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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돌아서면 가로막는 낮은 목소리
바람이여 안개를 걷어 가다오
아~아~ 그 정의는 어디에
아~아~ 그 정의는 어디에
- 정훈희의 노래 <안개>의 가사를 개사함 -
너무나 어둡기만한 공지영의 안개
무진(霧津). 우리말로 풀어보면 '안개 나루터' 정도라고 말할 수 있다. 문학을 좋아하고 즐겨 읽는 독자라면 '무진' 이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을 떠올릴 것이다. 서울 생활에서 상처받은 인물이 남쪽 고향인 무진에 와서 겪는 에피소드를 통해 삶의 여러 면모를 성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 때 민주화운동의 성지로 불렸던 무진은 안개로 덮여 있다. '감수성의 혁명' 이라는 별명답게 김승옥 작가는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 내놓은 입김' 이라고 음습하면서도 멋드러지게 표현하고 있다. 문학과 예술에서의 안개의 이미지는 어둠, 억압, 소통 불능, 희망 없음 정도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역시 '무진' 이라는 지명을 무대로 한 공지영의 <도가니> 역시 안개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딱 들어맞는다. 그러나 김승옥이 바라본 무진의 안개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김승옥의 안개는 몽환적이라고 한다면 공지영이 본 무진의 안개는 런던의 스모그 못지 않게 너무 불투명하면서도 어둡기만 하다. 당최 희망이라는 것이 보이지도 않는다.
우리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악의 카르텔
장애인 학교 '자애 학원' 내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성폭행 사건을 토대로 구성한 소설은 세상에 만천하에 공개된 사건 실체의 내막 자체가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는 충격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더 충격적인 점은 이 불행한 사건이 전혀 공권력의 힘이나 지역사회 상식의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역 인권단체에서 교장의 파렴치한 장애 학생 사실을 고발하지만 무진경철서 형사, 시교육청 장학사, 시청 담당 공무원, 판 검사 하물며 영광제일교회 교인들, '무사모' 라는 무진을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만든 시민단체까지 철저히 담합을 형성하여 이 사건을 은폐시키는 데 일조한다. 지역사회의 기득권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들이 총동원되어 비리 주범인 자애학원의 이강석 교장을 무혐의받도록 하는 것이다. 마치 성벽처럼 견고하고 거대한 악의 담합 앞에서 인간의 양심은 보잘것없는 사치에 불과한 것인가? 작가의 머리에서 탄생된 순전히 허구적인 내용이라고 하면 모를까 실화를 토대로 구성한 진실적인 내용이기에 우라나라의 현실에 대해 탄식이 절로 흘러나올 수 밖에 없다.
문제는 무진에서 벌어지는 이 협잡과 타락의 추악한 풍경이 단지 소설 속의 가상공간을 넘어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는데 있다. 점점 더 강자 중심으로 변해가는 권력 기득권자들의 담합과 약자들에 대한 억압, 정의의 실종과 같은 사회적 퇴행 현상이 무진에서 벌어지는 '악의 카르텔' 을 닮아가고 있다.
잘못된 사회가 괴물을 만든다
" 죽다 살아난 세계적 사회지도층의 미소 "
호텔 여종업원을 성폭행한 혐의로 수사를 받았던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 IMF 前 총재는
법원으로부터 공소 기각 결정을 받아 무혐의로 풀려나게 되었다.
(사진 출처: 로이터)
범죄도 대중의 관심에 따라 달라지는 세상에 무엇보다도 장애인은 언제나 가장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유독 장애아의 성폭행에 관해선 둔감하고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솜방망이인 사회에서 장애를 가진 당사자도 그렇지만 장애 아이를 키우거나 대한민국에서 딸을 키우는 부모로서는 늑대 굴에 어린 양을 풀어놓는 것과 다름없는 기분일 것이다.
요즘에는 집 근처 평범한 이웃에서부터 사회적으로 지위를 누리는 사회지도층, 심지어 세계 경제를 주름잡는다던 IMF 총재까지 자신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인간이 비이성적인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그리고 게중에 몇 몇 권력을 가진 자들은 자신이 일으킨 행위에 대해서 일말의 책임을 지지 않은채 법의 심판을 교묘하게 피하고 있다.
검찰 조직의 집단적인 성 접대가 만천하에 알려져도, 경제 대통령이라는 사람도 무혐의 처분을 받는 나라와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온갖 비리를 저지르고도 당당하기만 한 권력자들로 인해 상식적으로 용납해서는 안 되는 비인간적인 행위마저도 범죄가 안 되는 세상은 성경 속 소돔과 고모라 시대와 별반 다를게 없다.
장애 소녀를 집단 성폭행하고도 멀쩡하게 학교에 다니는 그들에게 대한민국은 어떻게 보일까? 그리고 인면수심으로 가득한 어른으로부터 신체적 상처를 입은데다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적인 경험의 기억은 또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여성을 하나의 성적인 유희의 도구로만 생각하게 만드는 사회에서 그들이 배울 수 있는 것은 없다. 장애아에 대한 지원은 고사하고 그들이 억울한 범죄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것도 막아주지 못하는 대한민국에서 장애아로 살아간다는 것은 지옥과도 같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장애아들은 여전히 권리를 획득하지 못한 것으로 나와 있다.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인호는 불편한 진실을 간직하지만 그 진실 안으로 뛰어들지 않는다. 뛰어들어 해결하지 않으려 하는 진실은 결국에는 묻혀버리고 만다. 지금도 어디선가 제2, 제3의 자애학원 사건이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최근에 공지영의 소설이 영화로 제작된다고 한다. 소설 발간 당시 그랬듯이 가을에 곧 개봉될 동명제목의 영화 역시 과연 소설 속 충격적인 내용을 어떻게 영상화가 될지 개봉 전부터 영화팬들 사이에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영화가 어떻게 잔인한 성폭행 장면을 묘사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충격 요법형으로 현실의 치부를 그대로 알려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화를 통해서 잘못된 사회에 대한 진지하고 절박한 고민으로 이어질 수 있느냐가 문제다.
세상은 감상으로 변하지 않는다. 제 자리에서 분노하고 공감만 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변화와 문제의 시점을 파악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비로소 변화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행동하지 않는 방관자의 무서운 침묵은 사회를 더욱 미쳐버리게 만들게 되며 괴물 같은 아이를 양산하고 그런 괴물들은 더욱 기괴한 모습으로 성장해 정의를 집어 삼켜버릴지도 모른다. 두렵고 무서운 사회를 방조하는 권력자들부터 변하지 않는 한 이 나라에는 희망의 햇빛 한 줄기 보이기는커녕 그저 어둡고 음습한 악(惡)과 거짓의 안개로만 가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