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지상주의에 집착하는 사회

 

 

 

 

 

 

 

최근 외모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면서 많은 사람이 피부나 몸매 관리에 정성을 쏟고 성형수술도 쉽게 한다. 우리나라 젊은 여성의 75% 이상이 자신의 외모에 불만이라고 답했다. 외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수록 만족도는 떨어진다. 아름답고 멋지게 보이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망에는 남녀노소가 없다.

 

맑고 하얀 피부, 즉 피부미인이라면 아름다움의 70%는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무자극 천연소재 화장품을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최근에는 외국에서 수입한 유기농화장품을 사용하는 등 곱고 맑은 피부 가꾸기에 여념이 없다.

 

남성도 이제 외모에 신경을 쓰는 것이 여성 못지않다. 주름과 여드름과 기미가 있는 피부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불성실한 자기 관리의 표본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남성이 자신의 외모에 투자하는 것은 이미 특별한 현상은 아니다. 그렇다 보니 화장품 회사도 각양각색의 남성화장품을 출시하고 있다. 얼굴이 하얘진다는 화이트 스킨로션이 있는가 하면 색조화장품까지 있다. 얼굴에서 남성미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꽃미남 열풍과도 관련이 깊다. 과거 남성은 근육질을 남성미로 생각했다. 최근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양해짐에 따라서 다양한 남성성이 출현을 하고 있다. 요즘은 멋진 근육에 남성스러운 이미지의 ‘짐승남’ 열풍이 있긴 하지만, 꽃미남(또는 얼짱)과 같은 고운 남성에 대한 선망은 지금도 여전하다.

 

 

 

 

 

 

 

 

 

 

 

 

 

 

 

 

얼굴 생김새로 사람을 판단하는 외모지상주의 즉, 루키즘(Lookism)이란 것이 있다. 외모가 개인 간의 우열과 성패를 가름한다고 믿어 외모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주의를 일컫는다.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윌리엄 새파이어(William Safire)가 인종·성별·종교·이념 등에 이어 새롭게 등장시킨 외모지상주의는 차별 요소로 지목되면서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제 외모가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자리를 잡아가자 외모가 곧 처세, 사교, 결혼과 같은 사생활은 물론, 취업·승진 등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요인으로 작용돼 일상생활에서도 외모를 가꾸는 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도록 되어 있다.

 

 

 

 ♣ 하얀 피부에 대한 인류의 열망

 

과거에는 얼굴을 하얗게 만들기 위해 수은이나 납 성분이 포함된 화장품을 장기적으로 피부에 도포해 중독되는 일이 흔했다. 지금은 이 정도는 아니지만 무허가로 시판되는 화장품의 상당수가 이러한 성분들을 가지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17~18세기 유럽의 귀족층에선 창백한 얼굴이 인기였다. 핏기 없는 얼굴의 결핵 환자가 ‘낭만의 징표’로 여겨졌을 정도다. 2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햇볕에 그을리지 않은 하얀 피부로 ‘상류층’과 ‘평민’이 구분됐다. 대부분의 평민은 돈을 벌기 위해 야외에서 육체노동을 해야 했고, 얼굴이 까맣게 탈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상류층 사람들의 창백한 얼굴은 태양아래서 해야 하는 일은 모두 다른 사람에게 시키고 자신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타고난 피부의 색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사람들은 대개 하얀 피부를 타고난 이를 부러워한다. 피부가 하얗고 깨끗하면 좀 더 밝고 환한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러나 타고난 피부색은 멜라닌의 종류가 다르고 양이 많고 적음 때문이지, 미(美)의 절대적인 기준은 될 수 없다. 특히 피부색에 따른 인종의 구분은 생물학적 차이일 뿐, 그것이 사회적인 차별의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하얀 피부에 대한 동경은 백인이 우월하다는 잘못된 통념에도 일부 책임이 있다.

 

 

 

 작품 #1  반(反) 자화상 1 : 하얀 마스크 팩과 함께 있는 미끌미끌한 자화상

 

 

 

 

(왼쪽) 살바도르 달리 『구운 베이컨 조각과 함께 있는 부드러운 자화상』 (1941년 작)

(오른쪽) 『하얀 마스크 팩과 함께 있는 미끌미끌한 자화상』 (그림 대체 사진 이미지 차용)

 

 

 

 

 

자화상은 흔히 자아의식의 발로라는 지표 아래 화가 자신이 인식하는 자아라는 차원에서 개성이나 내면의 성격의 입증과 함께 서양 예술의 흐름에서 흥미 있는 장르로서 계속 그려져 왔다. 그림의 수법을 연구함과 동시에, 화면에 자기 자신의 내심(內心)을 표현함으로써 반성하고 고독을 달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달리는 자신의 영혼을 반영코자한 반면, 표현에 있어서는 실제의 구체적 형상으로 겉모양만 표현한 ‘반(反) (심리학적) 자화상’을 그리고 싶어 했다. 긴 상자 위에는 잘 구워진 베이컨을 올려놓고 지팡이로 세워져 부드럽게 늘어진 모습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내가 생각한 자화상 역시 ‘반(反) 자화상’에 가깝다. 내 얼굴에는 하얀 마스크 팩을 씌운다. 피부의 잡티를 제거하고, 하얀 피부를 위한 미용을 위해서 하루에 한 장씩 마스크 팩을 사용한다. 마스크 팩을 한 나의 얼굴은 잡티가 없고, 깨끗하고 하얀 피부를 가진 ‘피부 미남’이 되기 위한 외모의 열망을 상징한다. 화장품 광고에 등장하는, 포토샵으로 하얀 피부색으로 처리된 미남 연예인의 얼굴처럼 되고 싶어한다. 멋진 '가면'이 되기 위해 하얀 가면인 마스크 팩이 필요하다.

 

하지만 마스크 팩을 한 얼굴을 표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내면에 있는 자아를 표현하는 일반적인 자화상 형식과는 다르다. 마스크 팩은 외모에 집착하는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열망하는 겉으로 드러나는 ‘하얀 피부’로 대체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하얀 피부를 선호하는(외모지상주의에 사로잡힌) 외부의 시선을 의미할 수도 있고, 이 그림을 보고 있는(하얀 피부를 선호하고 피부미용에 집착하는) 관객의 얼굴이 될 수도 있다. 즉, ‘하얀 피부에 대한 열망’을 상징하는 마스크 팩은 광의적으로 해석하면 외모지상주의자가 지향하는 미(美)의 외적 기준인 것이다.

 

 

 

 작품 #2  반(反) 자화상 2 : 하얀 가면

 

 

 

 

피부가 좋고, 하얗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상이 좋을지 몰라도 인품과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는 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겉모습으로만 사람의 인품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면이 아닌 겉으로만 드러나는 하얀 피부를 선호하는 잘못된 외모지상주의를 비꼬기 위해서 오브제(objet) 형식으로 ‘하얀 가면’이라는 제목으로 작품을 구상했다.

 

 

 

 ♣ 작품 #3  반 자화상 3 : 가면의 최후

 

 

 

(왼쪽)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세부 (1536~1541년 작) 

(오른쪽) 『가면의 최후』

 

 

 

 

 

 

 

 

 

 

 

 

 

 

미켈란젤로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보다는 내적인 영혼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온전히 사람의 얼굴을 모방하는 것과 다름없는 초상화나 자화상을 경멸했다. 그래서 육체에 담겨진 외적 아름다움은 껍질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듯한 자신의 자화상을 『최후의 심판』의 한부분에 그려 넣는다. 사실 그것은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명인 성 바르톨로메오가 손에 들고 있는, 순교할 때 벗겨진 자신의 살가죽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이 있다. 열흘 동안 붉은 빛깔을 띠는 꽃은 없다. 한번 성한 것은 언젠가 쇠락하고 만다. 아름다운 미모 또한 그렇다. 아름다움은 모진 세월의 풍파 속에 무너지고 망가지게 되어 있다. 그러한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기 위해 외모만 가꾸는 데 치중한다면 시간 낭비이며 집착의 형태이기도 하다. 특히, 삶이 완전히 소진되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육신은 썩게 되고 아름다움은 ‘추(醜)함’이 된다.

 

‘반 자화상’ 연작 세 번째인 『가면의 최후』의 오브제는 이미 얼굴 마사지로 사용한 마스크 팩이다. 사용하기 전 마스크 팩에는 촉촉하고 미끌미끌한 수분 성분이 묻어 있다. 그러나 마사지로 얼굴에 붙이는 순간, 팩에 머금은 수분 성분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5~10분 정도 지나면 수분 성분은 피부로 흡수되고, 마스크 팩은 촉촉한 수분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건조된다. 하얀 피부를 만들기 위해 우리 얼굴에 희생되는 마스크 팩의 일생은 너무나도 짧다. 길지 않은 하얀 가면의 최후는 아름다움의 유한성을, 축 늘어진 마스크 팩의 형상은 일시적인 아름다움이 죽음으로 인해 ‘추’(醜)로 변화되는 인생무상(Vanitas)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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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없는 에세이 -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성주 옮김 / 함께읽는책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 금성에서 온 진보주의자, 화성에서 온 보수주의자

 

혹시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공자의 사상을 현실과 동떨어진 케케묵은 보수 이념일 뿐이요, 어느 박물관 한 귀퉁이의 골동품처럼 여길지도 모른다.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 시절 중국의 개혁을 부르짖던 집권세력은 공자의 사상이 봉건주의와 자본주의의 상징이라며 그를 대대적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죽의 장막 속에서 ‘악의 뿌리’인 양 뽑히고 땅바닥에 패대기쳐졌던 공자는 오늘날 다시 살아나 중화인민의 추앙을 받고 있는 반면 요란했던 문화대혁명은 오히려 ‘반동의 역사’요 ‘잃어버린 세월’로 비판받고 있으니 얼마나 역설적인가. 공자가 부활한 것은 중국사회가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시장경제를 추구하면서 겪는 가치관의 혼란과 사회적 갈등을 치유할 필요가 절실해졌기 때문이다.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등 조화를 바탕으로 사회통합의 윤리를 강조해온 공자사상의 의미가 재평가된 것이다.

 

성인 반열의 공자 같은 인물과 사상에 대해서도 시대와 정치상황에 따라 그 평가가 극과 극으로 바뀌는 판이니, 현실 정치인에 대해서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권좌를 떠난 지 오래인 이승만 또는 박정희에 대한 평가도 크게 엇갈린다. 주된 이유는 바로 앞서와 같은 이념적 잣대 때문이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노선이란 서로 다른 잣대와 색안경을 갖는 것이어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기 마련이다.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밥그릇이 걸린 문제라는 생각 때문에 더욱 치열해지지만 근본적으로는 이념의 차이 때문이다. 이념이 다르니 인간과 사회를 보는 시각, 정책과 시스템도 달라진다. 미국의 진보주의자 조지 레이코프는 『도덕, 정치를 말하다』에서 보수주의는 엄부자모(嚴父慈母)의 가정, 진보주의는 자부자모(慈父慈母)의 가정에서 연원하는데 양측의 모든 차이는 여기서 발생한다고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보수는 자기관리·도덕·권위·자율·질서·동질성·자기이익을 중시한다. 이익추구는 자제력을 이용하여 자립을 이루려는 방식이다. 반면 진보는 다른 사람을 위한 감정이입(측은지심)·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 것·사회적 연계·양육·공정함·행복을 중시한다.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서는 우선 내 자신이 행복해져야 하고, 사회적 연결을 발전시켜야 한다.

 

 

 

 ♣ 교조주의가 정치와 무슨 상관인가?

 

어느 사회나 진보와 보수가 있게 마련이고 그들의 조화로운 공존이 역사를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국의 현실은 이미 그 도를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암울하게 만든다. 이런 시대를 더욱 암울하게 만드는 것은 진보냐 보수냐를 편 가르는 정치권의 이념의 양극화다. 이러한 이념의 양극화는 정치적인 경쟁과 논쟁의 수준을 넘어 우리 사회의 균열과 갈등을 조장하고 있으며, 국가 정체성의 근간마저 흔들고 있다.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두고 진보, 보수의 경합을 벌이는 현 상황도 역사적 진전이라 할 수 있지만, 그 대결이 이념양극화 수준에 이르렀다면, 더 이상의 ‘진전’이 아니라 ‘정체’이며, 편집증에서 벗어나자고 분열증을 앓는 격이다.

 

이념 갈등에 의한 분열 증세의 가장 큰 특징은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진보는 보수를 수구 부패 독재세력, 보수는 진보를 친북 무능 교조주의적 분열세력으로 낙인찍고 이런 판단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보수가 이룩한 국가발전 및 경제성장, 국가경영능력은 안중에도 없고 진보의 독재 타도 및 민주화, 권위주의불식 등도 무시된다. 서로를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한다. 이런 행태는 정치인들 스스로를 비도덕적으로 보이게 하고 깊은 논리적 대화나 토론을 희석시킨다.

 

한국 정치인들은 정치에 있어 소통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실제는 등한시하고 있다. 교조주의적 이념의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소통 부재의 정치를 하고 있어 산적한 국정 현안이 여야 간의 대화와 타협 없이 표류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버트런드 러셀은 『인기 없는 에세이』에 수록된 ‘이 모든 게 정치와 무슨 상관인가?’라는 글에서 교조주의와 정치의 불편한 관계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1947년에 쓰인 글답지 않게 교조주의에 대한 러셀의 경고는 교조주의의 위험성을 망각한 채 대립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유효하다.

 

거듭 말하는 바이지만 교조주의 체제에는 두 가지 단점이 있다. 하나는 거짓 믿음과 중요한 현실 문제를 결부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문제의 광신주의를 공유하지 않는 이들에게 극심한 적의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게 정치와 무슨 상관인가?」59~60쪽)

 

러셀이 보는 ‘교조주의자’는 광신자다. 이념적 광신자들의 위세는 실용성과 역사 보존 및 전 세대에 대한 존경을 앞지른다. 순수에 관한 광신자 본인들의 견해만 중요할 뿐이다. 이들은 자신의 신념이 먹혀들어가지 않거나 무시되면 화를 내고 상대를 부질없이 적대시한다.

 

 

 

 ♣ 건전한 자유주의자는 경험을 통해 스스로 개선한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인간의 ‘인정받고 싶은 욕망(튜모스; Thumos)’을 역사의 원동력이라 했다. 헤겔의 말대로 그 같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은 정치나 종교와 같이 사람들의 신념체계가 첨예하게 부딪치는 곳에서 돋보이게 드러난다. 꼭 자신의 주장이 인정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의견으로 상대를 강박하고 남의 말은 경청하지 않으며 인정받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정치나 종교와 같이 사람들의 신념체계가 첨예하게 부딪치는 곳에서 돋보이게 드러난다. 꼭 자신의 주장이 인정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의견으로 상대를 강박하고 남의 말은 경청하지 않으며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 싸움박질로 좋은 얼굴끼리의 대화마저 급기야는 엉망진창이 되고 만다.

 

헤겔은 어떤 명제인 테제(These)가 나왔을 때 그것에 반하는 안티테제(Anti-these)가 나와 서로 대립하며 그 같은 대립이 지양되었을 때 신테제(Synthese)’에 이른다고 했다. 역사가 변증법적인 과정을 부단히 되풀이 하면서 발전한다고 하는 견해는 확실히 그럴 듯하다. 그렇지만 헤겔이 말하는 정-반-합의 역사 변천과정은 결코 순조로운 것이 아니다. 한 고비 한 고비를 넘을 때 사람들은 피를 흘리고 사회질서가 뒤집히는 혼란과 고통이 수반되는 잔인한 과정이다. 이념 대립과 갈등은 정파들에 의해 정권 쟁취를 위한 탐욕의 방편으로 이용될 때 폭발 임계점을 넘어서기 쉽다.

 

러셀은 그러한 교조주의의 함정에 벗어나 인류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철학을 존 로크의 ‘경험적 자유주의’라고 말한다. 경험론이 진지하게 추구되고 완결되는 것은 성찰과 자기 개선을 통해서였다. 건강한 자유주의자는 자기 의견을 독단적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광신자, 교조주의자의 특징이다. 자기 의견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새로운 증거가 나오면 언제든지 철회할 수 있어야 한다.

 

 

 

 ♣ 초보 사회인을 위한 철학

 

확실성을 추구해온 근대적 합리성은 불확실성의 증폭에 직면하고 있다. 인간이 발견한 진리는 언제나 부분적이고 가설적인 것에 지나지 않음에 유념하는 탈근대적 지성이 요구되고 있다. 창의적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성향 가운데 하나로 ‘판단유보 능력’이라는 것이 지목된다.

 

러셀은 1950년에 집필한「초보자를 위한 철학」이라는 글에서 이미 ‘판단유보 능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런 능력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학문이 바로 철학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의 이분법을 거부하고 모호한 영역을 끌어안을 수 있는 판단력, 객관적으로 검증된 결과라 할지라도 의문 부호를 붙이면서 숨겨진 또 다른 가능성을 탐색하는 지적 호기심이 있어야 한다. 열린 감각, 열린 사고, 열린 경험이 있어야만 올바른 습관이 길러진다. 이것이 현실의 경험에 기초해 올바른 습관과 삶의 신념을 열심히 다지는 지성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나의 의견이 틀렸다고 해서 불안에 떨거나 나와 상반되는 입장에 격노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의견이 자명한 진리라는 확실성만 믿은 채 상대방을 열 받게 하고 신념이 지나치면, 대화 불능 상태인 문제 많은 초보 사회인에 불과하다. 러셀의 표현을 빌려서 좀 더 심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지적 쓰레기'다. 어떤 진리라고 주장되는 것도 영원히 옳을 수 없고, 그것에 반대되는 진리가 언제든 나올 수 있으니, 오히려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 더 바람직한 삶의 태도가 아닐까? 자신이 발견한 진리가 한 줌 밖에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관찰하고 실험하며 경험에 기초한 신념을 쌓아가는 것이 더 낫고 양자에게는 이롭다.

 

사람마다 이념적 성향이 다를 수 있고, 또 다양한 가치관이 공존하면서 합리적인 지향점을 찾아가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민주국가에서는 나와 다른 도덕관도 인정하고 남과 나의 잘잘못을 함께 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거기다 내가 지면 내 밥그릇이 깨지는 것으로 알기에 더 싸운다. 자신들의 교육이념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몹쓸 사람인 양 매도하고 흑백논리로 재단하는 것은 과연 옳은 태도일까. 한국사회도, 정치인들도 이제는 편향된 이념노선과 독선적 교조주의의 낡은 외투를 벗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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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저받 2013-11-18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철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알고 싶은 사람인데 리뷰 보니 이 책 재밌어보이네요. 현 사회의 나쁜 점을 개선하려는 진보나 현 사회의 좋은 점을 지켜가려는 보수, 두 이념 모두 중요하고 가치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개인의 권력이나 욕심을 채우는 데 이념을 사용하면서 사회적인 대의를 지키는 것처럼 합리화시키는 게 문제라고 생각함.. 철학이나 사회학 공부하시는 분들은 참 말빨이 좋으신 것 같아요^^ 잘봤습니다 무튼 위시도서리스트에 올려놔야겠어요!
 

 

 

 

 

 

 

 

 

 

 

 

 

 

 

 

 

 

 

셰익스피어의 작품 『베니스의 상인』에서 대금업자 샤일록은 안토니오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항해 중인 안토니오의 상선 대신 그의 가슴살 1파운드를 담보로 잡는다. 해적이 들끓던 16세기, 무역선이 못 돌아오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뱃사람들이 위험을 감수한 동인(動因)은 ‘원금의 수백 배에 이르는 고수익’이었다. 투자가들은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 여럿이 돈을 모아 자본금을 마련하곤 했다. 이것이 주식회사의 시작이다.

 

 

 

 

 

이익 앞에서 투자가들은 초인적 용기를 보여 준다. 이를 조지프 슘페터는 ‘기업가 정신’이라 했고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야성적 충동’이라고 불렀다. 야성적 충동은 케인스가 경기변동의 원인을 설명하면서 만들어 낸 말이다. 케인스는 “투자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기업가의 직감에 의존해 결정되며 투자의 이 같은 불안정성 때문에 경기가 변동한다”고 설명했다. 불확실성을 감수하는 기업가의 직감이 바로 야성적 충동이다.

 

 

 

 

 

기업가의 야성적 충동이 잘 발휘되면 좋겠지만 그렇다고해서 불확실한 상황 속에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무작정 투자를 감행한다는 건 쉽지 않다. 오히려 무모한 투자는 외환위기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2001년 레몬 이론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던 조지 애커로프 교수와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게 되는 로버트 쉴러 예일대 경제학 교수는 공동 출간한 『야성적 충동』에서 금융위기로 파탄 난 세계 경제를 비유하는데 ‘험프티 덤프티’를 사용했다.

 

 

 

 

 

루이스 캐럴의 소설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달걀이다. 영국 자장가에 나오는 원래 고집불통에 유식한 체를 잘하는 캐릭터로 소설에 등장하는 험프티 덤프티는 높은 담장 위에 위태로운 자세로 앉아 있다가 떨어져 깨져 버리는 인물이다. 험프티 덤프티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담장 위에 앉아 있지만, 권위 의식과 자만심에 빠져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야성적 충동』의 저자들은 현재의 금융 위기도 지나친 자신감 때문이었다며 금융 시장의 달걀은 이미 깨져버렸다고 진단했다. 이들은 "애초에 험프티 덤프티가 세계의 작동 방식에 대해 정확한 시각을 가졌더라면 담장에서 떨어지지 않았을 것처럼 사람들이 경제의 진정한 작동 방식을 깨달았더라면 자산을 구매할 때 좀 더 신중했을 것이며 결국 경제는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케인즈가 맨 처음에 ‘야성적 충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는 경제적 상황 또한 무관하지 않다. 1930년대 대공황도 ‘야성적 충동’에 의해 설명이 가능하다. 시장의 낙관론에 도취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과열 상태로 돌진한 시장은 결국 거품이 꺼지면서 자신감을 상실하고 극도의 침체를 경험했다. 지나친 오만과 자신감과 같은 야성적 충동은 또 한 번 경제를 큰 위기로 빠뜨릴 수 있는 것이다.

 

야성적 충동으로 인해 이미 깨진 ‘경제’라는 달걀을 원상 복귀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새로운 달걀로 교체해야 한다. 어떻게 교체해야 하는가? 조지 애커로프와 로버트 쉴러는 최선의 방법은 정부의 개입이라 결론짓는다. 그리고 그 개입은 언제나 야성적 충동이라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을 최우선의 요인으로 파악한 후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누군가 나서서 적절히 관리할 수밖에 없다. 현재로선 정부밖에 없는 것 같다. 앞으로 다가올 시장 경제의 미래를 위해서 인식의 교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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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3-10-17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글 잘 익고 갑니다.그나저나 경제이야기에 베니스의 상인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을 함께 쓰시다니 내공이 대단하심니당^^

cyrus 2013-10-17 21:29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잘 지내시죠? 오랜만입니다. '험프티 덤프티' 이야기는 로버트 쉴러의 <야성적 충동>에 인용되어 있어요. 그냥 잘 아는 이야기가 있길래 다시 한 번 기억해볼 겸 글로 정리해봤습니다.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 책의 탄생

 

인간은 동물의 일원이지만 고도의 지능과 욕구를 가진 까닭에 다른 동물 세계와 비교해 수준 높은 사회와 문화를 이루며 이를 무대로 삶을 살아간다. 무엇을 얻을지, 무슨 일을 하기를 바라는 인간 욕구가 지적 활동을 이끌어 낸다. 이 결과로 얻은 지식·정보가 수단과 방법으로 작용한 때문이다. 인간 사회가 지식을 얻으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 사회는 시작과 더불어 욕구 실현은 물론 고도화된 사회와 문화를 이루는 수단이자 방법인 지식을 얻으려고 애써 왔다.

 

인간 사회는 무엇 때문에 책을 만들려고 노력했을까. 먼저 책을 보면 단순하게 종이를 여러 장 묶어 맨 물건이다. 하지만 책에 어떤 내용을 담고 어떤 작용을 하는지 알면 종이 여러 장이 묶인 물건이라고 쉽게 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책은 인간과 주변 사물에 대해 배우거나 실천을 통해 알게 된 명확한 인식이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담겨 있다. 또 관찰과 측정을 통해 수집한 자료를 실제 문제에 도움이 되도록 정리한 지식이 정보라는 이름으로 담겨 있다. 지식과 정보는 인간의 욕구를 이루는 수단과 방법으로 사회와 문화를 이루고 발전시켰다. 책을 읽고 독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제대로’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문명사회에서 책 읽기를 권장하는 것은 아주 일반적인 일이다. 지식에의 목마름 때문이든지, 교양을 향한 딜레당트적 취향 때문이든지, 내면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함이든지, 우리를 책으로 이끈 동기가 무엇이든지 상관없이 책을 향해 뻗는 손길은 아름답다고 상찬된다. 목적을 따지지 않은 독서를 숭고하게 여기는 것은 책이 지식과 진실의 보고(寶庫)라고 여기는 무의식적인 인증 때문이다. 문명사회에서 책을 읽지 않는 일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며, 타인들과의 대화에서 어떤 책들을 읽지 않았다는 고백은 마치 고해성사에 견줄 만한 무의식적 죄책감을 수반한다. 문명사회에서는 책을 읽지 않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고 모욕을 준다. 그러니 사람들이 불이익과 모욕을 피하려고 읽지 않은 책들에 대해 마치 읽은 것처럼 거짓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이 뜻밖에 많다. 아무리 책을 좋아하고 일생을 책 읽기에 바친다 해도 우리가 읽은 책보다 읽지 않은 책이 많다. 우리 사회에서 독서는 신성한 것이고, 어떤 책을 읽지 않거나 대충 읽는 것은 눈 밖에 나는 일이다. 그렇게 읽었다고 말하는 것도 눈총받기에 십상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저자나 작품은 자칫 잘못 엮이면 빈곤하고 천박한 당신의 ‘수준’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에 짐짓 얼마나 선호하는지 숨기기도 한다. 독서에 대한 강박관념은 우리 대부분이 가지고 있다. 어떤 책은 반드시 읽어야 하고 그 내용을 잘 알아야 한다는 인식 말이다.

 

 

 

 ♣ ‘모든 것’을 무기로 만드는 비평가

 

사사키 아타루의 지적대로라면 오늘날 우리에게 책은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지식의 창고가 아니다. 오히려 습득한 정보를 남들에게 과시용으로 비평하기 위한 총구가 있는 ‘무기’가 되었다. 상대방보다 더 많은 정보(혹은 지식)를 보유하고 있다면 그 ‘모든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을 가진다. 그러면 누구나 ‘비평가’가 될 수 있다. 특정 분야에 정통하고, 일가견이 있는 지식인 대접을 받게 된다.

 

 

 

 

카라바조  「나르키소스」 1594~1596년

 

지식이나 정보라는 게 이토록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쇠약하게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중략)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자아를 지향하며 '모든 것'의 환상 아래 살포되어 있는 정보를 악착스럽게 긁어 모으는 것. 그것이 뭐가 될 것인지,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21~22쪽)

 

 

사사키 아타루는 ‘비평가’란 ‘모든 것’에 대해 다 알고 있고, 내가 알고 있는 그 ‘모든 것’을 완전하게 말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한다. 자크 라캉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비평가는 자신을 ‘똑똑한 만능인(지식인)’이 되는 ‘향락’에 빠지게 된다. 연못에 비친 자신의 완벽한 외모에 스스로 반해버린 나르키소스처럼 말이다. 결국, 똑똑한 나르시시즘에 빠진 비평가에게 책은 자신의 우월성을 보여주려는 무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일 뿐이다. 이러한 비평가는 잘못된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마냥 우쭐대거나 악의에 찬 지적질을 할 것이다. ‘지식의 우월함’을 앞세워 자신보다 부족한 상대방의 기를 억눌리게 하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복종하게 한다.

 

우리 사회는 ‘자칭’ 비평가들이 넘쳐 난다. 우리 주변에 있을 뿐만 아니라 온라인 공간에서는 ‘익명’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 또는 강화하기 위한 소아적 분파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비평적 판단력이나 감식안에 문제가 있다는 것, 텍스트나 현실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만을 앞세운 발언을 일삼는 등 여러 문제점에서 벗어날 수 없다.

 

 

 

 ♣ 읽고, 고쳐 읽고, 쓰며

 

우리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이상 읽은 책을 완벽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사사키 아타루도 독자들에게 고백한다. ‘저는 거의 아무것도 모릅니다. 곧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라는 가차 없는 제목을 단 사사키 아타루의 생각은 책이 얼마나 무서운 물건이었는지를 제목만큼 호기롭게 들려준다.

 

책은 비평가들을 위한 무시무시한 지식의 무기로 돌변하기도 하지만, 책을 읽는 수준을 비교하거나 측정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무기를 많이 보유하는 나라가 강대국으로 인정받는 것처럼,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지식인으로 느껴진다. 최근에 우리 대학생들의 독서량이 다시 도마 위에 오른 바 있다. 통계조사 결과, 우리 대학생들이 한 해 평균 도서관에서 대출하는 도서가 아홉 권 남짓 된다는 것인데, 이 요령부득의 지표를 놓고 네티즌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다른 통계에서는 하버드대 학생들이 사는 책들이 이른바 고전이라고 할 만한 책들이지만, 서울대 학생들조차 베스트셀러 위주의 시간 죽이기에 가까운 성질의 독서를 하고 있음이 밝혀진 적도 있다. 이런 사실을 들어 사람들은 학생들이 좋은 책을 더 많이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곤 한다. 그렇지만 실제로 대학에서 바라보는 책의 미래는 암울하다. 대학생들이 거의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무조건 하버드대 학생들이 사는 책을 읽는다고 해서 대한민국 대학생들이 그들과 같이 지적 수준이 동등해질까? 무조건 읽기만 하면 다 된다는 일방적인 독서 인식이 문제다. 책을 제대로 읽는 사람도 없는데도 말이다. 그런 사회가 진정으로 대학생들에게 책 읽기를 권장하는가도 의문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읽는 것과 쓰는 것 자체가 혁명이라고 말한다. 읽고, 고쳐 읽고, 쓰는 것이 목숨을 거는 일이었음을 잊지 말라는 주문이다. 우리가 모두 읽는 일에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겠지만, 이 책은 ‘책은 읽어서 뭐하나’라는 냉소에 맞설 수 있게 해준다.

 

결국,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수동적인 독자로 머물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텍스트를 외우거나 그 내용을 전부 알아야 한다는 속박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독서를 피하는가. 책을 읽으며 생각을 반추하고 성찰의 깊이를 더해가지 않는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 그 사회는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통찰력이 없는 ‘비평가’ 좀비들의 서식지로 전락한다. 오로지 책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는 환상이 결과적으로 얼마나 괴물답고 심지어 폭력적인가를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물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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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 사랑한 기억을 떠올리고 싶어"

 

 

 

영원한 행복이 없듯

영원한 불행도 없는 거야.

언젠가 이별이 찾아오고,

또 언젠가 만남이 찾아오느니

인간은 죽을 때,

사랑받은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과

사랑한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는 거야.

 

 

 

난 사랑한 기억을 떠올리고 싶어.

 

 

 

일본 작가 쓰지 히토나리가 쓴 연애 소설 『안녕, 언젠가』한 대목이다. 만약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산다면 과연 나는 ‘사랑받기’와 ‘사랑하기’ 중 어느 쪽의 인생을 마주하게 될까.

 

 

 

 

 

 

얼마 전 SNS에서 잔잔한 감동을 주는 사진을 보게 됐다. ‘노부부의 동심’이라는 제목이 달린 여러 장의 사진이다. 사진 속, 머리가 하얗게 센 노부부는 놀이터에서 그네와 회전 뱅뱅이 등 놀이기구를 함께 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노부부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지만 사진 속 상황만으로도 이들의 즐거운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노부부는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 그 때 서로 사랑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노부부만의 행복한 시간을 몰래 촬영하는 건 좋지 않지만, 이 장면을 우연히 발견한 익명의 촬영자는 멀리서 지켜보는 내내 흐뭇했을 거다. 이런 아름다운 장면의 사진이라면 여러 사람이 보면 좋다. 노년의 사랑을 조명한 뉴욕타임스 기사에서 한 심리학자는 말한다. “젊어서의 사랑은 자신의 행복을 원하는 것이고, 황혼의 사랑은 다른 누군가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것”이라고. 그 차이는 ‘사랑받기’와 ‘사랑하기’의 거리이기도 하다.

 

 

 

 

 ♣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황혼’에는 자연의 황혼과 인생의 황혼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1. 해가 지고 어스름해질 때, 2. 사람의 생애나 나라의 운명 따위가 한창인 고비를 지나 쇠퇴하여 종말에 이른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한다.

 

 

 

 

이육사의 「황혼」이라는 시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내 골방의 커튼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오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그가 노래하는 것은 인생의 황혼이다. 비록 한창 고비를 지났지만 아직도 정성된 마음으로 맞아들일 대상이 남아있다. 황혼이 곧 종말이라는 부정적인 관념, 특히 외로움으로 대표되는 골방의 커튼을 걷고 인생을 다시 보아야 한다. 모든 사물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고 삶이라는 본질은 달라진 것이 없다.

 

딱히 몇 살부터를 황혼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인생은 60부터’라는 말과 상관이 있어 보인다. 황혼기에 기죽지 말고 열심히 살라고 격려하는 뜻에서 생겨난 말일 것 같다. 이 황혼기가 머지않아 거의 30년 기간이 될 것인데 “이처럼 긴 시간들을 어떻게 아름답고 의욕적으로 보낼 것인가?”는 중요하고 의미 있는 질문이다.

 

 

 

 

 

 

 

 

 

정두영 목사 작곡의 성가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는 성경의 고린도전서 13장에 곡을 붙인 것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그리고 전 생애를 통하여 추구해야 할 것은 서로에 대한 믿음, 내일을 향한 소망, 그리고 서로를 아끼고 베풀며 따뜻하게 보듬는 사랑이다.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며 특히 황혼기에 가장 절실한 것이 바로 이러한 사랑이다.

 

 

 

 

 ♣ 사랑하면서 함께 늙어가기

 

 

 

청춘의 사랑이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이라면 황혼의 사랑은 화롯불같이 불씨를 품고 안으로 타오르는 열정이다. 후반부에서의 사랑은 그저 만화나 소설에서 꾸며 낸 이야기라고 치부하는 이라면 앙드레 고르가 쓴 『D에게 보낸 편지』가 시각 교정에 도움이 된다. ‘당신은 이제 막 여든두 살이 되었습니다.…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는 9월에 불치병으로 고통 받아 온 아내와 동반자살로 삶을 마감해 전 세계를 울렸다. 죽을 때조차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쇼’를 했다는 냉소적인 시각도 있겠지만, 어차피 인생이란, 삶이라는 무대에서 어떤 식으로든 연출할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감동의 드라마 아닌가. 83세의 앙드레 고르는 자다가 깨어나 82세의 아내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당신의 숨소리를 살피고, 손으로 당신을 쓰다듬어 봅니다.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저무는 세밑의 끝자락, 다들 아쉽고 뜻대로 안 된 일도 많을 터다. 그래도 곰곰 생각해 보면 숨이 남아 있는 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바로 타인을 사랑하는 능력이 아닐까 싶다. 영혼이 굳어지지 않고 사랑하며 늙어 간다면 나이 먹는 것도 그다지 불평할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 꼭 늙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젊은 연인들은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유치환 「행복」)는 시 구절을 한번 떠올려 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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