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에는 '정의' , 2007년에는 '88만원 세대' , 1990년대에는....
우리나라 베스트셀러의 역사를 돌아보면 한 권의 책이 사회 전체적으로 큰 변화를 주는 책들이 있었다. 2007년에는 <88만원 세대>로 인해 대한민국 20대들이 처한 암울한 현실 쪽으로 사회적 시선이 집중되었다면 2010년에는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였다.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서 10년 전으로 되짚어보게 되면 90년대에는 똘레랑스 신드롬이 있었다.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가 똘레랑스(관용)를 소개하면서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 1995년이니 10년을 조금 넘는 정도이다. 재미있게도 국내에 똘레랑스의 종주국으로 소개된 나라가 바로 프랑스라는 점이다.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는 한국에 돌아올 수 없는 처지였던 저자가 프랑스에 정치적 망명을 하고, 호구지책으로 택시운전사를 하면서 보고 느낀 것을 적었는데 프랑스를 사회 저변에 다양성과 타인에 대한 배려가 뿌리내리고 있는 관용의 사회로 소개하고 있다.
그 뒤 똘레랑스는 보수와 진보, 혹은 계층에 관계없이 우리 사회에서 광범위한 공감을 얻게 되었으며 한때나마 한국사회에서 양심의 자유, 다를 수 있는 자유를 용인해야 한다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똘레랑스가 소개된 지 10여 년이 지난 지금 오늘날 프랑스의 모습은 똘레랑스의 종주국이라고 무색하게 할 정도로 사르코지 정부 시대부터 점차 퇴색해져만 갔다.
실업률이 10%에 육박하고, 물가가 올라서 하루 먹고 살기 힘든데다, 범죄와 폭력이 난무하고 있는 사회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르코지 정부가 내린 특단의 조치는 강경한 이민정책이었다.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는 집시는 물론, 외국인 걸인과 도둑을 프랑스 사회를 좀먹는 '불순분자' 로 규정하여 법에 따라 모두 추방하겠다는 것이다. UN을 비롯한 국제 사회는 사르코지 정부의 강경한 이민책에 대해서 우려를 표시하였지만 정작 프랑스 국민의 절반은 정부의 이민 정책에 적극적인 지지를 표시하기도 했다.
사회가 각박해지면서 개인주의가 팽배하게 되면 인본주의, 인도주의를 제일로 치던 가치관도 바뀌기 마련이다. 게다가 각종 사회범죄가 기승을 부리게 되면서 혼란한 사회를 경험한 프랑스 인들 사이에서 외국인들을 기피하는 경향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분에 사르코지 정부의 정책에 쌍수를 들고 환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문화적, 인종적으로 이질적인 사람들 또한 자유, 평등, 유대라는 프랑스 공화국의 정신에 따라 프랑스 사회에 통합해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통합주의의 전통에 큰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이런 사회를 지켜보고 있었던 93세의 노인은 불법체류자와 이민자들을 추방하려고하며 정의가 상실되어가는 자국의 사회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새로운 메시지를 세상에 알리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분노' 였던 것이다.
2011년 지금은 '분노' 신드롬
분노라는 감정은 파괴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자신에 대해 때로는 상대에 대해 분노할 때 분노는 단순히 감정이 아닌 행동을 수반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행동은 종종 부정적인 측면을 불러일으키기에 우리는 분노의 감정을 경계한다. 그러나 분노가 사회를 대상으로 할 때, 사회적 구조를 향할 때 이는 변화를 추동하는 힘이 될 수 있다.
93세라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인권 및 사회문제에 강력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스테판 에셀의 책 <분노하라>에는 분노의 정치적 의미를 표방하고 있다.
6000원이라는 상당히 착한 가격에다가 편집자 후기와 추천사 등을 제외하면 60페이지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스테판 에셀이 현 시대를 개탄하며 쓴 글은 비단 프랑스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서도 호소력을 지닌다. 그가 전 생애를 걸고 수호한 민주주의와 평화가 시장경제라는 독재에 의해 훼손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를 지배하는 시장경제는 국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니콜라 사르코지 정부 이후 불법 체류자 및 이민 정책에서 나타나는 차별적 대우, 은퇴 연령 연장, 의료보험 제도 후퇴 등 민주주의의 가치는 점점 더 빛을 잃어가고 있다.
특히 10여년 전 다른 나라에서 유래된 올바른 가치를 배우고자고 했던 우리나라도 점점 프랑스를 닮아가고 있다.
다문화주의의 시대에 접어들어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반(反)다문화 정서의 영향은 남아 있다. 온라인 포털 사이트에 개설된 반다문화주의 인터넷 카페가 개설되어 외국인 범죄와 결혼 이민자의 가출 사례 등 외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퍼뜨리고 있다. 반다문화주의자들 역시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우리나라 경제 성장에 방해되는 요인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정부는 부자 중심의 사회 경제 정책을 내세우고 있고 이렇다보니 마땅히 보호받아야할 사회적 약자인 비정규직들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공정한 사회' 의 표방에도 불구하고 정계 내에는 불공정하고 정의롭지 못한 불법 비리와 정경유착이 사라지지 않았다. 사회적 권력자와 재벌들의 언론 독점은 이미 언론 독립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의미도 퇴색하고 말았다.
스테판 에셀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경제 소득으로 부가 축적되었지만 문화적, 사회적으로 점점 가난해지고 성숙하지 못한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질문한다. 국가는 더 이상 시민으로서 정당한 권리를 누릴 만한 비용을 감당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결국 시민이 스스로 일어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에셀은 평화적 봉기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추상적인' 분노 신드롬이 아닌 '실천적인' 분노가 필요할 때
올해 소개된 <분노하라>의 저자 스페판 에셀은 본적은 독일 출신이지만 젊은 나이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고 레지스탕스 일원으로 활약한 프랑스 사람이다. '한 때' 우리나라에서 똘레랑스의 종주국으로 추앙받았던 그 나라다. 그렇다면 이제 프랑스는 똘레랑스가 아닌 앵디녜부(Indignez-vous)의 종주국이 되는 것인가?
프랑스 이외에도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 국가에도 <분노하라>가 번역될 정도면 분명 21세기에 기억되는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범세계적 신드롬이다.
하지만 문제는 ‘분노하라’는 스테판 에셀의 메시지가 단순히 사회적 현실에 대한 추상적인 울림이 아닌 구체적 실천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19세기 말에 탄생된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이 부르주아지로부터 억압받고 있었던 전 세계 노동자들에게 사회개혁을 위한 단결의 의지를 고취시키는 변화의 원동력이 되었듯이 스테판 에셀의 분노 선언 역시 사회를 개선하려는 분노의 의지를 프랑스인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에게 촉구하고 있다.
프랑스 노인이 쓴 짧은 분량의 책을 그저 남의 나라에만 통용되는 이야기라는 인식, 또는 사회변혁에 대한 보수적인 무력감에 사로잡히게 되면 책의 진정한 메시지를 그저 활자 자체로 읽어버린 시간 낭비적 행위일뿐이며 정의롭지 못한 사회현실을 그저 두 눈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10여 년 전의 똘레랑스 신드롬처럼 역사 속 한 페이지에만 남아있는 일시적인 유행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앞으로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시민 스스로 적극적으로 사회변혁에 참여할 줄 알아야하며 비정의롭고 모순된 점에서는 분노할 줄 알고 비판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성숙된 시민으로서 요구되는 태도는 바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짊어지게 될 20대들에게 달려 있다.
20대들은 이제 암담한 현실에 대한 절규를 넘어서서 스스로 행동하기 시작해야 하는 시점이자 ‘행동하는 양심’ 이 되어야 하는 기회인 것이다. 정책과 사회, 교육제도, 정치를 바꾸지 않으면 사회변혁이 어렵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껴야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정치를 바꾸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해법을 찾고자 뭉치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 뭉쳐진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개혁의 길에 나서고 우리들의 비참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반값 등록금 문제 덕분에 분노 신드롬이 적절하게 맞아들어가게 되었고 전국 곳곳의 20대의 대학생들은 한 목소리로 등록금 문제에 대해서 직접 '분노' 하고 '저항' 할 수 있었다.
결국 20대가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길은 다른 세대나 이론에 있지 않다. 지금으로서는 20대가 행복해 지는 길은 20대 우리들 속에 있고, 우리들이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다. 우리들 20대가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또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우리들의 생존을 다른 누구에게 맡길 수 없다. 우리들의 생존은 우리들이 함께 나서서 찾아야 한다. 자유는 스스로 찾으려는 자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분노하라>가 대대적인 판매부수를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지가 않다. 책에서 전달하고자하는 메시지의 영향이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부조리하고 잘못된 사회에 대해서는 분노할 줄 알고 비판할 줄 알아야한다는 사실이다. 홍세화의 추천사 속 문구대로 스테판 에셀의 분노는 단순히 프랑스만의 것일 수는 없다. '분노' 신드롬을 뛰어넘어 전세계적으로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앵디녜부' 를 사회적으로 실천할 줄 아는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한다.
* 관련기사
[‘우향우’ 프랑스… 인종차별 살아나고 톨레랑스 사라진다] 동아일보 2010년 8월 18일
[외국인 편견·몰이해 反다문화 정서 부채질] 서울신문 2011년 7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