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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밥도둑
황석영 지음 / 교유서가 / 2016년 3월
평점 :
선우를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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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팔’ 선우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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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널’ 선우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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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부르는 선우도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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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해설)하는 선우 또한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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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찾는 선우가 누구인지 제 얘기 한 번 들어보시렵니까?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어서
쓸쓸한 저녁을 맞는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
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서로 좋구나
(백석 ‘함주시초-선우사’ 중에서, 《정본 백석 시집》 83쪽)
‘맛은 육신과 정서에 사무친다. 먹을 때는 생활이고 먹고 싶을 때는 그리움이다. 맛은 관념이나 추상이 아니고 삶과의 맞대면이다.’ 작가 김훈은 소래섭의 《백석의 맛》에 붙인 꼬리말에서 이렇게 썼다. 사실이다. 어느새 우리는 이런 궁핍했던 시절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옛 맛을 찾게 되니 말이다. 음식에도 사연이 곁들여지면 그악스럽게 먹어도 부끄럽지 않고 조악한 푸성귀 몇 잎에조차 행복해진다. 백석의 ‘반찬 친구(선우, 膳友)’는 가자미다. 백석은 가자미 반찬을 사람들과 어우러지는 친근한 대상처럼 묘사했다. 시인에게 반찬은 허기를 달래주는 음식이 되고 고독을 잊히는 친구가 된다.
맛에 대한 기억은 경험에서 비롯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맛은 각자의 혀에 코와 기억으로만 느낄 수 있다. 백석은 이 오묘한 상황을 불현듯이 실감했다. 우리에게 흰밥과 가자미는 어쩌다 먹는 별미지만, 백석에게 그것은 행복했던 유년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행복의 기억을 덤덤하게 곱씹는데 이만큼의 이야기들이 나오는가 보다. 백석에게 가자미가 있다면, 황석영에게는 굴비가 그런 음식일 게다. 고추장에 담근 굴비는 기억 속에 희미해진 작가와 어머니의 소중한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무더운 여름날에 입맛이 없을 때 찬물에 밥을 말아서 찢어놓은 구운 굴비와 열무김치를 먹으면 식욕이 왕성해졌다고 기억한다. 이만한 밥도둑이 또 어디 있을까.
그렇지만 《황석영의 밥도둑》에서 우리의 미각과 후각을 유혹하는 밥도둑들은 주인공이 아니다. 진짜 주인공이 따로 있다. 바로 밥도둑들의 유혹을 그리워하는 우리다. 백석은 ‘쓸쓸한 저녁’을 맞이하면서 진짜 밥도둑이 실은 가자미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밥도둑은 원래 일하지 않고 놀고먹기 만하는 한량을 의미한다. 시인은 밥상에 오른 가자미를 보면서 자신을 위해 뒷바라지한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을 것이다. ‘반찬 선(膳)’은 ‘희생’을 의미하는 한자다. 가자미는 시인의 입맛을 살리기 위해 한 몸 바쳐 희생했다. 어머니는 까다롭고 철없는 어린 미식가를 위해 부엌에서 적지 않은 희생의 시간을 보냈다. 싱크대가 없던 시절 우리네 어머니들은 쪼그리고 앉아서 수만 번 도마 위에 칼질하고, 수만 번 쌀을 씻고 밥을 안쳤다. 어린 밥도둑이었던 황석영은 굴비 반찬이 그렇게 맛있었던 이유를 이해하는 데 50여 년이 걸렸다. 작가의 어머니는 고추장 범벅이 된 갈비를 직접 손으로 찢었다. 이런 희생과 정성의 손맛이 굴비 조각 속으로 배어 들어가면 별식이 만들어지는 법이다. 아무리 까다로운 미식가라 하더라도 최고 음식을 꼽으라면 유명한 조리사가 만든 음식이나 산해진미가 아닌, 어머니 손맛을 꼽는 것을 봐도 그렇다.
부모는 우리 모두 미식의 스승이다. 우리는 성장하면서 부모의 맛을 닮아간다. 작가는 연인의 돌아가신 아버지가 제일 좋아했던 장아찌를 먹어본다. 그 과정에서 궁핍 속에서 살아남은 아버지가 흘러내렸던 짭짤한 땀 맛을 안다. 그러면서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유별난 사랑을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장아찌와 밥 한 덩이는 고통의 맛을 잊게 해주는 아버지의 유일한 반찬 친구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배워 온 기억의 재현을 통해 우리는 맛을 알아간다. 아니 단순히 맛을 알아간다는 차원을 넘어 부모님을 이해하고 닮아가고 있는 것이고, 동질감을 느낀다. 부모와 자식 간 정이 음식으로 통하는 것을 보면, 음식만큼 정을 나누고 마음을 통하게 하는 것도 없는 것 같다.
작가에게 음식은 ‘음식’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바로 ‘우정’과 ‘나눔’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 김용태와 함께 먹었던 부대찌개, 감자탕, 낙지볶음은 작가의 추억을 뜨끈하게 하는 반찬이다. 소주와 곁들인 이 저녁 음식들에는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충만하게 만드는 그 무언가가 있다. 그 속에 친구의 이야기가 채워져 있다. 작가는 날이 추워지면 부대찌개를 찾는다. 친구는 작가의 결핍을 채워주는 반찬(膳) 친구를 선물(膳)로 주고 떠났다. 오랜만에 만난 반찬 친구는 또 다른 친구의 추억을 낳는다. 추억이라는 놈은 그것이 기쁜 것이었든 슬픈 것이었든 이미 지나간 일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기에 불쾌한 녀석이 아니다.
백석의 「선우사」 마지막 두 행은 험한 세상과 대면하려는 시인의 자존심이 드러난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함주시초-선우사’ 중에서, 《정본 백석 시집》 84쪽)
특별한 반찬이 없어도 밥을 잘 먹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과 함께 밥을 먹으면 아무리 배가 불러도 다시 숟갈을 들게끔 식욕을 생기게 한다. 아마도 백석과 황석영이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다. 다만, 백석이 정다운 마음으로 대화를 시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방적으로 자신의 처지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황석영은 맛을 보면서 입 안에 맴도는 추억을 더듬는다. 맛있는 음식에는 함께 나누어 먹는 사람과의 친밀성이 담겨 있다. 그것이 맛의 기억을 최상으로 만든다. 아무리 배불러도 맛있던 기억은 소박한 밥상을 그립게 한다. 먹는 행위는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거나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매 순간 살아있음을 생의 의욕을 잃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친구 같은 음식에 대한 사람의 감정에는 권태가 없다. 내 마음을 훔치는 밥도둑과 함께 하면 누구 하나 부럽지 않다.
그런데 ‘먹고사니즘’에 사로잡혀 치열하게 살다 보니 음식의 진정한 소중함을 잊고 지냈다. 음식이 풍족한데도 나를 즐겁게 해준 밥도둑을 다시 만나지 못한다. 외로운 우리는 텔레비전에 갇혀 남이 먹는 행위를 보면서 위로받으려고 한다. 텔레비전 화면에 ‘어머니의 손맛이 있는 음식’을 먹는 연예인의 모습을 본다고 해서 어머니의 손맛을 느낄 수 없다. 우린 이제 그 음식을 먹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먹방 열풍’과 유명 음식점을 알리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더 이상 맛있는 추억을 공유한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현실적인 한계를 회피하기 위한 자구책이다. 먹고 노느라 바빴던 밥도둑(한량)은 이제야 맛있는 추억을 간직한 밥도둑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그럴수록 경제적 여유 걱정하지 않고도 정겨운 추억을 나눌 수 있는 반찬 친구가 간절하게 그리워진다.
보고 싶다, 내 밥도둑 선우야!
※ 서평대회 이벤트에 응모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