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전가 - 배삼식 희곡
배삼식 지음 / 민음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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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여자는 꽃이다.” 옛날에 이 문장은 외모가 수려한 여자에게 보내는 찬사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성을 꽃으로 비유한 찬사는 시들해졌다. 이 말 속에 여성의 참모습을 외모로 판단하는 시선이 겹쳐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외모가 ’과 같은 말이 되는 순간 여성은 남성의 눈과 마음에 끼워 맞춰진 대상화(objectification)가 된다. 남성을 위해 꽃이 된 여성은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한다.


하지만 극작가 배삼식 <화전가>(花煎歌)를 희곡으로 읽고, 연극으로 보고 난 이후로 생각이 달라졌다. 나는 빛바랜 찬사를 다시 쓰고 싶다<화전가>에 나오는 여인들은 꽃다운 인생을 살다 간 화녀(花女).







연극 <화전가>

극단 구리거울


2025221~22

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



 [연출] 

김미정



[출연진]

 

닭실 할매김 씨: 이경자

고모: 허세정

장림댁: 김정연

금실이: 석효진

박실이: 박나연

봉아: 이연주

영주댁: 이연진

독골 할매: 김미향

홍다리댁: 이혜정(극단 나무의자 소속)





<화전가>의 시간은 19504이다. 한반도 땅이 포탄을 맞고 두 개로 찢어 갈라진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이다닭실 할매김 씨의 환갑 잔치를 열기 위해 오랜만에 여인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세 딸(금실이, 박실이, 봉아)두 며느리(장림댁, 영주댁), 고모 권 씨, 행랑어멈(나이 든 하녀) 독골 할매, 혈연은 아니지만 가족처럼 함께 지낸 홍다리댁여인들의 고향인 경북의 반촌(班村)에 따스한 봄의 기운이 돌아오지만, 매캐한 전운이 봄을 짓누른다마음이 미지근한 김 씨는 환갑 잔치가 달갑지 않다그러나 여인들은 화목한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 결국 김 씨는 자신을 위한 화연(花宴) 대신에 모두가 즐기는 화전(花煎)놀이를 하자고 제안한다.


여인들의 화전놀이가 시작되기 전날은 경신일(庚申日)이다. 이날 밤(庚申夜: 경신야)이 되면 잠을 자지 않고, 술을 마시면서 노는 풍습이 있다. 도교 신앙에 의하면 사람 몸에 기생하는 삼시(三尸)라는 벌레가 있다. 경신일은 삼시가 승천하는 날이다. 하늘에 올라간 삼시는 천제(天帝: 최고 신)에게 자신이 기생한 사람의 죄를 일러바치는데, 그 사람은 목숨을 잃는다. 경신일에 사람이 잠들면 삼시가 하늘에 올라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삼시의 승천을 막아 천수를 누리기 위해 경신야에 잠을 자지 않는다. 김 씨와 여인들은 소주 한 말을 함께 마시면서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눈다여인들은 각자 마음속에 뭉쳐진 여러 가지 감정들을 분출한다. 과거에 좋았던 시절을 떠올려보기도 하고, 섭섭했던 순간들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아홉 명의 여인 중 가장 젊은 피인 막내딸 봉아는 가족들이 잠을 못 자게 방해한다.



[봉아] 내가 몬 자게 할 기다.

[금실이] ?

[봉아] 언니 오래 살라꼬.

[금실이] 참 빌.

[봉아] 아무도 못 잔다, 오늘은. 자기만 해 바라. 가만 안 둘 기다.


(3경신야 2중에서, 92)

 


경신야에 잠을 청하는 일은 작은 죽음을 상징한다. 죽음은 인간의 수명뿐만 아니라 시간도 멈추게 한다살아 있으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오거나, 이런 행복한 시간이 더 길게 느껴진다. 봉아는 살아 있음의 소중함을 알고 있다.


경신야와 화전놀이는 아홉 여인이 함께 경험한 화양연화(花樣年華). 아홉 여인의 화양연화는 순수하고 소박해서 아름답다. 여인들은 커피를 함께 마시고, 초콜릿을 조각조각으로 나누어 먹는다그리고 쓴맛이 강한 커피에 넣으려고 준비한 설탕 가루를 손바닥에 부어 맛보기도 한다행복한 순간은 물에 녹는 설탕 가루와 같다. 결국 행복한 순간은 흐르는 시간에 금방 녹아버리지만, 달콤한 여운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화전가>화녀전(花女傳)’이다아홉 명의 화녀는 어수선한 일상을 잠시 제쳐두고, 함께 행복을 느낀다. 혼자 피는 꽃보다 여러 송이의 꽃이 다 같이 활짝 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







<cyrus의 주석>







봉아는 극이 시작되자마자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소네트 15, 그것도 영어 원문으로 된 시를 고모 앞에서 읊으면서 등장한다. 극 중반부에 봉아는 잠에 취한 상태로 T. S. 엘리엇(T.S.Eliot)의 장시 <황무지>의 첫 구절을 영어로 낭송한다.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Memory and desire,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황동규 옮김, 황무지, 민음사)




국문학자 양주동(1903~1977) 선생은 1955<황무지>가 수록된 T. S. 엘리옽 시전집(탐구당)을 펴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대한민국에 출간된 모든 책이 보관되어 있다. 이곳 홈페이지에 T. S. 엘리옽 시전집의 서지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국립중앙도서관에 저장된 서지정보가 무조건 정확하다고 볼 수 없다양주동 선생 이전에 우리말로 번역된 엘리엇의 시가 실린 문헌(단행본이 아닌 문학잡지)이 있을 수 있다.

 

화전가의 시간적 배경은 양주동 선생의  T. S. 엘리옽 시전집》이 나오지 않은 19504월 하순이다. 봉아는 우리나라에 제대로 번역되지 않은 <황무지>를 영어로 읽을 줄 아는 똑똑한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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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2-26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셰익스피어 소네트랑 엘리엇의 황무지까지, 흥미롭네요!

cyrus 2025-03-01 21:10   좋아요 1 | URL
봉아가 낭독하는 셰익스피어와 엘리엇의 시구는 희곡의 주제를 떠올리게 해주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
 





세계 문학 전문 독서 모임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20246월 마지막 금요일 밤에 태어났습니다. 독서 모임이 태어난 요람은 술과 책을 파는 책방이었어요. 하지만 그 책방은 지난달에 문을 닫았어요. 새로운 가게가 책방을 덮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독자들의 책과 문학 사랑은 언제나 펼쳐져 있습니다.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독자들은 새로운 장소에 정착하여 올해도 책과 생각을 펼치려고 합니다.









 








* 버지니아 울프, 박인용 옮김, 보통의 독자(함께읽는책, 2011)




저를 포함해서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에 한 번이라도 참석하는 분들 모두 독자입니다. ‘독자는 책을 읽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저는 너무나도 단순해 보이는 단어에 다양한 의미를 넣어주고 싶어요. 제가 선호하는 독자는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가 말한 보통의 독자와 비슷해요. ‘보통의 독자특별한 문학 훈련을 받지 않은 독자예요. 여기서 울프가 표현한 문학 훈련은 문학 강연과 같은 교육입니다. 보통의 독자는 혼자 낯선 책에 다가가서, 스스로 생각하면서 책을 여러 번 쓰다듬은 독자입니다. 이런 독자(獨子)가 바로 보통의 독자(讀者)’입니다. 저는 보통의 독자독자(獨子)적인 독자(讀者)’라고 부르고 싶어요.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독자들이 만든 독서 모임입니다. 그래서 저는 올해부터 제가 아닌 다른 독자들이 추천한 책을 함께 읽어보려고 합니다.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지만, 3, 6, 9월은 다른 독자들이 추천한 책을 읽는 달입니다. 문학 분야의 책 이외에 인문학, 사회과학, 과학, 예술 분야의 책을 추천할 수 있습니다.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3월의 세계 문학 도서를 추천한 독자는 조약돌님입니다. 조약돌 님은 20231월 토요일 아침에 시작된 <일글책> 고전 읽기 모임 정회원입니다. 지금도 꾸준히 <일글책>에 오십니다. 그 밖에 현대 철학 독서 모임도 참석하는데, 니체(Nietzsche)와 라캉(Jacques Lacan) 등을 읽기도 했습니다.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3월의 세계 문학]

* 페터 빅셀, 이용숙 옮김, 책상은 책상이다(위즈덤하우스, 2018)

 

* [구판 절판] 페터 빅셀, 이용숙 옮김, 책상은 책상이다(예담, 2001)




약돌 님이 추천한 책은 스위스의 소설가 페터 빅셀(Peter Bichsel)의 단편 소설집 책상은 책상이다입니다. 이 책의 표제작 <책상은 책상이다>는 제가 중학생 시절에 만난 국어 교과서에 수록된, 너무나도 유명한 소설입니다. 작가 이름은 몰라도 <책상은 책상이다>를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 거예요. 이야기는 단순해요. 한 남자는 책상을 책상이라 부르는 대신에 양탄자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사물의 이름 바꾸는 일에 흥미가 생긴 남자는 의자를 시계, 신문을 침대라고 부릅니다. 책상은 책상이다에 실린 단편 소설들 속 주인공 모두 평범하지 않습니다. 열차 시간표만 암기하는 남자, 이미 만들어진 것을 자신이 발명했다고 믿는 발명가. 지구가 정말로 둥근지 직접 확인하고 싶은 남자.

 

약돌 님은 다르게 보기의사소통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으로 책상은 책상이다를 추천했어요. 저는 이 책을 2014년에 읽은 적이 있어요. 오랜만에 다시 이 책을 다시 만나면서,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책을 함께 펼쳤어요. 책상은 책상이다철학 소설입니다. 철학을 공부하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이면서도 철학자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바라볼 수 있어요. 책상은 책상이다의 매력은 철학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시선을 통과시킬 수 있는 투명한 책이라는 점입니다. 책은 투명할수록 독자들의 흥미로운 해석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책상은 책상이다보통의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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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5-02-25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상은 책상이다!
제가 몇 살 때 였는지는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때 엄청 인기있는 책이었어요.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네요.
미셸 푸코의 어떤 책을 펼쳤는지도 궁금해요^^

cyrus 2025-02-26 06:44   좋아요 1 | URL
중학생 시절에 국어 선생님이 <책상은 책상이다> 소설집을 추천해 주셔서 작가를 알게 되었어요. 제가 지금 읽고 있는 푸코의 책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입니다. ^^

stella.K 2025-02-25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통의 독자 나도 가지고 있는데 여태 못 읽고있다. 읽어야하는데... ㅠ 책상은 책상이다 사 봐야겠다. 잘 지내지?

cyrus 2025-02-26 06:46   좋아요 0 | URL
저도 <보통의 독자>를 샀는데, 어디에 있는지 못 찾았어요.. ㅎㅎㅎ
 











2월 22일 토요일. 오늘은 이상한 날이다. 이날에만 내가 보고 싶은 연극이 무려 세 편이나 상연된다연극 한 편은 서울에서, 두 편은 대구에서 한다공연이 시작되는 시간이 겹치는 데다가 서울과 대구를 오고 가는 시간도 부족하다결국 서울에서 하는 연극은 포기하고, 대구 연극 두 편을 관극(觀劇)하기로 했다.







내가 서울에 가서 보고 싶었던 연극은 일본 극작가의 작품이다. 매년 이맘때에 일본 극작가의 희곡 작품을 낭독극 형식으로 선보이는 현대 일본 희곡 정기 공연이 있다. 2002년 도쿄에서 시작된 정기 공연은 올해로 12회째를 맞이한다.






 










* 한일연극교류협의회 엮음 현대일본희곡집 7(연극과인간, 2016)

* 기타무라 소, 김유빈 옮김 호기우타(지만지드라마, 2024)




이번 공연에 공개되는 극작품은 마쓰이 슈(松井周) <지하실>기타무라 소(北村想)호기우타(寿歌). 공연 장소는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이다. 낭독 공연은 어제 금요일에 시작되었고, 첫 공연작은 <지하실>이었다. 목요일과 금요일 이틀 연속으로 연차를 쓰지 못하는 바람에 금요일에 상연된 <지하실>을 보지 못했다.

 















* 윤영선, 윤성호 죽음의 집(책공장 이안재, 2022)




<지하실>을 보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이 작품의 연출가와 출연 배우 때문이다. <지하실>의 연출가는 윤성호. 작년에 내가 소극장에서 관극한 죽음의 집을 쓴 극작가다. 죽음의 집2007년에 세상을 떠난 극작가 겸 연출가 윤영선의 미완성 희곡이었는데, 윤성호가 완성했다.

















* 나탈리 사로트, 이광호 · 최성연 옮김 아무것도 아닌 일로(지만지드라마, 2023)




<지하실>의 출연진 명단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이름은 박세인 배우문가에 배우다. 박세인 배우는 희곡 전문 가게 <인스크립트> 공동 대표. 202312, <인스트립트>에서 역사적인 첫 번째 낭독극 공연이 진행되었는데, 작품은 바로 나탈리 사로트(Nathalie Sarraute)2인극 아무것도 아닌 일로. 박세인 배우와 문가에 배우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공연의 페어(pair)’로 만났고, 나는 두 배우의 낭독극을 관극했다.


공교롭게도 연희동에서의 <인스크립트>의 삶은 오늘이 마지막이다<인스크립트> 시즌 2는 다음 달부터 혜화동 대학로에서 새롭게 시작된다.












최근에 알게 되었는데, 2년마다 대구에서 원로 연극제가 펼쳐진다대구 경북에서 활동하는 원로 연극배우들과 젊은 배우들의 연기를 볼 수 있는 연극 축제다지난주에 이미 첫 연극 작품이 무대에 올랐는데, 경주 출신 극작가 손기호<복사꽃 지면 송화꽃 날리고>지난주 토요일 저녁 공연을 봤다. 

















* [품절] 손기호 눈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연극과인간, 2020)




<복사꽃 날리면 송화꽃 지고>2011년 서울 연극제 대상 수상작이다. 손기호의 희곡집 눈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에 수록되어 있다. 이 희곡집에 표제작 <눈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 <감포 사는 분이, 덕이, 열수>가 실려있는데, 세 극작품은 경주를 배경으로 한 경주 3부작으로 알려져 있다. <복사꽃 날리면 송화꽃 지고>는 경주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극 중 인물들은 사투리를 쓴다. <복사꽃 날리면 송화꽃 지고>노부부의 소탈하면서도 정겨운 대화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 배삼식 화전가(민음사, 2020)


* 윌리엄 셰익스피어, 최종철 옮김, 셰익스피어 전집 10: 소네트. (민음사, 2016)





원로 연극제두 번째 작품은 배삼식화전가. 6·25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50년 경북 안동의 어느 시골에 환갑을 앞둔 닭실할매김 씨를 위해 두 며느리와 세 자매는 환갑 잔치 대신에 화전놀이를 준비한다. 여인들은 술을 마시고, 서로 선물을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하게 수다를 나눈다화전가는 김 씨의 막내딸 봉이가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소네트 15을 읊으면서 시작된다.








내가 예매한 <화전가> 공연은 오후 3에 시작된다. 이 작품을 다 보고 나면 달서아트센터로 이동해서 저녁 7시에 하는 중국의 고전 잡극(雜劇) <회란기>를 관극한다. <회란기>는 서울시극단 단장 고선웅이 연출했다서울에 가면 볼 수 있는 연극을, 그것도 대구에서 오늘 하루만 하는 연극을 놓친다는 건 연극쟁이로서 어리석은 일이다.

















* 이잠부, 문성재 옮김 회란기(지만지드라마, 2019)

※ 흰색 표지로 된 구판은 2012년에 출간됨, 당시 출판사는 지식을만드는지식





<회란기>원제는 포 대제가 슬기롭게 석회 동그라미로 판결을 내린 이야기라는 뜻의 <포대제지감회란기>(包待制智勘灰闌記). 포 대제는 판관 포청천으로 알려진 포증(包拯)이다. 포청천은 포증의 별명이다. <회란기>의 포 대제는 남편을 독살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친자식마저 빼앗기는 위기에 처한 여인을 구제한다


기생 출신의 장해당은 졸부 관리인 마균경의 첩이 된다. 두 사람 사이에 수랑이라는 이름의 다섯 살짜리 아들이 있다. 반면 마균경의 본처 마 부인은 자식이 없어서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 마 부인은 남편 몰래 관청에서 일하는 조 영사(令史)와 바람을 피운다. 두 사람은 마균경을 죽이기로 모의한다.

 

마 부인과 조 영사의 계략에 걸려든 장해당은 간통녀로 오해를 받아 남편에게 학대당한다. 해당은 국 한 사발을 마균경에게 대접하는데, 마 부인은 국에 독약을 몰래 넣었다. 해당은 졸지에 남편을 독살한 과부가 되었고, 마 부인은 남편의 유산과 해당의 아들을 차지하기 위해 송사(訟事)를 신청한다. 마 부인과 조 영사는 송사에 이기기 위해 해당의 출산을 도운 산파들과 관아의 관리들을 매수한다. 궁지에 몰린 해당은 모진 고문을 받게 되고, 고문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 거짓 자백을 한다.


해당은 개봉부의 사령(使令)으로 일하는 친오빠를 우연히 만난다. 개봉부는 포 대제가 근무하는 관청이다. 해당의 친오빠는 누이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포 대제에게 판결을 의뢰한다. 개봉부에서 다시 만난 장해당과 마 부인. 포 대제는 석회로 바닥에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려, 그 안에 아이를 세우게 한다. ‘하얀 동그라미는 진짜 친엄마가 누구인지 알아보기 위한 장치다.

















* 한국브레히트학회 엮음 브레히트 선집 1, 2, 3(연극과인간, 2015)

※ <코카서스의 백묵원>은 희곡 선집 3권에 수록됨



 

1924년 독일에 처음으로 번역된 <회란기>의 번안 제목은 하얀 동그라미.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포 대제의 재판 장면을 재해석한 희곡 코카서스의 백묵원을 썼다.








오늘 공연 관극을 위해 어젯밤부터 뜬눈으로 한국, 중국, 일본 희곡을 전부 다 읽었다. 이렇게 희곡을 몰아서 읽는 것도 흔치 않다. 게다가 놀라운 사실은 세 편의 희곡을 쓴 극작가와 연극을 만든 연출가 모두 브레히트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지하실>을 번역한 연극 전문 번역가 이홍이2015년에 상연된 창극 <코카서스의 백묵원>을 번역했다.

 

<복사꽃 지면 송화 날리고>의 연출가 정철원(극단 한울림 대표)대구시립극단 예술감독 시절인 2021년에 브레히트의 희곡 <억척 엄마와 그 자식들>을 연출했다.

 

극작가 배삼식의 데뷔작1998<하얀 동그라미>. 브레히트의 <코카서스의 백묵원>을 각색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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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베이컨 - 프랜시스 베이컨의 파란색과 함께 통과하는 밤 미술관에서의 하룻밤
야닉 에넬 지음, 이재형 옮김 / 뮤진트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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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붓질은 포악하다

그는 붓을 휘두르면서 모델의 얼굴을 때린다







붓에 맞은 입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찌그러진다

검정, 회색, 빨간색이 불길하게 뒤섞인 피부는 거칠거칠하다

베이컨이 그림을 그릴 때 자주 사용한 빨간색은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처럼 보인다.







베이컨의 초상화와 인물화를 만나게 되면 지옥도(地獄圖)가 떠올린다.고어(gore: )’로 가득한 그림들이 유명해지자, 대중은 베이컨을 폭력의 화가로 기억한다.


하지만 베이컨은 자신의 그림에 폭력성이 드러난다는 대중의 감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본인은 즐거운 그림을 그렸다고 말한다. 그는 야만과 전쟁이 판치는 이 세상이야말로 자신의 그림보다 더 폭력적이라고 비판한다베이컨의 일침은 틀리지 않았다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희곡 닫힌 방에서 타인은 지옥이라고 했다. 베이컨은 한술 더 떠서 지옥은 바로 이 세상이야!”라고 말했다.


베이컨은 자신의 그림에 나름대로 매력(?)이 있다고 공공연히 주장했다. 그러나 어두침침한 그의 그림은 볼 때마다 무섭다. 여기서 베이컨 그림의 기괴한 매력을 좋아하는 마니아들은 고민한다. 폭력잔혹. 살벌한 단어를 쓰지 않고, 베이컨의 그림이 덜 무섭게 보이도록 대중에게 소개할 수 있을까? 이러한 고민을 해결해 주는 책이 바로 블루 베이컨(Blue Bacon)이다.


이 책을 쓴 야닉 에넬(Yannick Haenel)은 청소년 때부터 베이컨을 좋아한 작가다. 그는 베이컨의 작품들이 전시된 퐁피두 센터(Pompidou Center), 그것도 한밤중에 혼자 관람한다. 좋아하는 화가의 작품들을 혼자서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일은 축복이다. 하지만 저자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는 베이컨의 그림들과 함께한 하룻밤이 마치 지옥 한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회상한다.


저자는 베이컨이 만든 지옥의 쓰라린 맛을 느낀 이후로 편두통에 시달린다하룻밤의 그림 감상의 후유증이다하지만 푸른 기운이 감도는 베이컨의 또 다른 그림을 보자마자 그의 머리를 콕콕 찌르던 고통이 말끔히 사라진다. 편두통에 짓눌린 저자의 마음을 치유해 준 베이컨의 그림은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Water from a Running Tap)이다이 그림은 베이컨이 세상을 떠나기 십 년 전인 1982년에 완성되었다<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난폭한 베이컨이라는 수식어가 나오게 만든 검은색이 가득한 그림들과 다르게 아주 평범하다. 노란색 배경 한가운데에 푸른색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만 그려져 있다. 저자는 베이컨의 그림에서 튀어나오는 파란색에 흠뻑 젖는다. 



 나는 입을 크게 벌리고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 앞에 서 있었다. 물은 더할 나위 없이 시원했다. 물의 시원함은 우리를 가득 채워준다. 그 시원함 덕분에 유익한 빛이 내 머리 주위로 흘러들었다. 나는 점점 더 잘 볼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숨도 잘 쉬었다.


(47쪽)



그는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를 오랫동안 바라보면서 기분 좋은 청량함을 느낀다저자는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파란색상처 없는 나라로 이끄는 빛으로 비유한다<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파란 천국이다


블루 베이컨 그림 없는 미술 책이다저자는 그림을 보여주지 않고, 오로지 단어로 이미지를 설명한다이 책을 펼치자마자 베이컨의 기괴한 그림들이 불쑥 튀어나와 독자를 놀라게 하는 일은 없다유명한 블랙 베이컨’을 만나기 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베이컨의 파란색 그림을 먼저 알고 있으면 좋다. 그러면 검은색에 가려져 있던 색들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베이컨은 붓으로 자신과 인물들을 분해했다블루 베이컨베이컨의 삶에 칠해진 검은색을 분산시켜서 다채로운 매력을 보여주는 프리즘이다.






<cyrus의 주석>

 



* 21




 

 데이비드 실베스터와의 인터뷰[1]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곧 살아있는 사람을 잡기 위해 덫을 놓는 것이라고 말했다.




* 42




 

 데이빗 실베스터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흠잡을 데 없이그려진 자신의 가장 완벽한 작품으로 언급한다.


[1] 데이비드 실베스터, 주은정 옮김, 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 프랜시스 베이컨과의 25년간의 인터뷰 (디자인하우스, 2015).





* 51




 

 앙토냉 아르토반 고흐의 까마귀가 지구를 황폐화하는 악령에 맞서기 위해 세워진 허수아비라고 확신했다. [2]

   

[2] 앙토냉 아르토, 이진이 옮김, 사회가 자살시킨 자, 반 고흐 (읻다, 2023), 조동신 옮김,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 사회가 자살시킨 사람 반 고흐 (도서출판 숲, 2003, 절판)





* 58




 

 우리는 우리 삶의 질료가 갇혀 있는 이 같은 고통을 인식하지만, 베이컨은 그것에 예술이라는 형식을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견딜 수 있는 경험으로 변화시킨다. 어느 정도 예민함의 차원에서는 사는 것이 참을 수 없지만, 것의 극히 짧은 순간들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그림은 그 고통에 굴하지 않고 우리를 풍요롭게 해준다. 랭보 나는 나의 풍요가 어디서나 피로 얼룩졌으면 좋겠어라는 싯구[3]에 그것이 있다.

 

[3] 시구(詩句)’가 올바른 표현이다. 인용된 시구가 있는 시의 제목은 착란 I: 어리석은 처녀. 출전: 랭보, 김현 옮김, 지옥에서 보낸 한 철 (민음사, 2016).





* 78




 

 조르주 바타유는 라스코의 벽을 마주하고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이 풍요로움의 놀라운 광채를 위해 태어났다고 느낀다.”

   

[4] 조르주 바타유, 차지연 옮김,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 / 마네 (워크룸프레스, 2017).





* 119




 

 질 들뢰즈는 그가 베이컨에 관해 쓴 저서[5]에서 다음과 같이 외친다. “불쌍한 고기 같으니!” 이보다 더 진실한 외침은 없다. 그날 밤 베이컨의 그림들은 이렇게 소리쳤다.


[5] 질 들뢰즈, 하태환 옮김, 감각의 논리 (민음사, 2008).





* 128




 

 랭보의 시에 등장하는 사랑의 열쇠라는 시구[주6]는 나를 꿈꾸게 한다.

   

[주6사랑의 열쇠이라는 제목의 시에 나온다. 출전랭보김현 옮김지옥에서 보낸 한 철 (민음사, 2016).





* 163




 

필립 솔러스 필립 솔레르스(Philippe Sollers)





* 166




 

 15세기에 회화 예술을 이론화한 레오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회화란 분수의 표면을 예술적으로 껴안는 것이라고 썼다. [주7]


[7]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김보경 옮김, 회화론 (기파랑에크리, 2011), 노성두 옮김, 알베르티의 회화론 (사계절, 2002년, 절판).





* 177~178







 

 1953년에 그려진 이 그림은 여러 개의 제목을 가지고 있는데, 레슬링 장면을 기록한 뮤브리지의 사진에서 영감을 받아 두 인물또는 레슬러라는 제목으로 불린다.

 

뮤브리지 마이브리지(Eadweard James Muybridge)

 




* 217




 

 앙드레 브르통<나드자>(Nadja)[주8] 서두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보다 누가 나를 괴롭히는가?”라는 질문을 더 선호했다.

   

[주8앙드레 브르통, 오생근 옮김, 나자 (민음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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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찬 회의론자 - 신경과학과 심리학으로 들여다본 희망의 과학
자밀 자키 지음, 정지호 옮김 / 심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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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협찬받고 쓴 서평이 아닙니다.



4점  ★★★★  A-





바이러스는 혼자서 살지 못한다. 세포를 만나야 살 수 있다. 바이러스는 자신보다 몸집이 훨씬 더 큰 세포에 빌붙는다. 세포를 장악한 바이러스는 혼자 있을 때보다 활발하게 움직인다. 바이러스는 자신과 똑같은 바이러스를 계속 만든다. 이때 세포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 바이러스가 증식하면 세포는 죽는다.


냉소주의(Cynicism)는 성격이 쌀쌀한 바이러스다. 냉소주의가 좋아하는 먹잇감은 마음이 가냘픈 사람이다. 마음이 가냘프면 외로움을 더 잘 느낀다. 그리고 세상이 더 어둡게 보인다교활한 냉소주의는 마음이 가냘픈 사람에게 다가가서 귀띔한다. “나만 믿고 따라오면 잘 살 수 있어.” 마음이 가냘픈 사람은 냉소주의자가 된다. 냉소주의자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은 이기적이며 정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냉소주의적 처세술에는 상대방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 바이러스가 돌연변이를 잘 일으키듯이 냉소주의자는 능수능란하게 변장한다냉소주의자는 음모론자로 변신해서 사람들을 이간질하여 갈등과 싸움을 부추긴다.


교활한 냉소주의에 속지 않으려면 백신(vaccine)을 접종해야 한다. 냉소주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최고의 백신은 회의주의(skepticism)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회의주의를 냉소주의의 동의어로 오해한다. 냉소주의에 이미 감염된 사람은 회의주의 백신 접종을 거부한다. 간사한 냉소주의자는 가짜 회의주의자로 변신해서 냉소주의에 감염된 사람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다.


희망찬 회의론자과학적으로 증명된 냉소주의의 위험성회의주의 백신을 꼭 맞아야 할 이유를 알려준다회의주의자는 지식을 의심한다. 지식을 의심하는 태도는 지식을 완전히 믿지 않아서 거부하는 냉소주의와 다르다. 회의주의자는 냉소주의자처럼 상대방의 견해를 매몰차게 대하지 않는다. 회의주의자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상대방을 존중한다. 그런 다음에 상대방의 견해가 확실한지 아닌지 판단한다. 냉소주의자는 똑똑한 척한다. 그래야 자신의 결점을 철저히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회의주의자는 자신 또한 틀릴 수 있다고 인정한다.


이 책의 저자는 신경과학을 연구한 심리학자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을 똑똑하지 않은 전문가라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책을 썼다희망찬 회의론자는 회의주의자의 고백록이다. 저자는 과거에 냉소주의자로 살아왔고, 지금도 가끔 냉소주의의 유혹에 흔들릴 때가 있다고 고백한다. 저자는 정신적으로 힘든 상황이 생기면 고인이 된 신경과학자이자 친구인 에밀 브루노(Emile Bruneau, 1972~2020)를 생각한다고 말한다. 에밀 브루노는 이 책이 태어나게 해준 산파이자 희망찬 회의주의자. 에밀은 세상을 좋은 쪽으로 바뀔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마음속에 희망을 품고 있지만 않았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사회 운동에 참여했다자신의 생각과 다른 상대방을 만나면 먼저 다가와서 대화를 시도했다. 그리고 회의주의적 태도를 유지하면서 최악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저자는 에밀을 만난 이후로 자신과 상대방을 모두 속이는 냉소주의를 스스로 의심하기 시작한다


냉소주의자는 공감과 연대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할 뿐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다. 냉소주의자의 이중성을 잘 모르는 사람은 상대방의 약점을 집요하게 찾아내는 냉소주의자가 영리하다고 생각한다. 겉멋이 든 냉소주의자는 자기만족을 위해 지금도 요리조리 변신한다. 사이버 폭력(Cyber Bullying)을 주도하는 익명의 개인, 음모론을 퍼 나르는 정치인, 사이비 종교의 교주, 이해타산이 빠른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 정치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투표하지 않는 사람들, 정직하게 사는 것이 어리석다고 비웃는 사람들희망찬 회의론자는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냉소주의자들의 허울을 벗긴다.


백신 거부론자들은 백신을 치료제라고 우긴다. 그들의 거짓 논리를 믿는 사람들은 백신 접종자의 사망 소식을 알리는 뉴스를 꺼림칙하게 느낀다. 백신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면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계속 들리기 시작한다. 백신은 치료제가 아니다. 바이러스 감염을 예방하는 약이다회의주의 백신은 우리의 마음 주변을 기웃거리는 냉소주의를 예방하는 삶의 태도다. 회의주의의 정의를 제대로 이해하면 회의주의로 둔갑한 냉소주의를 파악할 수 있다.


거짓 정보와 냉소주의는 끈질긴 불치병이다.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회의주의 백신은 죽을 때까지 계속 맞아야 한다우리는 끊임없이 정확한 정보를 만날 수 있도록 의심해야 한다. 그리고 최악의 상황이 나아질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회의주의 백신의 주요 성분은 희망이다. 희망찬 회의주의자는 어려운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다. 회의주의자 사전에 냉소라는 단어는 없다. 회의주의자 사전에 있는 희망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상대방의 생각을 신뢰하면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진하는 마음이다. 회의주의 백신을 맞으면 상대방의 마음에서 나오는 정직한 온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회의주의자는 따뜻하다. 다정한 회의주의자는 상대방의 차가운 손을 감싸안을 수 있다.







<회의주의자 cyrus의 주석과 정오표>




* 34




 

 은행원의 아들인 디오게네스[1]는 자기 마을의 통화를 위조한 죄로 고소당해 추방됐고 아테네 거리를 전전하며 음식을 구걸하고 큰 도자기 단지 안에서 잠을 자면서 살았다.



[1] 은행원에 해당하는 원문을 확인하지 않았지만, ‘환전상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디오게네스의 생애가 나오는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iogenes Laertius)의 책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16을 번역한 이정호 교수(정암학당 이사장) 환전업자로 번역했다. 당시 환전상은 돈을 빌려주거나 돈을 주조하는 일도 했는데, 은행의 원시적인 형태로 볼 수 있다. 대부분 경제사학자들은 은행의 역사가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희망찬 회의론자의 저자는 디오게네스가 화폐를 위조했다고 주장하지만,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간략하게 언급하자면 디오게네스의 아버지는 나랏돈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는데 돈을 위조한 죄로 추방당했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환전업자인 디오게네스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화폐를 맡겼는데, 일에 미숙한 디오게네스가 화폐를 위조했다. 결국 아버지는 감옥에 끌려가서 죽었고, 디오게네스는 추방당했다(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1, 나남, 2021, 494~495).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참고한 고대 문헌들이 전부 신빙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지만,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은 고대 철학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참고해야 하는 책이다. 라에르티오스의 책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면 고대 철학사에 해당하는 내용이 빈약했을 것이다.





* 193




 

 19세기 러시아 왕자[2]이자 자연주의자(후에는 무정부주의자로 투옥됨)였던 피터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2]은 시베리아를 여행하며 야생을 관찰했다. 그는 저서 상호 원조에서 경쟁이 아닌 협력이 생명의 기본 방향이라고 주장했다.



* 194




 

 오드리 로드를 비롯한 다른 사람의 손에서 자기 돌봄은 공동체와 결속에 그 뿌리를 둔다. 이 현상은 크로프트킨[2]이 목격한 생명의 본성과 심리학 및 뇌과학이 인간에 대해 알려주는 사실과 일치한다.

 


[2] 왕자의 원문이 ‘prince’로 추정한다면, ‘prince’를 왕족 출신의 왕자가 아니라 군주나 귀족의 칭호로 번역해야 한다. 굳이 원문을 확인할 필요 없이 러시아 왕자는 오역이다. 왜냐하면 크로포트킨은 왕족 출신이 아니며 많은 영지와 농노를 소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크로포트킨의 이름 ‘Peter’를 러시아식으로 표기하면 표트르194쪽에 크로프트킨이라는 오자가 있다.





* 301, 302






 

프러포절 프로포절(proposal)

포르포절 프로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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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5-02-18 1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시루스님의 글에서는 주석과 정오가 제일 재미있어요. 자밀 자키라는 사람이 영어로 쓴 책인지, 혹시 다른 언어로 쓴 글을 영어로 옮긴 책을 중역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요즘은 중역하는 일이 드물지만, 예전에는 제법 많았었죠.

시루스님이 지적하는 다양한 오류들을 번역자가 놓쳤다면, 편집자라도 바로 잡았어야 했는데. 현실적으로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죠. 베테랑 번역자들은 나라와 시대 상황에 따른 내용들까지 찾아보면서 일하는 경우들도 있지만, 그냥 원문을 우리 말로 옮기기만 하는 선에서 끝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아요. 오래전 제가 편집을 맡았던 역사책 번역자도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었는데, 번역 초고가 정말 형편없었어요. 글도 비문이 많아서 아예 고쳐써야했고, 시루스님이 주로 지적하시는 이름 표기법이나 유명한 사람이나 사건의 실제 상황들이 많이 잘못되어 있었어요. 원서가 독일어 책이었는데, 나중에는 제가 아예 원서와 독일어 사전을 놓고 한 문장씩 다 검증해야 했어요. 역사적 상황들도 많이 찾아보고, 번역된 글이 검색이 안되면 영문으로 찾아보기도 했구요. 그렇게 열심히 작업했는데, 당시 번역자는 제가 뭘 얼마나 고쳤는지 알지도 못하더라구요.

cyrus 2025-02-20 09:21   좋아요 0 | URL
주석과 정오표가 많은 저의 서평은 ‘배꼽이 큰 배’라고 할 수 있어요.. ㅎㅎㅎ
번역자와 편집자들이 보라고 만든 건데 실제로 댓글로 반응을 해주신 분이 그리 많지 않아요.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번역을 해본 적이 없지만, 번역을 잘하려면 공부를 꾸준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상식과 표기법이 시간이 지나면 달라지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