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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의 꿈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23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박종소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평점 :
" 이건 코디미로군요! "
- 도스또예프스끼 <아저씨의 꿈>중에서, p 216 -
익살과 해학이 넘치는 소설
도스또예프스끼의 유명한 대표작들을 열거하게 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이 <죄와 벌><백치><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다. 이들 작품들은 도스또예프스끼의 문학 인생 중 후기를 대표하는 불후의 명작이면서도 인간 존재의 근본 문제, 신, 이념 등 그리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읽는데 쉽지가 않다.
하지만 <아저씨의 꿈>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도스또예프스끼적인 문학 세계과 상반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도스또예프스끼가 기나긴 시베이라 유형 생활을 끝마치고 난 후에 본격적으로 작가 생활을 다시 하기 위해서 썼던 것인데 이 시기부터가 도스또예프스끼 문학 인생에서 과도기에 해당한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문학을 거대한 산으로 표현하자면 이제 막 중반에 이르렀을뿐이다. <죄와 벌><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라는 험한 산봉우리에 등정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이지만 지금까지 읽은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들 중에서 무척 재미있게 읽었던 것이 바로 이 소설이다. 소설 속의 사건 전개가 한 편의 코믹한 드라마를 연상케 한다.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던 중후한 도스또예프스끼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익살과 해학이 넘치는 분위기의 소설이라서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 아저씨 ' 공작 노인의 꿈, ' 어머니 ' 마리야의 꿈
세속적이면서도 허영심으로 가득한 귀족 부인인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자신의 딸인 지나를 부유하면서도 노화 때문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공작 노인에게 시집을 보내기 위해서 계략을 꾸민다는 에피소드이다. 자신의 딸에게는 할아버지뻘이 되는 늙은 공작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하는 마리야의 계략에는 자신의 부귀영달을 누리려고 하는 속셈이 숨겨져 있다.
그러나 지나는 이미 어머니의 속셈을 눈치를 채고 공작 노인과의 결혼을 반대하였다. 사실 그녀는 폐평으로 생사를 넘나들고 있는 가난한 가정교사를 짝사랑하고 있었으며 아직까지도 마음 속에는 가정교사를 향한 사랑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누가 늙어빠진 영감쟁이와 결혼을 하겠는가?
특히 소설 속 공작 노인은 과장될 정도로 치매기 가득한 희화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자신이 왕년에 나폴레옹과 시인 바이런, 음악가 베토벤을 만났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만났는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횡설수설하는 코믹한 캐릭터이다.
공작 노인과 딸의 결혼이 성사되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여생의 행로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마리야는 딸의 완고한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 공작과의 결혼이야말로 부와 명예로 가득한 삶을 위한 지름길이라는 식으로 간곡하게 사정을 한다.
그 당시 유럽 사회에서는 상류층으로 진출하여 부유한 삶을 살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는 상류층 집안과의 혼사를 맺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말이 부정할 수 없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삶의 중대한 결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지나는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공작 노인과 청혼을 하게 된다. 자신도 공작 노인과의 결혼이야말로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한편 그런 지나를 사모하는 또 다른 남자가 있었는데 젊은 관리 모즈글랴꼬프는 한 때 지나에게 고백을 했다가 퇴짜 맞은,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지나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우연히 마리야의 계략을 알게 된 모즈글랴꼬프는 지나와 늙은 공작과의 결혼을 어떻게든 막기 위해서 공작에게 접근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 결혼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지나의 청혼은 한낱 꿈 속에 있었던 일이라는 식으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공작 노인에게 늘어놓는다.
치매기가 있는 공작 노인은 모즈글랴꼬프의 어설프게 짝이 없는 속임수를 곧이 곧대로 믿어버린다. 결국에는 모즈글랴꼬프의 계략 때문에 지나와 공작 노인의 결혼은 파기되었고 마리야의 계락마저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이 기회에 틈타 모즈글랴꼬프는 다시 한 번 지나에게 고백을 하게 되지만 도리어 또 한 번 실연을 당하게 된다. 지나는 이전부터 쭉 모조글랴꼬프의 계락을 이미 눈치 채고 있었으며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 비겁한 속임수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청혼을 거절한다.
' 사랑 ' 이라는 이름으로 둘러싼 간계가 실타래처럼 꼬여 버리는 바람에 아리따운 처녀와의 사랑을 꿈꾸었던 공작 노인 ' 아저씨 ' 의 꿈은 산산히 부서지게 되었고 화려한 여생의 앞날을 고대하던 마리야의 장밋빛 꿈마저도 한순간에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모즈글랴꼬프는 자신이 만든 속임수로 인해 스스로 무덤을 파는 꼴이 되고 말았다.
최후에 웃는 자는 마리야와 지나
SBS 주말 드라마 <웃어요 엄마>에서 출연중인 이미숙 씨
자식의 성공을 통해서 자신의 안락한 행복을 누리려고 하는
어머니 조복희로 등장하고 있다.
자신의 딸을 통해서 사교계 상류층으로서의 명성과 부귀를 통해 안락한 삶을 누리고 싶어하는 마리야의 모습은 S 방송국 주말 드라마 <웃어요 엄마>에 등장하고 있는 조복희(이미숙 분)와 유사하다.
조복희는 자신의 딸인 신달래(강민경 분)를 무명 연예인에서 톱 스타 연예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일거수일투족 딸을 감시하고 최대한 자신의 딸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그리고 제일그룹 사장인 구현세(박성민 분)과 정략결혼을 시키려고까지 한다. 연예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야하는 말 못하는 정신적 고통과 오직 명예 때문에 진정한 사랑을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억지 결혼에 신물이 난 신달래는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드라마 초반부터 딸의 출세에 눈이 먼 나머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끝없이 다그쳤던 조복희는 후반기에 이르러면서 자신의 딸이 불치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녀를 위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주는 딸을 지극히 사랑하는 진정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된다.
과연 드라마 제목처럼 조복희는 고통의 시간을 이겨내고 마지막에는 웃을 수 있을지 결말을 끝까지 지켜봐야하지만 소설 속 마리야는 결혼 파기라는 굴욕을 깨끗이 씻어내고 웃을 수 있었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때문에 이수일과의 사랑을 파기시켜버린 심순애처럼 사랑의 참된 가치를 강조하였던 지나도 정신적인 교감보다 물질적 가치가 중요시되는 사랑의 현실을 무시할 수 없는가 보다. 지나는 예전에 연분을 맺은 가난한 가정교사이 아닌, 자신에게 두 번이나 고백을 한 모즈글랴꼬프도 아닌, 고위직 장군의 아내가 되고 만다.
결말에는 마리야가 어떻게 되었는지 상세한 속사정을 알 수 없지만 지나가 고위직 장군과 결혼을 했으니 마리야는 마음 속으로 웃었을 것이다.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상류층 인사와의 혼사가 이루어졌으니 이제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으니까.
이 소설에서는 딸의 결혼에 집착하며 엄격하기만한 마리야와 반대로 우스꽝스러운 노인으로 등장하는 공작의 등장이 돋보이지만 지나라는 인물 역시 쉽게 무시할 수 없다. 소설 전반부에서는 사랑이라는 정신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여성으로 등장하지만 결말에서는 고위직 장군과 결혼함으로써 세속적인 사랑을 선택하는 입체적인 인물이다.
사랑에 실패를 하게 된 공작 노인과 모즈글랴꼬프의 모습과는 무척 대조적이다. 결국 이 소설에서 최후에 웃는 자는 마리야와 지나, 두 모녀인 셈이다.
사랑보다는 다이아몬드
이 소설은 얼핏 도스또예프스끼의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의 전개와 유사하다. <가난한 사람들>에 등장하는 가난한 하급관리인 마까르 제부쉬낀과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가 결정적으로 이별을 맞이하게 되는 이유가 물질적인 안정을 영위할 수 있는 잘 사는 사람과의 만남이었다. 이 소설에서도 바르바라는 마까르보다 더 잘 사는 부유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게 되면서 서신을 나누면서 오랫동안 유지해오던 애틋한 사랑은 슬픈 결말로 끝나게 된다.
앞에서도 잠깐 심순애를 언급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바르바라와 <아저씨의 꿈>의 지나, 이 세 여인의 공통점은 부모가 시키는 대로 부유한 권세가와 결혼을 하고마는 봉건적인 사회체제를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름다운 플라토닉 러브는 엄격한 가족 제도와 명예 그리고 부(副)가 만들어낸 상류 사회가 만들어낸 사회적인 장애물을 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무조건 나쁘다고만 매도할 수 없다. 이 여성들에게는 견호하게 세워진 사회적인 장애물을 뛰어 넘으려고 하는 의지가 미약했고 지금도 그 장애물은 무너지지 않았다.
사랑이 1순위인 결혼보다는 더 잘 사는 것에 1순위로 두고 있는 취집을 선호하는 오늘날의 결혼 세태와 월평균 수입이 400만원이 넘어야 행복한 결혼생활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20, 30대 남녀의 결혼관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도 사랑으로만 밥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랫동안 연인의 끈을 이어가면서도 밥을 먹고 살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가치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순애는 김중배와 결혼 이후에도 이수일에 대한 사랑을 못 잊어서 괴로워하는데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 속에 사랑에 실패하는 여성들은 이상하게도 사랑의 후유증 때문에 괴로워하는 묘사가 없다. 반면에 남자들이 더 고통에 시달린다. <가난한 사람들>의 마까르는 부당한 현실 때문에 이루어진 사랑의 실패 앞에서 괴로워하고 <아저씨의 꿈>의 모즈글랴꼬프는 고위직 장군의 아내가 된 지나의 모습을 보면서 억지로 인생의 쓴 맛을 삼켜내고 있다.
과연 지나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그녀의 생애에서 첫 사랑은 가난한 가정교사였다. 마음이 여린 그녀 역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병 때문에 고통 속에서 살다 간 가정교사를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과 행복으로 번쩍거리는 다이아몬드 앞에서 갈등을 하고 괴로워하는 여성의 고뇌를 세밀하게 묘사한 소설 한 편을 코믹한 드라마가 아닌 정말로 진지하게, 도스또예프스끼가 마음 먹고 제대로 썼다면 어떤 작품이 나왔을지 내심 궁금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