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에 마시는 위스키가 창의력을 높여준다는 이야기가 있다.
술을 마시면서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나는 이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

아침에 마시는 위스키의 효능에 대한 출처는 ‘뉴로크리에이티브 연구소(Neurocreative Institute)’라는 기관이 발표한 연구 논문이다. 뇌에 약간의 알코올이 들어가면 긴장이 풀려서 아이디어가 잘 떠오른다고 한다.
* 스켑틱 협회 편집부 엮음(마이클 셔머, 제임스 랜디 외 여러 명의 필자 참여), 김보은 · 류운 · 하인해 외 옮김 《나는 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 스켑틱 10주년 베스트 에세이》 (바다출판사, 2025년)
논문이 과학자들에게 알려지려면 학술지에 실려야 한다.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은 과학자들의 검토 대상이 된다. 뉴로크리에이티브 연구소가 발표한 위스키 관련 논문 제목과 이 논문의 게재를 허락한 학술지 제목이 있는지 구글에서 검색을 해봤는데,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연구소의 위치와 연구소 공식 홈페이지도 나오지 않는다. 나는 실험 과정이 상세하게 언급되지 않았거나 출처가 확실하지 않은 연구 결과를 믿지 않는다.
애주가는 아침에 술을 마실 때면 어디인지도 모르는 연구소가 주장한 연구 결과를 언급한다. “어디에서 본 건데‥…”, “누구에게 들은 이야긴데‥…” 견해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길게 설명하지 않고, 연구소와 과학자 이름을 같이 언급하면 상대방은 그 견해를 과학적으로 증명된 내용이라고 믿는다. 사람들은 지적 능력이 높다고 생각하는 권위 있는 과학자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과학에 취한 애주가는 회의주의자(skeptic)다. 낮술을 즐기면서도 아침에 마시는 술이 정말로 창의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지 의심한다. 잠정 가설로 받아들이고, 과학이라고 주장하는 견해에 애매모호한 점(실험 방식, 통계 자료나 견해를 뒷받침하는 증거에 대한 설명이 빈약할 때)이 있으면 의심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내 경험상 늦은 밤에 술을 마시면 글이 잘 써진다. 하지만 술이 나의 머리끄덩이를 잡을 때가 많다. 이럴 때 정말 피곤해진다. 직장 일에 지친 상태에서 술을 마시면 문장 한 줄을 쓰는 데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 글이 안 써지는 어둠의 시간은 술맛이 사라지는 지루한 안주다.
쉬는 날이나 주말에 마시는 술은 마음이 편해지고, 두뇌 회전 속도가 평일보다 빨라진다. 지난주 토요일 아침, <과학책방 갈다>에 가서 맥주를 마셨다. <갈다>는 커피, 차, 맥주를 판다. 음료를 주문하면 책방 2층에서 마실 수 있다. 나는 책 한 권을 안주 삼아 맥주를 주문한다.

<갈다>에 판매하는 맥주는 총 다섯 종류다. 올해 여름에 ‘반딧불’이라는 맥주가 새로 들어왔다. ‘반딧불’을 마시고 싶어서 지난주 토요일에 <갈다>에 갔다. <갈다>에서 고른 책 안주는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 ‘느린 과학’ 선언》이다.
* 이자벨 스탱게르스, 김연화 · 장화원 함께 옮김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 ‘느린 과학’ 선언: 상호의존의 관계를 다시 엮는 과학으로》 (에디토리얼, 2025년)
‘느린 과학’은 과학 문제에 올바른 해답을 최대한 빨리 찾는 것을 거부한다. ‘느린 과학’은 대중과 소통한다. ‘느린 과학’에 익숙한 대중은 과학자들이 발견한 연구 결과에 열광하는 마니아가 아니다. 그들은 신중하다. 우리 삶에 필요한 과학 지식이 무엇인지 논의하며 가꾸어야 할 가치가 있는 과학 지식인지 판단한다.
책방 바로 맞은편에 나무 한 그루가 있다. 2층에 넓은 창문이 있어서 나무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이파리는 다 떨어졌고, 나뭇가지 끝에 ‘겨울눈(winter bud)’이 붙어 있었다. 맥주를 마시면서 창밖의 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겨울눈을 알고 싶어졌다. 술에 살짝 취한 뇌에 호기심이 돋아났다. 겨울눈이 자란 나무의 이름을 알고 싶어졌고, 겨울눈이 왜 생기는지 궁금했다. 다음날인 일요일에 대구로 돌아와서 겨울눈을 언급한 책들을 찾으러 도서관에 갔다.
* 김태영 · 윤연순 · 이웅 함께 씀 《겨울나무: 우리 땅에 사는 나무들의 겨울나기》 (돌베개, 2022년)
* [개정판] 소경자 · 이광만 함께 씀 《겨울눈 도감: 4단계 분류법에 따라 겨울눈을 구별한다》 (나무와문화, 2020년)
겨울눈은 겨울에 난 싹이다. 이 싹은 비늘이나 털로 덮인 상태로, 추운 겨울바람을 버티면서 봄을 기다린다. 겨울눈의 크기는 작은 편인데, 이 속에 겨울을 지내기 위한 양분과 봄에 발아하는 데 필요한 영양분이 저장되어 있다.

책방에서 본 겨울눈은 타원형이고, 털로 덮여 있다. 두 권의 겨울눈 도감을 같이 보면서 내가 내린 잠정 결론은 백목련 혹은 목련과 식물의 겨울눈이다.
* 트리스탄 굴리, 이충 옮김 《나무를 읽는 법: 나무껍질과 나뭇잎이 알려주는 자연의 신호》 (바다출판사, 2024년)
탐험가 트리스탄 굴리(Tristan Gooley)는 식물을 관찰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래서 ‘자연의 셜록 홈스(Sherlock Holmes)’라는 별명이 있다. 그는 나무가 인간과 동물, 주변의 다른 식물에 알리는 수백 가지 자연 신호(natural sign)를 알면 ‘나무를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자연 신호는 너무나 많고, 여전히 우리가 알지 못한 것들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를 누구보다 잘 아는 굴리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나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없다면서 겸손하게 말한다. 나무 한 그루를 제대로 식별하는 방식을 배우려면 평생을 바쳐야 한다.

책을 참고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다. 책방에서 만난 나무가 백목련이라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봄에 변신하는 나무의 모습을 보면 백목련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과학에 (심)취하려면 성급하게 해답을 찾거나 결론을 도출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해답과 결론을 찾는 과정을 즐겨야 한다. 그리고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정직하면서도 차분한 여유도 있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과학은 결론을 쫓아가는 ‘빠른 과학’이 아니다. 호기심을 유지하면서 꾸준히 관찰하는 ‘느린 과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