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솝 우화
이솝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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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심 파괴, 이솝 우화

 

 

어떤 사람이 자기를 해코지했다는 이유로 여우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는 실컷 앙갚음하려고 여우를 붙잡아 기름에 담갔던 밧줄을 꼬리에 매달고 거기에 불을 붙인 다음 풀어놓았다. 그러나 어떤 신이 그 여우를 풀어놓은 사람의 밭으로 인도했다. 때는 마침 수확기라 그는 울면서 뒤쫓아갔건만 아무것도 거두지 못했다. (우화 58 사람과 여우79)

 

 

무슨 잔인한 이야기일까. 생소하게 여기겠지만 실은 이솝 우화 중 한 꼭지다. 혹자는 어린이들이 즐겨 보는 이솝 우화에 이런 잔인한 장면이 있었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수백 편의 이솝 우화에는 이보다 더 심한 장면이 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동심 파괴에 가깝다.

 

 

독수리와 여우는 친구가 되어 서로 가까운 곳에서 살기로 했다. 가까이 살면 우정도 두터워지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독수리는 높다란 나뭇가지 위로 날아올라가 그곳에 둥지를 쳤다. 여우는 나무 아래 있는 덤불 속으로 슬그머니 들어가 그곳에서 새끼를 낳았다. 하루는 여우가 먹을거리를 구하러 집을 비운 사이 역시 먹을거리가 떨어진 독수리가 덤불 위를 덮쳐 새끼 여우들을 채어가서는 제 새끼들과 함께 먹어치웠다. 집에 돌아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된 여우는 제 새끼들이 죽음보다도 복수할 수 없다는 것이 더 괴로웠다. (중략) 그 뒤 오래 지나지 않아 독수리는 우정을 모독한 죗값을 치르게 된다. 사람들이 시골에서 염소를 제물로 바치고 있을 때 독수리가 내기 덮쳐 제단 위에서 불타고 있는 내장을 채어갔는데, 독수리가 그것을 제 둥지로 날라갔을 때 강풍이 불어와 내장의 불이 둥지 안의 마른 지푸라기에 옮겨 붙었던 것이다. 불이 불자 새끼 독수리들이 (아직은 날 수 없었기 때문에) 땅에 떨어졌다. 그러자 여우가 달려가 독수리가 보는 앞에서 새끼 독수리들을 모조리 먹어치웠다. (우화 3 독수리와 여우21~22)

 

 

이 이야기와 함께 전해 내려오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우정을 모독한 자는 피해자가 허약할 때는 복수를 피할 수 있어도 하늘의 벌은 피하지 못한다.” 피로 시작해서 피로 끝내고 마는 복수의 연속성을 주제로 잔인하고 자극적인 내용으로 알려진 셰익스피어의 초기 비극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의 동물 우화 버전을 보는 듯하다. 죄의 대가는 결국 천벌에 의해서 받게 된다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어린이용 우화로 각색한다면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야기 전개의 근간이 되는 복수의 필연성에 초점을 맞춘다면 순수한 동심으로 가득한 어린이들에게 썩 권하고 싶지 않은 내용이 된다.

 

믿기지 않겠지만 앞에서 소개한 엽기적인 이야기들은 진짜 이솝 우화다. 우리가 어렸을 때 즐겨 읽던 그 내용과 전혀 다른 정본이다. 그리고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중에는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장면이 더러 있다. 어떤 이야기는 육식동물인 여우와 초식동물인 당나귀가 함께 사냥하기도 한다.

 

사실 수천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온 이솝 우화은 독일의 그림형제 동화집처럼 불행한(?) 운명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유는 단 하나, 내용이 잔혹했기 때문이었다. 그림형제 동화집은 독일에서 전해내려 오는 민담을 묶어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왔다. 초판을 펴냈을 때 독일 부모들은 너무 잔인하고 폭력적이다’ ‘아이에게 어떻게 읽힐 수 있나라는 반응을 보였다. 잔인한 폭력성뿐만 아니라 과도한 성적 표현도 들어 있었다.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그림형제의 작품은 대부분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 내용을 풀어내고 표현을 순화해 만든 동화. 이솝 우화도 마찬가지다. 약육강식의 논리로 인간 세상의 권력구조를 표현했다는 인식 때문에 기독교 윤리가 지배하던 시기 때 외면 받았다. 우리에게 친숙한 어린이용 우화로 살아남기 위해서 오랜 세월동안 윤리적인 교훈을 강조하는 착한 이야기로 탈바꿈한 것이다.

 

 

 

 베짱이는 쇠똥구리로, 산신령은 헤르메스로

 

정본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의 원형을 알 수 있다. 바꿔 말하자면 원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솝 이후 수많은 세월동안 후대의 수많은 이야기꾼들은 정본에 손을 댔다. 당연히 우리가 알고 있는 어린이용 이솝 우화를 비교하면 내용상 많은 차이가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이솝 우화 한 꼭지로 개미와 베짱이가 있다. 베짱이는 일하지 않고 놀다가 겨울이 되어서 굶게 되어 후회한다. 베짱이는 여름철에 짝을 찾기 위해 양 날개를 비벼 울음소리를 낸다. 어린이용 우화에서는 베짱이를 악기를 연주하는 음악가로 등장한다. 반면 제대로 먹이를 저장한 개미는 삶의 여유가 있다. 정본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베짱이 대신 매미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이야기에는 쇠똥구리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쇠똥구리 역시 개미 못지않게 부지런한 생활을 하는 곤충이다. 쇠똥을 동그랗게 뭉쳐서 집으로 운반해 저장한다. 그런 쇠똥구리는 왜 겨울이 되자 개미에게 구걸을 했던 것일까? 이유가 너무나도 허무하다. 겨울에 내리는 비 때문에 모아 놓은 쇠똥이 녹아버려서. 이솝 우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유형은 간단하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강자와 약자. 강자는 약자에게 냉정하다. 먹이를 비축한 개미는 한순간에 빈털터리가 된 쇠똥구리를 꾸짖고 있다. 쇠똥구리에게는 조금 억울하게 느낄 수 있는 이야기다.

 

이 우화 한 꼭지로 인해 개미는 일약 근면’, ‘부지런함의 대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일종의 비틀어 보기식으로 이솝 우화를 재해석하는 입장이 나오고 있다. 오늘날에는 우화 속 개미를 현대인으로 비유하면 일개미. 쉬지도 못한 채 그저 일만 하는 워커홀릭이다. 근면, 성실한 면모는 본받을 수 있겠지만 휴식 없는 노동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정본 우화에 등장하는 개미가 선량한 이미지로만 나오는 건 아니다. 어떤 이야기는 개미의 특성을 비꼬기도 한다.

 

 

지금의 개미는 옛날에는 사람이었다. 개미는 농사꾼이었는데 제 노력의 결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남의 소출에 눈독을 들이다가 이웃이 수확한 것을 훔쳤다. 제우스는 그의 욕심이 못마땅하여 그를 개미라 불리는 동물로 바꿔놓았다. 그는 몸이 바뀌었어도 마음씨는 바뀌지 않았다. 지금도 그는 들판을 돌아다니며 남의 밀과 보리를 모아 저를 위해 저장하니 말이다. (우화 240 개미264)

 

 

본성이 나쁜 자는 벌을 받아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는 성악설(性惡說)을 강조하고 있다. 순자는 외부의 가르침에 의한 수양을 통해 선한 본성으로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반면 이솝의 성악설은 다르다. 외부로부터 벌을 받아도 나쁜 본성은 고칠 수 없다는 것이다. 개미가 등장하는 우화들 중에서 진짜 개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개미는 다른 집단의 개미집을 침략하여 먹이를 약탈하는 습성이 있다.

 

한국 전래 동화와 비슷한 이야기도 있다. 바로 금도끼와 은도끼이야기다. 정직한 나무꾼은 금도끼를 얻고 욕심쟁이 나무꾼은 쇠도끼마저 잃게 되었다는 내용의 설화로 알려져 있다. 이솝 우화에서는 산신령이 아닌 전령(傳令)의 신 헤르메스가 등장한다. 그러나 정본으로 전해져 내린다고 해서 이 이야기가 이솝이 지었다거나 고대 그리스에서 맨 처음 유래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금도끼 은도끼이야기의 분포는 매우 광범하다. 유럽뿐만 아니라 중국, 베트남, 일본에서도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바다 건너 유럽으로 전달되어 이솝이 활동한 시대 이후에 이솝 우화의 한 꼭지로 편입될 가능성도 있다.

 

 

 

 현상의 양면성을 집약한 세상의 알레고리

 

모든 우화의 이야기 전개는 너무나도 단순하면서도 뻔하다. 권선징악형 결론도 많다. 상대방에게 해를 가한 자는 똑같이 그대로 벌을 받는다. 겉모습은 변하더라도 나쁘고 사악한 본성은 달라질 수 없다. 자신의 분수를 모르는 자는 스스로 화를 자초한다. 등장인물과 상황만 다를 뿐 주제와 이야기 구조가 비슷한 것들이 많다.

 

그렇다고 이솝 우화는 문학성이 떨어지며 일독할 가치가 없는 건 아니다. 이래봬도 성서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힌 작품이다. 300여 편의 이야기 속에는 우리 인간의 특성과 현상의 이치가 집약되어 있다. 선악, 강한 자와 약한 자,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삶과 죽음으로 구분되는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본성을 유지한 인물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이중적인 동물 혹은 인간도 등장한다. 그야말로 세상의 맨얼굴을 볼 수 있는 한 권의 알레고리다.

 

우화 3 독수리와 여우처럼 우정을 어긴 자는 복수에 의해서 무너지기도 하지만 적선을 하거나 은혜를 베푼 자는 상대방에게 보은을 받기도 한다. 홍수에 떠내려가는 개미에게 나뭇잎을 떨구어 구해준 비둘기가 훗날 포수의 총에 맞을 뻔했을 때 개미가 포수의 다리를 깨물어 비둘기를 구해 주는 훈훈한 결론도 있다 (우화 242 개미와 비둘기)

 

 

 

 

 

 

야콥 요르단스  『사튀로스와 농부들』1620년경

 

 

반인반수(伴人伴獸) 사튀로스는 이중적인 성격의 사람과의 우정을 경계하고 있다. (우화 60 사람과 사튀로스) 사튀로스가 어느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식사 때 농부는 뜨거운 수프에 대고 입김을 불었다. 사튀로스는 추울 때 손에 입김을 불던 사람의 모습이 생각나 의아해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사람은 수프를 식히기 위해, 손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그랬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사튀로스는 이도 저도 아닌 인간의 이중적 행동을 비난했다. 자연에 길들여지지 않은 호색한 사튀로스가 인간의 이중성을 지적하니 역설적이다.

 

언젠가는 우리 숨결을 스쳐 갈 죽음의 신 하데스의 손길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워한다. 죽음 앞에서 이중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너무나 쉽게 죽음을 당하고 마는 보잘 것 없는 목숨을 우리는 파리 목숨이라고 말한다. 파리는 인간보다 수명이 짧지만 인간도 마찬가지. 누군가는 갑작스레 찾아 온 죽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지만 잘못된 탐욕에 의해서 죽음을 스스로 재촉하는 사람은 뒤늦은 후회를 한다. 우리 인생 또한 보잘 거 없을 정도로 허무하며 죽음이 가까이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Vanitas, 바니타스) 우화 속 두 마리의 파리가 처한 운명을 보라. 과연 나는 죽음 앞에서 어떤 감정을 표출할까?

 

고기가 가득 든 냄비에 파리가 빠졌다. 파리는 국물에 빠져 죽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먹고 마시고 목욕까지 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구나!” (우화 238 파리262)

 

광에서 꿀이 쏟아지자 파리들이 날아와 먹기 시작했다. 먹어보니 하도 맛있어서 파리들은 먹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발이 꿀에 달라붙어 날아오를 수 없게 되자 파리들은 숨을 거두며 말했다. “우리야말로 가련하구나! 순간의 쾌락 때문에 죽어가고 있으니!” (우화 239 파리들263)

 

 

 

 교훈은 일시적이지만 우화의 클래스는 영원하다

 

어렸을 때 본 우화 속 개미는 착하고 부지런했다. 반면에 게으른 베짱이처럼 살기 싫었다. 여우는 꾀가 많았고 당나귀는 세상 물정 모를 정도로 무식했다. 그 때는 절대로 저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우화의 교훈을 뼛속 깊이 새겨 들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 우화 속 교훈은 한낱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아니 편법이 판을 치고 정이 사라진 지금 교훈처럼 그대로 도덕주의자로 살아간다는 건 현실적으로는 어렵다. 요즘 시대적 분위기가 맞지 않는 것도 있다.

 

그러나 우화는 읽어야 한다. 교훈의 가치는 퇴색되었지만 인생의 이치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교훈은 일시적이지만 우화가 지금까지 빛을 발하고 있는 클래스는 영원하다. 우화가 표현한 세상과 동물(혹은 사람)은 양면적이다. 고지식하게 세상을 한 쪽만 편협하게 본다면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우화를 받아들이는 인식도 마찬가지다. 교훈에 있는 문자 그대로 믿을 시기는 현실적으로 지났다. 어렸을 때 우화를 읽으면서 느꼈던 교화적 감정은 이제는 재현할 수 없다. 이솝 우화에는 그 착했던 이솝은 없다. 외부에 의해 정념에 쉽게 사로잡히고 상황에 따라 사악한 본성을 드러내고 마는 우리들의 모습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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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7-17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숍우화, 를 번역한 천병희 선생님은 의외여서 한참 들여다본 적 있던 책이에요. 숲출판사 이벤트도 있길래.하하. 두꺼울 것 같은데 cyrus님 읽기 속도는 못 따라갈 것 같아요 @.@ 그림형제랑 같이 꼭 한 번 제대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이제는 다 컸다고 생각해서 또 그 교훈이 맘에 안 들 것 같기도 하고, 여튼 이 책은 cyrus님으로 기억될 것 같아요.

뜨거운 여름 보내요!
 

 

 

 

 

 

 

 

여행가방

 

                                              정호승

 

 

너는 나를 끌고

인천국제공항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너는 나를 비행기에 싣고

시나이반도 위를 신나게 날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너는 나를 카이로공항에서 다시 만나

이리저리 끌고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피라미드 안 좁은 통로를 헤매고 다니거나

람세스 2세의 미라를 슬픈 눈으로 들여다보거나

사막에서 하룻밤 찬란한 별들을 바라보며 추위에 떨다가

질질 나를 끌고 다시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러나 나는 너와 함께 가지 않는다

거듭거듭 말하지만 평생 나는 너의 것이 아니다

나는 나 혼자 갈 뿐

너는 너 혼자 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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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3-07-12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행 잘 다녀오세요 사이러스님~~~~~ :)
(설마 도서관으로 여행을 가는 건 아니겠지?! ㅋㅋ)
 
시간의 향기 - 머무름의 기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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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rder better faster stronger

 

높은 인사고과와 승진을 위해 바쁘다, 바빠!’를 외치며 분주히 움직이는 직장인들, 좋은 성적과 각종 스팩, 외국어와 컴퓨터 능력을 습득하기 위해 혈안이 된 학생들, 가사와 양육뿐만 아니라 집안 인테리어, 가족들 건강 챙기기, 자녀 학교 및 학원 데려다 주기 등 하루가 빠듯한 주부들.

 

이들은 출세하고 성공하기 위해 나는 할 수 있다는 긍정과 자신감으로 무장하고 하루 24시간을 시, 분 단위로 쪼개서 나눠 쓰는 워커홀릭들로 현대인의 자화상의 일면이다. 워커홀릭은 원래 현대 산업사회에서 일중독자나 업무중독자를 가리키는 말로 여가시간을 즐기지 못하고 가정에 소홀한 직장인을 주로 지칭하나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직업과 계층과 연령과 성별에 상관없이 각자 맡은 바 기능과 역할에 충실하기 위하여 심리적·육체적으로 분주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경제적으로 효율적인 삶, 합리적으로 계획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규칙적이고 계획적인 삶이 건강과 성공을 보장해 줄 것이라는 믿음 아래 시간계획표를 작성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 과정에서 성취감을 맛보기도 하고 작심삼일로 실패하면 좌절감을 맛보기도 했다. 성공이든, 실패든 그것은 개인의 책임이며, 성공할 수 있다는 긍정, 희망고문을 통해 또다시 계획하고 활동한다.

 

나는 해낼 수 있다는 자기 긍정의 구호로 가득한 피로사회는 그 이름에서 느껴지는 노곤한 이미지와 달리 실제로는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의 외침 소리, 발걸음 소리, 옷깃 스치는 소리가 가득한 요란한 사회다. ‘활동적인 삶이 지배하는 사회다.

 

 

 

 ♣ 가속화된 시간은 '금'이 아니라 '병'이다

 

이런 사회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압도적인 느낌은 시간의 가속화. 허둥지둥하며 살다 문득 뒤돌아보니 해 놓은 것 없이 세월만 갔더라, 하는 게 시간의 가속화다. 슬로푸드, 느림의 미학 그리고 힐링. 이런 말들이 나오는 이유다.

 

이 모든 사회현상의 원인을 근대 이래 계속 강화돼온 활동적 삶을 절대화, 찬양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노동이나 활동적 삶의 절대화는 모든 시간을 일로 치환시키며 여가시간도 일을 준비하기 위한 보조적 의미로 인식시킨다. 인간다운 향기가 사라지는 시간이 되고 만다. 신자유주의와 성과주의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자본주의 속도 또한 빨라지고 있다.

 

저자는 <시간의 향기>보다 먼저 우리나라에 번역된 <피로사회>에서 현대사회를 성과사회라고 진단한다. 성과사회의 개인은 복종하고 순응하는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이다. ‘할 수 있다가 지배하는 사회다. 열심히 노력하면 성적도 올릴 수 있고 취업도, 승진도 할 수 있으며 아름다워질 수도 있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믿게 하는 세상이다.

 

'할 수 있다'라는 긍정성의 과잉상태는 끊임없이 노동하게 하고, 활동하게 한다. 투잡, 쓰리잡을 뛰는 직장인이 적지 않으며 생활에 큰 지장이 없어도 야근과 특근을 하여 더 많은 돈을 벌고, 주변인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한다. 얼짱과 몸짱 스타를 보며 나도 아름다워질 수 있으리라 긍정하며 열심히 몸 관리를 한다.


노동 및 활동의 과잉, 긍정성의 과잉을 특징으로 하는 성과사회로의 패러다임 전환은 생산을 최대화 하고자 하는 자본주의적 시스템의 열망이 있다. 능력의 긍정성은 금지나 당위의 부정성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보다 더 빠르고 생산적이다. 성과주체는 이미 규율의 기술을 습득하고 당위의 명령을 내면화하여 스스로 생산성의 수준을 극대화한다.

 

이렇게 비판도 없이 따라가다 보니까 시스템의 압력이 굉장히 강해서 피로하게 된다. 그런 시스템, 사회가 문제인데 지금 한국은 개인이 문제라며 치유하라, 힐링하라고 외치고 있다. 그러나 끝없는 자기와의 싸움을 강제하는 성과사회의 부정성은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우울증의 증상은 자신이 부족하다든가 열등하다는 느낌, 실패에 대한 불안, 끝없는 자책과 자학이 포함되어 있다.

 

결국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주인 스스로 노동하는 노예가 되는 사회, 자기 자신을 착취함으로써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지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우울증,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이 나타나며 이는 성과사회, 긍정의 과잉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시간의 향기>는 다음 문장으로 시작한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오늘의 시간은 리듬과 방향을 상실하고 원자화됨으로써 위기에 봉착해 있다. 오늘날 시간은 자연적 순환과 같은 리듬도 구원이나 종말, 진보라는 서사적 긴장감도 없다원자화된 시간은 현재의 시간을 날아가는 시간의 끝자락으로 겨우 인식하게 한다. 그저 끝없는 현재들의 사라짐뿐이다. 삶의 가속화는 삶의 양은 증가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충만한 삶으로 채워진 것과는 거리가 멀다.

 

 

 

 ♣ 잃어버린 시간의 향기를 찾아서  

 

천천히 가는 게 치유가 아니다. 시간의 위기는 가속도가 아니다. 병은 다른 데 있는 것이다. 천천히 하는 것보다 남에게 시간을 주는 게 해결책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시간을 창조해야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처럼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의 향기를 찾아야 한다. 마르셀이 부드럽게 적셔진 마들렌 조각을 한 숟갈의 차 속에 담아 입술에 가져갔을 때 온몸에 퍼진 행복한 감정을 느끼는 순간처럼 말이다.

 

우리는 끝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유속 한가운데 있다. 설상가상으로 깊은 주의를 할 수 없는 상황에도 처해 있다. 세상은 잠시도 IT기기를 벗어나서 생활 할 수 없는 지경이다.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지하철에서도, 가정에서도 자라목이 돼서 24시간 인스턴트 정크 푸드와도 같은 정크정보들에 온통 주의를 빼앗기고 있다. 더 많은 정보와 콘텐츠가 아니라 어쩌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멍한 무용지물의 시간이 생긴다.

 

새롭고 갑작스레 찾아온 문명의 사회구조로 인해 경제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면서 인간의 지각은 파편화되고 분산된다. 저자는 이것을 정보화 사회인간이 이룩한 문명의 진보라기 보다는 퇴화라고 여긴다. 수렵자유구역의 동물들이 생존을 위해 먹이를 구하고 새끼를 보호하고 짝짓기 중에도 경계를 하는, 다양한 다중업무에 주의를 분배하느라 깊은 사색을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하는데 지금은 다양한 과업, 정보소스와 그 처리과정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산만한 시대를 살게 되었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하며 기존의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뿐이다.

 

'여행은 일상처럼, 일상은 여행처럼하라'는 말이 있다. 일상생활을 여행하는 것처럼 하는 사람이 있다. 프랑스 작가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는 1780년 42일 동안 가택연금으로 자기 방을 여행하 <내방 여행>이란 책을 출간했다. ‘내 방 순례 같은 자발적 유배시간은 조용하지만 강한 혁명 같은 시간’이라고 말한다.

 

인간적인 향기를 머금고 사색이 가득한 시간은 사라진 게 아니라 잊혀진 시간이다. 우리 삶 고유의 시간인 것이다. 새로운 삶의 창조를 위해서는 정신적 이완이 가능한 사색적 삶의 원천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일상을 여행처럼 사색하는 자발적 시간으로 우리 삶 가까이 다가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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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직 오지 않은 새벽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의 암울한 생활 속에서도 희망과 웃음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며 활동하는 노동 형제들에게 조촐한 술 한 상으로 바칩니다. 1984년 타오르는 5월에 박노해."

 

이와 같은 짤막한 서문이 수록된 시집 <노동의 새벽>이 1980년대 중반 무렵 발간되면서, 박노해라는 이름은 당대의 문학계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출현은 우리 문학사에 비로소 '노동자에 의한 노동 현실을 노래한 시'가 등장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고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 많은 시인들의 작품에서 민중들의 노동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여전히 '지식인의 눈으로 바라본 노동의 형상'이었을 따름이다. 하지만 노동자였던 박노해는 작품에서 몸소 체험했던 노동의 현실을 너무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인간은 매일매일 노동을 하며 살아간다. 따라서 노동은 삶의 의미를 실현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어떤가. 전태일이 살던 시절의 노동은 비인간적 삶 그 자체였다. 전태일이 자신의 몸을 불사른 지 10년이 지난 1980년대 초반, 박노해 시인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노동의 새벽

 

                                        박노해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

 

(중략)

  

늘어 처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 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이 시가 발표된 이후로 세월은 흘렀다. 시인이 노래한 노동현실 역시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가 절규하던 ‘새벽’은 아직 오지 않았다. 밤 깊은 어둠은 여전하다.

 

객관적 지표만이 노동자의 현실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다시 박노해 시를 하나 더 인용하면 “고층 사우나빌딩 앞엔 자가용이 즐비하고 (중략) 선진조국의 종로거리를 / 나는 ET가 되어 / 얼나간 미친 놈처럼 헤매이다 / 일당 4800원짜리 노동자로 돌아와 / 연장노동 도장을 찍”(‘손무덤’)어야 하는 게 바로 노동자의 삶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인간답게 살 권리를 갖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경제적 생활 조건은 그 기본 중 기본이며,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받아야 하는 것은 또 다른 기본이다.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할 때 수치감을 갖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승인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다.

 

 

 

 ♣ 여전히 어둡기만한 노동의 미래

 

 

 

 

 

 

 

 

 

 

 

 

 

 

 

 

전태일이 분신한지 40년이 지난 현재 노동 문제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핵심 이슈다. 그동안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만큼 노동 문제에도 새로운 이슈들이 등장해 왔다. 비정규직 노동자와 청년실업 문제는 그 중핵을 이룬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봐도 비정규직 문제는 대단히 심각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국의 비정규직 비율은 대체로 30%인데 반해 우리나라처럼 50%를 넘어서는 국가는 매우 드물다.

 

문제는 이렇게 대규모임에도 임금 수준이 턱없이 낮다는 점이다. 과연 전태일 시대로부터 우리 사회는 얼마나 더 발전해 온 것일까.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이야말로 바로 선진화의 현주소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점증하는 세계화 시대에 비정규직 노동자의 미래는 우울하기 이를 데 없다. 비정규직 문제는 국가적 이슈라는 점에서 노사관계를 넘어 정부와 기업, 시민사회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대안을 모색해야 함에도 그 어떤 주체도 이를 적극적으로 이슈화하지 않고 있다. 세계화가 강제하는 불가피한 결과로만 인식하는 한 비정규직 문제는 결코 해법을 마련하기 어렵다.

 

 

 

 

 

 

 

 

 

 

 

 

 

 



청년실업은 노동이 처한 또 하나의 우울한 미래다. 그동안 정부가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는 하지만 이런 프로그램들은 썩 신통치 않은 결과를 보여줬다. 생각한 만큼 괜찮은 일자리를 늘리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임시직 고용으로는 젊은 세대가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저임금 5210원

 

중소기업 근로자, 아르바이트생 시급(時給)의 기준이 되는 최저임금이 내년 시간당 5210원으로 결정됐다. 1988년 최저임금이 처음 도입되고 27년 만에 처음으로 5000원을 넘어섰다. 올해보다 350원, 비율로 따지면 7.2% 인상됐다.

 

내년도 시간당 최저임금을 월 단위로 환산하면 주 40시간, 월 209시간 기준 108만8890원이다. 올해 101만5740원보다 7만3150원 올랐다. 혜택은 주로 저임금 근로자에게 돌아간다. 최저임금을 심의ㆍ의결한 최저임금위원회는 전체 근로자 1773만4000명 중 14.5%에 달하는 256만5000명이 혜택을 보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최저임금이 결정되기까지 노사 간 협상은 쉽지 않았다. 당초 재계는 동결을 요구한 반면 노동계는 이보다 훨씬 높은 5910원을 주장했다. 노사는 각각 50원을 올리고, 120원을 낮춘 수정안을 제시했지만 법정 논의 시한인 지난달 27일까지도 합의를 이뤄내지 못했다. 결국 공익위원의 중재안 표결로 내년도 최저임금을 결정했다. 5년째 반복되는 모습이다.

어렵게 인상됐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저임금 근로자의 고용 불안을 야기한다는 시선도 적지 않다. 일각에서는 영세 사업자의 부담을 늘려 아르바이트 자리가 줄고 결국 일자리 총량이 감소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저임금 근로자의 생활 개선을 위해 인상된 최저임금이 되려 이들의 발목을 잡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은 최저임금 인상 결정이 어려운 경영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조치라고 비판했다. 그만큼 최저임금 문제는 노사 양쪽에 미치는 영향을 주기 때문에 타협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임금의 최저 수준을 법으로 강제하는 것은 소득의 양극화를 줄인다는 취지에서 결정한 것이다. 최저임금은 저임금근로자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최저임금은 평균임금의 33%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하위권이다. 중국도 빈부 격차를 줄이기 위해 2015년까지 최저임금을 평균임금의 40%로 높이기로 했다. 우리나라의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 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8월 기준 비정규직 임금은 정규직의 53.3%로 1년 새 4.3% 포인트가 떨어졌다. 지난 대선에서도 최저임금은 화두였다. 국민 대부분이 2017~2018년 기준 최저임금은 평균임금의 50% 수준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있다. 최저임금 인상에 정계, 기업 그리고 국민들은 좀 더 관심과 성의를 보일 때다.
 

‘노동의 새벽’을 지나 ‘인간의 새벽’이 오는 그 날은 언제 찾아올까? 희망 없는 노동자들의 불안은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자살로 이어지곤 한다. 지금처럼 ‘새벽’이 절실한 적은 없었다. 힘들어도 살아갈 수 있는 희망, 깊은 밤 어둠 속에서도 노동자들을 일으켜 세우는 ‘새벽’ 같은 희망이 찾아오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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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3-07-09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면 참 웃긴 것 같아요.
1년에 한번씩 경영자와 노동자 대표가 만나 최저임금을 정하는 것 말이예요.
늘 칼자루는 경영자에게 쥐어져 있고,
언제나 현실은 돈과 힘을 가진 자의 뜻대로 굴러가게 마련이죠.

그래도 5,000원대가 되었다는 사실에 조금이라도 만족해야 할까요?

조금 다른 얘기이지만 비정규직도 문제이고, 최저 임금도 문제이인데,
그 틀에만 묶여 있는 것도 저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비정규직과 적은 임금을 개선하려는 노력과 별개로
그 상황에 맞는 현실적인 대안도 필요하고,
아예 자본이 만들어 놓은 틀을 벗어나는 상상력과 실천도 필요하죠.

좀 더 재미있고 흥미로운 방식의 저항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cyrus 2013-07-09 16:18   좋아요 0 | URL
은빛님 댓글을 읽으면서 제가 노동 문제와 현실에 대해서 많이 무지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요.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매년 최저임금이 결정되는 소식이 나오면 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못한 게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은빛님 말씀처럼 진부한 관점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는 입장 때문에 여전히 만족할만한 해결책이 나오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안의 우주 - 인간 삶의 깊은 곳에 관여하는 물리학의 모든 것
닐 투록 지음, 이강환 옮김 / 시공사 / 2013년 5월
평점 :
품절


 

과학자에게 과학은 무엇인가? 과학연구와 사회적 활동을 같이해 나갈 수는 없을까? 그것은 과학자에게 독일까, 보약일까? 과학자에게 사회활동은 터부시된다. 아인슈타인 같은 위대한 과학자도 인권·평화 운동에 뛰어든 순간, ‘순수한 과학자’라는 정체성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좁고 깊은’ 전문가의 길을 걷는 과학자에게 사회란 불순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과학자 닐 투록은 과학과 사회의 분리를 반대한다. 아니, 분노할 것이다. 투록은 자신의 위대한 ‘물리학’ 영웅 리처드 파인만마저도 책임 회피에 직면한 모습에 안타까워한다.

 

 

“존 폰 노이만(헝가리계 미국인 수학자)이 나에게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주었다. 당신은 당신이 속해 있는 세계에 대해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폰 노이만의 충고를 따라 강력한 사회적 무책임의 감각을 발달시켰다. 그러자 나는 아주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나의 ‘적극적인’ 무책임이 자라나도록 씨앗을 뿌린 사람은 폰 노이만이었다!" (리처드 파인만 <파인만씨, 농담도 잘 하시네>에서 재인용, 22쪽)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인 투록은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던 아버지를 보며 자랐다. 이를 통해, 예비 물리학자로서 부모님으로부터 얻은 한 가지 생각, 즉 ‘훌륭한 생각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가슴속 깊이 새기게 되었다.

 

그는 현재 페리미터 이론물리 연구소의 소장으로 있으며, 프린스턴대학 물리학 교수와 케임브리지대학 수리물리학과 학과장을 역임했다. 우주론의 기본적인 이론들을 개발했을 뿐만 아니라 관측을 통해 이론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스티븐 호킹과 함께 인플레이션 우주의 탄생을 설명하는 ‘호킹-투록 인스탠탄 솔루션’을 개발한 바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우리가 상상해온 우주, 상상조차 못했던 우주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다. 뉴턴, 패러데이, 플랑크, 디랙, 아인슈타인, 파인만 등으로 이어지는 고전물리학부터 현대물리학까지 물리학 역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들을 바라보고, 물리학의 발전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어왔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저자 자신의 물리학 연구 이야기를 함께 하면서 마치 에세이를 읽는 것처럼 우주에 대해 친절히 설명하고 있다. 또한 예술, 문학, 영화 등 인간 문화 전반과 연관 지어 설명을 함으로써 이 책을 단순히 과학 서적이 아닌 역사와 철학, 문학과 예술이 포함된 종합 교양서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우리 사회는 과학적 성과를 사용하는 데에 만족해왔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하는 연구의 이유를 찾기보다는 연구 결과만 내는 것에 행복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과학자들은 성과에 대한 행복감에 도취되어 있을 때 실험실 밖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다. 파인만도 참여했던 맨하탄 프로젝트의 산물인 원자폭탄이 대표적인 사례다. 핵물리학의 성과가 살상무기로 개발되어 무수한 인류의 목숨을 앗아가는 도구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제는 투록의 작업처럼 우리의 과학과 인간성을 서로 연결할 때가 왔다. 결국 과학도 사람이 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과학기술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다. 정부의 주요 정책에도 과학이 연관돼 있는 경우가 많다. 기후변화, 신재생에너지, 원자력발전소 사고 등이 대표적이다. 일반 국민은 과학에 대해 과거보다는 많이 알고 있으나 세부적이고 전문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스스로 판단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만큼 과학은 눈부신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과학자들이 사회적 이슈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사회의 방향을 잡아주는 일이 절실하다.

 

저자는 물리학이 인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과학에서 큰 발전이 있을 때마다 사회에도 크나큰 변혁이 있었다. 그 변혁의 중심엔 당연히 사회 곳곳에 서있는 과학자들이 있다. 보다 더 대중에게 자신의 연구가 갖는 의미를 설명하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할 수 있는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과학자들과 그 들의 연구를 이해하는 대중이 많아진다면, 더 나은 우리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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