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미소가 그립습니다]
조선일보 2011년 8월 22일자
이번 달 들어서 셰익스피어를 읽게 되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리스 로마 신화까지 다시 한 번 읽게 되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비극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사 그리고 사건 전개를 유심히 보게 된다면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인물이나 이야기를 인용한다거나 작품 속에 그대로 차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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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셰익스피어가 주로 인용하는 그리스 로마 신화 원전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가 많다. <변신 이야기>는 대중적으로 친숙하게 널리 알려져 있는 신화 속 내용을 담고 있어서 그야마로 신화를 집대성한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과 세련된 묘사는 후대의 독자들을 사로잡았고 예술가들에게는 창작의 동기를 제공해주었다, 그만큼 셰익스피어의 시대까지도 고대 로마 시기 때 탄생된 오래된 문헌이 읽혀졌던 것이다.
국내에는 소설가 겸 번역가인 故 이윤기 씨와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의 번역본이 있다. 마침 민음사에서 출간된 이윤기 씨의 번역본을 소장하고 있어서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읽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9년 전,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이윤기 씨가 쓴 그리스 로마 신화 시리즈가 서점가에서 커다란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 때의 독서 열풍에 따라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그 책이 바로 이윤기 씨가 쓴 책이었다.
그리고 몇 학년용 교과서인지 기억이 안 나지만 확실한 것은 중학교 때 배웠던 국어 교과서에 신화에 관한 이윤기 씨의 글이 실려 있었다. 그 때 수록된 이야기가 태양 신의 마차를 몰다가 제우스의 벼락에 불 타 죽은 파에톤 이야기다.
덕분에 이 때부터 그리스 로마 신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서 신화와 관련된 이윤기 씨의 다른 책들도 열심히 읽어봤던 기억이 남는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독서의 범위는 넓혀지게 되었고 그 분이 번역가와 소설가로 활동하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실 한국소설을 즐겨 읽는 편이라 그 분이 쓴 소설은 단 한 권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그 분이 번역한 소설은 읽어봤다. 특히 제일 감명깊게 읽은 것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 인 조르바>다. 청소년기에는 이윤기 씨를 그리스 로마 신화의 전도사였다면 지금은 이윤기 씨라고 한다면 항상 먼저 떠오르는 것이 조르바다.
글을 쓰는 작가나 또는 다른 언어로 문장을 번역을 하는 번역가나 다 자신의 손에서 탄생되는 문장 그리고 글에 대해서 각별한 애정을 지니고 있다. 특히 이윤기 씨 같은 경우에는 번역만큼은 자신의 글을 읽게 되는 독자들을 위한 배려, 번역에 대한 자신의 사명감 그리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문장가들 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이 든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개정판 출간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그의 번역활동이며 <변신 이야기>는 이전에 다른 출판사에서 <둔갑 이야기>라는 제목의 축약본을 토대로 온전한 완역본으로 선보일 수 있었다.
최근에는 천병희 교수를 중심으로 고대 그리스, 로마에 쓰여진 텍스트들이 라틴어 원저 그대로 충실히 번역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이윤기 씨의 <변신 이야기>는 원저를 번역한 것이 아니라 러틴어 판을 번역한 영문판과 일어판을 중역한 것이다. <변신 이야기> 1권 첫 장에 들어가면 '일러두기' 라는 머리말이 있는데 이윤기 씨는 라틴어 판으로 번역하지 않은 이유를 솔직하면서도 타당성 있게 밝히고 있다.
라틴어 대본을 쓰지 않은 데엔 두 가지 까닭이 있다. 첫째는 역자에게, 고전 라틴어를 능숙하게 우리 말로 번역할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틴어 원문은 원래 운문인 데다, 상당 부분이 2인칭으로 서술되어 있다. (중략)
역자가 현대 영어로 번역된 영어 판을 대본으로 삼은 것은, 우리에게는 생소한 2인칭 문장이 독자를 괴롭힐 가능성이 크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 <변신 이야기> 1권, 일러두기 중에서 -
애초에 머리말에 본인의 라틴어 번역할 능력이 부족함을 알림으로써 중역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윤기 씨는 원전 자체 그대로 완벽하게 번역하는 의미에 두기보다는 원전에서 느낄 수 있는 재미를 온전하게 독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번역을 취하고 있다.
번역가들마다 각기 다른 번역가 특유의 고유한 문장 스타일이 있듯이 독자들마다 번역에 대한 취향이 다르다.
개인적으로 책의 단점을 지적하자면 문장 곳곳에 있는 한문으로 이루어진 단어에다가 간간이 나오는 중역투의 문장 때문에 젊은 층의 독자 입장에서는 재미가 반감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책에는 이와 관련된 화려한 도판이 있어야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데 민음사판에는 도판이 그리 많지 않을뿐더러 올컬러가 아닌 흑백이다.
아직 천병희 교수의 <변신 이야기>를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지금으로서는 이윤기 씨의 번역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든다. 산문형이다보니 읽으면서 할아버지가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듯한 느낌이 들었고 본업인 소설가답게 멋들어진 문장이 있어서 참 좋았다.
<변신 이야기>를 읽으면서 위대한 문장가가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사실 그리고 다시는 그의 글을 읽지 못한다는 점이 아쉽게 느껴진다. <변신 이야기>는 1998년에 첫 선을 보이게 되었는데 2권에는 이윤기 씨가 남긴 후기가 수록되어 있다. 번역 후기치고는 짧은 내용인데 지금도 이 부분을 읽게 되면 그 분의 글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하게 느껴지곤 한다.
이 <변신 이야기>는 연대순으로는 비교적 후대에 씌어진 것이기는 하나 역자의 손에서 이루어질 고대 신화 번역 총서의 한 시발점을 이룬다. 이 작업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뒤세이아>, 그리고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이스>, 아폴로도로스의 <황금 나귀>,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그리스 신화>로 이어질 것이다. 실로 평생 소원하여 마지않던 대장정이다. 험할 것으로 예감하나 이 대장정이 끝날 때까지 붓을 놓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이로써 한국의 독자들을 위한 고전 교실이 하나 세울 수 있다면 이 또한 우리 문화, 우리 문학의 초석이 될 터이다. 세계의 고전문학의 고삐를 잡고 우리 문학으로 끌어들이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 <변신 이야기> 2권, 개정판 후기 중에서 -
1998년, 그러니까 무려 13년 전부터 그리스 로마 신화를 소개하기 위한 대장정을 이미 계획하고 있었다니 붓을 놓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 그의 포부를 이제는 실현될 수 없어서 정말 안타깝기만 하다. 번역가이자 그의 친딸인 이다희 씨가 아버지가 남기고 간 유고들을 정리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지만 생전 이윤기 씨가 꿈꿔왔던 '대장정' 이 실현되기에는 너무 버겁게만 느껴진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1년이 된 지금도 그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그가 남기고 떠난 수많은 문장들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읽혀지고 있다. 고인이 생전에 했던 말처럼 당신의 존재가 잊혀지지 않는 지금의 모습이 아름답지만 잊혀지기 위해서 죽음이 이루어진다는 생각만큼은 동의할 수가 없다. 훌륭한 문장가를 잊어야한다는 점이 아쉽다기보다는 살아 생전에 꿈꿔온 그의 원대한 포부가 세월의 흐름에 잊혀져야간다는 것이 너무나 아쉽다.
특히나 당신의 글을 각별하게 좋아했던 나로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