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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설계자들 - 학병세대와 한국 우익의 기원
김건우 지음 / 느티나무책방 / 2017년 3월
평점 :
우익은 크게 보면 보수주의로 불린다. 한국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빨갱이 콤플렉스’가 형성되면서 좌파보다는 좌익이라는 개념으로, 우파보다는 우익이라는 개념이 고착되게 되었다. 중장기적으로 보면 우리 사회에도 성숙한 이념논쟁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우리 실정에서는 정책적 쟁점을 중심으로 채 논쟁도 하기 전에 ‘가짜 뉴스’를 동원한 ‘이념 갈등’이 시작된다. 이 ‘이념 전쟁’을 보면서 우리는 도대체 무엇이 좌파이고 무엇이 우파인지, 진보가 무엇이고 보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혼란스러워한다. 그것은 이념논쟁을 벌이는 측에서 명확한 자기 정의 없이 좌파와 같은 개념이 한국의 특수적 상황에서 가지는 부정적 이미지만을 상대방에게 덧씌우려 하기 때문에 나타난다. 극우파들은 자신들과 다른 입장을 표명하면 무조건 ‘적’이라는 극단적인 사고를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래서 이념적으로 가장 오른쪽에 치우쳐 있던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자신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모든 입장들은 좌파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상황이 이렇기에 《대한민국의 설계자들》(느티나무책방 · 2017)의 저자는 무지와 왜곡, 오류로 뒤범벅이 된 대한민국 현대사를 바로잡는다. 그리고 장준하, 안창호, 김교신, 류달영, 류영모, 함석헌, 강원용, 김수환 등 20세기가 배출한 걸출한 지식인들의 삶과 노선, 업적을 통해 대한민국 우익 계보를 재정립한다. 한국에서 현대적 의미의 이념 갈등은 일제 식민지배 시기에 시작됐다. 독립 운동가들이 광복 후 대한민국의 미래상을 그리면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수립을 지향하는 우익과 사회주의국가의 수립을 지향하는 좌익으로 나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분단의 씨앗은 이미 이 시기에 뿌려졌다고도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은 평안도와 황해도를 아우르는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및 종교 활동을 전개한 지식인과 종교인들에 주목한다.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대 초반까지 종교계의 월남행렬이 줄줄이 이어졌다. 이는 북한의 종교탄압과 직접 관련이 있었다. 특히 평안도를 중심으로 번창한 우익 기독교 세력이 대거 월남 길에 오르면서 남한의 우익 세력과 만나게 되는데, 이들 세력에게는 모두 ‘반공’이라는 공통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 건국과 통일의 방략을 놓고 좌우익 이념대결은 치열하게 벌어졌다. 결국, 반공 · 친미의 깃발 아래 대한민국의 건국을 지지하는 이승만 세력이 주도하게 된다. 여기에 친일파들은 친미세력으로 모습을 변신했고, 그 이후에는 이승만 세력에 협조하며 기득권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들은 친일 행적의 치부를 덮기 위해 반대 노선을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통해 한반도에 단일국가를 세우자는 김구 세력을 ‘용공’으로 몰아세웠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이승만 노선이 사실상 ‘국시(國是)’로 받아들여졌고 김구 노선은 김구의 본질적 보수성에도 불구하고 ‘용공’으로 분류되었다. 이 혼잡한 해방 전후기 속에 ‘학병 세대’가 대한민국 건국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는 적격자로 등장했다. 학병 세대가 대학에 입학할 즈음은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몰려 학병이나 징용으로 징발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피하고자 몸을 숨기거나 탈영하여 광복군에 합류하기도 했다. 이들은 친일과 용공 세력과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건국 활동을 주도할 수 있었다. 학병 세대의 대표적인 사람들이 장준하와 김준엽이다. 이 두 사람은 1950~60년대 우리나라 지성계를 이끌었던 월간지 <사상계> 창간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다. <사상계> 발행인 장준하를 비롯한 잡지 편집 및 필자로 참여했던 김준엽, 함석헌 등은 모두 평안도 출신이다. 이들은 안창호가 강조한 민족주의와 ‘실력양성론(개인의 수양을 통해 민족의 힘을 기르자는 독립 운동 전략)’을 계승하여 민족의 문화, 사회, 경제적 자강을 목표로 하는 대한민국의 미래상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흑역사’가 있다. 함석헌을 제외한 일부 <사상계> 그룹은 박정희의 5 · 16 군사 쿠데타를 4 · 19혁명의 연장으로 이해했다. <사상계>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서북 출신 우익 지식인들은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배척당했고, 야당 세력으로 밀려났다. 그들은 박정희 정권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국가와 민족의 근대화’를 달성할 수 있을 거로 봤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우익의 혁신 세력을 철저히 탄압하면서 이승만 정권의 ‘국시’를 부활시켰다. 서북 출신 우익 지식인들은 ‘반공’이라는 명분으로 민주주의적 자유를 억압하는 유신 정권과 맞서 싸웠지만, 그들의 ‘근대화론’이 유신 정권의 ‘근대화 프로젝트’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줬던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극우파들은 박정희 정권이 조국 근대화에 기여했고, 군사 쿠데타를 국가와 국민을 가난과 부정부패에서 구한 ‘구국의 혁명’이라고 찬양한다. 친박 세력은 박정희가 이루려 한 근대화의 핵심은 박정희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전두환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박정희의 조국 근대화 과업을 자신이 완성했다고 자평했다. 지랄도 풍년이다. 제2공화국 장면 내각제 시절에 이미 경제개발계획이 입안되었다. 제2공화국의 경제개발계획에 서북 출신 우익 지식인들도 직접 관여했다. 그 당시 지식인과 정치인들은 경제개발계획에 대한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장면 정권이 추진하려고 했던 경제개발계획을 이어서 진행했다. 이러한 ‘사실’이 분명히 남아 있는데도 여전히 박정희를 ‘근대화의 영웅’으로 미화하고, 기념하는 세력들은 김씨 일가를 ‘북조선 민족의 영웅’으로 떠받드는 북쪽 세력과 다를 바 없다. 역사를 망각한 사회는 전망이 없다. 현대사는 국가 정통성의 자랑스러운 증거가 될 수 없다.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진상이 많은데도 너나 할 것 없이 더 잘 안다고 주장하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그리고 극우파들은 자신과 반대되는 역사관을 ‘빨갱이’라고 매도한다. 그래서 ‘이념 색깔’로 덧칠되어 보이지 않았던 현대사의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의 가치는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