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흐르는 동안, 당신은 음악이다 - 우리의 인생과 음악심리학 이야기
빅토리아 윌리엄슨 지음, 노승림 옮김 / 바다출판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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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늘 음악을 듣는다. 장거리 운전을 할 때나 바쁜 일상의 자투리 시간이 주어질 때, 혹은 슬프고 지칠 때나 기쁘고 신이 날 때 말이다. 우리의 일상을 꾸며주는, 음악이 가진 위대한 힘이다. 그래서일까. 수많은 수난의 시기를 지내온 우리 민족은 대대로 음악을 좋아했고 노래하기를 무척 즐겼다. 노래하며 위로받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밭에 김을 매면서, 논에 모내기하면서 노동요를 불렀다. 특별한 악기가 없어도 젓가락 장단에 맞춰 구성진 가락을 뽑아내 흥을 돋을 줄 알았다.

 

노랫가락의 흥을 즐기던 우리의 일상문화를 반영하듯 노래방에 자주 가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의 노래방은 친구들을 만날 때나 직장 회식 이후에 ‘제2차’로 가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고 즐기며 ‘우리’라는 공동체를 다시금 확인하기도 한다. 요즘같이 혼자 노는 게 익숙해진 시대에 혼자서 노래방을 즐길 수 있는 ‘코인 노래방’도 있다. 이렇듯 노래방은 단순히 노래만 부르는 곳이 아니라 노래를 잘 부르든 못 부르든 상관없이 노래를 부르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놀이 공간이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를 쓴 네덜란드의 역사가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는 “문명은 놀이 속에서 발전했다”고 주장했다. 문화의 본질을 놀이에서 찾아낸 그는 삶의 의미와 행복 역시 놀이로부터 나온다고 역설했다. 호모 루덴스는 달리 말하면 ‘예술을 즐기는 인간’이다. 좀 더 세부적으로 보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음악 속에서 자라왔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 당신은 음악이다》음악이라는 ‘놀이’를 마음껏 누리면서 자라온 호모 루덴스에 관한 보고서라 할 만하다. 이 책은 음악과 우리 삶이 어떻게 관계 맺는지를 예리하게 고찰한 음악심리학 책이다.

 

저자는 태아기, 유아기, 청소년기, 성인기를 거쳐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생애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는 음악의 힘을 알려준다. 그래서 이 책에 음악의 영향력을 증명해주는 최신 연구 결과들이 나온다. 평소에 음악을 즐기는 저자는 이 책에서 음악의 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표한다.

 

 

 어떻게, 그리고 왜 음악이 그처럼 우리 일상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는지 이해하고자 나는 내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 [중략] 내게 필요한 것은 음악이 일상에 미치는 영향을 무척이나 알고 싶어하는 친구에게 권할 수 있는 책이었다.

 

(프롤로그, 6~7쪽)

 

 

《음악이 흐르는 동안, 당신은 음악이다》는 음악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이들도, 음악을 어떻게 무엇부터 들어야 할지 막막하던 사람에게도 권할 수 있는 책이다. 독자는 우리가 살면서 음악을 꼭 들어야 하는 당연한 이유를 이 책에서 만나게 된다.

 

놀랍게도 인간은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음악을 만난다. 태아는 자궁 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세상의 소리를 접하는데, 이때가 바로 인간이 처음으로 음악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자궁 속으로 전달되는 다양한 소리에 자주 노출된 아기는 박자와 음높이를 감지하고 구분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음악에 대한 기본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다. 청소년기는 음악과 정체성이 서로 일치하기 시작하는 시기다. ‘질풍노도’를 겪는 청소년들은 기분 좋게 만드는 노래를 찾게 되고, 이 시기에 접했던 노래를 ‘최애 노래(가장 좋아하는 노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른이 돼서도 청소년기에 즐겨 듣던 노래를 잊지 못한다. ‘최애 노래’는 지나간 시간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소환하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가수의 음악을 한 번 듣고 나면 그 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참 속상하다. 그러나 실망하기엔 이르다. 좌절할 필요 없다. 우리는 음악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요즘은 가사 몇 마디만 검색창에 입력하면 그 가사가 나오는 노래 제목과 가수 이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무리 생소한 멜로디의 음악이라도 자주 들으면 멜로디 일부가 고막에 콕 박혀 귓가에 맴돈다(이게 오래 지속되면 귀벌레 현상이 생긴다). 저자는 음악에 노출되는 과정을 ‘집짓기’에 비유한다.

 

 

 음악을 제대로 기억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출이 필요하지만, 일단 기억하기만 하면 잘 지어진 집처럼 튼튼하고 오래 지속된다. 실제로 집을 짓는 것과 달리 청취자한테는 별다른 노력이 필요치 않다. 마음이 원해서 하는 일이고, 당신은 그저 듣기만 하면 된다.

 

(7장 기억 속의 음악, 241쪽)

 

 

음악을 듣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은 ‘호모 루덴스’ 정신의 복원이다. 삶의 놀이인 음악은 가수, 작곡가, 연주자만 하는 것이 아니다. 놀이로서의 음악은 우리 삶에 스며들어 있기에 직업과 연관 지을 일이 아니다. ‘영원한 가객’ 김광석은 “가수란 자기가 부른 노래대로 인생이 풀린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대로라면 가수가 아니어도 노래를 즐기는 우리도 노래대로 인생이 풀리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러 가지 음악이 관통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몸에 흐르는 음악은 ‘나’라는 존재를 만든다. 서평을 다 쓰고 나니 ‘나의 노래는 나의 삶’이라고 노래하던 김광석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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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3 16: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03 17:09   좋아요 0 | URL
세상 정말 좋아졌어요. 절판된 앨범에 들어있는 곡을 들으려면 그 앨범을 직접 구해야했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
 

 

 

영국사를 통틀어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는 여성의 순결과 금욕을 강조한 성적으로 가장 엄숙했던 시기다. 하지만 성에 대한 호기심이 수많은 포르노그래피 서적을 통해 노골적으로 드러낸 시대이기도 하다. 그 시대에 발행된―소아성애(pedophilia)를 연상케 하는―어린아이들의 알몸 사진이 있는 엽서는 성에 대해 보수적이었다는 빅토리아 시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진보와 개혁을 추구하면서도 여전히 보수적 논리가 지배하고 있었다. 개인에게는 가정에 대한 의무와 함께 절제, 금욕, 순결과 같은 도덕적 규범이 엄격히 요구됐다. 그 표면적인 고상함의 이면에는 허영과 위선이 있었다. 《아름다운 명화에는 비밀이 있다》는 빅토리아 시대의 미술이 어떻게 양면적인 사회상과 만났는지 짚어보면서 그림 속에 반영된 영국인의 은밀한 속내를 보여준다.

 

 

 

 

 

 

 

 

 

 

 

 

 

 

 

 

 

 

* 이주은 《아름다운 명화에는 비밀이 있다》 (이봄, 2016)

 

 

 

억압과 규제가 더욱 강해질수록 인간의 욕망이 멈추지 않듯이,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는 매춘과 성병이 유독 기승을 부렸다. 국가는 매춘을 필요악으로 규정했고, 매춘을 ‘관리’하는 것으로 정책을 내세웠다. 국가가 통제하지 않으면, 매독을 각종 성병이 온 유럽을 집어삼킬 것이란 두려움이 널리 퍼졌다. 금욕을 강조했던 시대에 매춘부들은 멸시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자살하거나 평생 숨어 지내는 일도 많았다. 물에 떠 오른 익사한 여성의 시신이 많이 그려진 것도 그 때문이다.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민음사, 2016)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민음사, 2006)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당시에는 거리의 여자가 강물에 빠져 죽는 장면이 그림이나 대중잡지 삽화에 자주 등장했다. 이 시대의 여자는 늘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 지내면서 남편을 기다리고, 만일 버림받으면 갈 곳 없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집 안의 천사(The angel in the house)는 집안일을 관장하며 남편과 자식을 보살피는 빅토리아 시대의 전형적 여성상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자기만의 방》에서 모든 여성에게 ‘집 안의 천사’라고 불리는 내면의 유령이 있다고 단언한다. 내면의 유령에 사로잡힌 여성은 남편과 자식을 위해 헌신하지 못하면 죄책감을 느낀다. 울프는 ‘집 안의 천사’를 죽여야 한다고 말했지만, ‘집 안의 천사’가 되지 못한 여성들은 죄책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이라는 처벌을 스스로 선택했다.

 

 

 

 

 

 

 

 

 

 

 

 

 

 

 

 

 

 

* [절판] 노르마 브루드 외 《미술과 페미니즘》 (동문선, 1994)

 

 

 

미국의 미술사가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는 자신의 논문 『실종과 발견: 19세기 영국의 타락한 여성상』에서 가정적인 행복이 상실되고, 빈곤의 밑바닥까지 몰린 여성들의 비참한 결말을 묘사한 빅토리아 시대의 미술 작품에 주목한다. 이 논문은 《미술과 페미니즘》에 수록되어 있다. 노클린은 이 그림들에 안타까운 죽음에 이른 ‘타락한 여성’에 대한 동정심과 연민을 부각하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좀 이상하지 않은가.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았거나 매춘부가 된 여성들을 ‘타락한 여성’이라고 비난했던 냉담한 사회적 분위기와 대조된다. 그러나 ‘타락한 여성’을 바라보는 이 기묘하고도 양면적인 시선은 정조와 금욕을 강조하던 빅토리아 시대가 가진 이면이었다.

 

 

 

 

 

 

 

 

 

 

 

 

 

 

 

 

 

* 정진영 엮음 《세계 호러 단편 100선》 (책세상, 2005)

 

 

 

빅토리아 시대의 남성 화가들은 자살을 선택하는 여성들의 비참한 운명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그녀들을 아름답게 묘사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림에는 흔히 고상하고 우아한 아름다움과 함께 타락, 절망, 허무, 죽음과 같은 퇴폐미가 공존한다. 빅토리아 시대에 활동했던 작가 메리 엘리자베스 브래든(Mary Elizabeth Braddon)이 1860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차가운 포옹(The Cold Embrace)은 물에 빠져 자살하는 여성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공포적인 분위기로 연출한 작품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여인은 약혼한 남자로부터 버림받아 다리 밑의 강물에 몸을 던진다. 약혼을 파기한 남자의 직업은 화가다. 남자는 산책을 하다가 물에 빠져 죽은 여인의 시체 한 구가 놓인 관이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관을 운반하고 있던 인부를 멈춰 세운 뒤에 죽은 여인의 모습을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부탁한다. 인부는 죽은 여인이 아주 예쁘게 생겼다고 말하고, 화가는 인부의 말에 동조하면서 자살한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말한다. 화가는 죽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확인하고 싶어서 그녀의 얼굴을 덮고 있는 천을 걷어내는데, 죽은 여인의 얼굴을 보자마자 도망친다. 죽은 여인의 정체는 약혼녀였기 때문이다.

 

천사 같은 아내, 가족에게 헌신적인 어머니와 며느리, 현모양처라는 ‘집 안의 천사’는 남편, 아버지, 곧 남자들을 편하게 하기 위한 관념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이 관념은 여성의 주체적인 활동을 가로막는 유령이다. ‘집 안의 천사’가 되지 못하거나 이를 거부하는 여성은 ‘낙원(가정)’에서 추방된 ‘타락한 여성’이라는 꼬리표를 붙인 채 살아간다. 한 번 낙원에서 추방되면 다시 돌아오기 힘들다. 아늑한 낙원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추방당한 ‘타락한 여성’이 낙원의 평화를 위협하는 ‘악마’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그녀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낙원의 사람들은 그녀들이 죽고 나서야 연민의 손길을 내밀었다. 존재감을 상실한 여성들이 보기에 세상은 ‘집 안의 천사’가 너무나 많은 지옥이었다. 그들을 죽일 수 없으면 내가 죽어야하는, 기묘한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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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3 1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03 16:36   좋아요 1 | URL
잘 사는 사람들이 술집이나 룸살롱에 가서 돈을 펑펑 쓰는 모습을 보면 그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젊었을 때 실컷 노는 것도 좋지만, 유흥에 너무 맛들이면 나이 들어서 허전함이 더욱 많이 밀려올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정신이 피폐해질 거예요.

2019-06-05 0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04 12:42   좋아요 1 | URL
노라를 주제로 연구하신다니,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네요. 혹시 연구 결과가 논문으로 나온다면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

제가 글을 일기처럼 쓰는 편인데다가 제 관심사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성격이라서 블로그에 등록되는 글 대다수는 재미없어요... ㅎㅎㅎㅎ 글이 별로라고 생각하면 친구 관계를 해제하셔도 좋습니다. 실제로 그런 분들이 계시거든요.

여름이 2019-06-10 1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 방문했어요. 페미니즘 문학작품 토론에 참여하려고 하는데, 블로그에 써 주신 여러 서평들이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블로그 글에 대한 고마움에 답글 남깁니다. 자주 오게 되다 못해 한동안 상주...하게 될른지도 모르겠네요. 글들 감사합니다~

cyrus 2019-06-10 16:58   좋아요 1 | URL
별말씀을요. 어설픈 글을 좋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다시 처음부터 공부하는 심정으로 페미니즘 독서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있어요. 저도 배우는 입장이랍니다.

편하실 대로 제 글을 보시면 됩니다. 제가 매일 규칙적으로 글을 써서 공개하는 성격이라서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정기 구독하듯이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혹시 제 글을 보시다가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이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댓글로 알려주셔도 좋습니다. ^^

여름이 2019-06-10 17: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매일 규칙적으로 글 쓰신다니....고맙습니다.~~~!!!^^

cyrus 2019-06-10 17:13   좋아요 1 | URL
알라딘 서재에 저 말도고 매일 글 한 두 편 정도 쓰는 분들이 더 있어요. ^^;;
 
[전자책] 귀퉁이 그림자 빅토리안 호러 컬렉션 5
메리 엘리자베스 브래든 지음 / 올푸리 / 2020년 2월
평점 :
판매중지


 

 

지난 금요일에 올푸리 출판사‘빅토리아 호러 컬렉션’ 다섯 번째 시리즈가 공개되었다. 메리 엘리자베스 브래든(Mary Elizabeth Braddon)의 단편소설 《귀퉁이 그림자(The Shadow in the Corner)다. 브래든은 국내 독자에게 생소한 작가이지만, 생전에 베스트셀러 작가로 명성을 얻었다. 1862년에 연재한 《오들리 부인의 비밀(Lady Audley’s Secret)은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를 정직하게 그린 브래든의 대표작이다(《귀퉁이 그림자》가 나온 지 5일이 지난 후에 《오들리 부인의 비밀》 번역본이 정식 출간되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오들리 부인은 순종적인 ‘남편의 아내’로 나타나는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난 인물이다. 그녀는 남자들의 유혹을 거부하지 않는다. 《오들리 부인의 비밀》과 같이 바람피우는 여주인공, 간통, 살인 등 자극적인 소재를 다룬 대중소설을 ‘선정소설(Sensation Novel)이라고 부른다.

 

《귀퉁이 그림자》는 1879년에 나온 소설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자연과학 교수인 마이클 베스컴은 23년 동안 ‘와일드히스 그랜지’라는 저택에서 혼자 지낸다. 저택에 그와 함께 사는 혈육은 없지만, 베스컴의 시중을 드는 부부(직책은 집사와 하녀)가 살고 있다. 연로한 하녀가 집안일을 계속할 수 없게 되자, 집사는 베스컴에게 젊은 하녀 한 명을 고용해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새로운 하녀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저택에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학도’인 베스컴은 저택과 관련된 흉흉한 소문을 가볍게 넘긴다.

 

베스컴은 타지에서 고아로 자란 젊은 여성을 새로운 하녀로 고용하고, 하녀가 지낼 곳으로 ‘저택 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큰 방’을 배정한다. 그런데 하녀가 저택에 들어온 지 일주일째 되던 날, 그녀의 외양은 마치 악몽에 시달려온 사람과 같았다. 베스컴은 하녀가 걱정돼서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물어보는데, 그녀는 망설인 끝에 저택에 생활하면서 느꼈던 심정을 솔직하게 밝힌다.

 

 

“나리. 제가 자는 방이 무서워요.” (22쪽)

 

 

하녀는 자신의 방 귀퉁이에 있는 ‘흐릿하고 형체 없는 그림자’를 목격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베스컴은 하녀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는 그녀가 최근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정신적인 충격을 감당하지 못해 신경이 쇠약해졌다고 생각한다. 또 그녀가 상상력이 너무 풍부하다고 지적한다.

 

《귀퉁이 그림자》는 이렇다 할 반전이 없고, 결말을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공포소설이다. 그렇지만 이 소설은 ‘이성’과 ‘감성’을 철저히 분리하고, 위계적인 이분법의 관계로 보는 남성 중심적 사고의 한계를 보여준다. 베스컴은 ‘과학 연구를 사랑하는 광신도’이다. 그는 하녀의 진술을 마치 과학자가 분석하듯이 받아들인다. 즉, 철저하게 따져보는 태도이다. 하녀를 대하는 베스컴의 시선은 ‘과학자’의 시선이기도 하며, 더 넓게 보면 ‘이성’을 중시하는 남성적인 시선이다. 이 시선이 뿌리 깊게 박힌 서양철학은 ‘이성’과 ‘감성’의 관계성을 ‘남성’과 ‘여성’으로 설명하고, 여성(감성)에 대한 남성(이성)의 우위를 도식화해왔다. 서양 철학은 남성과 여성을 둘로 나누면서 이 둘을 수평적인 둘이 아니라, 위계적인 둘로 구분하였다. 서양 철학에 의해서 남성과 여성은 남성이 여성의 위에 있는 위계적인 이분법으로 구분되었다. 이러한 위계적인 이분법의 의미가 은폐된 철학의 근본 개념들이 바로 이성 대 감성, 합리성 대 상상력이다.

 

계몽주의 시대에 공상과 심령 현상은 비이성적인 감성으로 규정 받으면서 피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계몽주의 시대의 지식인들이 생각하는 ‘인간’은 경험과 과학을 바탕으로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존재이다. 당연하게도 남성 지식인들에 의해 강제로 ‘감성’과 동일한 존재가 된 여성은 그들이 생각하는 ‘인간’에 속하지 못했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편견은 계몽주의 시대가 끝나고, 한 세기 지나서 나타난 근대적인 빅토리아 시대에도 여전했다. 역사적으로 이성이 감성보다 우위를 점하던 시기는 오랫동안 지속되었지만, 《귀퉁이 그림자》에서 묘사된 이성은 감성에게 승리하지 못했다. 이성의 무기력한 패배를 암시하는 듯한 이 소설의 결말을 꼭 보시라.

 

 

 

 

※ Trivia

 

* 3쪽에 ‘계급’의 오자가, 21~22쪽에 뜻을 알 수 없는 비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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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에 더욱 치열해진 유럽의 제국주의 경쟁은 고삐 풀린 말처럼 과도한 민족주의 대결로 치닫고 있었다.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광휘를 더욱 찬란하게 드러내려고 했고, 독일은 제국주의 후발주자로서 게르만족의 자존심을 걸고 영국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유럽 국가들은 ‘땅따먹기 시대’에서 나름대로 민족의 자존심을 세우든지 혹은 지키기 위해서 얽히고설킨 관계를 유지했다.

 

 

 

 

 

 

 

 

 

 

 

 

 

 

 

 

 

 

 

* [품절] 찰머스 존슨 《제국의 슬픔》 (삼우반, 2004)

* 강준만 《미국사 산책 4: ‘프런티어’의 재발견》 (인물과사상사, 2010)

 

 

 

미국이라고 이러한 흐름에서 비켜나 있지는 않았다. 줄여서 ‘미제’라고 불리는 미국 제국주의(American imperialism)의 기원은 1898년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미국 제국주의의 역사를 다룬 《제국의 슬픔(The Sorrows of Empire)의 저자이자 외교정책 전문가인 찰머스 존슨(Chalmers Johnson)은 미국이 제국주의의 날개를 달고, 본격적으로 군국주의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 시기를 ‘미국-스페인 전쟁’이 일어난 1898년이라고 말한다.

 

1898년 스페인의 식민지인 쿠바의 아바나 항구에서 미국 전함이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난다. 자체 조사 결과 석탄 창고에서 일어난 자연 발화가 사고 원인이라고 밝혀졌지만, 미국 내에서는 전쟁 열기가 고조되고 마침내 스페인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그 결과 미국은 손쉽게 전쟁에 승리하고, 그해 12월 10일에 쿠바는 스페인 통치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미국은 전쟁에 승리한 대가로 쿠바의 내정에 간섭한다. 그리고 필리핀, 괌, 푸에르토리코를 스페인으로부터 넘겨받게 된다. 이를 계기로 국제무대에서 미국의 지위는 급상승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은 강대국으로 거듭났고, 냉전 분위기가 고조되던 시기 동안에는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에 맞선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제국주의적 속성을 감춘다.

 

 

 

 

 

 

 

 

쿠바의 관타나모 만(Guantanamo Bay)에 미 해군이 운영하고 있는 기지와 수용소가 있다. ‘캠프 델타(Capm Delta)’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관타나모 수용소는 쿠바의 역사적 아픔과 비운을 상징한다. 쿠바는 3년 동안 세 번의 독립전쟁을 치렀고, 제3차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독립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과의 전쟁에 승리한 미국이 개입하게 되고, 쿠바로선 더 강력한 외세의 등장 앞에 힘을 쓰지 못한다. 결국 관타나모를 미 해군기지로 할양하고 사실상 미국의 내정 간섭을 받아들인다. 1903년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정부는 이 기지를 임차(賃借)로 사용하는 대가로 매년 2천 개의 금화(4,085달러)를 쿠바 정부 앞으로 보낸다. 이어 1934년에 영구임차 계약을 체결하면서 관타나모 수용소는 가장 오래된 미군의 해외기지가 됐다. 1959년 독재 정권을 혁명으로 무너뜨리고 총리에 오른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는 미국에 수용소 철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쌍방이 합의해야만 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 영구임차 계약 조항을 들어 철수를 거부했다. 카스트로 정부는 기지 주변에 지뢰를 매설하고 순찰을 강화하는 등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고, 1964년에는 기지에 대한 물 공급을 중단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 해군은 임차료 4천여 달러를 내면서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 [레드스타킹 16번째 책] 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필로소픽, 2018)

 

 

 

2003년부터 관타나모 수용소에 이슬람 무장세력 알카에다(Al Qaeda)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포로들이 수감되어 왔다. 미국이 사법권과 관할권을 행사하는 해외 군사기지 중 주둔국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입맛대로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관타나모다. 부시(George W. Bush) 정부는 이곳을 ‘테러리스트 영구수용시설’로 만들어 수용소에 갇힌 포로들에게 ‘무기한 구금(Indefinite detention)’ 처분을 내렸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필자가 쓴 글 『무한정의, 무기한 구금』을 참고하길 바란다)

 

2009년에 대통령으로 취임한 버락 오바마(Barack Obama)는 대선후보 시절에 내건 관타나모 수용소를 폐쇄하는 공약을 실행한다. 그는 일 년 안에 수용소를 폐쇄하는 행정 명령을 발령했지만 실패했다.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는 취임 전부터 ‘나쁜 녀석들(bad dudes)’을 가둘 수 있는 관타나모 수용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2018년에 폭탄 테러를 모의한 혐의를 받은 사우디아라비아인 1명이 관타나모 수용소로 이감되었다. 그를 포함해서 수용소에 있는 수감자는 총 40명이다.

 

부시 정부는 ‘아프가니스탄 여성 해방’을 강조하면서 아프가니스탄 공습에 대한 국제적 비난을 잠재우려고 했다. 트럼프는 미국을 위협하는 ‘나쁜 녀석들’ 때문에 관타나모 수용소를 폐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두 사람은 미국을 위협하는 악의 세력에 맞서 싸우는 ‘정의의 사도’가 되려고 했다.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 대다수는 대외정책에서 강경한 입장을 드러내는 네오콘(neocons)이다. ‘백인 우월주의’, ‘미국 제일주의’를 내세우는 네오콘은 국제문제에서 군사력을 불사하는 미국의 적극적 개입을 옹호한다. 그들은 평화를 위협하는 악의 무리를 혼쭐내는 세계무대의 주인공과 같은 미국을 원하며, 그 역할이 ‘미국 백인의 의무이자 사명’으로 생각한다. 인도 출신의 탈식민주의 학자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은 세계 평화를 위해 군사력을 동원하면서 봉사하려는 미국의 행보를 “백인 남성이 갈색 피부의 남성으로부터 갈색 피부의 여성을 구원하려는 광경”이라고 비유해서 표현했다[주1].

 

 

 

 

 

 

 

 

 

 

 

 

 

 

 

 

 

 

* 강준만 《교양영어사전》 (인물과사상사, 2012)

 

 

 

네오콘이 원하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는 유럽인들이 ‘백인의 짐(The White Man’s Burden)을 노래 부르기 시작했던 1898년의 상황과 유사하다. ‘백인의 짐’은 영국의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Rudyard Kipling)이 1899년에 쓴 시의 제목이다.

 

 

 

Take up the White man’s burden --

Send forth the best ye breed --

Go bind your sons to exile

To serve your captives’ need;

To wait in heavy harness

On fluttered folk and wild --

Your new-caught, sullen peoples,

Half devil and half child.

 

 

백인의 짐을 져라.

너희가 낳은 가장 뛰어난 자식들을 보내라.

너희의 자식에게 유랑의 설움을 맛보게 하라.

너희가 정복한 사람들의 요구에 봉사하기 위해

육중한 마구를 차려입으라.

네 불만투성이 표정의 갓 잡아들인 포로들,

반은 악마요, 반은 아이인 자들에게. [주2]

 

 

(『백인의 짐: 미국과 필리핀 제도』 중에서)

 

 

 

이 시는 인종에 대한 편견과 백인 우월주의로 가득하다. ‘반은 악마요, 반은 아이인 자들’은 비 서구인을 의미한다. 『백인의 짐』은 19세기 말 제국주의자들의 정서를 아주 정확하게 반영한 문학작품이다. 이 시의 부제는 ‘미국과 필리핀 제도’이다. 키플링은 이 시를 발표하여 스페인과의 전쟁에 승리한 미국을 찬양했고,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옹호했다. ‘백인의 짐’은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이 아시아 · 아프리카로 식민지를 확대해 나갈 때도 식민 지배의 명분으로 이용됐다. 문명으로 발전한 서구 선진국이 비 문명사회인 아시아 · 아프리카 지역을 점령해 개화시키는 것은 ‘백인의 의무’라는 논리다. 이러한 논리는 개발도상국에 경제적 지원을 약속하는 미국의 행보와 맞물려 있다.

 

 

 

 

 

 

 

 

 

 

 

 

 

 

 

 

 

 

 

* 윌리엄 이스털리 《세계의 절반 구하기》 (미지북스, 2011)

 

 

 

개발경제학의 권위자인 윌리엄 이스털리(William Easterly)는 빈곤 국가나 개발도상국을 돕는 서구의 원조 방식을 비판하기 위해 키플링의 시 제목을 붙여서 책을 썼다. 이 책은 국내에 ‘세계의 절반 구하기’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저자는 서구의 막대한 원조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원조를 받은 국가들이 빈곤의 터널을 탈출하지 못하는 현실에 주목한다. 그리고 국제 원조가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계획가’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온 계획가는 선의를 갖고 빈곤국 원조를 주장하며 거시적인 ‘계획’에 따라 막대한 자금을 마련한다. 하지만 계획가는 빈곤국을 도우려는 ‘선한 의지’만 있을 뿐 실제로 빈곤국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빈곤국의 실정에 관심도 없는 상태에서 돈을 쏟아 부으면, 손해를 보는 쪽은 빈곤국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필요한 것을 계획가에게 설명하지 못하고, 계획가의 원조가 실패해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저자는 서구의 국제원조 방식이 ‘백인의 의무’를 강조한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백인의 짐’을 짊어진 채 세계무대를 누빈 미국은 늘 항상 이런 모습이었다. 타자나 다른 나라의 상황이 민주주의에 적합한지 아닌지 판단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들을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 또는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불한당’으로 규정하여 무력으로 그들을 제압하겠다고 나선다. 그런데 누가 미국에 그런 권한을 준 것일까. 미국식 적군 감별에 당하고 싶지 않은 국가는 미국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미국의 영웅 놀이’에 호응한다. 장기 집권을 노리는 일본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집단적 자위권 법안’을 통과시킨 다음, 일본을 ‘동아시아의 미국’으로 만들려고 한다. 요즘 일본은 미국에게 다가가 적극적으로 애정 공세를 펼치고 있다. 일본도 ‘백인의 짐’의 유사품인 ‘일본인의 짐’을 짊어진 과거의 화려했던 시절이 그리운가 보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미개한 아시아’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침략하고, 더 나아가 중국까지 넘보면서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한 일본 제국의 행보는 ‘팍스 아메리카나’를 꿈꾸기 시작한 1898년의 미국의 모습과 정확히 겹친다. 좋든 나쁘든 역사는 반복된다.

 

 

 

 

[주1] 주디스 버틀러, 『폭력, 애도, 정치』, 《위태로운 삶》, 75쪽, 필로소픽, 2018.

 

[주2] 번역문은 《교양영어사전》의 「white man’s burden」 항목과 나무위키의 ‘백인의 의무’ 항목을 참조해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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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9-06-03 1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흠 서로 적대적인 쿠바에 미군의 관타나모 기지가 있나 했더니 저런 이유기 있었군요.카스트로도 강제적으로 미국을 쫒아내고 싶었겠지만 그랬다간 오히려 미군의 침공을 받을수 있으니 별수없이 그냥 놔둔것 갔네요.역시 힘이 없으면 안되는가 봅니다ㅜ.ㅜ

cyrus 2019-06-03 16:41   좋아요 1 | URL
쿠바 입장에서는 골치 아픈 일이죠. 만약에 외부인이 내 집의 방 한 개를 차지하면서 “쌍방 계약 파기할 때까지 계속 여기 살 거야”라고 말하고, 그 방에 나와 무관한 다른 외부인들을 들어온다고 생각해보세요. 정말 최악입니다... ^^;;
 
근대 장애인사 - 장애인 소외와 배제의 기원을 찾아서
정창권 지음 / 사우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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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남긴 시인 호메로스(Homeros)는 시각장애인이었다. 우화를 쓴 이솝(Aesop)은 등이 굽은 장애인이었다. 악성(樂聖)이라 불리는 음악가 베토벤(Beethoven)은 청각장애인이었고,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Cervantes)는 한쪽 팔을 쓰지 못했다. 사회운동가 헬렌 켈러(Helen Keller)는 시각 · 청각 · 언어장애인이었다. 대부분 알만한 세계적 위인들이고,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 역사 속 유명한 장애인이 누구 있는지 생각해보면 언뜻 떠오르는 인물이 없다. 장애를 가진 위인이 없었던 게 아니다. 그만큼 가려지고 소외돼 왔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이 시각장애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종대왕은 안질에 걸려 시력이 점점 약해져 일상생활에 불편을 느낄 정도였다. 훈민정음 창제를 처음으로 알린 1443년에 당뇨 합병증으로 시력을 거의 잃어 지팡이 없이는 걷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장애를 숨기지 않았다. 조선 초기에 ‘명통시(明通寺)라는 시각장애인 단체가 만들어졌다. 장애를 가졌다고 해서 관직에 등용되는 데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장애인 차별이나 편견 등의 문제가 불거질 때면 대부분 사람(특히 비장애인)은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지금도 이런데 옛날에 장애인들은 얼마나 힘들게 살았을까?’ 하지만 《근대 장애인사》를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과거에 살았던 장애인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생각이 편견일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조선 시대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어울려 생활했으며 자신의 능력에 맞는 일을 했다. 양반 출신 장애인은 과거를 보아 관직에 나가는 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며, 악기를 연주하는 직업을 가진 장애인도 많았다. 중증 장애인으로 자립하기 어려운 사람은 국가가 나서서 복지정책을 폈다. 직접 식량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조세와 부역을 면제시켜줬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장애인들은 서서히 배척되기 시작한다. 조선 시대 장애인들이 생계 수단으로 삼던 점복(占卜: 점치는 일)과 독경(讀經: 경을 읽어 가정의 복을 빌거나 재앙을 물리치는 일)이 혹세무민한다는 이유로 개화기 지식인들의 비판을 받는다. 생계수단을 잃은 장애인들은 극심한 생활고를 겪게 되고, 근대 이후에 직업을 갖지 못한 장애인들은 ‘자립 능력이 없는 인간’으로 치부되어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천대받는 신세가 된다.

 

《근대 장애인사》는 방대한 옛 자료들을 꼼꼼히 살펴 근대 장애인들의 생활상 전반을 복원한다. 이 책은 특히나 장애 문제를 사회복지학적 측면만이 아니라 미시사적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의미 또한 아주 크다. 그동안 근대의 장애 문제에 대한 미시사 연구는 거의 없다시피 해 획기적인 저작으로 평가할 만하다. 평소 역사 속에서 주목받지 않았던 여성들이나 장애인들에 관해 관심이 컸던 정창권 교수는 《근대 장애인사》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확신을 하게 됐다. 근현대 이전 장애인들은 지금보다 더 인간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각종 자료를 통하여 조선시대부터 시작해서 일제 강점기에 이르는 시기의 장애인들의 삶을 살펴본 다음, 조선 시대 장애인들은 단지 몸이 불편한 사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고 진단한다. 또한 장애인을 지칭하는 각종 혐오 표현이 장애인의 사회적 지위가 급격히 하락한 일제 강점기 이후에 나오게 된 과정을 살핀다.

 

일제 강점기에 장애인이라는 용어가 없었다. ‘불구자(不具者)가 그나마 널리 쓰인 말이었다. 불구자는 ‘신체의 어느 부분을 갖추지 못한 사람’을 뜻하는 일본어 ‘후구샤(ふぐしゃ)에 유래되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 일본어는 신체적 · 정신적 결함을 가진 존재를 표현하는 말이 되었다. 이후 노동력, 상품성을 최고로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되면서 장애인은 ‘무능력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전락했다. 여기에 1910년대 이후부터 조선에 우생학이 유행하면서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는 인식은 더욱 강해졌다. 일제의 장애인 복지정책은 ‘생색용’에 불과했다. 조선이 근대화되면서 장애인의 수는 늘어났지만, 장애인 복지정책은 갈수록 후퇴했다.

 

이 책에서, 저자가 가장 공을 들인 내용은 ‘근대사에 족적을 남긴 장애 인물들’을 간략하게 소개한 3부에 있다. ‘장애 인물들’에 여성 차별과 장애인 차별이라는 이중고 속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긴 여성 독립운동가와 교육자, 작가들도 포함되어 있다. 장애란 비단 오늘날의 문제인 것만은 아니다. 어느 시대에서나 장애인은 존재했으며, 과거의 역사 속에서도 우리는 많은 장애인과 그들의 삶의 만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인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저자의 노력은 높이 평가되어 마땅하다. 앞으로 더욱 많은 비장애인들이 장애인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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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19-06-02 0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장애인에도 관심이 없는 시대에 장애인 역사에 대해 쓴 책이 나오다니 반갑네요!!

cyrus 2019-06-02 11:20   좋아요 0 | URL
정창권 교수는 십 년 전에 이미 조선시대 장애인사를 연구하여 이를 주제로 한 책을 몇 권 냈어요. 방귀희 교수도 장애인 연구를 하는 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