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 - 찰스다윈 자서전
찰스 다윈 지음, 이한중 옮김 / 갈라파고스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흔한 과학자의 자서전.txt

 

 

인간이 스스로를 평가하라고 한다면 얼마나 솔직할 수 있을까?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되돌아보고 인생의 파노라마를 담아 낸 자서전이라고 하는 책들은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심지어 자신이 살아가면서 느낀 수많은 감정들까지도 서슴없이 밝혀낸다. 하지만 자서전이라고 해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100%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인간의 삶은 좋은 일도 있고 궂은 일도 있는 법이다. 기억 속에 지우고 싶은 좋지 않은 일들도 기록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누구 감히 그런 것까지 세세히 밝혀내고 싶어 하겠는가. 자신의 명예로운 미지에 부합되지 않거나 도리어 손상될 우려가 있는 부정적인 일은 대중들에게 공개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보니 자서전이라고 하는 책들은 자화자찬으로 가득하다거나 자신의 업적을 좀 더 부각시키기 위해서 자신과 관계된 타자의 성격 또는 업적을 왜곡 또는 평가절하 하는 경우가 있다. '무한도전'에 나오는 노홍철처럼 자신의 입으로 '위인'이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의 좋은 업적만 부각시키는 '변종 위인전'인 것이다.

 

 

 

 

 

 

 

 

몇 주 전에 제임스 왓슨의『이중 나선』을 읽었다. 워낙에 잘 알려진 대중 과학도서라고 하기에 집어 들었지만 DNA 모형을 발견해내는 왓슨과 크릭, 두 과학자의 탐구 과정보다는 왓슨과 그 주변 과학자들의 얽히고 설킨 관계가 더 눈이 갔다. 더군다나 아무리 DNA 모형을 발견한 위대한 업적을 이룬 과학자라고 하더라도 자신과 함께 한 동료 과학자들의 업적을 크게 부각되지 않은 그의 서술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자신의 연구 활동에 중요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거나 다름없는 비운의 여성 과학자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왓슨의 동료인 크릭, 윌킨스보다 평가가 박했다. 과학도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과학고전이라고 하기에는 내용 면에서는 실망스러웠다.

 

 

 

 

 

 겸손한 과학자, 다윈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요즘 진화론 공부할 겸에서 읽게 된 찰스 다윈의 자서전은 과장없이 자신의 삶에 대한 솔직 담백한 고백을 담고 있다. 왓슨의 자서전도 자신의 동료인 크릭을 '말 많은 오지랖쟁이'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의 시선으로 솔직하게 평가했지만 다윈은 생물학자의 길을 반대했던 가족들, 연구 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많은 도움을 준 지도교수, 동료 학자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회상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업적을 부각시키면서도 동시에 겸손의 미덕을 놓지 않고 있다.

 

 

"제가 만일 20년을 더 살아서 일할 수 있다면『종의 기원』에 고쳐 쓸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것은 시작일 뿐이니 그 자체로 뭔가 의미가 있겠지요."

 

 - 찰스 다윈이 J.D. 후커에게 보낸 편지에서(1869년), 『나의 삶은 서서히...』서두 -

 

 

 

다윈의 자서전에 들어가기 앞서 책 앞에는 다윈이 동료 과학자인 후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발췌한 문구가 있다. 이 문구를 보자마자 찰스 다윈이라는 학자의 성품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 스스로 낮출 줄 알고 겸손할 줄 알았다.

 

사실 우리나라에 번역된 다윈의 자서전 분량은 자신이 쓴 『종의 기원』분량보다 더 적다. 이 책의 부록으로 실은 『비글 호 항해기』발췌문을 제외하면 책은 159페이지 정도에 불과하다. 이 짧은 자서전 속에 다윈은 진화의 원리를 발견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하는 데 중점을 두면서도 생물학자가 되기까지의 삶의 과정들도 세밀하면서도 솔직하게 기록했다.

 

 

전 생애를 통틀어 나는 외국어 하나도 변변하게 익히지 못했다. 시를 지어보려고 각별한 노력을 해보기도 했으나 영 소질이 없었다. 친구는 많은 편이었으며, 오래된 시를 잔뜩 모아다가 다른 아이들의 도움을 받아가면 이어붙이기를 해서 어떤 주제든 공부할 수는 있었다. 

 

 (중략)

 

나는 나이에 비해 뛰어나지도 처지지도 않는 정도였다. 그리고 여러 선생님이나 아버지도 나를 아주 평범한, 지적인 면으로는 보통 수준보다 약간 모자라는 소년으로 여겼다고 생각한다.

 

 

 - 찰스 다윈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pp 26~27 -

 

 

 

아인슈타인이나 에디슨이나 우리가 '천재'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영특하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찰스 다윈도 그러한 부류의 한 사람이었다. 기억력 좋은 아버지와는 다르게 어린 다윈은 유명한 시를 암기해도 48시간이 못 되어 잊어버리곤 했다. 하지만 다윈은 어린 시절 때부터 마주친 지적 한계에 대해서 크게 좌절감을 느껴본 적이 없는 듯하다. 자서전의 화자 다윈은 외국어 공부를 못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담담하게 고백하고 있을 뿐이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다윈의 겸손함은 생물학자가 되어서도 여전했다. 세인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성공한 뒤에도 다윈은 자신의 진화론을 옹호한 헉슬리처럼 비상한 이해력이나 재치도 없었고, 비평가로서도 약점 투성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한다. 그리고 기억력은 너무나 빈약해서 날짜를 며칠 이상 기억해 본적이 없었노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이론들이 진화론을 주장한 만큼 그는 종교문제에 관해서도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다윈은 생물학자가 되기 전에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성직자의 길을 걷고 싶어했던 신학을 공부한 이력이 있다. 특히 그가 페일리의『자연 신학』을 공부했으며 책 속의 논증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되는 장면은 진화론을 이해하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다윈의 이런 면이 새롭고 이채로울 것이다. 수백 년 뒤에 자신의 '후계자'라고 자처하는 리처드 도킨스『눈 먼 시계공』을 통해 페일리의 이론을 반박했던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그 밖에도 다윈은 생물학자의 길을 반대했던 아버지에서부터 훗날 진화론을 체계적으로 증명해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 지도교수 헨슬로 그리고 자신의 부인 엠마까지 자신의 인생과 함께 해온 가족 및 동료들을 따뜻하면서도 긍정적인 시선으로 이들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연구를 위해 비글 호에 승선하면서 만난 피트로이 선장에 대한 그의 서술은 '대인배'다운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피트로인 선장은 '조증'에 가까울 정도로 다윈과 여러 차례 시비에 휘말렸으며 몇 번씩 불화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다윈은 그러한 선장의 성격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악의에 찬 평가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자서전에는 가족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한 '가장'로서의 다윈의 모습은 행복한 가족생활을 한 그가 내심 부럽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짠하게 다가온다. 다윈은 열 살이라는 나이에 먼저 세상을 떠난 딸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는 마음 여린 '딸바보' 아버지였다.

 

 

내 가정생활은 정말 행복했다. 여기서 또 밝힐 것은 내 아이들은 건강문제를 제외하고는 걱정을 끼친 적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다섯 아들의 아버지로서 진정으로 이런 자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본다.

 

 (중략)

 

딱 한 번 잇었던 슬픈 일은 1851년 4월 24일 열 살을 넘긴 큰딸 애니가 세상을 떠난 사건이었다. 그 아이는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분명히 멋진 여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 아이의 품성에 대한 짧은 글을 사망 직후에 쓴 일이 있으니 여기서는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겠다. 그 아이의 상냥한 모습을 생각하면 아직도 눈시울이 젖곤 한다.

 

 - 찰스 다윈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pp 140 -

 

 

 

 

그가 이러한 좋은 성격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강했다. 다윈은 자서전에서 아버지로부터 중요한 정신을 배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관찰력'과 '동정심'이었다. 어린 시절, 그는 아버지의 관대하면서도 주변 사람들과 함께 기쁨을 함께 나눌 줄 아는 모습을 배우면서 자랐기에 유명한 생물학자가 되어서도 남들에게 관대할 줄 알며 겸손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Poco curante, 찰스 다윈

 

내용과 전혀 관련 없는 여자 관계를 서슴없이 밝혀내고 자기중심적인 이야기만 다루는 모 과학자의 자서전을 읽은 탓인지 다윈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마음이 정화되면서 훈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과학자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마음 따뜻하게 느껴본 적은 처음이다. 대중들을 위한 과학을 위해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최재천 교수는 과학자들은 글을 잘 써야한다고 설파하는 '과학적 글쓰기론자'이다. 과학적 원리를 어려운 수식으로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이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글을 쓰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훌륭한 '과학적 글쓰기'가 되기 위해서는 '과학'이라는 학문도 아름다우며 따뜻한 휴머니즘도 필요하다는 것을 느껴질 수 있도록 대중들을 매혹시킬 줄 아는 감성 표현 능력도 중요하다고 본다.  

 

문장력을 좋고 나쁨을 떠나서 다윈의 자서전은 과학자의 글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감성적이다. 어린 시절부터 시를 즐겨 읽었을 정도로 문학을 좋아했으며 자신에게 쓴 부인 엠마의 편지 그리고 비글 호 항해를 반대했던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외삼촌이 쓴 편지까지도 죽을 때까지 보관할 정도로 사람들 간의 감정을 연결하고 공유하려는 자세를 놓지 않았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라는 속담처럼 다윈의 삶은 서서히 '진화'했다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정도로 성숙해져만 갔다. 그리고 그는 여느 훌륭한 과학자들처럼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한 집착보다는 자연의 신비에 호기심을 가질 줄 알며 관찰과 실험을 좋아하는 '모태' 과학자였다.

 

적어도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내가 죽는 날은 관찰과 실험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날이 될 것이다. (pp 165~166)  

 

다윈은 학창 시절, 별명이 Poco curante(포코 큐란테)였다. '낙천가'라는 뜻의 라틴 어다. 다윈이 진화론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순수하면서도 낙천적인 성격 덕분이었다. 그러한 낙천적인 성격은 자신의 진화론이 학계와 종교인들로부터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받는 시련의 시간 속에서도 견뎌낼 수 있었다. 그리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죽는 날까지 관찰과 실험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다.

 

다윈의 쓴 『종의 기원』의 내용이 너무나 어려워서 못 읽더라도 다윈의 자서전은 과학자가 되고 싶은 학생이나 과학도들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관찰력'과 '동정심' 그리고 실패와 비난에도 굴하지 않은 채 포기하지 않는 탐구 열정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포코 큐란테' 정신은 훗날 과학자가 될 독자만 본받야되는 것이 아니다. 다윈의 삶의 원칙은 점점 정(情)의 의미가 퇴색해져만 가고 이해타산적인 관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처세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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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2-25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네요, 겸손한 과학자라니... 기분이 좋아집니다.
다윈은 기억력은 어떠하셨을지 모르나, 통찰력은 엄청나게 뛰어난 분이었을거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섬 내의 조금씩 다른 새들을 관찰한 내용에서 그렇게
뛰어난 발상이 나왔겠습니까! 참 멋지군요...

아, 그런데 대중을 매혹시킬 수 있는 글쓰기라.... 글만 둥둥 뜨지 않는다면
다윈과 같이 겸손함과 현명함과 핵심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지닌 사람이 그런 글쓰기를 한다면 정말 우리같은 후손의 복일테지만, 히틀러처럼 껍데기만 있는 사람이 그렇다면 현혹되기 딱 맞을테니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엉뚱한 한마디였네요~ ^^

cyrus 2012-02-26 22:4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일명 천재라고 불리우는 사람들 중에는 정말 빈틈없을 정도로
머리가 좋은 사람이 있는 반면에 다윈처럼 한 가지는 꼭 부족한 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죠. ^^

마고님 말씀대로 대중들을 이해시킬 수 있는 글쓰기가 많으면 좋은데
확실한 근거가 없으면서 맞지 않는 주장을 펼치는, 그저 대중들을 현혹하는
글쓰기는 조심해야죠. ^^

차트랑 2012-02-27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은 정말 인내심을 요하던걸요 ㅠ.ㅠ
물론 매우 정렬적인 저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김용옥선생은 다윈을 자사선생의 환생이 아닐까
뭐 그런생각까지도 했다고도 합니다 ㅠ.ㅠ
(오타를 수정하고 갑니다 ㅠ.ㅠ)

cyrus 2012-02-26 22:48   좋아요 0 | URL
저는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사놓고도 아직까지
한 페이지를 넘겨본 적이 없답니다. ^^;;

자사선생은 처음 들어보네요. 검색해서 알아봐야겠습니다. ^^

휘오름 2012-02-26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저는 자서전은 별로 안좋아 하는 편인데요 리뷰 보다보니 이런책이면 한번쯤 읽어봐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리뷰 잘 보고 갑니다..^^

cyrus 2012-02-26 22:49   좋아요 0 | URL
저도 자서전을 완전히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 인물에 대한 삶의 과정과 주변 환경을 보면 인물의 생각을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자서전도 좋은 옥석이 있는지
읽는 우리들이 잘 선택해야겠지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