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여성 운동가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은 《여성의 신비》에서 이렇게 썼다.
* 베티 프리단 《여성의 신비》 (이매진, 2005)
이름도 붙일 수 없는 이 문제란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여성들이 이것을 표현하려고 애쓸 때 사용하는 단어들은 대체 어떤 것이었던가? 때때로 어떤 여성은 “무언가 공허하고…‥불완전한 기분이 들어요”라고 했다. 또는 “내가 존재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아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어떤 여성은 가끔씩 진정제를 사용해 그런 느낌을 희미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했다. [중략] 어느 여성은 때때로 감정이 너무도 격해져서 집을 뛰쳐나가 길거리를 돌아다닌다고 말했다. 아니면 집안에 처박혀 울기도 한다.[1]
1960년대 미국의 전업주부들은 집 안을 청소하고, 장을 보고, 자녀들을 돌보고, 남편의 곁에 누우면서도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문제’와 싸워야 했다. 세 아이를 둔 프리단은 당시 전업주부들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자살을 하는 사례가 빈번해지자, 우선 동창들을 인터뷰하면서 문제점을 밝혀냈다. 5년간 자료를 수집하고 조사한 끝에 그녀는 《여성의 신비》를 펴냈다. 이 책은 ‘어머니’ 또는 ‘아내’ 역할에 만족하는 여성들을 흔들어 깨운다. 이 책의 제목에 있는 ‘신비’는 미국 여성들을 괴롭히는 강박적 관념이다. 프리단은 여성을 ‘남편과 자녀를 뒷바라지해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고정관념이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제한한다고 주장한다. 《여성의 신비》에서 프리단은 여성들에게 여성을 신비화하는 사회적 고정관념을 넘어서서 주체성을 확립할 것을 호소한다.
* [구판] 로즈마리 푸트남 통 《페미니즘 사상 : 종합적 접근》 (한신문화사, 1995)
* [개정판] 로즈마리 푸트남 통 《페미니즘 사상 : 종합적 접근》 (한신문화사, 2000)
* 카트린 칼바이트 《20세기 여인들 : 성상, 우상, 신화》(여성신문사, 2001)
* 김호기 《세상을 뒤흔든 사상 : 현대의 고전을 읽는다》(메디치미디어, 2017)
프리단은 보부아르(Beauvoir)의 《제2의 성》을 읽고 여성 운동에 헌신하기로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페미니즘에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보부아르는 글을 쓰기 위해 결혼과 출산을 거부했다. 그녀는 전업주부의 일을 ‘여성 노예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2] 반면 프리단은 페미니즘과 결혼 및 가정이 공존하길 원했다. 여성의 경제적 · 사회적 자립이 가능한 가정이 그녀가 추구하는 이상향이었다. 70년대에 들어서자 프리단은 ‘중도적인 여성 운동’에 앞장섰다. 그녀는 자신이 창설한 전국여성조직(NOW, 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 회장직에 물러났고, 남성을 적대적으로 대하는 페미니스트들을 비판했다. 프리단은 1981년에 펴낸 <제2의 단계(The Second Stage)>를 통해 페미니즘 운동이 새로운 단계로 발전할 것을 촉구했다. 그녀는 이 책에서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사회를 원했으며 남성에 대한 투쟁적 여성 운동 노선을 포기하는 입장을 취했다.
* 스테퍼니 스탈 《빨래하는 페미니즘》(민음사, 2014)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엄마는 페미니스트》(민음사, 2017)
프리단은 직장과 집안일을 동시에 수행하는 슈퍼우먼(superwoman), 슈퍼맘(supermom)의 등장을 바랐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일과 가정 모두 다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여성을 부담스럽게 한다. 그리고 프리단이 지향한 슈퍼우먼은 ‘중산층 백인 여성’을 위한 대안적 역할에 불과했다. 프리단은 인종차별 · 성소수자 · 계급 문제 등 백인 여성과 직접 관계가 없는 사안에 소극적인 모습으로 나왔다. 특히 그녀는 페미니즘이 동성애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노선(레즈비언 페미니즘, Lesbian Feminism)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여성의 신비》는 약점이 있음에도 페미니즘 운동을 빛나게 해준 교과서로 추앙받는다. 이 책이 세상에 끼친 영향력은 인정한다. 그러나 이 책이 성전(聖典)으로 취급하는 것에 불편하다. 시대에 맞지 않는 그녀의 입장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또 《여성의 신비》 한 권으로 변화가 많은 프리단의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데는 부족하다.
* 나왈 엘 사다위 《스핑크스의 여인들》 (한마당, 1995)
《여성의 신비》보다 훨씬 늦게 나왔지만, 《스핑크스의 여인들》(원제: Femmes Egyptiennes)은 프리단의 책에 비견될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다. 이 책은 이집트의 여성 운동가 나왈 엘 사다위(Nawal El Saadawi)가 가부장제 사회로부터 억압받는 이집트 여성들과 상담했던 기록들을 정리한 것이다.

엘 사다위는 정신의학을 전공했으며 1969년에 <여성과 성(Women and Sex)>이라는 책을 발표하여 가부장제에 억압당한 여성의 성적 권리와 성생활을 공론화했다. 이 책이 엄청난 반응을 얻게 되자 이집트 정부는 그녀를 ‘위험인물’로 경계했다. 엘 사다위는 정부 권력층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성 운동을 펼쳤다. 여성 할례 금지 운동에 앞장섰으며 여성을 억압하는 종교를 거부했다. 결국 1981년에 그녀는 감옥에 수감되었고, 정부는 그녀의 집필활동을 전면 금지했다. 자국의 탄압으로 엘 사다위의 글은 이집트보다 유럽에 더 많이 알려졌다.
엘 사다위의 여성운동은 보부아르가 지향하는 여성운동과 여러모로 비슷하다. 엘 사다위는 여성의 희생을 부추기는 결혼 제도에 반대했으며 여성의 글쓰기 행위를 예찬했다. 여성의 글쓰기 행위는 여성의 자아실현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활동이다. 남성이 차지하고 만들어낸 ‘권력’은 여성의 창조행위를 막는다. 여성의 창조행위는 사회적 제도에 질식하여 죽어가는 여성을 진정한 ‘인간’으로 부활하게 만드는 힘이다.

엘 사다위가 《스핑크스의 여인들》을 집필하는 데 걸린 시간은 17년. 엘 사다위는 열여섯 명의 이집트 여성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그녀들의 우울증과 불안한 감정 등을 분석했다. 《스핑크스의 여인들》과 《여성의 신비》의 공통점은 모두 남성 위주 사회에 억압받는 여성들의 심리 상태를 파악하는 데 있다. 프리단과 엘 사다위는 여성의 정신 상태를 ‘정신병’과 ‘광기’로 규정하는 정신과 의사들의 섣부른 진단을 비판했다. 그리고 남성 중심의 프로이트 정신분석법의 한계를 지적했다.
프리단과 엘 사다위는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두 사람은 1985년 케냐 나이로비에 열린 세계여성대회에 참석했는데, 이 자리를 통해 엘 사다위는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어려움에 처한 팔레스타인 여성들의 문제를 공론화하려고 했다. 그런데 프리단은 엘 사다위가 발언을 하지 못하게 말렸다.
“그녀는 내가 팔레스타인 여성들에 관해 연설을 하려고 하자 말렸습니다. 그건 정치적 문제이므로 페미니즘과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했지요.” [3]
유대계 미국인이었던 프리단은 유대인 정통국가인 이스라엘의 편을 들었다. 그러나 프리단의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프리단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여성 차별에 대한 주제로 연설을 했다. 본인은 페미니스트로서 정치적 문제에 대해 발언을 해놓고선 엘 사다위의 발언을 제지한 것이다. 엘 사다위는 프리단의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식 태도에 실망했고 소신 있게 발언을 이어나갔다. 두 사람의 일화는 제1세계 페미니즘(유럽 백인 중심 페미니즘)이 제3세계 페미니즘을 대하는 시대착오적 반응을 잘 보여준다.
※ Trivia
알라딘에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를 검색하면 1996년 평민사 출판사에서 나온 판본과 2005년에 재출간된 이매진 출판사 판본, 두 권이 나온다. 검색 결과만 보면 1996년 평민사 판본이 ‘국내 첫 번역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1996년 번역본은 ‘중판’이며 초판은 1978년에 나왔다. 초판과 중판의 역자는 동일 인물. 그리고 이 책의 번역본 일부는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대모’ 이효재 이화여대 전 교수가 엮은 《여성해방과 이론과 현실》(창비, 1989)에 수록되었다. 1978년 평민사 판본의 4장을 발췌한 내용의 소제목은 ‘여성 자아의 위기’이다.

최근에 문 대통령 부부가 청와대를 방문한 이효재 씨를 만났다. 이효재 씨는 엘 사다위보다 3년 늦게 태어났고, 현재 나이는 93세이다. 세 분이 함께 모여 찍은 사진, 정말 보기 좋다.
[1] 《여성의 신비》 62~63쪽
[2] 《20세기 여인들》 78쪽
[3] 《20세기 여인들》 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