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인문학 1 - 현실과 가상이 중첩하는 파타피직스의 세계 이미지 인문학 1
진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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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현실은 이미 현재와 잠재가 어지럽게 뒤섞인 혼합현실이다.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은 어느새 ‘현실가상’(real virtuality)이

되고 있다.

(109쪽)

 

 

 


 Scene #1  가상과 현실의 역전  

 

현대는 이미지의 시대이다. 이미지가 실체를 압도하고, 가상이 현실보다 더욱 진짜 같은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의 시대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가상현실을 진짜 현실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 가상의 이미지나 공간을 만드는 것으로 생각했다. 가상현실 공간하면 항상 떠올리게 되는 것이 영화 ‘매트릭스’에서의 공간이나 만화 ‘공각기동대’에서 전뇌(電腦)에 나타나는 현실과 구별되지 않는 가상의 세계이다.

 

여기서 가상의 세계는 디지털 매체에 의해서 만들어진 ‘가짜’의 세계로 간주된다. 가상현실의 성공여부는 디지털 매체를 이용하여 현실과 전혀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현실 같은 ‘가짜’를 얼마나 잘 만드는가에 달린 듯하다. 가상현실의 기술이 돌덩어리로 황금을 만드는 연금술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상현실이 현실과 똑같은 ‘가짜’의 세계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플라톤 이래로 철학자들은 참된 현실을 가상이라는 거짓의 침입으로부터 지키려고 했다. 하지만 디지털 문명은 이 전통적 패러다임을 낡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오늘날 가상은 현실이 되고 있다. 사이버 공간의 아바타를 꾸미는 데에 현실의 돈을 지급하고, 거금으로 사이버 섬을 구입하여 사업을 구상한다. 누군가의 머릿속에 있던 상상이 밖으로 나와 현실이 된 것들이다. 결국 이미지와 실재의 관계가 역전돼 실재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가상이 더욱 실재 같은 하이퍼리얼리티 현상이 벌어진다.

 

 

 Scene #2  파타피직스의 세계

 

사르트르의 말처럼 상상이란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상황을 전제하는 것이지만, 상상이 현재의 상황과 전혀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것 같은 상상이라 할지라도 상상은 언제나 현실의 상황과 맞물려있다.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기 위해 컵을 찾으려 하는 순간 눈앞에 있는 컵은 눈에 보이는 대로의 컵 이상이 아니다. 하지만 예술작품의 경우는 다르다. 눈앞에 보이는 물건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현실과는 다른 어떤 다른 상황이나 현실을 상상하게 만든다.

 

플라톤 이래로 현실과 가상의 문제는 예술 담론의 오래된 주제였지만 이 문제가 오늘날처럼 인구에 회자된 시대는 없었다. 누구나 알듯이 현실과 가상의 문제가 그 어느 때보다 화두가 되고 있는 까닭은 그것이 과거와 달리 단순히 예술적 담론의 영역을 넘어 직접적 현실의 테마가 되었기 때문이다.

 

 

 

 

 

제프리 쇼  「읽을 수 있는 도시」 연작, 1989~1991년

 

제프리 쇼의 <읽을 수 있는 도시>는 가상현실 예술의 고전이다. 이 작품의 관객은 인터페이스로 제공된 자전거를 타고 암스테르담이나 뉴욕 맨해튼의 인터페이스로 제공된 자전거를 타고 암스테르담이나 뉴욕 맨해튼의 구조를 재현한 가상의 도시를 탐험하게 된다. (중략) 이로써 자전거 여행은 도시공간을 탐험하는 것이자 데이터베이스를 탐색한다는 의미를 갖게 된다. (64쪽)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처음 우리의 일상에 들어왔을 때, 아날로그 매체와 구별되는 디지털의 특성은 관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주위의 모든 것이 디지털화한 오늘날에 ‘디지털’은 딱히 새로울 것이 없는 일상이 되었다. 이미지를 텍스트로, 텍스트를 다시 이미지로 변환하는 디지털 기술은 일상으로 체험된다. 이제는 미디어가 의식을 지배한다. 전에는 텍스트를 통해 세상을 읽었다. 그러나 이제는 디자인에서 미감을 읽고, 게임에서 서사의 감각을 익히는 시대다. 문자의 자리에 사운드와 영상이 차지하고 있다.

 

'몰입기술'을 통해 현실의 주체는 가상의 세계에 입장한다. 우리가 잘 아는 '가상현실'이다. 또 영상인식, 위치추적 기술 등을 통해 현실공간에 가상의 좌표를 중첩시킴으로써 '증강현실'을 경험할 수도 있다. 이처럼 가상과 현실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진 상태가 발생한다. 이를 파타피직스(Pataphisics)라 한다. 형이상학으로 번역하는 메타피직스(Metaphysics)의 패러디다. 파티피직스는 초(超)형이상학이다. 실은 온갖 우스꽝스러운 부조리로 가득한 사이비 철학을 말한다.

 

'파타피직스'는 가상과 현실이 중첩된 디지털 생활세계의 존재론적 특성이자, 동시에 그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디지털 대중의 인지적 특성이기도 하다. (10쪽)

 

여기서 진중권은 가상과 현실이 중첩되는 상태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파타피직스를 내세웠다. 과거에 창조성을 대표하는 것이 메타포(비유)의 능력이었다면 오늘날 창조성을 대표하는 것은 파타포(Pataphor)의 능력이다. 디지털 테크닉이 보편화된 파타피직스의 세계에서 ‘현실-가상’의 이분법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는 폐기된 도식이 되었다.

 

 

 Scene #3  상상이 개입되는 현실  

 

모든 분야가 그렇지만 특히 사진의 영역에서 현실과 가상의 테마는 그 어느 분야보다 뜨거운 감자다. 사진이 태어난 이후 그 새로운 매체의 존재 이유가 ‘현실의 객관적 재현’에 있었다면 디지털 시대의 사진은 더 이상 그러한 존재 근거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이미 ‘사진의 종언’이 현실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사진작가들은 그러나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인다.

 

 

 

 

 

이명호  「나무... #3」  2013년

 

(이명호) 작가는 현실의 사물을 가상의 세계에 등록시킨다. 현실의 사물을 가상의 세계 속에 옮겨놓는 ‘가상현실’ 체험은 디지털의 일상이다. 사진은 예로부터 2차원 평면에서 3차원 공간의 깊이를 만들어내는 원근법적 재현의 모범이었다. 하지만 나무 뒤의 차단막은 공간의 깊이를 가진 배경을 깊이 없는 평면으로 만들어버리고, 그 결과 그 앞의 나무마저 입체감을 잃어 거의 회화처럼 보이게 된다. 이는 현실의 사물이 가상에 등록될 때 평면적 이미지의 옷을 입는 것과 비슷하다. (90쪽)

 

여전히 사진의 객관적 기록성을 고수하는 작가가 있는 반면 일군의 작가들은 디지털 테크닉을 사진의 해방으로 받아들이면서 미디어아트의 영역으로 건너갔다. 사진매체를 통해 현실과 가상 사이에서 새로운 현실을 구축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단지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아닌 우리의 상상력 혹은 욕망에 의해서 만들어진 세계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늘의 이 무미건조한 삶에 내일의 희망을 중첩시키면서 하루를 보낸다. 상상이 개입되지 않는 삶과 현실은 무의미하며 견딜 수 없다. 현실은 언제나 상상이 개입되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미디어는 양날을 지닌 칼처럼 우리의 현실에서 잔인할 정도로 욕망이 제거된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지만, 현실과 상상을 하나의 단일한 공간으로 중첩시킬 수도 있다. 미디어로서 사진은 디지털 사진이 출현하기 전까지는 주로 우리의 상상력이 제거된 적나라한 현실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사진을 더욱 더 그럴싸한 현실의 모습을 연출할 수 있다. 디지털 미디어의 등장을 통해서 현실과 가상이 겹쳐진 새로운 현실을 만드는 것이 더욱 용이해졌다.

 


 Scene #4  예술의 숙명은 가상과 현실의 간극 해소

 

미디어매체가 가상적인 지각을 가능하게 한다는 진중권의 지적은 가상현실과 관련 지어 볼 때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때 가상적이라는 말은 결코 말 그대로 ‘가상의’ 혹은 ‘가짜의’라는 말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몸에 너무 배어 익숙해진 지각들로부터 추방된 지각들의 부활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대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가상'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 앞에서 기술적으로 실현해나가야 한다. 우리가 '기획'(Projekt)이 되는 것이다.

 

‘디지털 가상’은 우리 주위와 내부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공허의 밤을 밝혀주는 빛이다. 우리는 “그런 무(無)에 대항하기 위하여 그 무 속으로 자신을 투사(기획)하는 전조등”이다. (55쪽)

 

즉, 가상이란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도 아니고 허구도 아닌 제3의 현실, 곧 중립적인 현실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예술가들이 작품을 통해서 보여준 가상현실은 바로 이러한 지각의 가능성과 맞닿아 있다. 예술이 미디어를 활용함으로써 관객과 작가의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다. 이른바 ‘쌍방향성’인데, 이를 통해 관객은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존재, 나아가 작품의 공동 창작자로까지 등장한다. 예술가가 만든 가상이 진짜인지 가릴 필요가 무의미해진다. 가상과 현실이 중첩되는 세계에 살고 있는 지금, 우리는 이미 현실이 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미디어로 이루어진 중립적인 현실을 순응하는 판단중지인 셈이다.

 

가상과 현실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중첩된 제3의 현실은 미래의 예술 활동을 위해서도 너무나 매력적인 공간이다. 켜켜이 쌓여온 전통의 중압과 역사적 상상력의 한계를 뚫고 나갈 수 있는 것도 이 제3의 공간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다.

 

원천적으로 디지털이란 낱말 자체는 불연속적으로 단절된 정보 처리 기술을 의미한다. 이 기술은 하나의 전체를 분할된 정보들의 종합으로 다룬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정보 처리 과정에서 조작과 변형을 가능하게 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미지는 오리지널과 외견상 분간할 수 없는 유사한 복제품을 생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래의 모습과는 무관한 전혀 다른 새로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디지털 이미지는 재현의 질서와 가상-현실 간의 경계를 해체시킨다. 모방에서 유래된 재현의 질서에서 벗어난 디지털 이미지는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오간다. 그것은 실재와 허구를 넘나드는 환영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과 같다. 그 속에 자신의 고유한 예술적 존재를 정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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