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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평점 :
Scene #1 임금님이 벌거벗은 이유
빌헬름 페더슨이 그린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 삽화 (1849년)
벌거벗은 임금님은 어쩌다 벌거벗게 되었을까. 단순히 재봉사가 임금님의 재물을 노리고 일으킨 사기행각에 넘어갈 정도로 순진했던 것일까. 임금님은 매일 거울을 바라보며 착한 사람만 볼 수 있는, 세상에거 가장 멋진 옷을 입었다고 생각했다.
자만심이 크면 클수록 그 자만심에 의해 판단력은 흐려질 수밖에 없었다. 임금님이 벌거벗게 된 것 또한 주변에 바른 말을 하는 인물이 단 한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사기꾼 재봉사는 임금님의 자만심을 역이용해 그를 홀라당 벗김으로써 임금님의 자아도취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군중은 벌거벗은 임금님이 나오는 '로얄 포르노'를 볼 수 있었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모습은 ‘투명사회’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과 비슷하다.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을 타인에게 온전히 보여주려는 성향. 오늘날 ‘투명성’은 중요한 화두다. 정치나 경제 영역에서는 물론이고,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투명성을 강조한다. 인터넷, 소셜 네트워크 등의 발달로 정보가 모두 동등하게 공개되고 무제한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는 믿음이 생겼다.
Scene #2 지금도 일기를 쓰고 있습니까?
우리는 스마트폰, 페이스북을 보면서 타인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어느 위치에 있는지 알 수 있고, 하루에 있었던 일상까지 공개된다. 한 사람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실시간으로 업데이트시킨 글과 사진을 모은다면 한 권의 그림일기로 만들 수 있다.
어린 시절에 우리는 일기장을 많이 썼다. 기본적으로 여섯, 일곱 줄 정도까지 쓰기 위해서 지금으로 생각하면 별 것도 아닌 내용을 채우곤 했다. 아침에 먹은 음식 메뉴를 쓰면서 일기는 시작되고 매일 등교하면 만나게 되는 옆집 친구와 놀이터에서 놀았던 것을 쓴다. 가끔 평소에 일어날 수 없는 특별한 경험담을 쓸 때도 있다. 2박 3일 가족과 함께 멋진 곳으로 여행하는 날에는 평소보다 일기 분량보다 많아진다. 여행지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이 많다면 일기장 한 장을 충분히 채울 수 있다. 이렇게 일기를 공들여 썼는데도 이상하게 일기장이 부모님이나 친구에게 공개되면 무척 부끄러워했다. 일기장은 단순히 경험을 기록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동안 느꼈던 자신의 감정도 기록하는 은밀한 사색 노트이기도 하다. 부모님, 친구 때문에 감정이 상한 일이 있으면 말로 직접 표현하지 못하고, 일기장에 쓴다. 그렇기 때문에 일기장이 주변 사람들에게 공개되는 순간, 부끄럽고 얼굴이 붉어지게 된다.
시간이 흐른 뒤 어른이 된 지금 우리는 어떤가. 당신은 어린 시절처럼 일기를 매일 쓰는가. 부지런한 성격이 아니라면 매일 일기를 쓰는 일을 부담스럽게 여길 것이다. 아니면 바빠서 여유롭게 일기 쓸 시간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금도 일기를 쓰고 있다. 단지 일기장에 쓰지 않을 뿐이다. 트위터, 페이스북에 날마다 일기를 쓰고 있다. 그것도 24시간 내내. 어렸을 때 일기장에 썼던 내용과 비교하면 별반 다르지 않다. 친구와 함께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은 점심 메뉴를 소개하고, 음식의 맛을 언급한다. 그림일기였더라면 음식을 직접 그림으로 그렸지만, 이제는 간편하게 스마트폰에 있는 사진으로 촬영할 수 있다. 그 다음 내가 있는 지역이나 장소도 언급한다. 그곳에 간 사실을 증명할 수 있게 장소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은 필수다. 매일 기분 좋은 날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이 일하는 회사직원 때문에 감정 상하는 일을 겪었다. 자신을 화나게 만든 회사직원을 향한 분노는 페이스북으로 표출한다. 이런 다양한 사진과 글이 업데이트되면 페이스북 친구(줄여서 ‘페친)들은 ’좋아요‘ 버튼을 꾹 눌러 주거나 댓글을 달아준다. 페이스북에 쓰는 일기가 친구들에게 공개되는 것이다.
Scene #3 디지털 판옵티콘에 사는 벌거벗은 빅 브라더
일기 비슷한 형식으로 이루어진 글과 사진이 타인에게 공개되는 페이스북의 기능. 우리는 자신에 관한 모든 정보를 공개한다. 페이스북 같은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인맥을 형성해서 자신의 존재를 널리 홍보하는데 사용하기도 한다. 우리는 소셜 네트워크 덕분에 많은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게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타자와 이질적인 것이 제거된 투명사회에서 발생하는 환영이다. 긍정적인 요소만 부각된 채 부정성이 제거된다.
“긍정사회에서 일반화된 판정의 형식은 ‘좋아요’이다. 페이스북이 ‘싫어요’ 버튼을 도입하는 데 일관되게 반대 입장을 고수해온 것은 주목할 만하다. 긍정사회는 모든 종류의 부정성을 피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부정성은 커뮤니케이션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의 가치는 오직 정보 교환의 양과 속도로만 측정된다.” (26쪽)
정보가 많이 공개되면 민주주의가 발전된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정보가 공개되지 않은 사회는 암울하다. 특정 정보가 소수에게 집중되고 공유될수록 사회 내 갈등과 불평등이 심화된다. 정보를 가진 자와 없는 자 간의 비대칭적 관계는 판옵티콘(panopticon)이라는 기괴한 세상과 일거수일투족 감시하는 빅 브라더(big brother)를 태어나게 했다. 판옵티콘은 정보를 가진 감시자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정보가 없는 자를 감시 할 수 있는 형태. 정보가 없는 자는 감시자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다. 자신이 항상 감시당하고 있다는 불안감에 규칙을 더 잘 지키게 되고, 결국은 스스로를 감시하게 된다. 빅 브라더는 감시 체제를 통해 권력을 강화시킨다. 이러한 감시사회는 표현의 자유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소셜 네크워크의 장점은 민주주의 발전에 요긴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너나 할 것 없이 정보를 공개하고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세상에서 판옵티콘 감옥은 허물어지고, 일거수일투족 감시하는 빅 브라더가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판옵티콘에 살고 있다. ‘감시하는 괴물’ 빅 브라더를 무서워했던 우리는 어느새 그 괴물이 되어버렸다. 남이 나를 감시하지 않아도 내가 나에 대한 정보를 매체를 통해 알려주고 있다. 결과적으로 판옵티콘 감시자보다 더 효과적으로 자기를 감시하는 것이다. 즉, 권력에 의해 감시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신을 노출하고 전시하고 있다. 이 거대한 전시장이 바로 ‘디지털 판옵티콘’이다. 디지털 시대에 맞아 새롭게 개장한 거대 감옥이다.
이곳에서는 빅브라더와 판옵티콘 수감자의 구분이 사라진다. 서로 격리된 상태로 유지되는 판옵티콘 감옥과 반대로 디지털 판옵티콘 속에 사는 현대인은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하다. 나와 타자 간에 형성되는 이질감은 제거된다. 그 대신 인맥 네트워크가 구축되면서 친밀성은 높아진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가면(persona)을 벗는다. ‘프라이버시’라는 이름의 가면을 벗어 던져 나에 관한 모든 것을 ‘정보’로 전환시켜 공개한다. ‘나’를 드러낼수록 ‘나’를 향한 타인의 관심은 높아진다.
디지털 판옵티콘에 살고 있는 우리는 벌거벗은 빅 브라더이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빅 브라더. 완전히 발가벗겨진 투명한 '유리 인간'이다. 비밀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두가 같아지는 획일적 인간형이다.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보여야 한다는 투명의 강요 아래에서는 개인이 스스로 자신에 대한 정보를 노출하기를 원한다.
Scene #4 강요되는 투명성을 거부할 수 있는 반항 정신
“투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은 사회의 도덕적 기반이 취약해졌다는 것, 진실성이나 정직성과 같은 도덕적 가치가 점점 더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도덕적 심급이 허물어지면서 그 자리를 투명성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명령이 대신한다.” (98~99쪽)
지금 우리는 벌거벗은 빅 브라더가 되어 모두 벗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디지털 판옵티콘에 거주하는 벌거벗은 빅브라더는 유난히 긍정성을 강조한다. 서로 간의 관계를 이질적으로 만드는 부정성을 사라졌기 때문에 괴로움과 고통의 감정을 느낄 줄 모른다. 아니, 애써 외면한다. 자신이 벌거벗은 상태임을 알면서도 멋진 옷을 입었다고 자아도취에 빠지는 임금님처럼 벌거벗은 빅 브라더는 부정성을 외면하고, 긍정성을 더욱 강조한다. 이렇게 되면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성만 보는 나르시시스트가 된다.
디지털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민낯이나 다름없는 부정성을 전혀 보지 못한다. 심지어 타인의 부정성마저도. 긍정성만 쫓는 투명성의 시스템에 길들여지면 진실과 정직과 같은 도덕적 가치가 상실될 우려가 있다. 이런 현상이 지속된다면 과연 진정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민주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성숙한 민주사회는 타인의 부정성을 비판적으로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 진실과 정직이 상실된 사회는 신뢰를 잃어버린 것과 같다. 신뢰가 퇴색된, 서로 감시하려는 투명사회. 이러한 사회에 공감의 소통보다는 갈등과 불신만 남아 있을 뿐이다. 자기를 괴롭게 만드는 타인의 부정적 감정에 쉽게 대응하지 못하고 꺼려한다. 결국 투명한 유리로 된 벌거벗은 빅 브라더는 부정성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한 채 산산조각 부서질 것이다.
긍정성이 증식되는 투명사회에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한 아이와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아이는 벌거벗은 임금님이 착한 사람만 보인다는 멋진 투명 망토를 걸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의 눈은 그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을 드러낸 임금님이 보였다. 어린 꼬마가 벌거벗은 임금님을 곧이곧대로 말한 용기는 가상하지만,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가 절대 권력의 무서움을 알 턱이 없다. 그래서 어른들이 보기에는 그것을 용기라고 말하기에는 좀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어쨌든 어린아이의 용기 있는 한 마디로 온 나라 사람들이 임금님이 벌거벗고 돌아다닌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 해도 어딘가. “반항은 인간과 그 자신의 어둠과의 끊임없는 대면이다”라고 말한 카뮈의 반항 정신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투명성의 강요와 명령을 거부하고 대면할 수 있는 반항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