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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하여 -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과 대표 단편들 ㅣ 펭귄클래식 70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안지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2월
평점 :
' 소프트 아이스크림 ' 체호프의 단편소설
과장된 말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안톤 체호프의 대표 단편소설인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1899년 작)이 수록되어 있는 그의 단편선집인 <사랑에 관하여>을 두 달 사이에 스무번 정도 읽었다.
한 번 읽었던 책을 다시 읽으려면 두 세 달 뒤에 읽는 나의 평소 독서 습관을 생각하면 두 달 동안에 수십번 반복해서 읽은 책은 아마 이 책, <사랑에 관하여>일 것이다.
사실 이 책을 반복해서 읽은 특별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이 책이 독서모임 선정도서였는데 아직까지 리뷰를 쓰지 않아서 반복해서 읽었던 것이고, 또 하나의 이유는 체호프의 단편소설이 정말 좋았기 때문이다.
사실 집에 민음사에서 나온 체호프 단편소설선집이 있다보니 <사랑에 관하여>가 독서모임 선정도서가 되었을 때에는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밀린 리뷰 한 편 써내기 위해서 시험공부하다가 쉴 때 읽게 되었고, 결국에는 이 책을 수십 번 읽게 되었는데 나도 모르게 체호프의 단편소설에 푹 빠지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별다른 반응을 느끼지 못했던 타자나 대상을 자주 보게 되면 익숙해지거나 또는 호감을 가지게 되듯이 체호프를 읽는 독서가 그런 경우였다.
체호프의 단편소설의 내용은 다채롭다. 슬프거나 혹은 감동적이거나 또는 해학적인 유머가 있는 내용도 있다. 그리고 어떤 내용이든지 간에 체호프의 단편소설 한 편을 읽고나면 감정의 여운이 감돈다. 그리고 또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 생긴다.
굳이 외람된 비유를 곁들인 비교를 하자면 도스또예프스끼의 단편을 입 안에 쓴 맛이 진하게 감도는 블랙커피라면 체호프의 단편은 부드럽고 달콤한 소프트 아이스크림 정도.
먹어도 또 먹고 싶어지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의 맛처럼 체호프의 소설도 읽어도 또 읽어보고 싶은 매력이 있다.
체호프의 대표적인 단편소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그 중에 제일 많이 읽었던 단편소설은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이다.
중년의 은행원인 드미트리 드미트리치 구로프와 ' 개를 데리고 다니는 ' 얄타의 여인 안나 세르게예브나와의 러브 스토리는 어떻게 보면 불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각자 가정을 가지고 있는 처지인데다가 드미트리는 아내에게, 안나는 남편에게 전혀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소설 속 남녀 주인공은 배우자 몰래 바람을 피우고 있는 셈인 것이다.
두 연인은 서로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순순한 감정의 사랑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들이 처한 현실에 대한 불안과 죄책감 때문에 사랑의 감정을 잊고 각자 생활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각자의 생활로 돌아온 뒤에도 드미트리와 안나는 서로를 잊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드미트리가 직접 안나를 찾아가 재회하게 되면서 둘 사이의 사랑의 진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은밀한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또는 일상에 벗어난 외도의 사랑을 포기하고 가정을 지킬 것인가라는 현실적인 고뇌를 동반한다. 망설임 속에 선택의 기로에 선 드미트리와 안나는 정신적인 고민을 빠지게 되지만 현실의 어려움을 타개할 수 있는 희망적인 인생이 시작될 것이라는 암시의 뉘앙스를 남긴 채 소설은 끝을 맺는다.
' 호모 에로스(Homo Eros) ' 드미트리
개인적으로는 불륜이나 외도, 바람 피우는 것에 대해서는 반감적인 성향을 가졌는데 러시아 문학의 거장다운 체호프의 필력에 홀렸던 것이었을까? <여인>에 나오는 드미트리와 안나의 사랑에 대해서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비록 주위 시람들이 ' 외도, 불륜 ' 이라고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랑이었지만 이들의 사랑은 지나치게 본능에 치우쳐 있지 않았다.
물론 체호프가 일탈적 사랑을 미화적으로 표현한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소설을 중립적으로 읽게 된다면 ' 도덕주의자 ' 레프 톨스토이가 이 작품에 대해서 심한 분노와 불쾌감을 느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륜, 외도를 극도로 혐오한다고해서 이 소설 한 편 가지고 톨스토이처럼 크게 분노하고 문학성을 폄하한다면 그것은 ' 내가 하면 사랑, 남이 하면 불륜 ' 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의 현상에 대해서 주관적이면서 단면적인 생각을 가진 채 비난하는 것과 비슷하다.
남자든 여자든 간에 본능에 가까운 사랑이라는 감정을 충분히 조절하는 것도 쉽지 않으며 사랑의 감정에 충실하고 싶은 것이 ' 호모 에로스(Homo Eros) ' 인간이다.
특히 드미트리는 전형적인 호모 에로스적 캐릭터로 구현되고 있다.
그는 여자들 사이에 있을 때는 무슨 말을 해야하며 무슨 행동을 해야하는지 알고 있을 정도로 이성을 유혹하는데 연애 고수(?)로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안나를 처음 보는 순간 안나의 첫인상만으로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단번에 파악하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짧은 표현의 묘사였지만 드미트리가 안나와 대면하기 위해서 그녀의 애완견에 대한 관심으로 접근하는 그의 유혹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과연 이들의 사랑은 ' 최고의 사랑 ' 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이 발표 당시 독자들 사이에서는 큰 호응을 얻었다던데 특히 여성 독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소설 속 안나처럼 얄타의 해변에는 하얀 개를 데리고 돌아다니는 여성이 증가했으며 이 둘의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여성 독자들은 체호프에게 후속편을 써달라고 요쳥도 할 정도란다.
19세기 말 러시아 여인들은 소설 속 남자 주인공 드미트리를 열광적으로 호응했을지도 모른다. 올해 초에 인기리에 종영되었던 <시크릿가든>의 ' 주연앓이 ' 와 역시 최근에 많은 호응 속에 종영되었던 <최고의 사랑>의 독고진에 푹 빠진 여성 시청자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내가 드미트리와 안나와의 사랑에 대해서 비난하고 싶은 감정은 없지만 과연 이들의 사랑이 꼭 이루어져야 할 운명적이고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드미트리의 이중생활은 외도와 이성의 바람기를 허용하지 않는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현실적으로 실현하기에는 불가능하며 실제적으로 평온한 가정을 한순간에 파탄날 수 있는 위험한 삶의 선택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의 선택을 쉽게 수긍하는 독자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만남이 운명이라 믿었다. 그래서 도대체 왜 그가 결혼을 하고 그녀가 시집을 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새장에 갇혀 살게 된 두 마리의 암수 철새 같았다.
- 안톤 체호프『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중에서, 같은 책 pp 228~229 -
드미트리와 안나는 자신들이 처한 가정생활을 새장에 갇힌 새라고 비유를 하고 있는데 이 두 연인은 자신들의 사랑이 곧 또 다른 새장에 갇히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특히 바람기 있는 드미트리는 자신의 삶에 새롭고 아름다운 인생이 시작될 것이라는 사랑의 ' 희망 ' 에만 사로잡혀 있다보니 정작 마주하게 될 사랑의 진짜 ' 현실 ' 을 간과하고 있다.
만약에 드미트리가 아내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안나와 재혼을 한다고 상상해보자.
남성 기혼자들 사이에서는 우스갯소리로 ' 결혼은 지옥이다 ' 라는 말이 떠돌던데 드미트리는 새장도 아닌 ' 지옥 ' 이라는 결혼 생활을 견딜 수, 아니 그 때의 감정처럼 행복하게 유지할 수 있을까? 확실한 것은 결혼을 하고나면 예전의 연애를 했던 사랑의 감정이 쉽게 변하며 끝까지 유지할 수 없다는 점이다.
만약에 체호프가 이 소설의 후속편을 쓰게 된다면 어떤 내용이 전개될까?
여성 독자들의 호흥에 못 이겨 두 사람의 사랑이 이어지는 전개로 썼을테지만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을 집필하기 전 13년 전에 체호프는 『진창』(1886년 작) 을 통해서 남성들의 은밀하고 저속한 욕망을 날카롭게 묘사했다. (이 단편소설 역시 <사랑에 대하여>에 수록되어 있는데 꼭 읽어보시라. 특히 남성 독자들은!)
마음에 드는 이성이라면 얼마든지 유혹하고 싶은 남성이라는 종족을 제대로 알고 있는 체호프라면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의 후속작을 시간과 현실에 따라 쉽게 변하는 남녀 간의 사랑을 특유의 필체와 탁월한 표현력으로 실감나게 묘사했을 것이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을 감명깊게 읽은 여성 독자들에게는 지극히 현실적인 후속작을 생각하기도 싫은 ' 최악의 사랑 ' 으로 읽혀지게 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