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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ㅣ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평점 :
입을 움직이지 않고 목소리를 내 마치 인형이 말하는 연기를 복화술이라고 한다. 남성 작가가 여성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일종의 복화술이다. 가부장제가 지배하던 당대 남성 작가들은 겉으로는 여성에게 목소리를 부여해 발언하게 하는 듯했지만, 사실은 교묘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남성 작가의 복화술은 여성의 발화를 원천 봉쇄한다.[1] 주체적으로 표현할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한 여성은 가부장제가 만든 울타리에 갇힌 채 ‘메아리 없는 절규’를 외친다.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7)은 이 시대 텅 빈 여성의 잃어버린 목소리, 그 메아리 없는 절규를 받아쓴 소설이다. 이 소설은 한 여인의 삶을 깨뜨리는 냉소적인 담화로 가득 차 있다. 여성이라면 이 소설을 읽을 때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작가의 담담한 문체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하고, 억압하는 것이 일상화된 사회를 폭로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서른네 살의 기혼 여성 김지영이다. 이름만 보면 그리 특이한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소설은 지영이 어느 날 갑자기 이상 증세를 보이면서 시작한다. 시댁 식구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친정엄마로 빙의해 가슴 속으로 꾹 삼켰던 말들을 쏟아 내뱉는다. 때에 따라 죽은 대학 동아리 선배가 되거나 어렴풋이 아는 다른 여성이 되곤 한다. 기이한 언행을 하는 아내가 걱정된 남편은 그녀의 정신 상담을 주선하고, 지영은 정신과 의사에게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소설은 어린 시절부터 학창 생활, 회사 업무 그리고 결혼 생활에 이르기까지 지영의 삶의 궤적을 사실감 있게 보여준다. 너무나도 평범해 보이는 김지영이란 사람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그녀가 이해할 수 없던, 그녀 주변의 남성들이 공감하지 못했던 여성으로서의 비감(悲感)이 느껴진다.
남성 입장에서는 여성으로서의 삶 자체가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남성은 여성의 현실이 아닌 자신들의 여성 판타지에만 공감하면서, 여성들이 느끼는 불편함을 무시해버린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여성차별과 여성 혐오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일상화돼 있어 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사실이다. 성범죄는 곳곳에 일상적으로 존재한다. 십 년 전에도 그러했고 어제도 그랬다. 스마트폰이나 초소형 카메라로 상대방의 동의 없이 사진 · 영상을 촬영하는 ‘몰카(몰래카메라)’ 성범죄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몰카 성범죄는 공중화장실, 사우나, 수영장, 탈의실 등 특정 장소는 물론이고 출퇴근길의 지하철이나 버스 안처럼 많은 사람이 밀집된 공간에서 자신이 찍혔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촬영이 되어, 불특정한 수많은 피해자를 낳는다. 몰카 성범죄 경우 다른 성범죄인 강간이나 강제추행보다 가벼운 혐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지영이 다니는 회사의 여자 화장실에 설치된 몰래카메라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한 남성 직원들은 몰카 성범죄를 ‘가벼운 일탈’로 생각한다.
“조사받은 남자 직원들이 우리한테 너무했대. 자기들일 몰카를 설치한 것도 아니고, 사진을 찍은 것도 아니고, 그냥 아무나 볼 수 있는 사이트에 올라온 사진 좀 본 거 가지고 성범죄자를 만들려고 한다면서. 사진 유포했잖아. 범죄를 방조했잖아. 근데 그게 잘못인 줄도 몰라. 완전히 개념이 없더라니까.” (155쪽)
남성 직원들은 몰래카메라를 설치한 남자 보안 요원이 찍은 사진을 돌려 봤다. 그들은 야동을 보며 멋대로 키워오던 성적 판타지를 실현했다. 그들의 말과 의식 속에 성범죄는 따로 있다. 성범죄는 너무나 더럽고 추악하고 끔찍한 것이기에 정신병자의 소행이 분명하다.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 그러나 내가 한 이 ‘가벼운 일탈’을 성범죄로 문제 삼는 피해자가 신경과민이다. 따라서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라는 결론을 낸다. 남성 중심의 문화에 익숙한 남성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데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남성 직원들은 성범죄의 방관자 혹은 공모자다. 이런 주장 뒤에는 남성들의 반발이 아우성칠 것이다. 그들은 페미니즘에 대한 두려움과 선입견을 품고 있다. 페미니즘이 여성의 피해의식 프레임과 결합하여 반남성주의적 담론을 형성한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82년생 김지영》이 ‘물 만난 고기’처럼 잘 팔린 책이 되었다고 말하여 어떤 이는 ‘여성의 피해의식으로만 가득한 최악의 소설’이라고 말했다. 이 책을 한 번 읽고 나서 평가하는 것과 아예 안 읽은 상태에서 평가하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남성 독자들이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적어도 다섯 번 이상 읽어보라!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는 성경 말씀이 있잖은가. 처음부터 끝까지 읽던 중간부터 읽던 계속 읽어라. 그러면 보일 것이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차별과 편견이 보이리라.
남성도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치 붕어빵 기계로 찍어놓은 듯 ‘판박이 남성성’에 맞춰 살아왔다. 페미니스트들은 남성들이 남성성이라는 정해진 틀을 강요당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따라서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성’을 비판할 뿐, ‘남성’ 자체를 악의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일부 남성들은 페미니스트가 ‘평범하고 착한 남성’들을 잠재적 성범죄 가해자로 매도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착한 남성’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착한 남성’은 여성에게 인정받으려고 만든 ‘남자다운 남성성’의 변형이다. ‘착한 남성’ 프레임은 남성들의 행동과 생각을 제한한다. 따라서 이들은 일상 속 성차별, 성범죄를 묵인한다.[2] 짝꿍인 남자 아이에게 괴롭힘을 당한 지영은 이미 어렸을 때에 ‘착한 남성’ 프레임이 여성의 고통을 공감하는 데 방해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남자애들은 원래 좋아하던 여자한테 더 못되게 굴고, 괴롭히고 그래. 선생님이 잘 얘기할 테니까 이렇게 오해한 채로 짝 바꾸지 말고, 이번 기회에 둘이 더 친해지면 좋겠는데.” 짝꿍이 나를 좋아한다고? 괴롭히는 게 좋아한다는 뜻이라고? 김지영 씨는 혼란스러웠다. (41쪽)
이 장면을 잘 살펴보면 데이트폭력을 당사자 간의 애정 문제로 가볍게 치부하는 인식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 있다. 안타깝게도 학교는 그릇된 성차(sexual difference)를 재생산되는 공간이다. 그래서 자기 아들이 ‘착하다고’ 믿는 부모는 자식이 여자아이를 심하게 괴롭히는 것을 단지 여자아이를 ‘좋아해서 시작한 아이다운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남자아이에게 괴롭힘당하는 여자아이와 남자친구가 휘두르는 주먹에 얼굴을 맞는 여자는 그 행위가 ‘폭력’이라고 인지하고 있지만, 자신을 향한 관심의 표현이고 과한 애정 때문이라는 생각에 개인이 감당해야 할 상황으로 받아들인다. 성차에 기인한 젠더 폭력(gender violence)이 ‘착한 남자’ 프레임에 가려지면, 그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 문제는 비단 남성이 저지르는 착각의 제가 아니다. 여성도 프레임의 덫에 한 번 빠져버리면 성차 문제에 둔감해진다. 혼자 귀가하다가 자신을 쫓아오는 남학생에게 봉변당할 뻔한 지영의 곁에 있어 준 여자의 위로는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가벼운 말이 아니다.
“세상에는 좋은 남자가 더 많아요.” (69쪽)
이 ‘좋은 남자’라는 표현은 자신을 ‘착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남성들이 선호하는 단어다. 하지만 그들은 여성 혐오와 폭력 앞에 서면 소극적인 자세를 취한다. ‘착하고 좋은 남자’들은 여성 문제를 몇몇 나쁜 남성, 예외적 남성이 저지르는 일이라고 본다.
《82년생 김지영》은 페미니즘을 표방한 소설이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온건적 페미니즘)’에 위치한다. (물론, 내 주장이 옳다고 볼 수 없다. 책과 페미니즘을 바라보는 관점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또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다)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은 개인의 자유와 자아실현을 강조한다. 그래서 여성의 사회진출과 성공을 가로막는 관습적, 법적 제한이 여성의 남성에 대한 종속의 원인으로 보고 줄기차게 비판한다. 작가는 이야기에 각종 도서, 신문 기사, 통계 보고서 등 객관적 자료들을 적절히 배치했다. 여성을 불편하게 만드는 다양한 사회 문제를 부각하는 작가의 의도는 좋다. 하지만 작가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암시하는 복선이나 결말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혼란스럽다. 작가는 여성을 억압하는 그릇된 사회 구조를 직시하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82년생 김지영》은 여성 개인의 자아실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들’[3]을 전달하는 데 그친다. 이것이 ‘급진적 페미니즘’ 관점으로 지적할 수 있는 《82년생 김지영》의 한계다.
김지영의 잃어버린 목소리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여성’의 것인가. 국내에 거주하는 이주 여성, 귀화 여성도 여성 혐오 대상이 되고, 가정 폭력의 희생자가 된다. 우리 사회에서 외국인 아내는 법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언어 문제로 한국인 남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런 외국인 아내의 취약성(발화불가능)을 담보로 한 불평등한 부부관계가 폭력과 살인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망하기 사흘 전에 스물두 살(1986년생, 그녀가 현재 살아있다면 서른 한 살이 된다)의 베트남 여성 쩐타이란 씨는 일기장에 이런 말을 남겼다. 그녀는 남편의 폭력을 견디지 못해 한국에 온지 1주일 만에 이혼했다.[4]
“자기들이 필요해 베트남으로 와서 결혼하자고 한 게 아닌가. 우리는 누구나 똑같은 인간이다. 단지 국적만 다를 뿐이다.”
여성이 살기 어려운 대한민국의 현실은 소설보다 더 냉혹하다.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도식화된 이분법에 익숙한 남성중심 사회에 분노하는 것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여성의 목소리이자 '정당한 무기'다. 하지만 이 ‘여성의 무기’를 손에 대지 못한 채 소외되는 여성들도 있다. 과연 이들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자신이 ‘김지영’이라고 말한다. 이 책을 공감한 사람들은 ‘우리 모두의 김지영’이 된다. 조남주 작가와 독자들에게 묻고 싶다. 86년생 쩐타이란 씨도 ‘우리’에 포함되는가? 페미니즘을 공부한다는 것은 다양하고 복잡한 섹슈얼리티 이슈와 얽힌 고민의 끈을 계속 부여잡는 일이다. 페미니스트는 인종과 계급을 넘어 여성이 연대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한국 여성=김지영’이라는 도식적인 형태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 ‘김지영 신드롬’이 진지한 성찰 없이 ‘한국 여성들만의 공감과 분노’에 그친다면 《82년생 김지영》은 실패한 페미니즘 소설이다.
[1] 엘리자베스 D. 하비 《복화술의 목소리》 (문학동네, 2006)
[2] 토니 포터 《맨 박스》 (한빛비즈, 2016)
[3] 베티 프리단 《여성의 신비》 (이매진, 2005)
[4] [죽거나 죽이거나 ‘이주여성 잔혹사’]
(시사인, 2009년 3월 5일 / '북플'에서 링크 기능 X)
이 기사에 언급된 '쩐타이란'은 가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