모든 몸은 평등하다 - 장애여성들의 몸으로 말하기
김효진 외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날이 갈수록 슬슬 추워진다. 올해 겨울도 춥다고 한다. 추위에 약한 사람이 다 달라 실제 체감 온도는 온도계 온도만으로 짐작할 수 없다. 또 체감 온도는 사람이 서 있는 위치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무엇을 체감한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 세계에 위치한 자리를 확인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이 어떠한지를 깨닫는 일이다. 그것은 머리만 생각해서는 불가능하며, 몸만 움직여서도 불가능한 일이다. 장애인에 대한 체감도 자신이 처한 위치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많은 비장애인은 장애인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독립적인 존재’라는 것을 쉽게 간과한다. 장애인을 ‘불쌍한 존재’ 정도로 치부하는 사회 속에서 장애인들은 늘 비장애인들의 동정을 마주해야 한다. 대중매체에서 장애인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의존적 존재로 그려진다. 의존성은 장애인의 독립적 인격을 부정하는 근거로도 이어진다. 장애인을 타자화하는 시선은 근본적으로 당연히 보장돼야 할 장애인의 권리에 접근하지 못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Deleuze)가타리(Guattari)에 따르면 다수성과 소수성은 양적 문제가 아니다. ‘다수’는 수적으로 많아서가 아니라 사회의 가치 척도를 가진 채 지배하는 상태를 말한다. 한편 그 척도에서 벗어나 있는 자들은 비주류, 즉 소수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 척도에 의해 억압받고 차별을 받는다. 여성, 장애인, 성 소수자, 소수민족은 이들이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힘 있는 다수에 의해 ‘2등 시민’으로 강등되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배제하고 남은 사람들이 자신들만을 ‘정상인’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장애 여성’의 목소리는 기삿거리가 되지 못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장애 여성’, ‘비장애인 여성’은 생소한 용어였다. 이 세상(이성애 중심 사회)에 여성과 남성이 있고, 마치 장애인이라는 무성(無性)적 존재라도 있는 것처럼 장애인 안에 여성이 있다는 것을 무시해오고 있었기에 장애 여성들의 경험과 차별은 드러나지도 않았다. ‘장애여성네트워크’는 장애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장애를 가진 여성들의 정체성을 찾고, 사회적으로 형성된 장애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의식을 바꾸기 위한 운동을 하는 인권 단체이다. 2009년에 ‘장애 여성 이야기가 있는 사진전-몸으로 말하기’를 개최하여 일상 속에서 포착한 장애 여성들의 모습이 있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2010년과 2011년에는 페미니즘 저널 <일다>에 장애여성네트쿼크에서 활동한 다섯 명의 장애 여성들이 쓴 스무 편의 글이 연재되었다. 이 글들을 모은 책이 바로 2012년에 나온 《모든 몸은 평등하다》이다.

 

나온 지 꽤 됐지만 이대로 잊히기엔 아쉬운 책이다. 저널지에 발표한 글을 모아서 낸 무성의한 책이 아니다. 자신들을 ‘장애인’이라고 여기는 사회에서 ‘정상인’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운 몸’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장애 여성을 위한 책’이 아니라 장애인, 비장애인을 아우르는 ‘모두를 위한 책’이다. 다섯 명의 글쓴이들은 장애와 마주한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얘기하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장애여성들의 삶을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세상으로 바꾸고자 (장애 남성, 비장애인) 독자들을 설득한다. 인권의 사각지대에 내몰린 장애 여성들의 삶과 인권을 배려하고 존중하기를 설득하는 글쓴이들의 어조는 부드럽고, 유쾌하다.

 

비장애인들은 누구나 친숙한 것 앞에서는 편하고 낯선 것 앞에서는 불편하다. 그래서 장애 여성의 몸을 뒤틀리고 결함 있는 몸이라고 생각한다.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낯선 것들 앞의 그 불편함을, 우리는 존재의 조건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배제의 감정을 통해서 해소하려고 한다. 그 때문에 장애인 문제의 심각한 이유 중의 하나가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들의 무관심과 편견이다. 특히 장애 여성들은 자신들이 겪은 차별에 관해 이야기하고, 권리를 주장해도 무관심과 편견이 대부분의 비장애인과 장애 남성들의 잠재의식에 도사리고 있어 막막함에 직면할 때가 많았다. 여성이라면 축복받아야 할 초경이 장애 여성에게는 본인은 물론 부모에게도 골칫덩이가 된다. 연애, 결혼, 출산도 비장애인 여성이 갖는 고민보다 훨씬 복잡하다. 건강 상태는 물론 아이를 기를 수 있는 사회적 여건도 충족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몇몇 비장애인 독자들은 “자기 몸 하나 가누기 어려운데 무슨 다른 장애 여성들을 도울 수 있겠느냐”고 걱정할 것이다. 한때 나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 같은 장애 여성이지만 이 책을 통해 더 가까이 살펴보면 얼마나 많은 것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된다. 이 책의 글쓴이들은 발랄하게 웃으면서 글을 썼을 것이다. 그녀들은 비장애인, 혹은 다른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장애 여성의 몸’을 이야기한다.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몸에 대해 말하는(글 쓰는) 행위 그 자체를 즐긴다. 그녀들에게 몸은 ‘결핍’이 아니라 ‘충만’이다. 타자(남성)의 시선에 맞춘 몸이 아니라 자유롭게 살아가는 몸이다. 장애 여성의 몸은 비극과 불행의 몸이 아니다. 그래서 아름답지 않아도 존재하는 몸들의 자기 확인은 유쾌하면서도 당당하다.

 

실제로 비장애인들은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장애인을 만날 기회가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대중매체에서 그려지는 장애인의 이미지들에 익숙해서 장애인은 자신의 판단과 실천을 할 수 없는 존재,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된다. 장애인은 이렇게 상상적 타자로 그려지고 ‘타자화’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관계망을 형성할 수 없거나 관계망은 특정한 방식으로만 구성되게 된다. 도와주는 비장애인과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장애인이라는 방식의 관계로 재현된다. 하지만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한 존재이기 위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런 이유로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자기 행복을 위해 저마다의 이유로 살고 있다. 장애인에게 느끼는 비장애인의 불편함은 ‘정상’, ‘표준’으로 정형화된 신체적으로 건강하면서 아름다운 몸과 비장애인의 몸에 대한 괴리감에서 생긴다. 타자에 대한 관심, 서로 다른 몸과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 간의 만남과 교류가 정말 중요하다. 타자의 삶과 만나지 못하고 자기 안에서만 느끼고 해석하면 타자의 삶을 절대로 체감할 수 없다. 자기 것일 뿐이다. 장애인에 대한 체감이 쉽지 않기에 우리는 장애인의 다름을 받아들이면서 만나야 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11-19 2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1-20 19:54   좋아요 0 | URL
맞아요. 눈에 보이지 않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2018-11-20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1-20 19:56   좋아요 0 | URL
여전히 장애인과 함께 수업하는 방식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자꾸 피하면 비장애인들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가진 채 살아가게 되고, 장애인 복지 정책 도입이나 장애인 권리 문제에 시큰둥하거나 냉소적인 반응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