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ㅣ 도란스 기획 총서 2
권김현영 엮음, 권김현영.루인.엄기호 외 지음 / 교양인 / 2017년 5월
평점 :
한국사회의 가부장적 아버지상의 해체는 90년대 말 압축 성장 신화가 붕괴한 IMF 체제를 통과하며 이루어졌다. 한국의 남성은 경제성장의 주체였고, 그들의 퇴장은 가부장제의 몰락이기도 했다. 때맞춰 발간된 김정현의 《아버지》(문이당, 1996)는 외환위기를 거치며 직장과 가정에서 동시에 밀려나 갈 곳을 잃고 몰락한 가부장의 뒷모습을 애처롭게 조명했다. 그러나 성의 경계, 전통적 가부장이 몰락한 최근에도 여전히 시대착오적인 가부장 아버지들이 대중문화에 등장하기도 한다. 아직도 TV 드라마는 왕좌 같은 소파에 근엄하게 앉아 버럭 소리를 지름으로써 모든 갈등을 일시에 중지시키거나 해결하는 힘을 과시하는 아버지들을 등장시킨다.
드라마 속 아버지의 모습은 점점 희미해져 가는 ‘(거칠고 권위적인) 남성성’을 지키려 하는 한국 남성의 모습을 닮았다. 잃어버린 남성성을 회복하고 싶은 한국 남성들은 여권 신장 등 사회적 변화를 거부하고 ‘남성의 위기’를 불러온 원인을 여성에게 돌린다. 한국 남성은 자신의 시들어가는 남성성을 확인하기 위해 여성을 혐오하고 물리적 · 언어적 폭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자신들이야말로 여권 신장 시대가 낳은 희생양이며 점점 설 자리가 잃어서 먹고 살기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그동안 책과 언론은 ‘남성성의 허상’에 대해 끊임없이 제기해왔지만, 대부분 한국 남성들은 여전히 현실적인 문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교양인, 2017)는 한국 남성들이 어떻게 남자로 만들어져 가는지를 규명한 흥미로운 책이다. 정희진과 권김현영은 ‘식민지 남성성’이 어떤 방식으로 일제 강점기 시대의 조선 남성들에게 영향을 줬는지 논의했고, 루인과 한채윤, 준우는 트랜스젠더 남성 · 여성과 레즈비언을 ‘비정상’으로 규정하게 만드는 ‘남자다움’과 이성애 제도의 문제점을 들춰낸다. 엄기호는 남성성을 ‘어디서나 통할 수 있는 보편성’으로 인식하는 남성 권력을 분석한다.
일제 강점기 조선 남성 지식인들은 ‘피식민지인’의 설움을 강한 남자의 힘으로 극복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그들이 동경한 것은 ‘일제가 조선에 이식한 근대화’였고, 나라를 빼앗긴 수치심을 참지 못한 조선 남성들은 자신을 ‘식민지 남성(일본)에게 패배한 피해자’로 인식했다. 거대한 제국주의 앞에 한없이 쪼그라든 식민지 남성들이 자기 비하감에 젖어 드는 것은 당연한 일. 조선 지식인 및 문필가들은 자신의 위축된 남성성을 자조하며 시대의 아픔을 기록했고 문학과 예술로 승화시켰다.[1]
남의 나라 식민지 노예가 되고 동족끼리 피 흘리는 전쟁을 경험한 한국 남성들은 ‘강인한 남성성’을 원했고, 우리나라 특유의 군사 문화는 한국 남성의 남성성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국가의 부름을 거절하는 남성은 국가 정책에 거스르는 ‘비(非) 국민’이 된다. 군대를 다닌 남성은 국가 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핵심 노동 자원이 되는 순간 ‘한국 남성’으로 개조된다. ‘남성적 민족성’이 강조되면서 여성은 노동하는 능력이 있음에도 ‘한국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지 못한다.[2] 미필 남성, 동성애자 남성, 장애인 남성 등은 ‘한국 남성’을 상징하는 지배적 남성성보다 아래에 있는 ‘주변적 남성(성)’으로 전락한다.[3] 군대를 다녔고, 노동함으로써 ‘국민’으로 인정받은 한국 남성들은 자신의 위치를 당연하게 여겼다. 그리고 청춘을 군대에서 보내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면서도 ‘군대에서 허비한 시간과 경험’을 보상받기를 원했다. 군대 간 남성들이 군 가산점제 부활을 요구하는 것도, 잊을 때마다 여성 징병제를 주장했던 이유가 바로 그런 것이다. 한국 남성은 사회뿐만 아니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까지 구획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게 되었고, 남성성을 위협하는 동성애와 트렌스젠더를 인정하지 않았다. 트랜스남성(female-to-male transgender: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전환, 남성 성 정체성을 가진 트랜스젠더)은 ‘남자다움’을 강조하는 남성 집단으로부터 배척받는 주변적 남성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한국 남성’이 되기 위해 단련된 근육으로 섹스어필하는 남성상, 가부장적 남성성을 모방한다.[4]
현대의 남성성은 오랜 기간에 걸쳐 제도화되었다.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 다방면에 걸쳐 형성된 ‘남자다움’에 대한 오해와 허상으로 인해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 동성애자, 트랜스젠더도 자유롭지 못했다. 21세기는 남성성이 소용없는 시대다. 남성들은 지금까지 알고 있는 ‘남성성’을 죽이고 ‘남성’이 아닌 또 한 명의 좋은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 한국 남성의 적은 여성이 아니다. 남성성은 ‘남성’을 치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편협하고 이기적인 환영(幻影)이다. 남성성을 죽이자! 남성성은 우리 모두(남성, 여성, 동성애자, 트랜스젠더)의 원수다.[5]
[1] 2장 근대 전환기 한국의 남성성 (권김현영)
[2] 4장 보편성의 정치와 한국의 남성성 (엄기호)
[3] 1장 한국 남성의 식민성과 여성주의 이론 (정희진)
[4] 6장 트랜스남성은 어떻게 한국 남자가 되는가 (준우)
[5] 디시 인사이드 갤러리에 유행했던 짤방에서 나온 말 ‘개미를 죽입시다. 개미는 나의 원수’를 패러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