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놀기 좋아하는 친구들끼리 모여서 노래방을 많이 갔다. 말 그대로 노래방 정모라고 할 수 있는데 나는 이 노래를 부르곤 했다.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다. 그땐 아이돌에 열광하는 젊은 친구들도 어깨를 들썩이게 했다는 조용필의 ‘Bounce’가 나오지 않았다. 20대에게 조용필은 왕년에 잘 나갔던 가수였고, 그의 노래를 즐겨 듣는 20대를 찾아볼 수 없었다. 부모님은 조용필 노래를 워낙 좋아해서 조용필의 인기곡을 모은 카세트테이프를 자주 들었다. 거의 수백 번 정도 지겹도록 조용필의 노래를 듣다 보니 조용필 음악의 진가를 벌써 알게 되었다. 노래방에서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부르면 친구 녀석들은 키득키득하면서 웃었다. 그들은 독백이 절반을 차지하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우스운 노래로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독백이 마음에 들어서 노랫말이 많아도 이 노래를 꼭 노래방에서 불러본다. 실제로 꼭대기에 만년설이 덮인 킬리만자로 산에 표범은커녕 원숭이조차 올라갈 수 없지만,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들의 방황과 고독, 꿈과 희망, 존재의 의미를 대변하는 듯한 긴 독백은 언제나 들어도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가사 중에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흐란 사나이도 있었는데란 대목이 특히 끌린다. 산정 높이 홀로 올라가는 킬리만자로의 표범과 고흐는 통하는 점이 있다.

 

고흐는 짧은 생애 동안 어디에도 발붙이지 못한 고독한 이방인이었다. 그의 주위는 항상 쓸쓸했으며 고독한 환경 속에서 생활했다. 물론 괴팍한 고흐를 따뜻하게 대해준 사람들이 있었다. 꽤 많은 양의 편지를 주고받은 동생 테오는 고흐의 삶을 논할 때 고갱과 함께 언급된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우편배달부 조세프 룰랭, 화가 카미유 피사로, 그리고 병든 고흐를 진찰해준 폴 가셰 박사도 빠질 수 없다. 고흐는 자신에게 호감을 느낀 사람을 만나 교제를 맺으면 그림을 통해 기쁨의 답례를 해주었다. 고흐는 가난한 자신에게 무료로 그림 도구를 빌려준 탕기 영감과 저녁 식사에 자신을 초대해준 룰랭 가족을 위해 초상화를 그려줬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은 고흐의 성격상 고마운 사람들에게 보답해줄 수 있는 것이 그림뿐이었다.

 

 

 

 

 

 

반 고흐 「슬픔」 (1882년) 

 

 

고흐가 동생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외부 사람과의 관계가 서툰 이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가장 설득력 있게 보는 원인이 어머니와의 관계다. 고흐는 1853년에 목사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런데 실제로 고흐는 맏아들이 아니었다. 그가 태어나기 일 년 전에 고흐의 형이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죽은 고흐의 형 이름은 빈센트였고, 세상에 사라질뻔한 이름은 1853년에 태어난 아이가 가지게 되었다. 고흐의 삶을 소개하는 책에서는 죽은 형과 화가 고흐가 태어난 날, 장소 모두 일치한다고 설명한다. 불행의 씨앗을 예고하는 것 같은 비극적인 우연한 일치는 고흐를 세상에서 불행한 화가로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과연 이 기록이 정말 사실인지 미심쩍지만, 실제로 어린 고흐는 죽은 형의 무덤 근처에 있는 아버지의 목사관에서 자랐다. 고흐는 죽은 형이 있다는 사실에 커다란 죄책감을 느꼈다. 아들의 마음을 몰랐던 고흐의 어머니는 죽은 형의 무덤에 고흐를 대동했다. 고흐는 일기에서 자신은 어린 시절에 어머니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지 못했다고 적었다. 어머니는 죽은 형을 그리워했고, 형의 이름만 물려받은 자신을 사랑하는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비관적인 생각은 고흐를 평생 괴롭게 하는 트라우마가 되었다. 고흐는 어머니와 같은 여자를 만나고 싶었고, 자신이 원하는 이상형을 만나 용기 있게 청혼을 하면 연거푸 싸늘한 거절만 당했다. 고흐는 좋은 반려자를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평범한 가장이 되고 싶었지만, 불행하게도 고흐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나마 고흐가 가장 역할을 했던 시기가 창녀 시엔 호르닉과의 동거였다. 그는 시엔이 낳은 아기를 자기 아들로 받아들여서 시엔과 함께 살려고 했으나 고흐 집안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 사건 또한 고흐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가슴 아픈 일이었으리라.

 

 

 

 

 

살바도르 달리 「욕망의 수수께끼 - 나의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1929년)

 

 

 

 

 

살바도르 달리 「죽은 형의 초상」 (1963년)

 

 

 

고흐처럼 늘 광기라는 단어가 항상 따라오는 스페인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도 어린 시절 고흐와 같은 경험을 했다. 살바도르라는 이름이 원래는 죽은 형의 이름이었다. 달리의 부모는 어린 달리를 형의 묘지에 데려갔다. 달리는 형의 그늘 속에서 성장했고, 보이지 않는 형의 영혼이 그를 괴롭혔다. 달리의 부모는 어린 달리를 귀하게 보살폈다. 생후 2개월 만에 세상을 떠난 달리의 형 살바도르에게 해주지 못한 부모의 애정은 어린 달리에게로 향했고, 이로 인해 달리는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화가로 성공한 달리는 유명 인사들과 만나기를 좋아했고, 범상치 않은 언사로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달리의 그림 욕망의 수수께끼 나의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죽은 형의 초상은 달리의 무의식 속에 남아있는 어머니와 죽은 형의 기억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특히 욕망의 수수께끼 나의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에서 치즈처럼 생긴 형체의 구멍 안에 나의 어머니라는 단어가 적혀 있다. 그 단어는 모성애를 애타게 갈망하는 달리의 욕망, 마음 속으로만 외쳐야해던 달리의 구슬픈 목소리였다.

 

고흐와 달리, 이 두 사람은 생전에 미치광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누구는 광기의 본질을 정서불안이라고 말하며, 또 누구는 정신병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정서불안에 시달리고, 특이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어떤 요인이나 고흐와 달리를 극도로 불안정한 정신 상태로 몰아갔을 것이 분명하다. 고흐와 달리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대체물이라는 박탈감에 사로잡히는 바람에 사랑의 대상이 생기면 지나치게 집착하는 성격이 되었다.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한 두 사람에게는 그림만이 구원이었고 그림만이 사랑이었다. 그들이 남긴 그림은 대중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아이러니다.

 

 

 

 

P.s 테오는 자신의 아들에게 형의 이름과 같은 ‘빈센트’라고 지어줬다. 테오의 아들은 고흐와 그의 아버지보다 오래 살았고 88세에 세상을 떠났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5-07-03 0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니뫼니 해도 탕기 할아버지가 최고죠....
갈 때 자주 먹을 것을 싸가지고 갔다고 하더군요. 고흐 주려고 말입니다.
탕기네 가족 그림도 많이 그린 것으로 압니다.

cyrus 2015-07-03 18:56   좋아요 0 | URL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던 고흐 전에서 탕기 영감의 초상화를 실제로 봤습니다. 생각보다 그림이 컸습니다. 탕기 영감에 대한 고흐의 존경심이 묻어난 그림이었습니다.

푸르미원주 2015-07-03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흐와 달리의 비슷한 출생, 성장과정과 그림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네요. 고흐 그림 저도 좋아해요. ^ ^
글 서두에 조용필 노래를 끄집어내신 이유를 주욱 읽으니 공감가요.

cyrus 2015-07-03 18:56   좋아요 0 | URL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

단발머리 2015-07-04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고흐의 형에 대한 이야기를 님의 페이퍼를 읽고 처음 알았네요.
역시 정보와 재미를 듬뿍 얻고 갑니다.
제 친구 중에도 ˝킬리만자로의 표범˝ 즐겨 부르던 친구가 있었는데, 친구 이름이 가물가물하네요.

cyrus 2015-07-06 13:48   좋아요 0 | URL
사소한 가족사라서 고흐의 죽은 형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는 책도 간혹 있습니다.

오쌩 2015-07-04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계로 부터의 소외가 오히려 그림에 몰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겠네요.사랑을 갈망하고 불일치에 고통받고,사후에 이르러 인정받고 사랑받으니.님말대로 아이러니네요.

어쩌면 고흐같은 방황과 고독이 필요조건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결핍은 어쩔수없는 천형인지도 모르겠네요.
고흐가 테오에게 쓴편지를 보면서 감동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잘보고갑니다.

cyrus 2015-07-06 13:56   좋아요 0 | URL
네, 고흐가 목사의 꿈을 완전히 접고 나서 할 수 있는 게 그림 그리는 일뿐이었어요. 이제 사회생활을 하고 있어야 할 나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이렇다 보니 고흐가 사람들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림을 그려서라도 인정을 받고 싶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