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펴보기 전에 책 얼굴(앞표지)부터 살펴본다내가 선호하는 책 얼굴은 화가의 그림이 있는 것이다. 특히 좋아하는 화가의 그림으로 장식된 책 얼굴을 만나면 반갑다. 최근에 완독한 탄소라는 세계의 책 얼굴은 앙리 루소(Henri Rousseau)의 그림이다.






 













* 폴 호컨, 이한음 옮김 탄소라는 세계(웅진지식하우스, 2025)

 

* 코르넬리아 슈타베노프, 이영주 옮김 앙리 루소(마로니에북스, 2006)

 

* [절판] 정금희 · 조명식 · 쥬세페 고아 편집 앙리 루소(재원, 2005)





책 앞날개에 적힌 루소의 그림 제목은 Jungle with Setting Sun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해가 지는 정글이다







루소는 이국적인 풍경을 주로 그렸다. 그러나 루소는 열대우림이 많은 아프리카에 가본 적이 없다정글에 가지 않아도 정글을 그리는 방법이 있다. 열대 식물들이 자라는 식물원에 가면 된다. 루소는 식물원에 드나들면서 열대 식물들의 생김새를 눈여겨봤다하지만 그는 꽃과 나무를 똑같이 그리려고 하지 않았다루소는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아마추어 화가였다. 그는 원근법을 무시하거나 상상력을 덧칠해서 풍경화를 그렸다.








 

그림의 실체를 잘 모르는 독자는 루소가 평화로운 정글을 상상해서 그린 풍경화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책 얼굴의 절반을 가린 띠지를 벗기면 참담한 형상이 나타난다수풀 사이로 야생 동물에 잡아먹히는 아프리카 원주민이 보인. 이 그림의 다른 제목은 Black Man Attacked by a Jaguar. 야생 동물의 정체는 재규어상상화에 묘사된 세상은 환상이고, 정확하지 않다. 재규어의 습격에 당한 아프리카 흑인은 모순이다. 재규어는 아프리카가 아닌 중남미에 서식한다.


루소의 그림들에서 나타나는 모순적 이미지는 예술적 상상력이 빚어낸 산물이다루소의 그림을 감상하려면 사실을 바라보려는 눈을 감아야 한다. 그러면 루소가 그린 환상의 세계를 들어갈 수 있다.

















* 찰스 로버트 다윈, 장대익 옮김, 최재천 감수 종의 기원(사이언스북스, 2019)



탄소라는 세계를 다 읽은 후에 다시 책 얼굴을 살펴봤다. 책 얼굴과 책의 속살(책의 핵심 내용)이 다르다.


책 얼굴이 된 루소의 그림은 약육강식의 냉혹한 정글을 연상시킨다. 강자는 약자를 지배하고 멸망시킨다지금까지 살아남는 존재는 강자다정글에 오직 힘의 논리만이 통한다탄소라는 세계는 정글이 생각보다 냉혹하지 않으며 자연에 살벌한 경쟁만 있는 건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 책이 독자에게 보여주고픈 속살은 협력하고 공생하는 자연 생태계다.



































* [개정판] 최재천 다윈 지능: 최재천의 진화학 에세이(사이언스북스, 2022)

 

* 브라이언 헤어 · 버네사 우즈 함께 씀, 이민아 옮김, 박한선 감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친화력으로 세상을 바꾸는 인류의 진화에 관하여(디플롯[주1], 2021)

 

* 다니엘 S. 밀로, 이충호 옮김 굿 이너프: 평범한 종을 위한 진화론(다산사이언스, 2021)

 

* 프란츠 부케티츠, 이덕임 옮김 겁쟁이가 세상을 지배한다: 다윈의 자연선택론과 적자생존의 비밀(이가서, 2011)




지금도 여전히 대중은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자연관을 주장한 생물학자로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을 지목한다. 다윈은 억울하다. 그는 약육강식이라는 단어를 자신의 책 종의 기원에 쓴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을 강조하는 비정한 논리로 사용됐다하지만 다윈의 의도와 다르게 진화론은 경쟁을 부추기고 사회적 약자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선전 도구로 변질되었다.


자연에서 가장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적자는 완벽하지 않다. 그리고 생각보다 강하지 않다. 진화는 생명체가 완벽한 상태로 거듭나는 과정이 아니다. 약점이 있는 생명체가 끊임없이 변하는 자연에 적응하기 위한 전략이다

















신현철 다윈을 오해한 대한민국》 (소명출판, 2025)

 

[수정 증보판] 찰스 로버트 다윈신현철 옮김 종의 기원 톺아보기》 (소명출판, 2024)




우리나라에 번역된 진화경쟁일본에서 만들어진 한자를 수입한 것이다. 두 개의 단어는 일본의 지배를 받기 전인 대한제국 시절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근대 일본에서 번역된 진화경쟁은 명확한 정의가 없는 불완전한 단어였다. 서양 사상을 받아들인 일본 지식인들은 진화경쟁을 다윈의 생각과 다르게 이해했다. 다윈이 생각한 자연관을 제대로 이해한 일본 지식인은 남을 이기기 위한 경쟁이 아닌 모두가 이익을 누릴 수 있는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약육강식’을 내세우는 진화론이 우세했다유럽과 자웅을 겨룰 만한 강대국이 된 일본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전역을 지배한다. 이 시기에 진화경쟁은 우리가 아는 약육강식과 동일한 의미의 단어로 자리 잡게 된다.


일제강점기의 조선 지식인들은 굴욕적인 약소국 신세에서 벗어나기 위한 이론적 대안으로 약육강식을 주장했다. 처음에 그들은 부국강병을 주장했지만, 독립에 대한 열망이 식어버린 이후부터 강자 앞에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였다. 고개 숙인 지식인들은 아시아의 강대국 일본에 순응하면서 발전하는 것이 이롭다고 주장하는 친일파로 변절했다.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2025년 9월의 세계 문학]

조지 오웰이한중 옮김 나는 왜 쓰는가》 (한겨레출판, 2025개정 증보판)


* 프리드리히 니체, 박찬국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을 위한, 그리고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아카넷[주1], 2025)

 



조지 오웰(George Orwell)정치와 영어라는 글에서 정치적 언어를 이렇게 정의한다.



 정치적 언어거짓을 사실처럼 만들고 살인을 존중할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순전한 헛소리를 그럴듯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고안된다.


(조지 오웰, 정치와 영어중에서, 나는 왜 쓰는가수록, 291)




진화는 다양한 생명이 한데 어우러진 자연의 참모습이 담긴 과학 용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의 생각들이 묻혀서 지저분한 정치적 용어가 되고 말았다. 다윈의 책을 한 번도 읽지 않은 사람은 진화를 거쳐야 인간이 진보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다윈은 진화가 진보의 동일한 단어로 쓰이는 것에 반대했다. 진화론을 잘 안다고 주장하는 우파는 경쟁에서 살아남은 개인을 존중한다. 얼치기 진화론자는 진화의 정의가 강한 자가 되기 위한 과정이라고 거짓말하고, ‘남을 쓰러뜨려 이기는 경쟁을 정당화한다. 정치적 언어가 된 진화는 위험하다.


최근에 새로 나온 니체(Nietzsche)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번역본은 기존의 번역서들보다 번역자의 주석이 많은 편이다. 이번 번역본의 역자는 니체 철학 연구의 권위자 박찬국 교수그런데 본문이 시작되는 부분에 위험한 주석이 있다. 문제의 주석은 다윈의 자연관과 니체의 자연관을 비교한 내용이다.








 자연에는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종과 다채로운 변화와 풍요로움이 존재한다. 이 점에서 니체의 자연관은 자연을 부족한 자원을 둘러싸고 생명체들이 투쟁하는 결핍의 장소로 보는 다윈식의 진화론적인 자연관과는 다르다.

 니체에게서 자연은 마치 넘쳐흐르는 자신의 힘을 분출하지 못하여 고통스러워하는 생명체와 유사하다. 차라투스트라에게는 자신의 지혜를 베푸는 일이 행복이다.

 

(주석 5, 14)




박 교수가 언급한 다윈의 진화론적 자연관은 정치로 오염된진화의 잘못된 의미가 반영되어 있다. 다윈은 지구상의 수많은 생명체가 생물 다양성에 의해 건강한 상호 관계를 유지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유기체 간의 상호 관계, 그리고 각 유기체와 물리적 환경 간의 상호 관계가 얼마나 복잡하면서도 딱 들어맞는가도 생각해 보라.

 

(찰스 다윈, 장대익 옮김, 종의 기원》 「4장 자연선택중에서, 141)



다윈의 진화론을 편협하게 설명한 위험한 주석은 사소하지 않다. 주석의 심각성에 둔감한 독자들이 있다면 거꾸로 생각해 보자. 니체의 철학이 독일 나치즘(Nazism)에 영향을 준 사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보기만 할 텐가. 니체는 반유대주의를 비판했지만, 그가 죽은 후에 니체 철학의 핵심 위버멘쉬(Übermensch)’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Hitler)가 좋아하는 정치적 용어가 되었다.


다윈과 니체는 억울하다. 두 사람은 정치에 물들인 언어 진화와 위버멘쉬를 말하지 않았다그들을 지지하는 추종자들은 이론과 사상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정치색을 입혔다













<다윈과 니체를 좋아하는 cyrus가 만든 주석>



[1] 디플롯 출판사는 학술서와 고전을 주로 펴낸 아카넷 출판사 소속의 임프린트 출판사(독립 브랜드).

 





* 다윈을 오해한 대한민국, 104




 

 다윈이 쓴 또 다른 책 Desecnt of Man[2]인간의 친연관계가 아니라 인간의 기원이나 인간의 유래또는 인간의 계승으로 번역한다면, 다윈이 생각하는 바가 조금은 오해될 수 있을 것이다.



[2] Desecnt Descent. 인간의 유래로 알려진 다윈의 책 제목의 영어 철자가 틀렸다중간에 있는 ec가 바뀌었다.






* 다윈을 오해한 대한민국, 214




 

 다윈이 모든 생명체 사이에서, 그리고 생명체와 물리적인 살아가는[3] 조건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상호 연관성이 얼마나 무한히 복잡하면서도 서로에게 잘 부합하는지도 유념해야 한다고 설명했듯이, 생물과 환경과의 적절한 관계가 생물다양성의 지속성을 담보할 것이다.



[3] 문장이 어색하다. 저자는 자신이 직접 번역하고 주석을 단 종의 기원 톺아보기에 있는 문장을 인용했다. 그런데 종의 기원 톺아보기구판(2019년 출간) 118쪽에 있는 비문(非文)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옮겨 적었다작년에 나온 수정 증보판에도 비문이 남아 있다. 비문이 나오는 쪽수는 구판과 똑같이 118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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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라는 세계
폴 호컨 지음, 이한음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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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지구는 모든 생명체가 춤을 추는 거대한 무대이다. 생명력이 넘실대는 지구는 46억 년 전에 만들어졌다인간은 30만 년 전부터 지구에서 생명의 춤을 추기 시작했다46억 년 지구의 나이를 하루 24시간으로 표현한다면, 인간은 235955에 등장했다. 인간이 생명의 춤을 춘 시간은 1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을 슬기로운 춤꾼(Homo sapiens)이라고 주장한다. 


자연의 무대에 뒤늦게 오른 인간은 백업 댄서에 가깝다. 하지만 거만한 인간은 무대를 독차지하려고 오래전부터 생명의 춤을 춘 동물과 식물, 곤충을 쫓아냈다오늘날 지구는 인간의 독무대가 되었다인간의 춤 욕심은 끝이 없다. 춤을 더 잘 추고 싶어서 자기 입맛에 맞게 무대를 개조한다무대 위에 솟은 산을 깎고, 무대 위에 자란 나무들을 모조리 베어낸다자연의 무대에 인간이 무수히 남긴 흔적들만 있다. 생명의 독무(獨舞)에 열중한 인간은 지저분한 지구를 청소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짓밟힌 지구가 위태롭다. 심하게 망가져서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춤을 잘 추려면 안무가의 손길이 닿아야 한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아주 작은 안무가를 잘 만나서 생명의 춤을 출 수 있었다생명의 춤을 추게 만드는 안무가는 생명체 속에 살고 있지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안무가와 함께 춤을 추고 있다. 비밀에 싸인 생명의 춤꾼인 안무가의 정체는 탄소(carbon)’.









탄소라는 세계재능이 많은 생명의 춤꾼 탄소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일깨워주는 책이다. 탄소는 지구와 생명체를 이루는 기본 원소이다탄소가 없으면 지구는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되어 있을 것이다. 탄소가 없는 지구는 생명체가 살 수 없는 메마른 무대다. 그곳에 죽음의 춤(the dance of death)이 펼쳐진다탄소는 바지런하다. 생명체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달린다(run). 인간의 세포 한 개에 12,000억 개의 탄소 원자가 있다저자가 인용한 탄소의 춤(the dance of carbon)은 시들해진 생명체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생명의 춤꾼 탄소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알려준다. 첫 번째 교훈,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춤을 추지 말기. 탄소는 공평하다. 모든 생명체는 탄소를 만나고, 죽을 때까지 탄소와 더불어 살아간다. 생명체가 죽고 나면 탄소는 또 다른 생명체를 만든다. 생명의 춤을 추는 모든 존재는 탄소를 공유한다두 번째 교훈, 서로 돕고 살아가면서 춤추기인간보다 먼저 생명의 춤을 춘 동식물은 자신과 다른 종()들과 협력하면서 살았다곤충은 꽃가루를 퍼뜨리는 생명체다. 곤충 덕분에 식물은 열매를 맺고, 씨앗을 남길 수 있다. 그러나 곤충을 피하는 인간의 독무가 길어질수록 자연의 무대 위에 있어야 할 곤충이 사라지고 있다. 곤충의 도움을 받지 못한 식물은 생명의 춤을 추지 못한다. 식물이 멸종하면 그 식물을 먹고 살아야 할 동물과 인간도 멸종하고 죽음의 춤을 추게 된다.


인간이 하도 춤을 춰서 망가진 지구가 계속 뜨거워지고 있다.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가 많아지면 온실가스가 생겨서 지구온난화 현상이 지속된다. 자신이 슬기롭다고 착각하는 춤꾼은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탄소를 지목한다. 지구를 청소하는 환경 운동가들은 탄소와 이산화탄소를 뭉뚱그려서 온실가스라고 주장한다.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생명의 춤꾼은 오해로 둘러싸여 있다. 안무가의 은혜를 모르는 인간은 생명의 독무를 고집한다. 지구가 건강해지려면 모든 생명체가 아울러 춤추는 합동 공연이 이루어져야 한다. 생명 다양성은 인간, 동물, 식물, 곤충, 곰팡이와 같은 미생물이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추는 춤이다. 탄소의 춤을 방해하고, 이기적인 생명의 독무(獨舞)를 유도하는 무지의 독무(毒霧)는 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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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이 저물고 월()요일이 조용히 뜨기 시작하는 밤. 잠을 자야 할 시간인데도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는다. 일요일이 끝날 때만 생기는 불면증이다. 자꾸만 미룬 책들을 뒤늦게 펼쳐본다. 온종일 가만히 있었던 집중력이 되살아난다. 눈꺼풀에 매달린 졸음이 달아난다거뜬히 책을 읽고 나면 새벽 한 시. 집중력이 평소보다 높아지는 날이면 새벽 두 시까지 읽는다.

















* 파스칼 드튀랑, 김희라 옮김 우주를 품은 미술관: 예술가들이 바라본 하늘과 천문학 이야기(미술문화, 2025)

 




지난주 일요일(97)우주를 품은 미술관을 완독했다. 하루 만에 다 읽었다. 서평을 쓰기 시작했다. 쉬엄쉬엄 다른 책을 보면서 서평을 썼다. 완성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월요일(98) 새벽이 될 때까지 썼다


월요일 새벽에 붉은 달(blood moon)’이 뜬다는 뉴스를 알고 있었다. 달이 붉게 변하는 현상은 개기월식이다. 달은 지구의 그림자에 완전히 가려진 상태다. 우주를 품은 미술관에 일식과 월식 현상을 묘사한 그림들이 나온다고대 그리스-로마인들은 일식과 월식을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 시대가 변하면서 일식과 월식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졌다. 기독교 미술에서 묘사된 일식과 월식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신의 메시지를 의미했다.


달이 붉게 변할 때가 개기식 최대로 볼 수 있는 시간대다. 그런데 붉은 달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개기식 최대 시간이 새벽 311이다새벽 3시를 넘긴 채 월요일 새벽을 맞이한 적이 없다. 아침에 깨어날 때 막 몰려오는 피로감을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자투리 잠을 잘 걸 그랬나. 하지만 서평 쓰는 데 몰입하느라 눈을 잠깐 붙일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서평을 다 쓰고 나니 새벽 2시였다잠이 오지 않아서 옥상에 갔다. 230분부터 개기식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밤하늘에 구름이 많았다. 구름은 서서히 붉어지는 달을 가렸다. 생각하지도 못한 변수다. 구름 뒤로 숨은 붉은 달이 있는 곳을 쳐다보기만 했다. 구름이 지나가길 바랐다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구름은 붉은 달을 감쌌다.



















* 블레즈 파스칼, 이환 옮김 팡세(민음사, 2003)

 

* 칼 세이건, 현정준 옮김 창백한 푸른 점(사이언스북스, 2001)





한 시간 남짓 불빛 한 점 없는 옥상 한가운데 서서 밤하늘만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으니 살짝 두려움을 느꼈다파스칼(Blaise Pascal)이 두려워하던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어떤 느낌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내 눈앞에 펼쳐진 구름 낀 밤하늘은 크기를 가늠하기 힘든 우주의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런 우주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은 아주 작은 존재파스칼은 어린 나이에 계산기를 발명했고, 젊은 시절에 수학과 물리학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다재다능한 학자다. 게다가 그는 팡세를 쓴 철학자이자 신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천문학에 관심을 드러나지 않았지만, 무한한 어둠의 우주 속에 있는 인간을 티끌로 비유한 칼 세이건(Carl Sagan)의 말에 공감할 것이다우주에서 바라보는 지구는 창백한 푸른 점이다파스칼은 무한을 두려워했지만, 사실 내가 두려워한 것은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그것은 바로 모기였다.








새벽 3시가 될 무렵에 구름이 전보다 줄어들었다. 지나가는 구름의 틈 사이로 붉은 달빛이 희미하게 보였다. 구름에 반쯤 가려진 붉은 달을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어설프게 고화질로 설정해서 찍은 건데 생각보다 붉은 달빛이 진하게 나왔다. 달 표면이 뚜렷하게 나온 사진은 아니지만, 맨눈으로 붉은 달을 봤다는 것만으로 만족한다325. 붉은 달 관측 종료.


집으로 돌아와서 바로 누웠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억지로 눈을 감았다. 그날따라 눈 속의 어둠이 무한한 우주의 어둠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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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9-10 0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생각보다 달이 잘 찍혔네요.요즘 스마트 폰의 사진 촬영능력이 나날이 좋아지는 것을 새삼 다시 느끼게 됩니다.스마트 폰이 이리 좋아지니 카메라 회사들이 자꾸 힘들어 지는 것 같네요^^

cyrus 2025-09-14 23:33   좋아요 0 | URL
흐릿하게 나올 줄 알았는데, 사진 보정 기능을 아무거나 해보니까 진하게 나왔어요. ^^;;

꼬마요정 2025-09-10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말씀처럼 여름밤에 무서운 건 모기죠!! 올해는 그나마 모기가 적다지만 독하더라구요ㅠㅠ 근데 사진이 정말 잘 찍혔네요. 가끔 달 찍어보면 저는 흐릿하거나 뭔가 잘 안 나오던데 멋집니다. 파스칼과 칼 세이건.... 똑똑한 사람들의 만남이로군요^^

cyrus 2025-09-14 23:35   좋아요 1 | URL
올해 여름은 신기하게도 집안에 모기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안심했는데, 역시나 새벽에 나가보니까 모기들이 돌아다니네요.. ^^;;

transient-guest 2025-09-11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잠이 안 올때 책을 펼치면 아침까지 잠을 못자게 됩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잠이 안 와도 책은 안 읽어요.ㅎㅎ 새벽에 일찍 일어나려구요.ㅎ 글이 좋네요. 책과 우주와 미술과 생활과...낭만적입니다

cyrus 2025-09-14 23:38   좋아요 1 | URL
지금도 잠이 오지 않아요. 오늘 해야 할 일은 독서 모임 발제를 만드는 것인데, 다 만들었어요. 읽다 만 책 조금 보다가 자야겠어요.. ㅎㅎㅎ
 
우주를 품은 미술관 - 예술가들이 바라본 하늘과 천문학 이야기
파스칼 드튀랑 지음, 김희라 옮김 / 미술문화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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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우주는 무한한 도화지다. 사람들은 까만 도화지에 알록달록한 상상력을 마음껏 수놓았. 바빌로니아 지역에 살았던 칼데아 사람(Chaldean)은 밤의 화가들이었다. 그들은 누워서 별 하나하나 눈 맞춤했다별빛을 듬뿍 받은 화가들의 눈이 초롱초롱 빛난다. 밤의 화가들은 별을 그러모아서 여러 가지 동물을 그려 넣었다. 별들을 연결해서 만든 동물 그림은 별자리가 되었다. 밤의 이야기꾼들은 별자리에 어울릴만한 신화를 만들었다. 신화를 믿는 사람들은 밤하늘에 위대한 영웅들의 모습을 새겼다.


붓을 든 화가들은 한 폭의 캔버스에 우주를 담으려는 야망을 품었다. 대부분 화가는 우주를 몰랐다. 하지만 잘 모를수록 우주의 모습은 더 잘 그려진다. 화가들은 상상력을 동원해서 자신만의 별과 우주를 만든다.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천문학자들은 최대한 정확하게 별과 행성을 그린다. 거대한 도화지였던 우주는 그림이 되었다코스모스(cosmos, 우주)는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먹으면서 자라난다.


우주를 품은 미술관: 예술가들이 바라본 하늘과 천문학 이야기멀티버스(multiverse) 화보. 과학에서 말하는 다중우주(多重宇宙)는 실험으로 검증되지 않았다. 저 멀리 어딘가에 있을 또 다른 우주들을 직접 볼 수 없다그러나 고대부터 현대까지 동서양 예술가들이 그린 다중우주는 감상할 수 있다미술관에 코스모스(우주)가 울긋불긋 만개한다책의 저자는 문학 교수다. 저자는 그림 작품들을 설명할 때 우주와 행성을 소재로 한 문학 작품들을 인용한다시인과 소설가들도 우주에서 영감을 찾았다.








예술가들이 상상한 멀티버스는 시대별로 다르다중세인들의 우주는 신의 피조물이다. 태양은 예수의 신성함을, 달은 성모 마리아의 순결함을 상징한다. 성직자와 교부 철학자들은 성경 구절에 부합하는 우주를 좋아했다. 중세 예술가들은 성경을 펼쳐서 우주를 찾았다








실험과 관측을 중시하는 천문학자들이 등장하면서부터 중세 우주론의 한계가 드러났다. 코페르니쿠스(Copernicus)갈릴레이(Galileo Galilei)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주장했다. 천문학자들이 이용한 망원경은 우주를 좀 더 정확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 화가들이 풍경을 그릴 때 사용한 카메라의 조상)









낭만주의자의 우주는 우울하고 암울하다낭만주의 예술가들이 묘사한 석양은 태양의 뜨거운 생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하늘이다. 희미한 석양은 힘이 없다. 인간처럼 우주 또한 쇠퇴하고 언젠가 죽음을 맞이한다.


거인 같은 망원경과 우주를 홀로 떠도는 인공위성 덕분에 우리는 우주와 행성의 실제 모습을 볼 수 있다. 고대에 살았던 밤의 화가들은 토끼가 살고 있는 달을 상상하면서 그렸다. 과학의 혜택을 받고 사는 현대인들은 스마트폰 카메라로 선명한 달 사진을 찍을 수 있다그래도 예술가들은 여전히 우주를 상상한다. 우주를 정확하게 아는 과학은 우주를 자유롭게 상상하는 예술을 죽이지 못한다








예술로 피어난 코스모스는 영원하다.









<별의 먼지로 만들어진 cyrus가 만든 주석과 정오표>







* 106




 

 아폴리네르시집 알코올(1913)에서 과감하게 목이 잘린 태양이라 표현함으로써 태양의 언어를 혁신했다. [1]



[1] 목이 잘린 태양이라는 시구가 나오는 시는 알코올에서 첫 번째로 실린 변두리. “목이 잘린 태양은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이다. (기욤 아폴리네르, 황현산 옮김, 알코올, 열린책들, 2010)






* 145




 

아르튀르 랭보, <태양과 육체>, 시집, 1870 [주2]

 


[주2랭보가 처음으로 발표한 시집지옥에서 보낸 한철이다. 1873년에 발표되었다. 이 시집이 나오기 전에 랭보는 잡지를 통해 시를 발표했다. 1870년에 랭보의 이름이 실린 시집은 나오지 않았다. <태양과 육체>1870년에 쓴 시다.



[우리말로 번역된 <태양과 육체>가 실린 랭보의 시 선집]

 

* 최완길 옮김, 지옥에서 보낸 한철(북피아, 2006, 절판)


* 한대균 옮김, 나의 방랑(문학과지성사, 2014)



폴 베를렌(Paul Verlaine)은 랭보의 연인이다. 우리말로 번역된 베를렌의 시 선집은 그리 많지 않으며 절판되었다. 베를렌의 시 <하얀 달> 전문을 볼 수 있는 번역본 베를렌 시선(윤세홍 옮김, 지만지, 2013)이 유일하다.






* 159~160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소련의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의 놀라운 업적을 칭송했다레비나스는 가가린이 한 시간 만에 인간이 모든 지평선을 넘어 존재했음을 보여준 첫 번째 사람이고 우주에서는 그를 둘러싼 모든 게 하늘이었다고 말했다[주3]



[주3출처는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에세이 Heidegger, Gagarin and Us(하이데거가가린 그리고 우리, 1961)이 글은 <Difficult Freedom: Essays on Judaism>(1963)에 수록되었다.



















[주4]


* 186

토성의 위성 수: 82

 

* 206

목성의 위성 수: 79

 

* 218

천왕성의 위성 수: 27

 

* 220

해왕성의 위성 수: 14



[주4토성, 목성, 천왕성, 해왕성의 위성 수가 정확하지 않다. 토성은 태양계 중 가장 많은 위성을 가진 행성이다. 국제천문연맹(International Astronomical Union, IAU)이 인정한 토성의 위성 수는 274. 목성의 위성 수는 95, 천왕성의 위성 수는 28, 해왕성의 위성 수는 16.

 

(출처: NASA Jet Propulsion Laboratory, ‘Planetary Satellite Discovery Circumstances’, https://ssd.jpl.nasa.gov/sats/discovery.html)







* 215





에베레스트산 8,844m [주5]


 

 


[주5] 에베레스트산의 높이 측량은 1849년부터 시작되었다. 중국, 인도, 미국이 산의 높이를 측정했는데, 측량법이 달라서 높이가 다르게 나왔다. 1954(또는 1955) 인도가 측정해서 확인된 산의 높이는 해발 8,848m였다. 처음으로 인정된 에베레스트산 높이 값이다


2005년 중국이 측정했을 때는 약간 줄어든 8844.43m가 나왔다. 8,844m는 바위 위에 쌓인 눈을 제외한 상태에서 측정된 높이 값이다


1999년에 미국은 GPS로 측정해서 확인된 산의 높이가 8,850m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의 측량 결과는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공식 높이는 해발 8,848m


에베레스트산은 지각 변동의 영향을 받으면 높아진다. 2015년 히말라야에 지진이 발생하고 5년이 지나서 중국과 네팔이 공동 측량을 착수했고, 1m 높아진 8,848.86m로 확인되었다.


(출처: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실측해 보니 1m가량 높아졌다>, 연합뉴스, 2020128일 입력, 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2067863?sid=104)






* 259




 


 혜성의 꼬리와 사람의 머리카락이 비슷하므로 혜성은 여성의 이미지와 강력하게 동일시된다. 예를 들어 프루스트는 꽃다운 소녀들의 행렬이 바다를 향하는 것을 반짝이는 혜성처럼 둑을 따라나아간다고 표현했[주6]

 


[주6] 저자가 인용한 문장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2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1919) 2고장의 이름 : 고장에 나온다프루스트 특유의 길고 늘어진 문장의 첫 부분에 해당한다.



 방파제를 따라 빛나는 혜성처럼 앞으로 나아가던 그 무리 안쪽에서 소녀들은 주위 군중이 자기들과는 다른 인종인 듯, 또 그들의 고통 역시 자기들 마음속에 어떤 유대감도 불러일으킬 수 없다고 판단한 듯 군중을 바라보지 않는 것 같았고, 나사가 풀린 기계처럼 보행자들을 피하는 수고도 할 필요 없다는 듯, 멈춰 선 사람들에게도 길을 비키도록 강요했으며, 기껏해야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접촉도 꺼리는 어느 겁 많은 또는 분노한 노신사가 허둥대거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도망이라도 치면, 자기들끼리 서로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김화영 옮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2중에서, 255,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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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08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도 흥미롭지만 책의 오류를 잡아내는 cyrus님의 수고와 능력이 항상 경이롭습니다.

cyrus 2025-09-10 06:51   좋아요 1 | URL
책을 읽다가 궁금한 내용이나 무언가 의심스러운 내용이 보이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 편이에요. ^^;;

서니데이 2025-09-09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위의 댓글 쓰신 분과 같은 생각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오타가 있거나 오류가 있을 때도 있지만, 그냥 지나가게 되거든요.^^
지난 월요일에 개기월식이 있어서인지, 우주와 행성의 이야기가 좋네요.
cyrus님 잘 읽었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cyrus 2025-09-10 06:53   좋아요 0 | URL
알고 있어서 오류를 잘 잡아낸다기보다는 모르는 것이 많아서 오류를 발견되는 경우가 많아요. 오류를 확인하면서 제가 몰랐다거나 잘못 알고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되거든요. ^^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줄여서 세속’) 8월의 책국내 작가가 쓴 추리소설이다. 그리고 베스트셀러. 모임 날은 오늘 저녁이다. 아주 유명한 소설이라서 그런가? 현재까지 모임 참석 인원은 나를 포함한 아홉 명이다. 모임에 처음 오는 분은 한 명이다. 이 정도면 제법 많은 편이다.

















[<읽어서 세계 문학 + 향기의 미스터리 속으로> 2025년 8월의 책]

정해연 홍학의 자리》 (엘릭시르, 2021)




모임 선정 도서는 정해연홍학의 자리. 이 책을 추천한 세속 독자(모임 정회원)’추리소설 마니아 향기이다









지금처럼 무더웠던 작년 7월과 8월에 향기 님은 대구 책방 <일글책>에서 추리 문학 전문 독서 모임 <향기의 토요 미스터리 극장>을 진행했다선정 도서는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단편 소설 선집이었다향기 님은 노트 형태로 된 독서 모임 자료를 직접 만들었다포를 매우 좋아한 나는 향기 님이 만든 독서 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향기의 토요 미스터리 극장> 첫 번째 선정 도서, 20247~8]

* [절판] 에드거 앨런 포, 황소연 옮김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윌북, 2022)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2024년 7월의 세계 문학]

에도가와 란포김소연 옮김 에도가와 란포》 (손안의 책, 2021)




<향기의 토요 미스터리 극장>이 시작된 7월에 <세속> 두 번째 모임이 진행되었다. 당시 <세속> 7월의 책은 에도가와 란포(江戸川 乱歩)의 단편 선집이었다. 에도가와 란포는 일본 근대 추리 문학을 풍성하게 만든 작가. 에도가와 란포는 에드거 앨런 포의 이름을 따서 만든 필명이다. 그래서 나는 두 번째 독서 모임에 장르문학 마니아들만 아는 란포의 소설을 과감하게 골랐다. 장르문학에 생소한 독자들을 배려하지 못한 선택이었다. 예상했듯이 <세속> 7월 모임에 세 명이 참석했다. , 향기, 정현정. 두 분은 <세속> 첫 번째 모임에 참석한 정회원이다.

















* 미스테리아 편집부 미스테리아 58(엘릭시르, 2025)




나는 추리 문학의 매력을 잘 아는 향기 님을 믿고, 장르문학 마니아가 아닌 독자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추리소설을 읽어 보기로 했다. 때마침 지난 달에 미스터리 전문 격월간지 《미스테리아》58호가 나왔다. 









2003년부터 2023년까지 출간된 ‘35권의 한국 미스터리 추천작이라는 글이 실려 있다2021년에 출간된 세 권의 추천작 중 한 권이 홍학의 자리.

 



여기서, 잠깐만!




독서 모임 선정 도서를 소개하는 글을 보면서 이상한 점을 느꼈는가? 세계 문학 전문 독서 모임에 국내 작가의 추리소설을 읽는 것이 어색할 수 있다. <세속> 모임의 정체성을 생각한다면 외국 작가의 추리소설을 읽어야 한다.


내가 독서 모임 도서를 선정한 것에 조금이라도 이상하다고 느낀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국내 작가의 책을 고를 거면 세계 문학 전문이라는 이름은 있으나 마나네요. 차라리 국내 작가의 문학 작품도 읽는 독서 모임을 진행해 보시는 게 어떤가요? 그러면 모임 참석자들을 더 모을 수 있어요.”


독서 모임의 정체성을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독서 모임의 정체성을 180도 바꾸지 않고도, 약간의 변화를 줄 수 있다. <세속> 선정 도서가 국내 작가가 쓴 책이라면, 이 책의 분위기가 비슷하거나 같이 읽을 수 있는 외국 작가의 책을 소개하면 된다따라서 세계 문학 전문 독서 모임에 국내 작가의 문학 작품을 선정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홍학의 자리는 첫 장면부터 범인이 나온다. 이제 막 이야기에 몰입하기 시작한 독자는 범인을 알고 있다. 형사들은 범인을 찾기 위해 여러 방식으로 수사를 벌인다. 범인을 아는 독자는 형사들이 범인을 어떻게 찾는지 궁금해한다기존의 추리소설들은 범인을 찾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결말에 범인이 공개된다. 홍학의 자리는 일반적인 추리소설과 다르게 범인의 범행이 어떻게 발각되는지를 보여준다이러한 형식의 추리소설을 도치 서술 추리소설(inverted mystery)’이라고 한다도치(倒置)’는 순서를 바꾼다는 뜻의 단어다.


잠깐 스치듯이 묘사되었지만, 홍학의 자리를 유심히 본 독자라면 법의학에서 다룰 법한 과학 수사를 기억할 것이다. 사람의 걸음걸이로 범인을 가려내는 법보행 분석(273), 물에 빠져 죽은 시체 속에 있는 플랑크톤 분석하기(311).




















* [절판] 리처드 오스틴 프리먼, 원은주 옮김 붉은 엄지손가락 지문(시공사, 2011)


* 리처드 오스틴 프리먼, 이경아 옮김 오시리스의 눈(엘릭시르, 2013)


* 리처드 오스틴 프리먼, 김종휘 옮김 노래하는 백골(동서문화사, 2004)




도치 서술 추리소설을 처음으로 쓴 작가는 리처드 오스틴 프리먼(Richard Austin Freeman)이다.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프리먼의 원래 직업은 의사. 프리먼이 창조한 탐정 손다이크 박사(Dr. Thorndyke)’과학 수사 기법을 이용해 범인을 밝히는 법의학자의 원형이다.


붉은 엄지손가락 지문(The Red Thumb Mark, 1907)은 손다이크 박사가 처음으로 등장한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손다이크 박사는 지문을 채취하여 감별하는 수사 방식을 도입하는데,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과학 수사 기법이었다. 비공인 기록이지만, 붉은 엄지손가락 지문이 발표되기 2년 전에 프리먼은 손다이크 박사가 나오는 단편 <31, New Inn>를 썼다. 이 단편 소설을 장편으로 개작한 작품이 1912년에 발표된 <The Mystery of 31, New Inn>(31 여인숙의 수수께끼)[주1]이다.


단편집 노래하는 백골(The Singing Bone, 1912)에 실린 오스카 브러트스키 사건(The Case of Oscar Brodski)은 도치 서술 추리소설 형식과 손다이크 박사의 과학 수사 모두 볼 수 있는 작품이다. 프리먼의 새로운 시도는 좋았으나 그때 당시 독자들은 범인을 찾는 추리소설을 선호했다1910년대 영국 추리 문학의 대세는 프리먼과 같은 의사 출신의 작가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이 쓴 셜록 홈스(Sherlock Holmes)’ 시리즈였다.




















* 조지 오웰, 강문순 옮김 책 대 담배(민음사, 2020)

 

* [절판] 조지 오웰, 하윤숙 옮김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조지 오웰 평론집 (이론과실천, 2013)

 

* 조지 오웰, 박경서 옮김 코끼리를 쏘다(실천문학사, 2003)




문학에 조예가 깊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의외로 추리소설을 좋아했다. 그는 최고 수준(명작)은 아니지만, 그래도 묻히기 아까운 작품들을 소개한 글을 썼는데, 제목은 <good bad book>이다지금까지 우리말로 번역된 제목은 세 개다. 좋으면서 나쁜 책(코끼리를 쏘다》, 실천문학사)’, ‘좋은 대중소설(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책(책 대 담배)’


오웰은 이 글에서 문학적인 수준은 떨어져도 재미있어서 읽을 만한 작품으로 셜록 홈스 시리즈와 손다이크 박사 시리즈에 속한 프리먼의 소설 오시리스의 눈(The Eye of Osiris, 1911)노래하는 백골을 언급한다.













 








 













* G. K. 체스터턴, 홍희정 옮김 결백(북하우스, 2002, 브라운 신부 전집 1)

 

* G. K. 체스터턴, 봉명화 옮김 지혜(북하우스, 2002, 브라운 신부 전집 2)

 

* G. K. 체스터턴, 장유미 옮김 의심(북하우스, 2002, 브라운 신부 전집 3)

 

* G. K. 체스터턴, 김은정 옮김 비밀(북하우스, 2002, 브라운 신부 전집 4)

 

* G. K. 체스터턴, 이수현 옮김 스캔들(북하우스, 2002, 브라운 신부 전집 5)




‘good bad book’이라는 표현을 처음 쓴 사람은 영국의 추리소설 작가 G. K. 체스터턴(G. K. Chesterton)이다그의 대표작은 가톨릭 성직자가 탐정으로 나오는 브라운 신부(Father Brown)’ 시리즈손다이크 박사가 법의학 탐정이라면 브라운 신부는 범죄심리학 탐정이다. 그는 자신을 범인으로 가정한 뒤에 범인의 감정 및 심리 상태를 이해하려고 한다.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2025년 9월의 세계 문학]

* 조지 오웰, 이한중 옮김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2025, 개정 증보판)





문학적으로 뛰어난 작가들도 오웰의 펜 끝에 달린 비판의 날을 피하지 못한다. 오웰은 동료 작가들의 정치적 성향과 정치적 행보에 문제가 있으면 직설적으로 비판한다. <세속> 9월의 책인 오웰의 에세이 선집 나는 왜 쓰는가민족주의 비망록이라는 글이 실려 있다. 오웰은 이 글에서 자신만의 기준을 내세워 민족주의자들의 유형을 분류하고, 이들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오웰은 체스터턴을 상당히 재능 있는 작가로 치켜세운다. 그러나 현실 이해력과 도덕적 감각이 떨어질 정도로 민족주의적 충심이 너무 큰 게 문제라고 주장한다. 오웰이 꼬집은 체스터턴의 문제점가톨릭이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는 종교적 견해(정치적 가톨릭주의)무솔리니(Benito Mussolini)를 찬양할 정도로 국외의 파시스트적 정세에 무지한 태도.

















조지 오웰정철 · 홍지영 함께 옮김 《손 가는 대로: 조지 오웰 시사 에세이》 (빈서재, 2025)




오웰은 트리뷴(Tribune)이라는 일간지에 칼럼을 게재한 칼럼니스트였다. 칼럼 제목은 ‘As I please(나 좋을 대로, 손 가는 대로)’이다. 오웰은 신문 칼럼에서도 가톨릭의 우월성을 입증하려는 체스터턴을 비판했는데, 또 한편으로는 부자와 권력자를 용감하게 비판한 체스터턴을 두둔하는 입장을 내비쳤다.

















* G. K. 체스터턴, 안현주 옮김 못생긴 것들에 대한 옹호(북스피어, 2015)




체스터턴도 오웰처럼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작가였다. 종교뿐만 아니라 문학과 사회를 주제로 한 비평을 많이 썼다. 오웰과 체스터턴이 활동했던 20세기 초 영국에 우생학을 지지한 지식인과 작가들이 상당히 많았다. 체스터턴은 우생학을 비판한 지식인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에세이 선집 못생긴 것들에 대한 옹호에 수록된 범죄형 머리통』(A Criminal Head, 1910년)은 머리의 형태로 범죄자의 기질을 파악할 수 있다는 우생학을 비판한 글이다.


오웰은 반유대주의를 비판한 글도 여러 편 썼다반유대적인 견해를 드러낸 작가들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비판했다프리먼과 관련해서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은 ‘꺼림칙한 진실이 있다. 그의 추리소설에 반영된 반유대주의. 프리먼은 우생학도 지지했는데, 1921년에 <Social Decay and Regeneration>(사회와 피폐와 재건)이라는 우생학 저서[주2]를 썼다. 우리나라에 번역되지 않은 손다이크 박사 시리즈가 많은데이 중 몇몇 작품을 보면 작가의 반유대적인 성향을 확인할 수 있다프리먼의 반유대주의를 비판할 때 거론되는 작품이 <Pontifex, Son and Thorndyke>(1931)이다이 소설에 나오는 악당들은 유대인이다하지만 프리먼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반론도 있다프리먼의 후기 작품들은 유대인을 긍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과연 오웰은 프리먼의 반유대주의를 알고 있었을까? 오웰이라면 좋으면서도 나쁜 작가를 어떻게 평가했을지 궁금하다.





[1]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작품. 노래하는 백골작품 해설(364)에 언급된 제목을 참조했다.

 

[2] 번역되지 않은 책이라서(주제와 내용을 생각하면 절대로 나오면 안 되는 책이다‥…) 정식 제목이 없다노래하는 백골작품 해설(365)을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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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8-29 15: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의 미스터리 소설에 대한 놀라운 지식과 식견에 감탄을 금할 길이 없네요.앞으로 좋은 미스터리 작품을 자주 소개해 주시길 바랍니다.

cyrus 2025-09-08 06:40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과 향기님, 그리고 제가 아는 추리소설 마니아 몇몇 분들과 비교하면 저는 초급반입니다 ㅎㅎㅎ 안 읽은 추리소설들이 너무 많아요

꼬마요정 2025-08-29 16: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너무 좋은 정보들입니다. 고맙습니다.^^
흥미로운 소설들이 많네요. 정해연은 요즘 인기 많은 작가 중 한 명이죠 ㅎㅎ 에도가와 란포는 기담집 하나 읽었는데 재밌었어요. 명탐정 코난에서 코난이 에도가와 코난인데 에도가와 란포에서 따왔다길래 궁금했거든요. 소년탐정 김전일은 맨날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고라고 외치는데 그 할아버지가 긴다이치 코스케더라구요. 근데 저는 긴다이치 코스케는 그닥 재미가...ㅠㅠ

체스터턴의 브라운 시리즈는 책은 저는 별로 재미가 없더라구요. 근데 BBC에서 드라마로 방영한 건 재밌게 봤어요. 조지 오웰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군요. cyrus 님 글 보면서 많은 걸 배워갑니다. 도치 서술 추리소설이 예전부터 있던 방식이군요. 리처드 오스틴 프리먼의 손다이크 박사는 궁금해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좋으면서도 나쁜 작가... 오묘합니다.

(토요미스터리극장 하니까 왠지 괴담이나 기담 이야기 하셔야 할 것 같아요. 저 옛날에 저 프로그램 진짜 좋아했는데... 토요미스테리극장...)

cyrus 2025-09-08 06:45   좋아요 1 | URL
조지 오웰의 독서 편력이 생각보다 넓더라고요. 최근에 오웰의 에세이들을 다시 읽어보면서 느끼고 있어요.

안 그래도 여름이 완전히 지나가기 전에(이번 달이 여름의 끝자락이죠) 공포 문학 작품들을 읽고 리뷰를 쓰고 싶어요. 눈여겨 본 책들이 있는데 너무 많아서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있어요. ^^;;

stella.K 2025-08-29 20: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 체스터턴 작품은 좋은데 안 좋은 꼬리표가 있다고 하던데 바로 저거였구만.
그래도 정말 작품은 어떤지 궁금하다.
너는 몇개의 독서 클럽에 가입되어 있냐? 난 얼마 전부터 <그믐>에서 하는 독서토론에 들어가곤 하는데 요즘엔 좀 지치기도하더군. 그거 하니까 읽으려고 쌓아 논 책들을 더 못 읽겠어. ㅎㅎ
그래도 재미는 있어. ㅋㅋ

cyrus 2025-09-08 06:46   좋아요 1 | URL
이번 달에 독서 모임 날이 많아요. 이번 주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 연속 모임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