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 17명의 대표 인문학자가 꾸려낸 새로운 삶의 프레임
백성호 지음, 권혁재 사진 / 판미동 / 201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Scene #1  우리는 인문학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인문학 열기가 생각보다 오래 간다. 주위에서도 종종 인문학 강좌가 열리는 걸 볼 수 있고 서점가에서도 인문학 관련 서적들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고 있다. 동네 어귀의 작은 서점이든 번화가의 대형 서림이든, 인문학 서가의 표정은 한결같다. 흥미로운 것은 인문학의 위기도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위기란 산업혁명 이후 숨 가쁘게 달려온 물질문명의 폐해에 대한 인문학의 역할 부재를 비판하는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오늘날 인류사회가 당면한 병리현상과 맥을 같이한다. 놀랍게도 현대 인문학의 위기를 가장 쉽고 상징적으로 표현한 글은 제프 딕슨이라는 사업가가 쓴 칼럼이다. 칼럼 제목은 ‘우리 시대의 역설’이다.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고 소비는 많아졌지만 기쁨은 더 줄어들었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더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더 모자란다.” 칼럼 구절처럼 우리는 생활비 버는 법은 배웠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렸다. 그동안 외면 받아온 인문학의 핵심가치, 즉 인간성과 생명사랑 정신의 회복을 통렬하게 깨우쳐 준다.

 

우리는 인문학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인문이라는 말은 중학생 시절 실업계, 혹은 인문계 고등학교를 선택할 때나 쓰는 말이었다. 인문학에 관한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지조차 도통 기억에 없다. 돈 안 되는 인문학 대신, 돈과 맞바꿀 수 있는 다른 학업에 열정을 불태웠기 때문이다.

 

인문학 강좌를 제공하는 단체가 인문학 학습자들을 연령별로 분석했는데 4050세대가 가장 많이 나왔다고 한다. 40대 이상의 높은 연령층이 인문학을 배우는 목적으로 교양과 힐링에 대한 니즈가 가장 컸다. 인문학 열기가 사그라지지 않은 이유에 몸과 마음의 치유를 강조한 ‘힐링’ 대세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우리가 진정으로 치유 받을 수 있는 방법에 인문학을 주목하고 있다.

 

20세기 중반까지 인간을 괴롭혔던 질병들은 의술의 발달로 두렵지 않은 병이 됐다. 절대 빈곤에서도 자유로워졌다. 그럼에도 현대인은 아프다. 결핍감, 상실감, 소외감은 예전보다 더 커졌고, 막연한 우울과 분노 무기력에 시달린다. 가난했던 시절보다 행복이 더 멀어졌다고도 한다. 이 같은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데 인문학을 활용한다.

 

인문학은 더 이상 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학자들만이 알 수 있는 학술용어와 이론을 걷어내어 남녀노소, 학력, 계층에 상관없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지적 자산이다. 그동안 인문학이 찬밥 신세가 되어 위기론이 불러온 이유가 학술용어로 지나치게 전달을 어렵게 하며 고립을 자초했던 학자들의 위기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요즘 인문학의 가치를 전달하는 학자들이 강연가, 저술가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대중이 인문학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도록 효율적으로 표현하는 소통을 지향한다. 

 

하지만 그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현상의 이면을 살펴봐야 한다. 마음의 병을 치료하길 원하는 ‘수요’가 많아질수록, 인문학 강연과 대중을 위한 인문학 서적으로 ‘공급’이 된다. 행복의 갈증에 시달리는 현대인은 지나치게 인문학 치료제에 의존한다. 아무리 좋은 약도 남용하면 해로운 결과가 나타나고, 꼼꼼히 따져보지 않으면 오용될 우려가 있다. ‘행복’과 ‘힐링’이라는 이름으로 인문학의 중요성이 강조될수록 그 본질이 너무 가벼워진 감이 있다. 대중의 입맛에 맞춘 저렴한 인문학이 등장한다. 인문학을 전문적으로 전공하지 않은 사람도 TV 방송에 출연하고, 책 몇 권 써내면 인문학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수박이 되기 위해서 줄이 그어진 호박처럼 무늬만 인문학을 내세우는 사람과 책이 많다.

 

 


 Scene #2  행복한 인간도 상처받기 마련이다 

 

요즘 인문학 서적 출판의 흐름을 보면, 공동 저자로 내는 것이 많아졌다. 여러 음악가의 노래를 모은 컴필레이션 앨범처럼 인문학을 주제로 지식인들의 목소리를 책으로 한데 묶은 것이다. 이런 책들은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이나 전문가들이 바라보는 인문학의 의미를 소개하고, 행복을 위한 인문학의 활용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는 유교 연구가, 건축가, 천문학자, 심리학자, 기생충학자, 시인 등 17인의 명사들의 인터뷰를 모은 책이다. 작년부터 중앙일보가 기획한 동명제목의 연재물을 단행본으로 펴낸 것이다. 이들은 각자 행복의 의미를 말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형조 교수는 인간의 모든 상처와 불행은 자기중심으로부터 비롯되며,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할 때 비로소 행복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일단 그는 우리 사회에서 강조하는 힐링을 반대한다. 그가 연구하는 유교와 동양철학은 인생의 고통을 위로하는 힐링의 학문이 아닌 직접 고통과 대면하는 능동적인 학문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괴로워하는 원인을 타인에게 탓하지 않고, 나를 본다. 즉, 고통스러운 증상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 찾는 것이다. 이제 자신의 상황을 인식했다면 스스로 극복하면 된다. 이것이 곧 자기혁신이며 절망적인 상황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맷집’이 생긴다.

 

 

 

 

 

세계 과학철학계의 석학 장하석 교수는 ‘쓰레기통’이 되라고 주문한다. 장 교수가 생각하는 불행의 원인은 폐쇄성이다. 세상의 모든 질문을 포용하고,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수용하는 개방성을 강조한다. 개방적인 쓰레기통은 단순히 학문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자신이 정말 좋아서 하는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어느 한쪽에 갇히지 않는 ‘열림’의 자세도 필요하다. 이런 ‘열림’의 중요성은 건축가 김개천은 ‘살아 있는 집’이라고 비유한다. 이것은 결국 다른 것을 품을 수 있고, 항상 자신을 상황에 맞게 새롭게 변화시키는 능동적인 삶이다.

 

국립생태원장 최재천 교수는 ‘아름다운 방황’을 강조한다. 새가 화려한 나방에 독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일단 먹는 것처럼 생존을 위한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병 증상을 외면하고 타인의 위로에만 의지하는 현대인의 불행한 모습은 마음 속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자신만의 치료법을 찾지 못한 채 ‘위로’ 성분이 과다하게 들어간 ‘힐링’ 치료제를 찾기만 한다.

 

미학자 진중권은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구절을 읽으면서 마음의 병을 치유했다고 한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실수하게 마련이다.” 그는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상처받기 쉬운 존재라고 말한다. 우리가 그토록 궁금하고 알고 싶었던 행복의 근원에 대한 물음의 답이 나왔다. 그가 인용한 <파우스트>의 구절을 빗대어 표현하자면, “행복한 인간도 한 상처받기 마련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빈곤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면서도 행복하지 않다고 말한다. 전 세계의 행복지수를 집계한 순위에서도 우리나라는 거의 하위에 머무르는 수준이다. 해마다 자살율도 늘어난다.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잘 먹고 잘 사는데도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기이한 마음의 병은 단순히 유행하는 감기 정도가 아니다. 죽을 때까지 우리를 괴롭히는 만성질환이다. 

 

 


 Scene #3  마음의 상처 부위에 붙인 ‘힐링’ 반창고를 떼어내라 

 

여기 전문가들은 말한다. 마음의 병을 완전히 치료해주는 만병통치약은 없음은 물론이며 행복하기 위한 삶의 정답은 없다고. 오히려 행복이라는 단어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행복하게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행복을 단순히 좋은 일만 가득한 감정 상태라고 생각한다. 이렇다보니 때때로 우리를 괴롭히고 아프게 만드는 슬픔과 절망을 무시하고 두려워한다. 그리고 ‘행복 찾기’라는 공허한 질문에 몰두하고, 그 대답을 ‘힐링’ 치료제를 파는 전문가에게 찾으려고 한다. 즉, 정답 없는 질문에 얽매이는 것이다.

 

사실 행복을 정의내리는 17인의 목소리도 마음의 병으로 고생하는 독자들을 낫게 만드는 치료제가 될 수 없다. 그들은 ‘아름다운 방황’, 내적 상처를 스스로 마주하고 긍정하는 ‘맷집’을 기르는 덕분에 갑작스럽게 재발하는 마음의 병을 슬기롭게 대처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찾고 싶으면, 인문학에게 묻지 마라. 먼저 ‘나’ 자신에게 물어보라. 나는 왜 행복 하고 싶은 것일까? 내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딱지가 생긴 마음의 상처 부위에 오랫동안 붙여 있는 ‘힐링’ 반창고를 떼어내라. 조금 아플지라도 마음의 상처가 어떤 상태인지 스스로 봐야 한다. 그리고 이제 마음의 상처 부위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행복했던 경험을 기억해보라. 어쩌면 당신이 찾으려는 행복은 저 멀리 인문학에 찾을 필요도 없이 당신 가까이에 있을지도 모른다. 인문학자로 대표되는 17인의 이야기는 올바른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이지 행복한 삶을 알려주는 지도가 아니다.

 

인문학 공부는 현재의 삶에 대해 의심을 하고 ‘진정한 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일반 여가 문화나 자기 계발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물론 인문학을 통해 보다 효율적인 인간관계를 만들기도 하고, 자신의 주장에 설득력을 얻으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진정한 인문학은 말 그대로 ‘인간다움’에 대한 질문과 해답의 공부다. 인문학을 통해 얻는 것은 스펙이 아니라 꾸미지 않은 자신의 민낯이다. 민낯을 보면서 그동안 애지중지해 온 인식과 잣대들이 많은 잣대 중 하나였음을 알게 되고, 자신의 민낯이 사실은 그동안 찾아왔던 가장 아름다운 얼굴임을 알게 된다.

 

세상의 칭찬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고 자본의 탐욕스러운 질주 안에서도 천천히 호흡하고 여유 있게 걷는 내공은 공부에서 나온다. 우리는 그런 공부를 인문학이라 부른다. 그래서 인문학은 단기완성으로 할 수 있는 공부가 아니다. 평생에 걸쳐 자기 스스로 찾아가는 공부이자,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행복을 맛보는 흥겨운 놀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종석의 문장 한국어 글쓰기 강좌 1
고종석 지음 / 알마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Scene #1  가끔 노력도 우리를 배신할 때가 있다

 

“타고난 재능이라는 게 있을까?” 요즘 이런 질문을 하면 대다수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최근에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한 ‘1만 시간의 법칙’을 부정하는 연구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1만 시간’은 진정한 전문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매직 넘버이다. 대략 하루 세 시간, 일주일에 스무 시간씩 10년간 연습한 것과 같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1만 시간의 법칙은 2009년에 말콤 글래드웰이 쓴 『아웃라이어』라는 책에서 소개되어 널리 알려졌다. 김연아 선수, 비틀스, 빌 게이츠 등 세계적인 유명 인사들의 진정한 성공 요인도 재능보다는 수많은 시간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스포츠 기자 데이비드 엡스타인이 ‘1만 시간의 법칙’을 뒤집는 내용을 주장했다. 선천적 재능에 손을 들어줬다.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노 호날두가 세기를 열광하게 만드는 축구 천재이자 라이벌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꾸준한 노력보다는 특출한 ‘스포츠 유전자’(Sports Gene)를 가졌기 때문이다. 1만 시간 훈련을 해도 제2의 메시, 호날두가 나오는 것이 쉽지 않다. 비단 스포츠뿐만 아니라 교육 분야에서도 노력과 실력의 상관관계를 부정하는 실험 결과가 나왔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스포츠, 예술 분야보다 공부 분야에서 재능이 더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1만 시간, 아니 그 정도 시간을 공부하는데 투자를 하면 성적이 향상될 거라는 기대는 한낱 희망에 불과했던 것인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노력이 가끔 배신하는 슬픈 진리는 틀리지 않다. 십년 전에 EBS에서 밥 로스의 ‘그림을 그립시다’라는 방송 프로그램을 챙겨본 적이 있었다. 밥 아저씨라고 소개된 로스는 시종일관 인자한 눈빛과 미소, 그리고 단아한 말투, 가벼운 붓놀림만으로, 신기하게 30여분 넘는 짧은 시간에 눈이 휙 돌아갈 만한 멋들어진 풍경화를 그렸다. 그 때 밥 아저씨는 “간단하죠?”, “참 쉽죠?”를 연발하면서 그림 그리는 순서와 방법을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그런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 밥 아저씨처럼 따라하면 그와 같이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밥 아저씨의 손에 탄생된 멋진 그림보다는 붓과 나이프의 손놀림이 더 예술적이었다. TV로 보면 쉽게 보이는 테크닉 같지만, 이제 막 붓을 쥐기 시작한 초보자들에게는 그저 신기한 장면일 뿐이다. 나름 밥 아저씨가 나오는 TV 브라운관에 집중하면서 따라해보지만, 아름다운 그림은커녕 괴상한 낙서를 그릴 뿐이다. 뱁새가 황새 따라하다 가랑이 찢어지는 법이다. 이처럼 우리가 밥 아저씨의 덥수룩한 수염을 때릴 정도 수준에 이르는 가능성은 희박하다. 공 좀 잘 찬다고 해서 상대방을 제치고 공을 패스할 수 있는 뛰어난 발재간을 가진 '월드 클래스' 수준의 메시가 누구나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성공을 위해서는 약간의 재능과 특별한 기회, 주변 환경, 사회적 체제 등도 필요요건이 될 수 있다. 세계적인 유명 인사들의 진정한 성공 요인이 재능보다는 수많은 시간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에 성공할 수 있는 가장 큰 요인 하나를 더한다면 연습을 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와 환경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Scene #2  글쓰기는 훈련만 하면 누구나 가능하다  

 

비록 스포츠, 공부에서 노력이 우리를 배신하더라도 좌절하지 마라. 노력해도 안 된다는 사실, 즉 자신의 실력 수준을 이해하고 있다면 다른 분야로 도전할 수 있지 않은가. 해도 해도 안 되는 것을 본인이 잘 알고 있으면서 고집 부린다면 거기에 투자한 시간이 아깝다. 그리고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모든 분야가 노력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재능이 2% 부족하더라도 누구나 노력하면 충분히 성취 가능한 최고의 분야가 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도전하고 노력하면 충분히 소기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분야를 글쓰기로 꼽고 싶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시간 날 때마다 글을 쓰면 된다. 글쓰기 능력도 타고난 재능으로 가진 문필가도 있지만, 글 쓴 사람들 중에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천재는 많지 않다. 4살 때 벌써 바이올린을 능숙하게 켜기 시작했다는 음악 천재 모차르트나 1부터 50까지 숫자를 단번에 계산할 정도로 어렸을 때 암산에 능숙한 수학 천재 가우스는 있어도 이제 막 글을 떼기 시작한 어린 시절에 문단을 놀라게 할 정도로 글 잘 쓴 문필 천재는 그렇게 많지 않다. 단, 예외가 있다면 고종석이 글쓰기 특강 중에 직접 언급한 프랑스 시인 아르튀르 랭보가 있다. 그는 10살 때부터 시를 쓴, 재능이 많은 문필가에 속한다.

 

그러나 고종석은 글쓰기에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충분한 연습으로 글쓰기 실력이 향상될 수 있다. 글을 쓰고, 또 여러 번 써서 언어를 다를 줄 아는 감각을 익혀나간다. 사실 글쓰기 연습을 강조하는 고종석의 말은 평범하면서도 전혀 새롭지가 않다. 글 좀 잘 쓴다는 명사들이나 글쓰기 테크닉을 알려주는 수많은 책에서도 글을 많이 쓸 것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중국 송나라 문인 구양수는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 즉 삼다(三多)를 강조했다. 삼다는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방법론이다. 많이 책을 읽고, 많이 글을 쓰고, 많이 생각하는 것. 글을 잘 쓰기 위한 기본 중의 기본이다. 아니, 가장 중요하다.

 

 

 

 Scene #3  배보다 배꼽이 커져버린 글쓰기 특강 

 

고종석의 글쓰기 특강은 여타 글쓰기 책처럼 글 쓰는 테크닉만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관련된 교양과 지식도 소개한다. 특히 아름다운 모국어 즉, 한국어로 글을 써야하는 이유를 언어학의 기초 지식(시니피앙, 시니피에, 랑그, 파롤)을 언급하면서까지 장황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우리가 글 쓰면서 흔히 잘못 쓰거나 혼동하기 쉬운 세밀한 문법을 지적한다. 접속부사를 빼면 문장에 힘이 생긴다. ‘적(的)’과 ‘의’는 뺄 수 있으면 빼는 게 좋다. 복수 표현 ‘들’을 사용하지 않는다.

 

결국 고종석의 글쓰기 특강은 자신이 권하는 ‘물고기 잡는 법’이 생겨난 이유와 그와 관련된 곁다리 지식까지 설명한다. 이렇다보니 그의 특강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이다. 가끔 특강과 전혀 상관없는 내용으로 옆길로 샌다. 알짜배기 테크닉을 원한 독자라면 지식이 버무린 글쓰기 특강이 자칫 지루하게 여길 수 있다. 작년 석 달 동안 숭실대학교에서 진행된 특강 내용을 채록했기 때문에 고종석의 목소리가 울리는 특강 장소에 온 듯한 생동감이 느껴지지만, 읽다보면 다듬어지지 않은 문장이 발견된다. (고종석이 가르쳐준 테크닉을 어느 정도 숙지한 독자라면, 책 내용 속에 어색한 문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고종석의 글쓰기 특강은 배보다 배꼽이 큰 책이다. 특강 때 나온 내용을 전달하는데 책 한 권의 분량만으로도 부족했다. 결국 분권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 1권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너무 많은 내용을 담으려는 출판사의 의도가 엿보인다. 아마도 이전에 나온 글쓰기 테크닉을 다룬 서적들과 차별성을 두기 위한 전략일 것이다.

 

 

 

 Scene #4  테크닉 습득보다 중요한 건 글을 고치려는 의지

 

그러나 테크닉을 눈으로 읽고, 안다고 해서 글쓰기 실력이 향상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구양수의 삼다를 독자가 직접 실천해야 한다. 이 책을 글 잘 쓰는 방법을 상당히 지적이면서도 세련되게 알려주는 교양서적 정도로 읽었다면 그건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한 오독이다. 시간 낭비에 가까운 오독을 피하려면 실전에 뛰어들어야 한다. 실전이 가장 중요하다.

 

고종석은 2002년에 자신이 쓴 『자유의 무늬』에 나온 문장을 인용해서 첨삭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저자 본인이 자신이 쓴 문장에 대해 잘못 썼음을 시인하고 직접 고치는 것이다. ‘셀프 첨삭’ 사례는 다른 글쓰기 테크닉을 소개하는 책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방식이다.

 

첨삭은 말 그대로 문장 일부를 고쳐 쓰거나 새롭게 첨가하는 과정이다. 첨삭과 비슷한 의미로 흔하게 사용하는 것이 ‘퇴고’이다. 우리 사회는 글쓰기를 요구한다. 학부생 시절에 교수님은 리포트로 우리를 괴롭혔고, 졸업하면서도 대학생활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논문을 써야 한다. 취업하기 위해서 자기소개서를 써야 하며, 직장 생활에 적응될 무렵에 업무에 관한 보고서의 압박감을 겪는다. 글을 많이 써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고통스러운 경험일 것이다. 그래서 리포트, 논문, 자기소개서 등 첨삭해주는 전문가가 등장하고 있다. 전문가가 알려준 첨삭을 통해서 고친다면 이전보다 더 읽기 좋은 글로 변신한다. 그런데 지나치게 첨삭 전문가에게 의존하는 글쓰기는 뛰어난 실력 향상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내가 쓴 글을 상대방에게 읽히도록 함으로써 글을 고치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본인이 직접 읽고, 고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눈에는 완성된 글이 무척 잘 쓰고, 멋져 보일 터. 하지만 글쓰기 고수의 날카로운 눈은 작은 것이라도 지나가지 않는다. 그들은 어색한 문장을 골라낸다. 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예전에 쓴 글을 읽게 된다면 그때 보지 못했던 어색한 문장과 논리성이 결여된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즉, 글을 고치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상태일수록 옥에 티를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퇴고 방식이다. 삼다 중의 다상량. 글쓴이는 퇴고하는데 많은 생각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퇴고는 말이야 쉽지, 의외로 실천하기 어려운 글쓰기 과정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퇴고는 글쓴이 입장에선 부족한 글쓰기 실력을 스스로 인정하는 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상대방이 자신이 쓴 글을 지적하면 대다수 글쓴이는 불쾌한 감정을 드러낸다. 본인은 잘 쓴 글이라 생각했는데 상대방이 “이 문장이 어색하다, 고쳐라”라는 식으로 일일이 지적받는다면, 글 쓴 사람 입장에서 기가 한풀 꺾이는 일이다. 퇴고를 하기 위해서 여러 상대방에게 읽히도록 하는 것은 좋지만, 자신의 능력을 의심치 않는 자존심 센 사람에게는 불편하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혼자서라도 퇴고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일 수밖에 없다. 귀찮더라도 글을 많이 쓰고, 많이 고치는 것도 중요하다. 몇 번 고치느냐 횟수가 중요하지 않다. 퇴고도 글쓰기 훈련의 일환이면 노력의 자세다. 퇴고를 외면하거나 포기한다는 것은 부족한 글쓰기 실력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아마추어나 다름없다.

 

 

 

 

글쓰기에 왕도는 없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글쓰기 훈련을 외면한다면

절대로 좋은 글이 나올 수 없다. 글쓰기도 후천적 노력으로 통해

재능을 향상시킬 수 있다.

 

과연 글쓰기 특강 2권에 어떤 내용이 있을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그렇지만 2권에 있을 테크닉을 기대하는 것보다 1권에 있는 테크닉을 실전하는 것이 우선이다. 일단 평소에 쓰고 싶은 글을 써보고, 또 고쳐 보라. 1만 시간이 아니어도 좋다. 거기에 들인 시간이 중요하지 않다. 글 한 편 쓰는데 소모된 시간이 많거나 퇴고를 수십 번 이상, 아니 수백 번 했다고 해서 글쓰기에 재능이 붙었다고 자만하면 금물이다. 제아무리 열심히 운동해서 복근에 스펙을 완성됐더라도 운동을 멈춘다면 다시 원래 똥배로 돌아간다. 과거에 명성을 날리던 운동선수도 체력 관리를 소홀히 하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쓸쓸히 은퇴를 하게 된다. 글쓰기도 일종의 운동과 비슷하다. 많이 쓰고, 많이 읽고, 많이 고치고, 많이 생각하기. 글쓰기는 손과 머리로 하는 지적 운동이다. 몸꽝이 운동 열심히 하면 몸짱이 되는 것처럼 글꽝도 열심히 쓰면 글짱이 된다. 당신의 노력이 간절한 꿈으로 이루어지는 날이 있을 것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글쓰기에 자신 없다고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말고, 직접 손에 펜을 들고 원고지에 부딪혀 봐야 한다. 그리고 못 쓰고 퇴고를 감수해야 한다. 그만큼 자존심을 버려야 한다. 글쓰기 분야에서만큼은 노력이 당신을 배신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4-07-24 0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24 2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4-07-24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요즘 조금씩 읽고 있는 책인데
나는 고종석의 책을 많이 안 읽어서일까? 아니면 그냥 좋아해서일까
아직은 좋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특히 그가 드는 여러 예들을 읽는 재미가 쏠쏠해.
근데 다 읽고나면 나도 별 세 개 줄 수 있으려나?ㅎ
셀프 첨삭 좋은 말이긴 한데 내 글 고쳐 쓴다는 게 또 보통 고역이 아냐.
귀찮기도 하고. 그런데 또 눈에 띄면 창피한 마음에 얼른 고쳐 쓰긴 하지.
그런데 이 '적'이나 '의'를 뺀다는 게 의외로 쉽지 않더라.
암튼 이 책을 읽고 있어설까? 요즘엔
문장 공부도 좀 해야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넌 이 더운 날에도 좋은 책 많이 읽네.
부럽다. 건강 잘 챙겨.^^

cyrus 2014-07-24 22:4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이런 더운 날에 컴퓨터 앞에서 글 쓰다 고치고 반복하는 일이 고역이죠 ㅋㅋㅋ 사실 서평 대회나 이벤트에 응모하는 글을 쓸 때 첨삭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예전에 모 일간지에 칼럼이 운 좋게 실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퇴고를 엄청 많이 했어요. 글 한 편 완성시키고 그 다음날 읽어보면, 어색한 문장이 눈에 보이더라고요. ㅋㅋㅋ 누님도 건강 조심하세요. 날씨가 장난 아니네요. ^^
 
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Scene #1  임금님이 벌거벗은 이유

 

 

 

 

빌헬름 페더슨이 그린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 삽화 (1849년)

 

 

 

벌거벗은 임금님은 어쩌다 벌거벗게 되었을까. 단순히 재봉사가 임금님의 재물을 노리고 일으킨 사기행각에 넘어갈 정도로 순진했던 것일까. 임금님은 매일 거울을 바라보며 착한 사람만 볼 수 있는, 세상에거 가장 멋진 옷을 입었다고 생각했다.

 

자만심이 크면 클수록 그 자만심에 의해 판단력은 흐려질 수밖에 없었다. 임금님이 벌거벗게 된 것 또한 주변에 바른 말을 하는 인물이 단 한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사기꾼 재봉사는 임금님의 자만심을 역이용해 그를 홀라당 벗김으로써 임금님의 자아도취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군중은 벌거벗은 임금님이 나오는 '로얄 포르노'를 볼 수 있었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모습은 ‘투명사회’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과 비슷하다.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을 타인에게 온전히 보여주려는 성향. 오늘날 ‘투명성’은 중요한 화두다. 정치나 경제 영역에서는 물론이고,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투명성을 강조한다. 인터넷, 소셜 네트워크 등의 발달로 정보가 모두 동등하게 공개되고 무제한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는 믿음이 생겼다.

 

 

 

 Scene #2  지금도 일기를 쓰고 있습니까?

 

우리는 스마트폰, 페이스북을 보면서 타인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어느 위치에 있는지 알 수 있고, 하루에 있었던 일상까지 공개된다. 한 사람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실시간으로 업데이트시킨 글과 사진을 모은다면 한 권의 그림일기로 만들 수 있다.

 

어린 시절에 우리는 일기장을 많이 썼다. 기본적으로 여섯, 일곱 줄 정도까지 쓰기 위해서 지금으로 생각하면 별 것도 아닌 내용을 채우곤 했다. 아침에 먹은 음식 메뉴를 쓰면서 일기는 시작되고 매일 등교하면 만나게 되는 옆집 친구와 놀이터에서 놀았던 것을 쓴다. 가끔 평소에 일어날 수 없는 특별한 경험담을 쓸 때도 있다. 2박 3일 가족과 함께 멋진 곳으로 여행하는 날에는 평소보다 일기 분량보다 많아진다. 여행지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이 많다면 일기장 한 장을 충분히 채울 수 있다. 이렇게 일기를 공들여 썼는데도 이상하게 일기장이 부모님이나 친구에게 공개되면 무척 부끄러워했다. 일기장은 단순히 경험을 기록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동안 느꼈던 자신의 감정도 기록하는 은밀한 사색 노트이기도 하다. 부모님, 친구 때문에 감정이 상한 일이 있으면 말로 직접 표현하지 못하고, 일기장에 쓴다. 그렇기 때문에 일기장이 주변 사람들에게 공개되는 순간, 부끄럽고 얼굴이 붉어지게 된다.

 

시간이 흐른 뒤 어른이 된 지금 우리는 어떤가. 당신은 어린 시절처럼 일기를 매일 쓰는가. 부지런한 성격이 아니라면 매일 일기를 쓰는 일을 부담스럽게 여길 것이다. 아니면 바빠서 여유롭게 일기 쓸 시간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금도 일기를 쓰고 있다. 단지 일기장에 쓰지 않을 뿐이다. 트위터, 페이스북에 날마다 일기를 쓰고 있다. 그것도 24시간 내내. 어렸을 때 일기장에 썼던 내용과 비교하면 별반 다르지 않다. 친구와 함께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은 점심 메뉴를 소개하고, 음식의 맛을 언급한다. 그림일기였더라면 음식을 직접 그림으로 그렸지만, 이제는 간편하게 스마트폰에 있는 사진으로 촬영할 수 있다. 그 다음 내가 있는 지역이나 장소도 언급한다. 그곳에 간 사실을 증명할 수 있게 장소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은 필수다. 매일 기분 좋은 날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이 일하는 회사직원 때문에 감정 상하는 일을 겪었다. 자신을 화나게 만든 회사직원을 향한 분노는 페이스북으로 표출한다. 이런 다양한 사진과 글이 업데이트되면 페이스북 친구(줄여서 ‘페친)들은 ’좋아요‘ 버튼을 꾹 눌러 주거나 댓글을 달아준다. 페이스북에 쓰는 일기가 친구들에게 공개되는 것이다.   

 

 

 

 Scene #3  디지털 판옵티콘에 사는 벌거벗은 빅 브라더

 

일기 비슷한 형식으로 이루어진 글과 사진이 타인에게 공개되는 페이스북의 기능. 우리는 자신에 관한 모든 정보를 공개한다. 페이스북 같은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인맥을 형성해서 자신의 존재를 널리 홍보하는데 사용하기도 한다. 우리는 소셜 네트워크 덕분에 많은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게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타자와 이질적인 것이 제거된 투명사회에서 발생하는 환영이다. 긍정적인 요소만 부각된 채 부정성이 제거된다.

 

“긍정사회에서 일반화된 판정의 형식은 ‘좋아요’이다. 페이스북이 ‘싫어요’ 버튼을 도입하는 데 일관되게 반대 입장을 고수해온 것은 주목할 만하다. 긍정사회는 모든 종류의 부정성을 피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부정성은 커뮤니케이션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의 가치는 오직 정보 교환의 양과 속도로만 측정된다.” (26쪽)

 

정보가 많이 공개되면 민주주의가 발전된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정보가 공개되지 않은 사회는 암울하다. 특정 정보가 소수에게 집중되고 공유될수록 사회 내 갈등과 불평등이 심화된다. 정보를 가진 자와 없는 자 간의 비대칭적 관계는 판옵티콘(panopticon)이라는 기괴한 세상과 일거수일투족 감시하는 빅 브라더(big brother)를 태어나게 했다. 판옵티콘은 정보를 가진 감시자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정보가 없는 자를 감시 할 수 있는 형태. 정보가 없는 자는 감시자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다. 자신이 항상 감시당하고 있다는 불안감에 규칙을 더 잘 지키게 되고, 결국은 스스로를 감시하게 된다. 빅 브라더는 감시 체제를 통해 권력을 강화시킨다. 이러한 감시사회는 표현의 자유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소셜 네크워크의 장점은 민주주의 발전에 요긴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너나 할 것 없이 정보를 공개하고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세상에서 판옵티콘 감옥은 허물어지고, 일거수일투족 감시하는 빅 브라더가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판옵티콘에 살고 있다. ‘감시하는 괴물’ 빅 브라더를 무서워했던 우리는 어느새 그 괴물이 되어버렸다. 남이 나를 감시하지 않아도 내가 나에 대한 정보를 매체를 통해 알려주고 있다. 결과적으로 판옵티콘 감시자보다 더 효과적으로 자기를 감시하는 것이다. 즉, 권력에 의해 감시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신을 노출하고 전시하고 있다. 이 거대한 전시장이 바로 ‘디지털 판옵티콘’이다. 디지털 시대에 맞아 새롭게 개장한 거대 감옥이다.

 

이곳에서는 빅브라더와 판옵티콘 수감자의 구분이 사라진다. 서로 격리된 상태로 유지되는 판옵티콘 감옥과 반대로 디지털 판옵티콘 속에 사는 현대인은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하다. 나와 타자 간에 형성되는 이질감은 제거된다. 그 대신 인맥 네트워크가 구축되면서 친밀성은 높아진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가면(persona)을 벗는다. ‘프라이버시’라는 이름의 가면을 벗어 던져 나에 관한 모든 것을 ‘정보’로 전환시켜 공개한다. ‘나’를 드러낼수록 ‘나’를 향한 타인의 관심은 높아진다.

 

디지털 판옵티콘에 살고 있는 우리는 벌거벗은 빅 브라더이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빅 브라더. 완전히 발가벗겨진 투명한 '유리 인간'이다. 비밀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두가 같아지는 획일적 인간형이다.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보여야 한다는 투명의 강요 아래에서는 개인이 스스로 자신에 대한 정보를 노출하기를 원한다.

 

 

 

 Scene #4  강요되는 투명성을 거부할 수 있는 반항 정신

 

“투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은 사회의 도덕적 기반이 취약해졌다는 것, 진실성이나 정직성과 같은 도덕적 가치가 점점 더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도덕적 심급이 허물어지면서 그 자리를 투명성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명령이 대신한다.” (98~99쪽)

 

지금 우리는 벌거벗은 빅 브라더가 되어 모두 벗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디지털 판옵티콘에 거주하는 벌거벗은 빅브라더는 유난히 긍정성을 강조한다. 서로 간의 관계를 이질적으로 만드는 부정성을 사라졌기 때문에 괴로움과 고통의 감정을 느낄 줄 모른다. 아니, 애써 외면한다. 자신이 벌거벗은 상태임을 알면서도 멋진 옷을 입었다고 자아도취에 빠지는 임금님처럼 벌거벗은 빅 브라더는 부정성을 외면하고, 긍정성을 더욱 강조한다. 이렇게 되면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성만 보는 나르시시스트가 된다.

 

디지털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민낯이나 다름없는 부정성을 전혀 보지 못한다. 심지어 타인의 부정성마저도. 긍정성만 쫓는 투명성의 시스템에 길들여지면 진실과 정직과 같은 도덕적 가치가 상실될 우려가 있다. 이런 현상이 지속된다면 과연 진정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민주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성숙한 민주사회는 타인의 부정성을 비판적으로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 진실과 정직이 상실된 사회는 신뢰를 잃어버린 것과 같다. 신뢰가 퇴색된, 서로 감시하려는 투명사회. 이러한 사회에 공감의 소통보다는 갈등과 불신만 남아 있을 뿐이다. 자기를 괴롭게 만드는 타인의 부정적 감정에 쉽게 대응하지 못하고 꺼려한다. 결국 투명한 유리로 된 벌거벗은 빅 브라더는 부정성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한 채 산산조각 부서질 것이다.

 

긍정성이 증식되는 투명사회에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한 아이와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아이는 벌거벗은 임금님이 착한 사람만 보인다는 멋진 투명 망토를 걸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의 눈은 그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을 드러낸 임금님이 보였다. 어린 꼬마가 벌거벗은 임금님을 곧이곧대로 말한 용기는 가상하지만,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가 절대 권력의 무서움을 알 턱이 없다. 그래서 어른들이 보기에는 그것을 용기라고 말하기에는 좀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어쨌든 어린아이의 용기 있는 한 마디로 온 나라 사람들이 임금님이 벌거벗고 돌아다닌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 해도 어딘가. “반항은 인간과 그 자신의 어둠과의 끊임없는 대면이다”라고 말한 카뮈의 반항 정신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투명성의 강요와 명령을 거부하고 대면할 수 있는 반항이 필요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센세이션 - 결심을 조롱하는 감각의 비밀
살마 로벨 지음, 오공훈 옮김 / 시공사 / 2014년 6월
평점 :
품절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나 표현 중에는 물리적인 개념을 묘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속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예를 들면, ‘무겁다’를 ‘마음이 무겁다’ 또는 ‘입이 무겁다’와 같이 표현한다. 범죄 집단의 굴레에서 빠져나오면 ‘손을 씻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물리적 상태를 나타내는 낱말로 추상적 개념을 묘사하는 표현은 한둘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따뜻하게’ 느껴진다고 표현한다. 이런 사례는 마음이 존경이나 애정 같은 추상적 개념을 이해할 때 몸의 도움을 받는 증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비교적 획득하기 쉬운 신체적 혹은 물리적인 개념으로부터 추상적인 또는 심리적인 개념을 체득하는 사회적 인지의 과정은 인간의 발달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진행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감각이나 움직임이 인지 기능에 영향을 미치는 상관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체화된 인지' 이론에 집중조명하고 있다. 감각은 신체와 외부 환경 사이의 연관성을 전제로 하여 신체 반응과 행동을 통해 심리적 정보를 밝히는 것이다. 

 

감정이 신체반응을 야기하고 이 신체반응이 행동을 만들어 내며 상대방이 그 행동을 통해 심리적 정보를 해석한다. 손이나 다른 신체 부위를 이용해 접촉했을 때 느끼게 되는 촉각은 사람들이 물리적인 세상을 경험하는 기본적이고 매우 중요한 통로 중의 하나이다. 유아기에서부터 사람들은 손을 이용해서 외부의 대상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고 외부 대상의 실체에 대한 느낌을 획득한다. 따라서 물리적, 환경적 요소가 우리의 행동이나 기분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따뜻한 물체를 만졌을 때 함께 있던 상대방에 대해 더 너그럽고 이해하고 다정하게 대하게 된다는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있다. 추운 날에 뜨거운 찻잔을 손에 쥐면 손뿐만 아니라 마음도 따뜻하게 하는 심리적 효과를 증명했다.

 

윌리엄스 박사팀은 대학생 41명을 두 그룹으로 나눠 한 그룹에는 뜨거운 커피가 든 컵을, 다른 그룹에는 차가운 커피가 든 컵을 일정 시간 들고 있게 했다. 그런 다음 가상의 인물을 설정해 성격적 특징에 대한 정보를 학생들에게 주고 각자 그 인물의 성격 각 요소에 대해 평가해 보게 했다.

 

실험 결과, 따뜻한 컵을 들고 있었던 학생 그룹은 차가운 컵을 들고 있었던 학생 그룹보다 가상의 인물을 더 너그럽고 사교적이고 성품이 좋은 사람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성격적 특징은 심리학적으로 따뜻한 성격의 특징으로 간주되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성품의 따뜻함과 큰 상관관계가 없는 정직성, 매력도, 힘 등에 대한 평가는 두 그룹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

 

'체화된 인지' 이론은 우리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접촉이 우리의 감각을 조절하는데 큰 영향을 준다. 어릴 적에 엄마의 약손으로 배앓이가 치유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뒷목이 아프면 자연스레 손을 얹듯 아픈 곳을 어루만지는 것은 치유를 위한 인간의 본능이다. 접촉은 말보다 따뜻한 몸의 언어다. 태어나자마자 충분한 접촉을 받은 아이는 심리적 안정감을 얻고 안정된 애착관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자신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인간은 건강할 때는 보살핌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독한 고독에 빠지거나 몸과 마음에 에너지가 소진되어 혼자 힘으로 일어서기 어려울 때 비로소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이때 누군가가 손을 내밀면 그 손을 잡고 일어나게 된다.

 

몸은 해결되지 않은 감정 응어리를 담아 두는 저장소다. 응어리를 제때 풀지 않으면 몸속 어딘가에 쌓여 있다가 신체 통증으로 나타날 수 있다. 좋지 않은 감정은 바로 풀어 버려야 한다. 신체 감각은 은유적 표현을 구체화시킬 수 있다.

 

예를 들면, "화가 나서 마음으로 억누르다"라는 문장처럼 우리는 실제로 좋지 않은 감정을 마음으로 조절하고, 그것을 담아둔다. 이런 과정이 반복이 되면 화병이 생길 수 있다. 정신 건강뿐만 아니라 몸 건강도 해로워진다. 유대교 전통 중에 새해를 맞이할 때 작년에 지은 죄나 안 좋은 감정, 기억과 관련된 물건이나 그것을 상징하는 음식 조각을 주머니에 담아 물속으로 던져버리는 것이 있다. 실제로 부정적인 감정을 글로 기록하여 편지 봉투에 밀봉하거나 그것을 밖으로 내다버리면 부담감을 덜 수 있다. 은유적 표현을 구체화시킨다면 안 좋았던 기분이 풀리는 것이다.

 

심리학을 인간의 마음이나 성격을 규명하는 학문이라고 막연히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심리학 실험사례가 일상에 적용한다고 해서 100% 결과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공신력 있는 실험기관에서 증명된 실험사례도 재연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실험 과정에 다양한 변수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체화된 인지에 관한 연구는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분야다. 몸과 감각 사이의 상호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심화 연구가 필요한 실정이다.  


지금까지 소개된 실험사례들은 우리 인간의 일상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내용으로 설명하는데 용이하다. 심리학은 단지 과학적 연구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현상들을 설명하고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행동들 안에, 흔히 듣고 넘기는 말들 속에도 심리적 기제는 존재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미지 인문학 1 - 현실과 가상이 중첩하는 파타피직스의 세계 이미지 인문학 1
진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의 현실은 이미 현재와 잠재가 어지럽게 뒤섞인 혼합현실이다.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은 어느새 ‘현실가상’(real virtuality)이

되고 있다.

(109쪽)

 

 

 


 Scene #1  가상과 현실의 역전  

 

현대는 이미지의 시대이다. 이미지가 실체를 압도하고, 가상이 현실보다 더욱 진짜 같은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의 시대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가상현실을 진짜 현실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 가상의 이미지나 공간을 만드는 것으로 생각했다. 가상현실 공간하면 항상 떠올리게 되는 것이 영화 ‘매트릭스’에서의 공간이나 만화 ‘공각기동대’에서 전뇌(電腦)에 나타나는 현실과 구별되지 않는 가상의 세계이다.

 

여기서 가상의 세계는 디지털 매체에 의해서 만들어진 ‘가짜’의 세계로 간주된다. 가상현실의 성공여부는 디지털 매체를 이용하여 현실과 전혀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현실 같은 ‘가짜’를 얼마나 잘 만드는가에 달린 듯하다. 가상현실의 기술이 돌덩어리로 황금을 만드는 연금술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상현실이 현실과 똑같은 ‘가짜’의 세계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플라톤 이래로 철학자들은 참된 현실을 가상이라는 거짓의 침입으로부터 지키려고 했다. 하지만 디지털 문명은 이 전통적 패러다임을 낡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오늘날 가상은 현실이 되고 있다. 사이버 공간의 아바타를 꾸미는 데에 현실의 돈을 지급하고, 거금으로 사이버 섬을 구입하여 사업을 구상한다. 누군가의 머릿속에 있던 상상이 밖으로 나와 현실이 된 것들이다. 결국 이미지와 실재의 관계가 역전돼 실재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가상이 더욱 실재 같은 하이퍼리얼리티 현상이 벌어진다.

 

 

 Scene #2  파타피직스의 세계

 

사르트르의 말처럼 상상이란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상황을 전제하는 것이지만, 상상이 현재의 상황과 전혀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것 같은 상상이라 할지라도 상상은 언제나 현실의 상황과 맞물려있다.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기 위해 컵을 찾으려 하는 순간 눈앞에 있는 컵은 눈에 보이는 대로의 컵 이상이 아니다. 하지만 예술작품의 경우는 다르다. 눈앞에 보이는 물건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현실과는 다른 어떤 다른 상황이나 현실을 상상하게 만든다.

 

플라톤 이래로 현실과 가상의 문제는 예술 담론의 오래된 주제였지만 이 문제가 오늘날처럼 인구에 회자된 시대는 없었다. 누구나 알듯이 현실과 가상의 문제가 그 어느 때보다 화두가 되고 있는 까닭은 그것이 과거와 달리 단순히 예술적 담론의 영역을 넘어 직접적 현실의 테마가 되었기 때문이다.

 

 

 

 

 

제프리 쇼  「읽을 수 있는 도시」 연작, 1989~1991년

 

제프리 쇼의 <읽을 수 있는 도시>는 가상현실 예술의 고전이다. 이 작품의 관객은 인터페이스로 제공된 자전거를 타고 암스테르담이나 뉴욕 맨해튼의 인터페이스로 제공된 자전거를 타고 암스테르담이나 뉴욕 맨해튼의 구조를 재현한 가상의 도시를 탐험하게 된다. (중략) 이로써 자전거 여행은 도시공간을 탐험하는 것이자 데이터베이스를 탐색한다는 의미를 갖게 된다. (64쪽)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처음 우리의 일상에 들어왔을 때, 아날로그 매체와 구별되는 디지털의 특성은 관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주위의 모든 것이 디지털화한 오늘날에 ‘디지털’은 딱히 새로울 것이 없는 일상이 되었다. 이미지를 텍스트로, 텍스트를 다시 이미지로 변환하는 디지털 기술은 일상으로 체험된다. 이제는 미디어가 의식을 지배한다. 전에는 텍스트를 통해 세상을 읽었다. 그러나 이제는 디자인에서 미감을 읽고, 게임에서 서사의 감각을 익히는 시대다. 문자의 자리에 사운드와 영상이 차지하고 있다.

 

'몰입기술'을 통해 현실의 주체는 가상의 세계에 입장한다. 우리가 잘 아는 '가상현실'이다. 또 영상인식, 위치추적 기술 등을 통해 현실공간에 가상의 좌표를 중첩시킴으로써 '증강현실'을 경험할 수도 있다. 이처럼 가상과 현실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진 상태가 발생한다. 이를 파타피직스(Pataphisics)라 한다. 형이상학으로 번역하는 메타피직스(Metaphysics)의 패러디다. 파티피직스는 초(超)형이상학이다. 실은 온갖 우스꽝스러운 부조리로 가득한 사이비 철학을 말한다.

 

'파타피직스'는 가상과 현실이 중첩된 디지털 생활세계의 존재론적 특성이자, 동시에 그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디지털 대중의 인지적 특성이기도 하다. (10쪽)

 

여기서 진중권은 가상과 현실이 중첩되는 상태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파타피직스를 내세웠다. 과거에 창조성을 대표하는 것이 메타포(비유)의 능력이었다면 오늘날 창조성을 대표하는 것은 파타포(Pataphor)의 능력이다. 디지털 테크닉이 보편화된 파타피직스의 세계에서 ‘현실-가상’의 이분법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는 폐기된 도식이 되었다.

 

 

 Scene #3  상상이 개입되는 현실  

 

모든 분야가 그렇지만 특히 사진의 영역에서 현실과 가상의 테마는 그 어느 분야보다 뜨거운 감자다. 사진이 태어난 이후 그 새로운 매체의 존재 이유가 ‘현실의 객관적 재현’에 있었다면 디지털 시대의 사진은 더 이상 그러한 존재 근거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이미 ‘사진의 종언’이 현실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사진작가들은 그러나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인다.

 

 

 

 

 

이명호  「나무... #3」  2013년

 

(이명호) 작가는 현실의 사물을 가상의 세계에 등록시킨다. 현실의 사물을 가상의 세계 속에 옮겨놓는 ‘가상현실’ 체험은 디지털의 일상이다. 사진은 예로부터 2차원 평면에서 3차원 공간의 깊이를 만들어내는 원근법적 재현의 모범이었다. 하지만 나무 뒤의 차단막은 공간의 깊이를 가진 배경을 깊이 없는 평면으로 만들어버리고, 그 결과 그 앞의 나무마저 입체감을 잃어 거의 회화처럼 보이게 된다. 이는 현실의 사물이 가상에 등록될 때 평면적 이미지의 옷을 입는 것과 비슷하다. (90쪽)

 

여전히 사진의 객관적 기록성을 고수하는 작가가 있는 반면 일군의 작가들은 디지털 테크닉을 사진의 해방으로 받아들이면서 미디어아트의 영역으로 건너갔다. 사진매체를 통해 현실과 가상 사이에서 새로운 현실을 구축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단지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아닌 우리의 상상력 혹은 욕망에 의해서 만들어진 세계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늘의 이 무미건조한 삶에 내일의 희망을 중첩시키면서 하루를 보낸다. 상상이 개입되지 않는 삶과 현실은 무의미하며 견딜 수 없다. 현실은 언제나 상상이 개입되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미디어는 양날을 지닌 칼처럼 우리의 현실에서 잔인할 정도로 욕망이 제거된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지만, 현실과 상상을 하나의 단일한 공간으로 중첩시킬 수도 있다. 미디어로서 사진은 디지털 사진이 출현하기 전까지는 주로 우리의 상상력이 제거된 적나라한 현실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사진을 더욱 더 그럴싸한 현실의 모습을 연출할 수 있다. 디지털 미디어의 등장을 통해서 현실과 가상이 겹쳐진 새로운 현실을 만드는 것이 더욱 용이해졌다.

 


 Scene #4  예술의 숙명은 가상과 현실의 간극 해소

 

미디어매체가 가상적인 지각을 가능하게 한다는 진중권의 지적은 가상현실과 관련 지어 볼 때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때 가상적이라는 말은 결코 말 그대로 ‘가상의’ 혹은 ‘가짜의’라는 말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몸에 너무 배어 익숙해진 지각들로부터 추방된 지각들의 부활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대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가상'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 앞에서 기술적으로 실현해나가야 한다. 우리가 '기획'(Projekt)이 되는 것이다.

 

‘디지털 가상’은 우리 주위와 내부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공허의 밤을 밝혀주는 빛이다. 우리는 “그런 무(無)에 대항하기 위하여 그 무 속으로 자신을 투사(기획)하는 전조등”이다. (55쪽)

 

즉, 가상이란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도 아니고 허구도 아닌 제3의 현실, 곧 중립적인 현실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예술가들이 작품을 통해서 보여준 가상현실은 바로 이러한 지각의 가능성과 맞닿아 있다. 예술이 미디어를 활용함으로써 관객과 작가의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다. 이른바 ‘쌍방향성’인데, 이를 통해 관객은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존재, 나아가 작품의 공동 창작자로까지 등장한다. 예술가가 만든 가상이 진짜인지 가릴 필요가 무의미해진다. 가상과 현실이 중첩되는 세계에 살고 있는 지금, 우리는 이미 현실이 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미디어로 이루어진 중립적인 현실을 순응하는 판단중지인 셈이다.

 

가상과 현실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중첩된 제3의 현실은 미래의 예술 활동을 위해서도 너무나 매력적인 공간이다. 켜켜이 쌓여온 전통의 중압과 역사적 상상력의 한계를 뚫고 나갈 수 있는 것도 이 제3의 공간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다.

 

원천적으로 디지털이란 낱말 자체는 불연속적으로 단절된 정보 처리 기술을 의미한다. 이 기술은 하나의 전체를 분할된 정보들의 종합으로 다룬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정보 처리 과정에서 조작과 변형을 가능하게 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미지는 오리지널과 외견상 분간할 수 없는 유사한 복제품을 생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래의 모습과는 무관한 전혀 다른 새로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디지털 이미지는 재현의 질서와 가상-현실 간의 경계를 해체시킨다. 모방에서 유래된 재현의 질서에서 벗어난 디지털 이미지는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오간다. 그것은 실재와 허구를 넘나드는 환영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과 같다. 그 속에 자신의 고유한 예술적 존재를 정립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