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동주 따라 필사하기 세트 - 전2권 (쓰고 읽는 필사본 + 시집) -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ㅣ 시인의 필사 향연
윤동주 지음 / 스타북스 / 2016년 2월
평점 :
품절
책은 직접 눈으로 보면서 확인한 뒤에 사야 한다. 아주 단순하고 자명한 진리인데도 실제로 하지 않는다. 자세히 살피지 않고 책을 주문하면 실제 모습에 크게 실망할 때가 있다. 그 뼈아픈 교훈을 어제 겪었다. 필사하고 싶은 어머니를 위해서 《동주 따라 필사하기》를 주문했다. 그런데 알라딘에 있는 사진을 믿고 주문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어머니가 필사 책에 썩 만족스럽지 못한 반응을 보였다. 어머니는 글자 크기가 작고, 종이의 여백이 너무 넓은 점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나는 필사를 안 하려면 책을 팔자고 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내 제안을 반대했다. 새 책을 쓰지도 않고 파는 것이 너무 아까운 마음이 들었는가 보다. 언젠가 쓰게 될 날이 있으니 팔지 말고 따로 보관하자고 말했다. 우리 집에서 가장 합리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생각했던 어머니도 이처럼 올바르지 않은 선택을 하게 된다. 내 말이 이해가 안 되는 분은 리처드 탈러의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리더스북)을 꼭 읽어보시길.
나는 ‘시를 써보면 시인이 된다’라는 출판사의 카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시를 직접 써봐야 시인이 되지, 시를 똑같이 옮겨 쓴다고 해서 시인이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들은 습작 시절에 다른 작가의 글을 필사해서 작문 실력을 향상하는 훈련을 한다. 그렇지만 작년 신 모 작가 표절 파문으로 인해 필사 훈련의 맹점이 드러난 이상 필사를 특별하고 대단한 행위가 아니다. 필사는 특별하지 않다. 그냥 평범한 기록 행위일 뿐이다.
읽기 위해서 따로 만들어진 시집의 상태는 무난하다. 그런데 필사 책의 내부 구성에 대해서 보는 사람마다 호불호가 생길 듯하다. 필사 책 펼치기가 편해서 좋지만, 너무 힘을 주면서 사용하면 종이가 쉽게 떨어져 나갈 수 있다. 필사 책의 겉표지가 잘 벗겨진다. 겉표지를 벗긴 상태에서 쓸려고 해도 필사 책에 책등이 없어서 오래 보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필사 책에 있는 시의 글자 크기가 작다. 노안이 있는 분들에게는 답답해 보인다. 시의 글자 크기가 작아서 그런지 필사할 수 있는 종이의 여백 공간이 상대적으로 넓게 느껴진다. 어머니는 몇 줄 안 되는 시 한 편을 필사하면 여백이 남을까 봐 염려했다. 글씨체를 작게 쓰는 사람들 처지에서는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한다. 어떤 사람은 종이 여백이 어중간하게 남아 있는 상태를 못 참기도 한다. 시구를 반복해서 쓰면 종이 한 면 전체를 다 쓸 수 있다. 그런데 종이 여백을 처리하려고 문장을 반복하면서 쓰게 되면 억지로 하는 것 같은 부담감이 느껴진다. 이럴 바에 자신에게 맞는 종이나 공책을 구해서 필사하는 것이 더 편하다.
필사 책 뒤편에는 장시(長詩)가 있다. 여기는 글씨체를 작게 쓰는 사람들이 유리하다. 여백 없이 시 전체 문장을 필사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글씨체가 크게 나오는 사람들은 종이 여백이 부족하게 느낄 수 있다. 필사 책을 고르기 전에 자신의 글씨체 크기를 먼저 생각해봐야 한다. 그 다음에 필사 책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다. 눈으로 어림잡아서 종이 여백에 자신의 글씨체를 입력해 본다. 나에게 맞는 필사 책인지 아닌지 구분해야 한다. 오프라인 서점에 필사 책만 모아놓은 판매대가 개설되면 샘플용 필사 책과 펜을 따로 마련했으면 좋겠다. 고객은 필사 책이 자신에게 맞는지 그 자리에서 확인 가능하다. 그러면 유행 따라 필사 책을 성급하게 사는 독자들이 손해받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