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줄여서 ‘세속’) 8월의 책은 국내 작가가 쓴 추리소설이다. 그리고 베스트셀러다. 모임 날은 오늘 저녁이다. 아주 유명한 소설이라서 그런가? 현재까지 모임 참석 인원은 나를 포함한 아홉 명이다. 모임에 처음 오는 분은 한 명이다. 이 정도면 제법 많은 편이다.
[<읽어서 세계 문학 + 향기의 미스터리 속으로> 2025년 8월의 책]
* 정해연 《홍학의 자리》 (엘릭시르, 2021년)
모임 선정 도서는 정해연의 《홍학의 자리》다. 이 책을 추천한 ‘세속 독자(모임 정회원)’는 추리소설 마니아 ‘향기’ 님이다.

지금처럼 무더웠던 작년 7월과 8월에 향기 님은 대구 책방 <일글책>에서 추리 문학 전문 독서 모임 <향기의 토요 미스터리 극장>을 진행했다. 선정 도서는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단편 소설 선집이었다. 향기 님은 노트 형태로 된 독서 모임 자료를 직접 만들었다. 포를 매우 좋아한 나는 향기 님이 만든 독서 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향기의 토요 미스터리 극장> 첫 번째 선정 도서, 2024년 7~8월]
* [절판] 에드거 앨런 포, 황소연 옮김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윌북, 2022년)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2024년 7월의 세계 문학]
* 에도가와 란포, 김소연 옮김 《에도가와 란포》 (손안의 책, 2021년)
<향기의 토요 미스터리 극장>이 시작된 7월에 <세속> 두 번째 모임이 진행되었다. 당시 <세속> 7월의 책은 에도가와 란포(江戸川 乱歩)의 단편 선집이었다. 에도가와 란포는 일본 근대 추리 문학을 풍성하게 만든 작가다. 에도가와 란포는 에드거 앨런 포의 이름을 따서 만든 필명이다. 그래서 나는 두 번째 독서 모임에 장르문학 마니아들만 아는 란포의 소설을 과감하게 골랐다. 장르문학에 생소한 독자들을 배려하지 못한 선택이었다. 예상했듯이 <세속> 7월 모임에 세 명이 참석했다. 나, 향기, 정현정. 두 분은 <세속> 첫 번째 모임에 참석한 정회원이다.
* 미스테리아 편집부 《미스테리아 58호》 (엘릭시르, 2025년)
나는 추리 문학의 매력을 잘 아는 향기 님을 믿고, 장르문학 마니아가 아닌 독자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추리소설을 읽어 보기로 했다. 때마침 지난 달에 미스터리 전문 격월간지 《미스테리아》58호가 나왔다.

2003년부터 2023년까지 출간된 ‘35권의 한국 미스터리 추천작’이라는 글이 실려 있다. 2021년에 출간된 세 권의 추천작 중 한 권이 《홍학의 자리》다.
여기서, 잠깐만!
독서 모임 선정 도서를 소개하는 글을 보면서 이상한 점을 느꼈는가? 세계 문학 전문 독서 모임에 ‘국내 작가’의 추리소설을 읽는 것이 어색할 수 있다. <세속> 모임의 정체성을 생각한다면 ‘외국 작가’의 추리소설을 읽어야 한다.
내가 독서 모임 도서를 선정한 것에 조금이라도 이상하다고 느낀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국내 작가의 책을 고를 거면 ‘세계 문학 전문’이라는 이름은 있으나 마나네요. 차라리 국내 작가의 문학 작품도 읽는 독서 모임을 진행해 보시는 게 어떤가요? 그러면 모임 참석자들을 더 모을 수 있어요.”
독서 모임의 정체성을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독서 모임의 정체성을 180도 바꾸지 않고도, 약간의 변화를 줄 수 있다. <세속> 선정 도서가 ‘국내 작가’가 쓴 책이라면, 이 책의 분위기가 비슷하거나 같이 읽을 수 있는 ‘외국 작가’의 책을 소개하면 된다. 따라서 ‘세계 문학 전문 독서 모임’에 국내 작가의 문학 작품을 선정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홍학의 자리》는 첫 장면부터 범인이 나온다. 이제 막 이야기에 몰입하기 시작한 독자는 범인을 알고 있다. 형사들은 범인을 찾기 위해 여러 방식으로 수사를 벌인다. 범인을 아는 독자는 형사들이 범인을 어떻게 찾는지 궁금해한다. 기존의 추리소설들은 ‘범인을 찾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결말에 범인이 공개된다. 《홍학의 자리》는 일반적인 추리소설과 다르게 ‘범인의 범행이 어떻게 발각되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형식의 추리소설을 ‘도치 서술 추리소설(inverted mystery)’이라고 한다. ‘도치(倒置)’는 순서를 바꾼다는 뜻의 단어다.
잠깐 스치듯이 묘사되었지만, 《홍학의 자리》를 유심히 본 독자라면 법의학에서 다룰 법한 과학 수사를 기억할 것이다. 사람의 걸음걸이로 범인을 가려내는 법보행 분석(273쪽), 물에 빠져 죽은 시체 속에 있는 플랑크톤 분석하기(311쪽).
* [절판] 리처드 오스틴 프리먼, 원은주 옮김 《붉은 엄지손가락 지문》 (시공사, 2011년)
* 리처드 오스틴 프리먼, 이경아 옮김 《오시리스의 눈》 (엘릭시르, 2013년)
* 리처드 오스틴 프리먼, 김종휘 옮김 《노래하는 백골》 (동서문화사, 2004년)
도치 서술 추리소설을 처음으로 쓴 작가는 리처드 오스틴 프리먼(Richard Austin Freeman)이다.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프리먼의 원래 직업은 의사다. 프리먼이 창조한 탐정 ‘손다이크 박사(Dr. Thorndyke)’는 과학 수사 기법을 이용해 범인을 밝히는 법의학자의 원형이다.
《붉은 엄지손가락 지문》(The Red Thumb Mark, 1907년)은 손다이크 박사가 처음으로 등장한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손다이크 박사는 지문을 채취하여 감별하는 수사 방식을 도입하는데,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과학 수사 기법이었다. 비공인 기록이지만, 《붉은 엄지손가락 지문》이 발표되기 2년 전에 프리먼은 손다이크 박사가 나오는 단편 <31, New Inn>를 썼다. 이 단편 소설을 장편으로 개작한 작품이 1912년에 발표된 <The Mystery of 31, New Inn>(새 31 여인숙의 수수께끼)[주1]이다.
단편집 《노래하는 백골》(The Singing Bone, 1912년)에 실린 『오스카 브러트스키 사건』(The Case of Oscar Brodski)은 도치 서술 추리소설 형식과 손다이크 박사의 과학 수사 모두 볼 수 있는 작품이다. 프리먼의 새로운 시도는 좋았으나 그때 당시 독자들은 범인을 찾는 추리소설을 선호했다. 1910년대 영국 추리 문학의 대세는 프리먼과 같은 의사 출신의 작가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이 쓴 ‘셜록 홈스(Sherlock Holmes)’ 시리즈였다.
* 조지 오웰, 강문순 옮김 《책 대 담배》 (민음사, 2020년)
* [절판] 조지 오웰, 하윤숙 옮김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조지 오웰 평론집 》 (이론과실천, 2013년)
* 조지 오웰, 박경서 옮김 《코끼리를 쏘다》 (실천문학사, 2003년)
문학에 조예가 깊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의외로 추리소설을 좋아했다. 그는 ‘최고 수준(명작)은 아니지만, 그래도 묻히기 아까운 작품들’을 소개한 글을 썼는데, 제목은 <good bad book>이다. 지금까지 우리말로 번역된 제목은 세 개다. ‘좋으면서 나쁜 책(《코끼리를 쏘다》, 실천문학사)’, ‘좋은 대중소설(《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책(《책 대 담배》)’
오웰은 이 글에서 ‘문학적인 수준은 떨어져도 재미있어서 읽을 만한 작품’으로 셜록 홈스 시리즈와 손다이크 박사 시리즈에 속한 프리먼의 소설 《오시리스의 눈》(The Eye of Osiris, 1911년)과 《노래하는 백골》을 언급한다.
* G. K. 체스터턴, 홍희정 옮김 《결백》 (북하우스, 2002년, 브라운 신부 전집 1)
* G. K. 체스터턴, 봉명화 옮김 《지혜》 (북하우스, 2002년, 브라운 신부 전집 2)
* G. K. 체스터턴, 장유미 옮김 《의심》 (북하우스, 2002년, 브라운 신부 전집 3)
* G. K. 체스터턴, 김은정 옮김 《비밀》 (북하우스, 2002년, 브라운 신부 전집 4)
* G. K. 체스터턴, 이수현 옮김 《스캔들》 (북하우스, 2002년, 브라운 신부 전집 5)
‘good bad book’이라는 표현을 처음 쓴 사람은 영국의 추리소설 작가 G. K. 체스터턴(G. K. Chesterton)이다. 그의 대표작은 가톨릭 성직자가 탐정으로 나오는 ‘브라운 신부(Father Brown)’ 시리즈다. 손다이크 박사가 법의학 탐정이라면 브라운 신부는 범죄심리학 탐정이다. 그는 자신을 범인으로 가정한 뒤에 범인의 감정 및 심리 상태를 이해하려고 한다.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2025년 9월의 세계 문학]
* 조지 오웰, 이한중 옮김 《나는 왜 쓰는가》 (한겨레출판, 2025년, 개정 증보판)
문학적으로 뛰어난 작가들도 오웰의 펜 끝에 달린 비판의 날을 피하지 못한다. 오웰은 동료 작가들의 정치적 성향과 정치적 행보에 문제가 있으면 직설적으로 비판한다. <세속> 9월의 책인 오웰의 에세이 선집 《나는 왜 쓰는가》에 『민족주의 비망록』이라는 글이 실려 있다. 오웰은 이 글에서 자신만의 기준을 내세워 민족주의자들의 유형을 분류하고, 이들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오웰은 체스터턴을 ‘상당히 재능 있는 작가’로 치켜세운다. 그러나 현실 이해력과 도덕적 감각이 떨어질 정도로 민족주의적 충심이 너무 큰 게 문제라고 주장한다. 오웰이 꼬집은 체스터턴의 문제점은 가톨릭이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는 종교적 견해(정치적 가톨릭주의)와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를 찬양할 정도로 국외의 파시스트적 정세에 무지한 태도다.
* 조지 오웰, 정철 · 홍지영 함께 옮김 《손 가는 대로: 조지 오웰 시사 에세이》 (빈서재, 2025년)
오웰은 『트리뷴』(Tribune)이라는 일간지에 칼럼을 게재한 칼럼니스트였다. 칼럼 제목은 ‘As I please(나 좋을 대로, 손 가는 대로)’이다. 오웰은 신문 칼럼에서도 가톨릭의 우월성을 입증하려는 체스터턴을 비판했는데, 또 한편으로는 부자와 권력자를 용감하게 비판한 체스터턴을 두둔하는 입장을 내비쳤다.
* G. K. 체스터턴, 안현주 옮김 《못생긴 것들에 대한 옹호》 (북스피어, 2015년)
체스터턴도 오웰처럼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작가였다. 종교뿐만 아니라 문학과 사회를 주제로 한 비평을 많이 썼다. 오웰과 체스터턴이 활동했던 20세기 초 영국에 우생학을 지지한 지식인과 작가들이 상당히 많았다. 체스터턴은 우생학을 비판한 지식인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에세이 선집 《못생긴 것들에 대한 옹호》에 수록된 『범죄형 머리통』(A Criminal Head, 1910년)은 머리의 형태로 범죄자의 기질을 파악할 수 있다는 우생학을 비판한 글이다.
오웰은 반유대주의를 비판한 글도 여러 편 썼다. 반유대적인 견해를 드러낸 작가들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비판했다. 프리먼과 관련해서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은 ‘꺼림칙한 진실’이 있다. 그의 추리소설에 반영된 반유대주의다. 프리먼은 우생학도 지지했는데, 1921년에 <Social Decay and Regeneration>(사회와 피폐와 재건)이라는 우생학 저서[주2]를 썼다. 우리나라에 번역되지 않은 손다이크 박사 시리즈가 많은데, 이 중 몇몇 작품을 보면 작가의 반유대적인 성향을 확인할 수 있다. 프리먼의 반유대주의를 비판할 때 거론되는 작품이 <Pontifex, Son and Thorndyke>(1931년)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악당들은 유대인이다. 하지만 프리먼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반론도 있다. 프리먼의 후기 작품들은 유대인을 긍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과연 오웰은 프리먼의 반유대주의를 알고 있었을까? 오웰이라면 ‘좋으면서도 나쁜 작가’를 어떻게 평가했을지 궁금하다.
[주1]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작품. 《노래하는 백골》 작품 해설(364쪽)에 언급된 제목을 참조했다.
[주2] 번역되지 않은 책이라서(주제와 내용을 생각하면 절대로 나오면 안 되는 책이다‥…) 정식 제목이 없다. 《노래하는 백골》 작품 해설(365쪽)을 참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