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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하는 능력 - 관계의 혁명을 이끄는 당신 안의 힘
로먼 크르즈나릭 지음, 김병화 옮김 / 더퀘스트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다른 이들이 하는 말을 듣는 것만이 아니라, 말로 하지는 않지만 전달되는 그들의 경험, 희망, 소망, 고난과 걱정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프란체스코 교황)
상대방의 감정과 의견을 함께 나누는 공감(Empathy)은 이제 현대사회를 이끄는 새로운 힘이다. 이 각박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고 함께 느끼고 싶어 한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감동적이거나 위로가 되는 글이나 사건을 보면 메시지를 보내고 네트워크를 통해 공유하고 공감하고자 한다. 그래서 제러미 리프킨은 자신의 저서 『공감의 시대』에서 인간을 공감하는 존재(homo empathicus)로 파악했다. 그는 인간은 다윈이 주장한 것처럼 적자생존의 경쟁으로 치닫는 존재가 아니라 공감의 본성을 가진 존재로 보았다. 이견이 있겠지만, 사회적 공간에서 다른 사람과의 발전할 수 있는 유대감을 가장 고차원적인 욕구로 지향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인 것은 틀림없다.
영어사전에서 '공감'은 'Empathy'와 'Sympathy'로 나온다. 어원을 따져보면 'pathy'는 그리스어의 'Pathos'라는 말에서 나왔다. 이성적 판단이 로고스(Logos)라면 그 반대 지점에 있는 인간의 감정은 파토스다. 파토스라는 말 자체가 고대 그리스어'paschein(받다)'라는 동사에서 왔기 때문에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인간의 마음이 받은 상태를 의미한다. 거기에 '함께'라는 뜻의 'sym'이 더해지면 바로 공감을 뜻하는 Sympathy가 된다. 슬퍼하는 사람의 감정을 알아채고 함께 슬퍼한다. Empathy에서 'em'은 '내부'를 의미한다. 단순히 감정을 함께하는 것을 넘어 나 역시 상대의 감정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공감하는 능력』의 저자 로먼 크르즈나릭은 'Sympathy'를 공감의 의미와 별개로 구분한다. 상대방에 대한 연민은 공감이 아닌 '동정심'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동정과 연민은 다른 사람의 감정에 대한 공감이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내 감정이 될 수 없기에 한계가 있다.
세월호 침몰 사고에 우리 사회는 한때 슬픔의 공감에 빠졌다. 희생자와 유가족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는 많은 사람이 사고 소식을 전하는 뉴스를 차마 보지 못했다. 웃고 떠드는 즐거운 자리를 잠시 미루고, 슬픔을 함께 나눴다. 기업도 마케팅이나 홍보를 자제하고 차분한 가운데 애도 분위기에 동참했다. TV에선 예능 프로그램들이 자취를 감췄다. 예상치 못한 큰 어려움을 당했을 때 이런 사회적 공감은 시련을 이겨내고 더 나은 내일로 나가는 힘이 되어준다. 우리가 함께 겪은 슬픔의 연대는 다시는 우리 아이들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희생이 일어나는 일이 없도록 다짐한다.
소셜 네트워크의 발전으로 공감하는 능력을 갖춘 인간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타인과 공감할 수 있는 소통의 수단을 가지게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페이스북이나 카카오톡을 이용하면 평상시에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함께 모여 정보나 감정을 공유하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그러나 소셜 네트워크의 발전가능성을 공감하는 인간인 우리가 잘 활용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우리는 어딘가에 접속해 있지만, 익명성을 즐기며 깊은 교류를 꺼린 채 살아간다. 온라인 공간 속에서 개인은 지나치게 자신의 집단에 대한 편애와 타자를 구분한다. 내 편이 아닌 사람과 집단에게는 비방과 공격적인 댓글을 퍼붓는다. 이런 사회에서는 공감의 지속을 통해 생성되는 신뢰를 기대할 수 없다.
"(미디어)이미지는 마비시킨다"고 말한 수잔 손택의 지적은 손쉽게 공유되고 전달되는 소셜 네트워크의 이미지에 마비되어 나타나는 '공감피로' 증상을 예언하고 있다. 세월호 침몰이 우리 사회의 심장을 할퀴면서 생긴 고통을 일부러 피하거나, 알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대형 사고나 우울한 사건에 무감각하다. 공인이나 타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대중의 반응에도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크르즈나릭이 강조하는 공감은 일차적으로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알아채는 데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감정을 함께 느끼고 나누는 능력을 말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슬픔을 알아챘더라도 그것이 내 이해관계와 상충할 때 바로 등을 돌리게 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공감', 그리고 사회가 필요로 하는 관계지향성과 거리가 멀다.
우리는 'homo empathicus'이다. 잃어버린 공감 능력을 되찾을 수 있다. 물론 선천적으로 공감이 잘 안 된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흔히 사이코패스라고 부른다. 공감의 능력이 병적으로 결핍되어 상식적으로 이해되기 어려운 비이성적 행동과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에게 공감의 능력은 교육과 훈련을 통해 분명히 향상시킬 수 있다.
가장 먼저 기본적으로 공감능력을 향상할 수 있는 자세가 바로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그를 이해하는 것이다. 내 입장에서, 내 방식대로, 내 감정대로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다. 공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경우 대부분 선입관, 편견이 작용하기 때문에 상대방 입장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상대방의 감정을 좀 더 이해하고 싶은 좋은 훈련법으로는 평소와 다른 새로운 체험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낯선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을 가져야 한다. 타인의 말에 귀 기울여 듣는 대화법을 배운다면, 조율과 타협 능력이 향상된다. 책과 예술작품 같은 간접경험도 도움이 된다. 잠시 스마트폰과 컴퓨터 전원을 끄고 안락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는 시간을 들인다면 집에서도 공감여행을 할 수 있다.
지난해 실시한 한국인의 의식 가치관 조사에 따르면 우리 사회를 더 좋은 사회로 만드는 데 필요한 가치로 가장 많은 사람이 꼽은 것이 ‘상대방을 향한 배려’였다. 우리 사회가 배려에 목말라하는 까닭은 과도한 경쟁 속에서 상대방을 돌아볼 여유가 없어서이다. 자기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상대방의 상황과 감정에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의견과 생각만 강하게 밀어불인다.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리턴 사건'은 공감능력이 부족한 리더십의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상대방에게 어떤 상처를 줄지 예상하지 못한다. 모든 상황을 자신의 기준으로 생각하므로 상대방의 형편을 생각하지 않는다. 배려심 없는 이기적인 태도를 방관한다면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공감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기본적 능력의 하나다. 상대방의 필요를 미리 알고 있다가 소리 없이 한 손을 건네주는 사람, 따뜻한 말 한마디로 격려해주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타인의 삶에 잔잔한 변화를 일으키고 행복한 인간관계를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프랑스 속담에 ‘사람들은 친절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친절한 공감으로 맺어진 인간관계는 서로 소통하고 배려할 수 있다. 그 속에서 자신에 대해 개방할 수 있는 친밀감과 정서적 유대를 얻게 된다. 공감은 건조하고 외로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