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황사가 있는 날인데도 대구 날씨는 참 좋았다. 설 연휴 동안 거의 독서실에서만 지내다 보니까 나들이하고 싶은 생각이 불쑥 들었다. 놀러 갈 만한 곳이 딱히 없으면 책방이나 서점에 가서 책 구경을 한다. 돈 많이 안 들면서 혼자 놀기에 좋은 곳으로 책방이나 서점만 한 데가 있을까. 오랜만에 대구역 근처 지하상가에 있는 책방으로 향했다. 오래전에 이곳도 대구를 대표하는 책방의 메카였다. 책방을 찾아오는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어지면서부터 그 많던 책방들은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했고, 지금은 두세 개의 책방만 지하상가를 지키고 있다.
내가 자주 가는 책방의 이름은 ‘가나헌책방’이다. 연세가 꽤 있어 보이는 할아버지 혼자서 책방을 운영한다. 책방 내부는 상당히 협소하다. 몸 하나 뉘이면 꽉 차는 고시원 원룸 평수보다 조금 넓은 편이다. 책방 안에 장정 세 명이 서서 책을 고르면 비좁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가나헌책방은 언제나 가도 시끌벅적하다. 책방 주인 어르신의 말동무가 되어주는 단골손님들이 찾아온다. 책방 내부가 좁아서 어르신과 손님과의 대화를 엿듣지 않으려고 해도 귀에 다 들어온다. 나는 어르신들의 대화에 신경 쓰지 않고 책 고르는 데 열중하는 개썅마이웨이다.
책방이나 알라딘 중고서점에 가면 구하기 힘든 귀한 책 한 권을 발견할 정도로 촉이 되게 좋은 편이다. 내가 간절하게 가지고 싶어 하던 책이 어떻게든 책방에 가면 저절로 만나게 되더라. 인복, 여복은 없어도 책복은 많다. 내가 원하는 책이 있는지 책방 주인에게 물어보지 않고 직접 혼자 찾는다. 개인 약속이 없거나 책방 주인이 책방을 일찍 문 닫지 않는다면 두세 시간 이상 책방 내부 전체를 보물 찾듯이 꼼꼼하게 둘러본다. 손에 먼지 묻혀가며 오래된 종이 냄새를 맡으면서 책 한 권 한 권씩 마음껏 펼쳐볼 수 있는 이 시간이 너무나도 좋다.
가나헌책방을 방문한 지 오늘이 두 번째지만, 비좁은 책방을 그냥 지나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님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책장 구석까지 살펴보면 귀한 책을 만날 수 있다. 운이 좋게도 절판된 법정 스님의 책을 만났다.
작년 4월에 찍은 사진
2년 전부터 알라딘 대구점에서 법정 스님의 책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예전엔 한 달에 다섯 번 정도(매주 한 번씩 방문한 셈이다) 알라딘 중고서점에 갔는데 손님이 판 책만 따로 꽂은 책장(A 코너)엔 법정 스님의 책 한 권쯤은 있었다. 스님의 무소유 정신에 어긋나는 행동이지만, 스님의 책을 사다보니 어느새 꽤 많이 모았다. 작년 12월, 알라딘 대구점에서 산 《인도기행》(샘터, 2006)까지 포함하면 총 14권이었다.
오늘 가나헌책방에서 만난《말과 침묵》(샘터, 1982) 초판 13쇄와 《산방한담》(샘터, 1983) 초판 그리고 정말 책방에 찾기 힘든 범우문고 《무소유》(범우사, 1985)까지 사면서 스님의 대표작을 거의 모으는 데 성공했다. 작년 초에 이미 양장본 《무소유》(범우사, 1999)를 샀기 때문에 《무소유》를 두 권이나 소유하게 되었다. 범우문고 《무소유》에 문학평론가 김병익이 쓴 '법정론 : 불교적 지성과 현대적 사랑'이라는 글이 수록되었는데 양장본 《무소유》엔 없다.
범우문고 《무소유》는 손바닥에 딱 맞는 포켓북이다. 1976년에 처음 나왔을 땐 범우문고가 아닌 범우에세이선(選) 15번이었다. 파란색 표지의 《무소유》가 1985년에 나온 범우문고 시리즈 2번이다. 이 책이 범우문고의 《무소유》로 처음으로 대중 앞에 선보였다.
1991년에 깃털 펜을 쥔 손이 그려진 회색빛 표지로 바뀐다. 지금의 주황색 표지로 바뀌기 시작한 때가 2004년이다. 《무소유》를 너무나도 갖고 싶어서 알라딘 대구점을 배회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년이나 지나버렸다. 《말과 침묵》과 《산방한담》도 《무소유》 다음으로 구하기 힘든 책이었는데 오늘 한꺼번에 만날 줄이야. 80년대에 나온 초판이라서 세로쓰기로 되어 있지만, 초판도 온라인 책방에서 꽤 비싼 가격으로 판매된다.
JP의 부인 박영옥 여사가 세상을 떠나면서 JP와 박근혜 대통령과의 관계가 부각되고 있다. 오래전부터 제3공화국 정치권력의 비사가 너무나도 궁금했던 터라 1990년대 초부터 중앙일보에 연재했던 기획물을 정리한 《청와대 비서실》 1권(중앙일보사, 1992)을 발견했다. 1권의 저자는 김진 중앙일보 논설위원이다. ‘청와대 비서실’ 연재가 90년대에 엄청나게 큰 인기를 끌었는가 보다. 연재물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는 책의 추천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청와대 비서실’은 중앙일보의 대단한 인기 연재물이다.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청와대 비서실’이 나가는 금요일에는 가판이 더 팔리고 혹은 이날 배달사고라도 있으면 보급소가 독자항의 전화로 불이 난다. 현재 2년째 연재를 계속하고 있지만 인기는 여전하다. (6쪽)
1992년 당시 중앙일보 편집국장이었던 송진혁 고려대 석좌교수의 자화자찬 추천사가 믿을 수 없어서 ‘청와대 비서실’ 연재물과 관련된 정보를 검색해서 찾아봤다. 연재물에 대한 진짜 반응이 궁금했다. 정치부 기자 시절 김진 논설위원이 3공 시절 박정희 대통령 밑에서 요직을 맡았던 인사들을 만나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정치 내막을 소개했다. 이 연재물로 김진 논설위원은 기자협회가 주는 한국기자상을 받았다.《청와대 비서실》이 워낙 오래된 책이라서 알라딘에 검색해도 나오지 않은데다가 독자서평도 찾을 수 없다. 십 여 분 동안 각종 포털 사이트를 벼룩 잡듯이 뒤져 보다가 독자서평 몇 편을 찾을 수 있었다. 어느 독자는 서평을 통해 연재물이 주말의 화젯거리였고, ‘청와대 비서실’을 읽지 않고서는 대화에 끼지 못했다고 술회했다. 《청와대 비서실》은 총 4권까지 나왔는데 2권은 노재현 중앙북스 대표이사, 3권은 박보균 중앙일보 대기자, 4권은 오병상 JTBC 보도총괄이 집필에 참여했다. 1권이 박정희 정권에 대한 기록이라면 2권부터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 이르는 정치권력의 실상을 기록했다.
나에게 새로운 책방 미션이 생겼다. 나머지 세 권을 찾아야 한다. 낱권을 구한다는 것은 책방 마니아에게는 제일 힘든 상황이다. 뭐 별수 있나. 책방 마니아의 숙명인걸. 나는 책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