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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노동, 목소리 - 지금껏 보이지 않았던 11인의 출판노동 이야기 ㅣ 숨쉬는책공장 일과 삶 시리즈 1
고아영 외 10인 지음 / 숨쉬는책공장 / 2015년 7월
평점 :
한 해가 끝나갈 무렵이 되면 출판단체나 언론 매체, 평론가들이 올해 출간된 책 가운데 중요한 책들을 고른다. 그들은 ‘놓치기 아까운 책’이라며 ‘올해의 책’을 선정해 목록을 소개한다. 내가 알지 못한 좋은 책들이 있는지 목록을 확인한다. 잠깐, 이상하다. 아무도 이 책을 선정하지 않은 것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이 책’이야말로 정말 놓치기 아깝다. 아니, 그냥 잊히기에 너무 아깝다고 보면 된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연말 맞이 추천도서에 ‘이 책’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올해 놓치기 아까운 책, 아니다. 이런 표현은 언론 매체나 평론가들이 많이 써먹어서 지겹다. 잊히기에 아까운 올해의 책을 소개해보련다. 숨쉬는책공장 출판사가 펴낸 《출판, 노동, 목소리》라는 책이다. 책 제목의 쉼표를 떼어내면 이 책의 메시지가 확연히 드러난다. 출판 노동 목소리. 그렇다. 이 책은 출판 노동에 뛰어든 사람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담긴 소중한 기록이다. 책의 글쓴이들 모두 책을 만드는 노동자다. 이들은 출판사의 영업, 디자인, 편집 분야로 활동했거나 현재도 활동 중이다. 책 앞표지를 한 번 보시라. 책 속에 있어야 할 판권 정보를 앞표지에 넣었다. 정말 과감한 시도다. 자신의 이름을 ‘지은이’에 올린 열한 명 노동자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출판, 노동, 목소리》를 판권 정보가 앞표지에 있는 특이한 책으로 여기지 마시라. 독자들에게 튀고 싶어서 시도한 것이 아니다. 출판노동 현실에 눈감은 출판사에 절대로 굴복하지 않으려는 확고한 의지를 선언한 것이다. 《출판, 노동, 목소리》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출판노동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출판사들은 연말 분위기에 취해서 ‘놓치기 아까운 책’을 고를 때가 아니다. 당신들, 올해 어떤 일이 있었는지 벌써 잊으셨는가. 자음과모음 출판사의 직원 부당 발령, 신경숙 작가의 표절 문제에 대한 창비 출판사의 태도. 올해 출판업계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올해만 그런 게 아니다. 작년에 쌤앤파커스 출판사는 사내 성폭력 사건을 미온적으로 처리하는 바람에 ‘가족 같은 회사’를 꿈꾸다가 그만 ‘족 같은 회사’로 이미지 한 방에 ‘가’ 버렸다. 이쯤 되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을 법한데 출판노동 현실을 되돌아보는 출판사가 보이지 않는다. 반성하는 척하는 출판사도 없다. 골치 아픈 문제 앞에서 입을 닫고, 눈을 감아서 모른 척 넘어가겠다는 자세일까. 심각한 문제를 외면한 채 무슨 기쁜 일인처럼 연말 맞이 추천도서를 소개하는 일부 출판사 대표들이 안쓰럽다. 어떻게든 책을 더 팔아보려고 안간힘을 쏟는 느낌이다. 책이 너무 안 팔려서 힘든 거 다 안다. 그렇지만 이보다 더 힘든 사람들 걱정해본 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출판사 대표들은 열악한 근로환경 속에 책 한 권 만드는 노동자들의 심정을 이해해본 적이 있었을까. 출판노동자들은 윗선의 눈치에 못 이겨 부당한 일은 침묵해야만 했고, 노동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겪은 부당한 경험은 대략 이렇다. 연차가 보장된다는 회사 측의 말을 믿고 연차를 사용하면 연장 근무가 늘어난다. 합당한 근거 없이 직원들을 해고하는 회사에 근근이 버틴 직원들은 죽을 맛이다. 노동조합을 설립하자고 제안을 하면 배부른 아이들이 투정하는 소리로 여긴다. 결국, 노동조합 얘기를 입 밖에 꺼내지 말라는 핀잔이다. 이들이 불리한 처지에 놓이면 어디 하소연할 때가 없다. 사실 출판노동자들의 근로 실태는 책에 나오는 내용보다 더 심각하다. 노동권의 기본인 근로계약서 작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당연한 권리를 누리려고 하면 해고나 인사상 불이익 등의 불리한 대우를 받는다. 연장근로 수당을 한 푼도 못 받는 직원들이 많다.
앞에서 출판노동 문제에 침묵하는 출판사들을 비판했지만, 이를 지켜보는 전문가(혹은 지식인) 그리고 우리 독자들도 문제의 책임에 벗어날 수 없다. 이런 사건이 터지면 전문가와 독자들은 일단 커다란 관심을 보인다. 서로 입을 모아 문제를 개선하라고 성토한다. 하지만 이런 열띤 반응은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 전문가와 독자 들은 회사와 직원 간의 분쟁을 부각해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만 한다. 출판사, 출판 평론가 그리고 독자가 함께 모여 진지한 논의를 시도해보지 못한 채 사건이 잊힌다. 독자는 그 후로 이 분쟁이 어떻게 해결되는지 잘 모른다. 나 또한 그런 독자 중의 한 사람이다. 이쪽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고 생각했으나 이 책을 읽고 나니까 흘깃 쳐다만 보는 수준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았다. 기나긴 침묵은 그 문제를 은연중에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로 이어진다. 즉, 문제를 비판적으로 보면서 해결점을 찾는 일을 피하는 꼴이다. 인문사회비평지 《말과 활》 기획위원 김신식은 출판계 전망을 비관적으로 보는 데 그치는 전문가와 독자의 태도에 아쉬움을 드러낸다.
출판노동자의 목소리가 수면에 드러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알라딘 MD 박태근은 ‘책’이라는 결과물에 치중하는 출판환경 때문이라고 말한다. 책이 나오면 부당한 상황들은 잊게 된다. 그냥 불편한 추억이라고 생각하면서 지나가 버린다. 지금도 연말을 맞아 ‘올해의 책’을 선정하는 출판사들은 직원들의 불편한 추억을 잊어버리려고 애쓴다. 어쩌면 직원들에게 ‘너희가 고생해서 만든 책, 열심히 홍보해줄 테니 내년에도 열심히 일하자’라는 무언의 신년 각오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독자로서 이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못해서 송구스럽다. 그렇지만 출판노동자들의 입장을 이해해주는 독자들과 있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저항의 목소리가 잃지 않기를 응원한다. 내가 줄 수 있는 건 이 노래 밖에 없다. 그들을 위해 김보경의 노래 '혼자라고 생각 말기'를 들려주고 싶다.
지치지 않기. 포기하지 않기, 어떤 힘든 일에도 늘 이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