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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이 건넨 네 글자 - 생각을 잊은 인생에게
정민 지음 / 휴머니스트 / 2016년 1월
평점 :
신년이 다가오면 여기저기서 사자성어들이 등장한다. 학자와 정치인, 관료, 법조인, 기업인까지 경쟁적으로 어려운 사자성어들을 쏟아낸다. 교수들이 모여 ‘올해의 사자성어’를 정하기도 한다. 모두 그 어렵다는 주역과 논어, 맹자를 비롯해 도덕경, 손자병법까지 경쟁적으로 원문을 뒤져 새해를 예견하고 지나간 세월을 정리하고 있다. 한국 사정을 잘 모르는 외국인이 본다면 한국인들은 모두 동양고전에 박식한 ‘인문학 민족’으로 비칠 정도다. 일부 고사성어의 경우 말하는 사람이 정확한 뜻을 알면서 한 것인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억지로 끼워 맞춘 듯한 구석도 있으니 문제다. 무엇보다 높으신 분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힘든 일반인들로선 사회의 리더들이 꼭 이런 식으로 유식을 뽐내야 하는지 생각해볼 문제다. 어려운 성어의 ‘겉멋’보다 그 속에 담긴 뜻을 살리는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 우선이다.
서양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은 성경과 셰익스피어라고 한다. 우리는 속담이나 사자성어를 많이 인용한다. 인용문의 힘은 상대를 내 편으로 만드는 데 효과적이다. 인용문은 지극히 감성적인 효과를 지닌다. 상당히 논리적인 말을 인용하더라도, 인용문이 가지는 후광효과에서 이미 우리의 감성이 자극된다. 특히 사자성어 인용문은 상대의 관심을 끌어내는 것은 물론 짧은 메시지로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 데 유용한 무기가 된다. 그 역량의 중심에는 독서와 인용 노트 작성, 상황을 고려해서 미리 인용문을 준비하는 계획이 있다. 평소 책을 읽다가 좋은 말이 있으면 그것을 기록한다.
인간의 뇌는 정보에 따라 반응한다. 지식은 대개 독서를 통해 입력된다. 오근독서(五勤讀書)라는 것이 있다. 중국 역사학자 리핑신이 오근독서를 즐겼다. 부지런히 읽고, 부지런히 초록해 베껴 쓰며, 부지런히 외우고, 부지런히 분류해서, 부지런히 편집해 정리한다. 리핑신은 좋은 문장을 따로 기록한 것들을 취보합(聚寶盒)이라는 이름의 그릇에 보관했다. 그는 그릇에 담은 메모들을 소중한 보물로 여겼다. 연구하다가 필요한 자료를 찾을 때 취보합을 이용했다. 우리도 보물을 모을 수 있다. 이른바 인용 노트를 만드는 것이다. 자신에게 처할 주요 상황별로 카테고리를 만들어두고, 그에 어울리는 인용문들을 평소에 하나씩 기록해서 모으면 나중에는 엄청나게 중요한 자산이 된다.
인용 노트를 작성하는 일은 생각보다 재미있다. 그렇지만 베껴 쓰면서 정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많아질 수 있다. 처음에는 필기로 인용문을 정리했지만, 지금은 한글 워드로 입력한다. 주로 다섯 줄 이상의 인용문을 모아 둔다. 컴퓨터 자판 입력 속도가 비교적 빠른 편인데도 1시간 걸린다. 인용문 중에 불필요한 문장을 추려내면서 재편집하는 과정에 많은 시간을 들인다. 그런데 가끔 이 일이 귀찮게 느껴질 때가 있다. 딴생각이 많아지면 책 읽는 속도가 급격히 떨어진다. 이럴 때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인용문을 정리하면 되는데, 이 일마저도 집중하지 못한다.
독서를 게을리하는 일은 변덕스러운 장마와 가뭄을 만나 농사짓는 시기를 잃는 것과 같다. 책을 읽는 일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읽은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활용해야 한다. 옛사람은 농사일하다가 공부에 관한 생각이 퍼뜩 떠오르면 나뭇잎을 따서 그 생각들을 얼른 적었다. 그리고 그 나뭇잎을 항아리에 보관했다. 이덕무와 박지원도 이런 습관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책 한 권을 읽는 도중에 메모나 밑줄 긋기를 하지 말라고 권한다. 책 읽다가 메모하면 책의 내용에 몰입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문장을 발견하면 그냥 지나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책을 다 읽고 나면 그 인용문의 존재감을 잊어버린다. 인용문을 찾기 위해서 책을 다시 읽어야 한다. 다 읽은 지 얼마 안 된 책을 다시 펼치는 건 시간 낭비다. 그래서 책 속에 중요한 문장을 발견하면 메모하는 대신에 쪽수만 기록한다. 나중에 인용문을 찾고 싶으면 쪽수를 보고 책을 펼치면 된다.
중국의 서석린(1873~1907)은 삼심양합(三心兩合)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삼심이란 책을 읽을 때 지녀야 할 세 가지 마음가짐으로 전심(專心), 세심(細心), 항심(恒心)을 말한다. 전심은 잡념을 버리고 오직 책에만 몰입하여 읽는 것이다. 세심은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정독하는 것이다. 항심은 꾸준하게 책을 읽는 마음이다.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는 것처럼 책도 그렇게 꾸준히 읽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삼심에 다른 두 가지를 결합시켜야 하는 것이 양합(兩合)이다.
선현들이 독서에 대해 남긴 글을 보면 한결같이 강조한 내용이 있다. 정독의 한 방편으로 권장되는 다독의 효과, 의심과 질문을 통해 확장되는 생산적 독서 훈련 등이 그것이다. 독서를 제대로 하려면 다독, 낭독 훈련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여기서 말하는 다독은 많은 책을 폭넓게 읽는 것이 아니라, 읽은 책을 또 읽고, 또 읽는 다독이다. 책 많이 읽고 깊은 감화를 얻으면 저절로 똑똑해지게 될까? 아니다. 습관적 독서는 좋지만 기계적 독서는 좋지 않다. 무조건 책을 ‘먹어치우게’ 강요하는 것은 책을 싫어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독서의 즐거움이 먼저다. 독서처럼 돈 들지 않는 오락도 없고, 독서처럼 오래가는 기쁨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