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샤오위안《고양이의 서재》(유유, 2015)을 읽다가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느껴지면서 공감되는 일화가 눈에 띄어서 여기에 소개해본다. 장샤오위안은 과학사학자이자 천문학자이면서도 성(性)을 연구한 적이 있는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서평을 꾸준히 작성할 만큼 책을 모으고 읽는 것을 좋아하는 중국의 ‘책벌레’다. 그의 유별난 책 사랑은 외국에 여행을 가서도 이어진다. 장샤오위안은 독일을 여행하다가 베를린에 있는 에로티크 박물관을 방문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나온 소장품 목록을 갖고 싶었다. 하지만 박물관에 책이 없어서 구하지 못했다. 몇 년이 지난 후, 장샤오위안은 어느 여성과 함께 포르투갈 리스본 거리를 걷다가 작은 서점을 발견했다. 참새는 떡방앗간을 지나칠 수 없는 법. 서점 내부를 둘러보고 싶은 마음에 발길을 향하는 순간, 서점 진열대에 자신이 예전에 사고 싶었던 베를린 에로티크 박물관 도록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당장 이 책을 샀다. 운이 좋게 레어템을 획득했다. 그런데 서점의 여성 직원은 영어로 ‘Erotic’이라는 문자가 크게 박힌 책을 고른 장샤오위안에게 묘한 표정을 지었고, 그런 책을 구매한 사실을 동행한 여자에게 들키고 말았다. 서점의 여성 직원은 섹슈얼한 내용이 있는 책을 고르는 손님을 이상하게 생각했고, 동행한 여자는 서점 직원들이 자신과 장샤오위안을 불륜 관계로 보는 건 아닐지 걱정했다. 반면 장샤오위안은 여성 직원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개의치 않았다. 원하던 책을 손에 넣었으니 그저 즐거웠다.  

 

나도 장샤오위안처럼 성을 주제로 한 책을 모으는 것을 좋아한다. 지금까지 모은 책들은 대부분 성을 문화나 역사적 관점으로 정리한 내용이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유명 작가가 쓴 성애소설이다. 이런 책들은 남성 독자들의 관심을 많이 끌 법한데 실제로는 잘 팔리지 않는 듯하다. 서점에 구할 수 없고, 대부분 절판의 운명을 맞는다. 이런 책을 사고 싶은 마음은 있어도 주위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사지 못한 채 그저 책 앞에서 입맛만 다신다. 장샤오위안처럼 물불을 두려워 않는 용기와 어떤 시선(특히 서점 여성 직원)에도 주눅이 들지 않는 당당함이 있어야 제목에 ‘sex’가 들어간 책을 살 수 있다. 그렇지만 서점에서 이런 책을 여성 직원 앞에 내보이면 오해의 시선을 받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런 상황에서 남성 직원도 그렇게 생각한다. 일을 하느라 여념이 없어도 평범한 손님들이 고르지 않는 책을 사는 손님의 속내가 무척 궁금할 것이다. 성 관련 책을 고르는 손님은 소수에 불과하다.

 

 

 

 

 

 

 

작년에 알라딘 대구점에서 토머스 라커의 《섹스의 역사》(황금가지, 2000)를 샀다. 이 책은 정말 특별하다. 국내에 섹스와 문화와의 이해관계를 중점적으로 다룬 책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판이 일찍 끊겼다. 2000년에 나온 책이라서 재출간 여부가 불투명하다. 내가 이 책을 특별하게 여기는 또 다른 이유가 출판사가 ‘황금가지’라는 점이다. 황금가지 출판사는 민음사의 장르문학 전문 자회사이다. 1996년에 ‘황금가지’ 출판사가 정식으로 출범했으니 《섹스의 역사》는 출판사가 들어선 지 4년째로 접어든 초창기에 나온 셈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섹스의 역사》가 출간되기 전에 이미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성과 사랑의 역사》(1996)라는 제목의 책을 낸 적이 있었다. 알라딘에 검색하면 프랑스 아날학파 역사가 필립 아리에스가 책의 저자로 나오는데 필립 아리에스의 단독 저작물이 아니다. 성 과학과 각종 성 담론에 관한 프랑스 학자들의 저작물을 발췌한 내용을 모은 것이다. 이 책에 미셸 푸코의 글(제목은 ‘순결의 투쟁’)도 수록되어 있는데 《성의 역사》(나남출판, 2004)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어쨌든 《섹스의 역사》를 운 좋게 발견해서 기분은 좋았으나 사는 것이 문제였다. 이 책을 고른 손님을 직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벌써 내 심장에 진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알라딘 매장 직원들은 대체로 나이가 젊다. 나도 그들과 같은 세대라는 점에서 직원들이 《섹스의 역사》를 고른 자기 또래 손님을 이상하게 볼 것이다. 《섹스의 역사》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기에 직원과의 민망함을 줄이려고 남성 직원에게 책값을 지불했다. 책 바코드를 찍고 책값을 직원의 손에 건네주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이렇게 길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만약에 이 책을 살 것인지 말 것인지 오랫동안 망설였다면 장샤오위안 같은 손님이 샀을 것이다. 용기 있는 자만이 좋은 책(?)을 차지한다.

 

 

 

 

 

 

 

하지만 그 정도의 경험은 약과였다. 몇 달이 지나고 알라딘 대구점에서 윌리엄 A. 유잉의 《몸》(까치글방, 1996)을 사면서 또다시 민망한 시간이 찾아왔다. 《몸》은 성 관련 책이 아니라 인간의 신체를 찍은 예술 사진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이 책을 발견했을 당시에 《몸》은 비닐 덮개 안에 보관된 채 책장에 꽂혀 있었다. 이 책이 19세 미만 청소년이 봐서는 안 되는 건 줄 알고, 보호 차원에서 비닐 덮개를 씌운 것일까? 비닐 덮개가 뜯겨져 있지 않아서 책 보존 상태가 아주 훌륭했다. 이 책도 시중에 구하기 힘들어서 온라인 중고가가 꽤 높게 책정되어 있다. 이때 사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게 된다. 그런데 이번에는 책 표지가 신경이 쓰인다. 책 앞표지는 벌거벗은 여성의 복부가, 뒤표지는 역시 벌거벗은 상태인 여성의 등 부분이다. 지금 생각해도 책 앞표지를 보면 볼수록 민망하다. 딱 봐도 벌거벗은 여성의 복부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다. 가슴 아랫부분이 살짝 드러나 있고, 책 중간에 있는 배꼽이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책 제목을 넣지 않은 디자인 방식이 오히려 자극적으로 느껴지게 한다. 페티시즘을 불러일으키는 듯한 책 표지가 난감하다. 역대 우리나라 출판물 사상 가장 특이한 책표지다. 《몸》도 《섹스의 역사》를 샀을 때처럼 책 계산을 남자 직원에게 맡겼다. 다행히도 《섹스의 역사》와 《몸》은 각각 다른 남성 직원이 계산했다. 만약에 동일 직원에게 계산을 맡겼다면 이런 책을 고른 독자의 취향을 의심했을 것이다. 이제는 민망한 상황을 겪고 싶지 않아서 웬만하면 성 관련 책은 온라인 중고책 판매 사이트에서 주문한다. 장샤오위안처럼 직원의 눈치에 신경 쓰지 않는 대범함을 키워야겠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성 관련 책을 서점에서 사는 일이 민망하다.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ledgling 2015-05-07 2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성인 만화책이나 포르노 잡지 사는 것 보다는 교양있어 보이고 덜 민망할 것 같은데요! 저도 성에 관심이 있는 편이라 <오르가즘의 기능>, <에로티즘> 을 사두고 부모님이 이 책을 눈치채지 않기를 빌기도 했지요. 하지만 성을 알고보니 별게 아니더군요. 잘 모를수록 이상하게 보는 것 같아요. 현재는 당당히 서재에 꽂아 놓고 성에 대해서도 서슴없이 얘기하는 편입니다. 미성년자든 성인이든 친구든 성이야기는 언제나 즐겁습니다. 개방적인 자세로 올바르게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여자 속옷이나 성인용품 사는 것보단 덜 민망한 것 같아요! 😊 그냥 막 지르시길! 용기를!

cyrus 2015-05-07 21:01   좋아요 0 | URL
<오르가즘의 기능>, <에로티즘>은 제가 사고 싶은 책이에요. 저도 사람들 눈에 보이는 책장에 보관하고 싶은데 지금은 저만 아는 비밀 공간에 보관하고 있어요. 가끔 여동생이 책장에 책을 고를 때가 있어서 이런 책을 보면 오해를 할 수 있거든요. <가슴 이야기>라는 책을 보고 제 동생이 저를 음흉한 사람으로 보더군요... ^^;;

AgalmA 2015-05-07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시경>을 중고서점에서 사려는데, 주인장이 그거 어려워서 사도 안 읽으실 걸요, 하며 얕잡아보는 말투로 말하더군요. 음, 책 사러 갈 때 똑똑해보이는 복장을 해야하나 난감;

새아의서재 2015-05-07 22:10   좋아요 0 | URL
풀테안경과 가죽서류가방, 혹은 아주 어려운 철학책을 한권 손에 든채 시작하심이...^^

AgalmA 2015-05-08 02:26   좋아요 0 | URL
달걀부인님, 제가 뿔테를 선호하는 데도 안 먹혔어요ㅎ 제 관상이 유재석 과는 아닌데, 제 노력보다 아마 상대가 저를 그리 본다면 어떤 노력도 무용할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cyrus 2015-05-08 18:27   좋아요 0 | URL
주인장의 말이 얄미운데요. ㅎㅎㅎ

fledgling 2015-05-07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그렇군요! 저도 여동생이 있긴한데 제 책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하네요! 여동생에게 성교육과 성상담 해주시면 오해가 풀리실듯! ^^ 저랑은 분위기나 성격이 달라서 거부하시려나요~

cyrus 2015-05-08 18:28   좋아요 0 | URL
동생과 따로 살고 있어서 성에 대해서 얘기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ㅎㅎㅎ

새아의서재 2015-05-07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대학교 1학년때 독일에서 나온 성 관련책을 샀더렜어요. 독일에서 성교육교과서로 쓰인다는 띠지가 붙어있었죠. 안에는 남성의 성기와 여성의 성기가 발기하는 사진이 여러 컷으로 실려있는데..(원서에는요) 한국판에선 검열에 걸려 삭제되었다고 쓰여있었어요. 그 후 그 책 자체의 내용이 정말 교과서정도의 책이란 걸 알고 처분했는데... 왜 그 시절의 천진난만했던 제가 그런책들에 관심이 생겼던 걸까 새삼 궁금해지네요.

cyrus 2015-05-08 18:31   좋아요 0 | URL
유럽의 성교육은 솔직해서 좋아요. 제대로 알아야 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형성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거라 생각해요. ^^

stella.K 2015-05-08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가 어리긴 뭐가.ㅎㅎ
니가 생각하는 것만큼 알라딘 여직원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그냥 책 계산해 드린다 그렇게 생각하지. 소심하긴...ㅋ

하긴 편의점 알바가 남자면 생리대 사는 게 좀 그랬던 시절이 나도 있긴 해.
하지만 그것도 하나의 생필품이고 어떤 남편은 아내 심부름으로 사가기도 한다더군.
오히려 계산하는 쪽에서 실실 얼굴 쪼개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그러면 갠 진짜 어리거나 알바로서의 직업 의식이 없는 거지.
너 같이 생각하면 산부인과는 여자만 해야 할 거야. 그런데 안 그러잖아.
난 오히려 남자나 여자나 섹스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누가 아니 여직원 중 오히려 너를 의식있게 볼지.
그렇다고 일부러 여직원한테 살 필요는 없구.ㅋ
다음엔 자연스럽고 편하게 사라구.^^

cyrus 2015-05-08 18:36   좋아요 0 | URL
자주 가는 헌책방에서는 야한 책을 살 수 있어요. 책방 주인도 저의 독서 취향을 잘 아실거고, 헌책방에 성인잡지나 야설도 판매하거든요. 소심한 멘탈을 버려야겠어요. ^^

카스피 2015-05-08 1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성과 관련된 도서나 성애소설들은 아무래도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사회에서 쉽게 손에 집을수 없는 책이죠.게다가 19금이니 뭐니해서 서점에서도 쉽게 팔리지 않으니 쉽게 절판되기도 하죠.
개인적으로 책을 수집할때,SF나 추리소설등을 많이 헌책방에서 찾았는데 흔히 말하는 마이너부류중에서도 더 마이너가 바로 성애소설이더군요.헌책방에서도 거의 찾을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cyrus님이 성애소설을 수집하셨다고 하니 어떤 책이 있는지 무척 궁금해지네요.수집 목록좀 공개해 주세요^^

cyrus 2015-05-10 13:12   좋아요 0 | URL
예전에 한 번 수집한 책에 관한 글을 알라딘 블로그에 남긴 적이 있는데, 아직 안 읽은 책도 있어서 다 읽고 나면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