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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크래프트 전집 1 ㅣ 러브크래프트 전집 1
H. P. 러브크래프트 지음, 정진영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8월
평점 :
헨리 퓨젤리 <악몽>, 1781년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감정은 공포다.
그리고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공포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다.
- H.P. 러브크래프트 -
호러소설계의 ' 미친 존재감 '
요즘 온라인에서는 ' 미친 존재감 ' 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새롭게 등장한 이 단어는 주로 방송에서 출연하는 연예인들의 수식어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 적은 방송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외모, 스타일 등으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으며 방송 내용 전체 흐름에 큰 영향을 주는 연예인들에게 붙여진다. 그만큼, 특정 연예인들을 향한 대중들의 인기를 반영하고 있으며 방송. 연예계뿐만 아니라, 이제는 사회나 스포츠 등 어디서나 사용되는 새로운 신조어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렇다면, 호러소설 장르에서 ' 미친 존재감 ' 은 누구일까?
최근에 신작소설을 들고 나온 '호러 킹(Horror King)' 스티븐 킹, 호러소설의 창시자이며 미스터리 소설 작가들에게 수여되는 상의 이름으로 남아있는 에드거 앨런 포우, 아니면 <피의 책>이라는 작품 하나만으로 인기 호러소설 작가로 급부상했던 클라이브 바커. 이 외에도 <나는 전설이다>의 작가 리처드 매드슨, 일본의 교고쿠 나쓰히코 등은 지금도 수많은 독자층 팬덤 형성은 물론이고, 영화나 TV 드라마로 만들어질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대표적인 작가들이다.
여기서 언급한 특정 작가를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이들에게는 ' 미친 존재감 ' 이라고 불릴만한 작가가 없다. 아니, 이들은 이미 대중적인 작가로 지금도 이들의 명성은 가히 높기 때문에 ' 미친 존재감 ' 이라고 붙이기에는 ' 거장 ' 이나 다름없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퍽 섭섭해할 것이다. 특히, ' 호러 킹 ' 이라는 별명 하나로 호러소설의 제왕으로 상징되는 스티븐 킹에게는.
러브크래프트, 그는 누구인가?
H.P. 러브크래프트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1890~1937)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생소하겠지만 호러소설을 즐겨 읽으시는 분들이라면 한번쯤은 이름을 들어봤을 H.P. 러브크래프트. 그야말로 호러소설계의 ' 미친 존재감 ' 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스티븐 킹, 클라이브 바커, SF호러 영화 <에일리언>의 캐릭터를 탄생시킨 H.R. 기거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러브크래프트라는 존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러브크래프트의 프로필을 보게 되면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의 일생 전반적으로 보면 어둡기만 하다. 아버지가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불우한 유년시절을 경험했지만 그 시기에 이루어진 방대한 독서는 자신의 작품 집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작품 집필과 독서를 위해서 폐쇄적인 생활을 한 그는 그 이유로 괴짜 은둔자라는 이미지가 따라다니게 되었지만 실제로는 자신처럼 호러소설을 쓰는 아마추어 작가들과 서한 교류를 할 정도로 그렇게 폐쇄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당시만해도 러브크래프트 문학을 알아주기에는 시대에 앞선 일이었으며 열심히 써내려간 단편소설들은 단지 생계 유지를 위한 것일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H.R. 기거가 그린 에일리언
러브크래프트가 묘사한 크툴루와 니알로토텝의 모습은
H.R. 기거가 그린 에일리언의 모습과 같다고 주장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러브크래프트의 문학은 H.R. 기거의 미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
크툴루, 니알로토텝, 데이곤 등 이전에 보지 못한 괴기스러운 캐릭터들을 탄생시켰으며 그의 생애만큼이나 대다수 작품들에서도 뿜어져나오는 음산하고 괴기스러운 분위기 때문에 그의 문학은 영영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질뻔하였다. 하지만, 후세에 그의 문학은 호러소설이라는 장르를 구축한 공로로 평가되기 시작하였으며 그의 소설은 영화, 음악 등으로 변용되어 재생산되고 있다. 스티븐 킹 이외에도 장르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한번씩 꼭 읽었던 대표적인 작가가 바로 러브크래프트이다.
러브크래프트의 몽환적 리얼리즘
러브크래프트의 소설들은 기존에 우리가 읽고 있는 소설의 형식과 다르다. 무섭고 으시시한 호러소설을 원하면서도 러브크래프트를 처음 읽게 되는 독자들에게는 낯선 문장과 묘사 때문에 러브크래프트 문학의 묘미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소설에는 세기말 유럽 사회의 분위기와 고대에서 전해내려온 미신 그리고 러브크래프트 특유의 몽환적인 오컬트가 공존하고 있다.
페르낭 크노프 <버려진 거리>, 1904년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을 읽게 되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배경이 있기 마련인데 아컴, 미스캐토닉 계곡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공간이지만 러브크래프트 소설의 핵심적인 배경들이다. 가끔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실제 지명인 프로비던스도 종종 등장하곤 한다. 소설 속 지명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존재가 살기에 딱 적당한 장소인만큼 대체로 음산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그리고, 러브크래프트 소설에서도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키워드가 바로 네크로노미콘이다. 네크로노미콘을 절대로 읽어서는 안 되는 ' 악마의 책 ' 이다. 다시 말하자면, 금서인 것이다. 러브크래프트는 <네크로노미콘의 역사> 라는 일종의 픽션이 가미된 소품에서 이 책이 실제 존재하는마냥 묘사하고 있다. (러브크래프트는 네크로노미콘의 판본 중 하나가 아컴의 미스캐토닉 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게 되면 끔찍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한다. 비록,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허구의 책이지만 ' 금서 ' 와 ' 저주의 책 ' 이라는 효과 덕분에 이름을 그대로 따온 위작들이 등장할 정도로 러브크래프트는 환상과 현실이 공존하는 묘사에 탁월하였다.
아르놀트 뵈클린 <망자의 섬>, 1880년
러브크래프트 소설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마치 꿈 속에서 겪은듯한 환상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데 독자들에게는 현실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게 된다. 특히 <데이곤>에서 화자가 늪 속에서 흉칙스러운 괴생물체 데이곤을 피하기 위해서 낯선 곳에서의 혼란과 공포 속에서 난파선까지 사력을 다하여 기어가다시피 하는 모습은 꿈 속에 있을법한 일을 더욱 현장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어딘지 알 수 없는 어둠만이 존재하는 늪 속 한가운데에 있다고 꿈을 꾸고 있다고 하자. 실제로 접하지 못한 낯선 미지의 공간에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공포감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꿈꾸고 있는 동안 우리는 그런 분위기를 갖게 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동물이라고 말할 수 없는 괴이한 모습의 생명체들이 다가온다고 해보자. 공포감이 한층 더 배가될 것이다.
꿈이라는 현상을 겪게 되면 잠자는 동안에 깨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사물을 보고 듣을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한 경험을 하게되지만 결국에는 꿈 속에서의 장소와 배경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에 불과하다. 실제로 러브크래프트의 소설들 중에는 작가 본인의 꿈을 토대로 오컬트적 분위기를 가미한 것들이 있다. 작가 본인 스스로도 꿈 덕분에 니알로토텝이 탄생할 수 있다고 밝힐 정도로 그가 꿨던 꿈 (어떻게 보면, 불길하고 괴이하기 짝이 없는 악몽이지만) 은 몽환적 리얼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소설로 재구성할 수 있었다.
꿈꾸는 인간이 기록한 그로테스크한 일기
<뵈클린에 대한 경의> H.R. 기거
러브크래프트의 소설들을 읽게 되면 어떤 독자들은 작가의 정신 세계에 대해서 의문을 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작가의 아버지가 정신 질환 증상이 있었다는 점 때문에 작가 본인도 스스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는 정신 질환의 유전적 징후가 독특한 작품들이 완성할 수 있는 근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소설 속 화자들은 대부분 일기 형식으로 자신들이 겪은 괴이한 체험을 고백하는 것처럼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나 역시 이번에 그의 소설을 처음 읽게 되면서 호러소설계의 ' 미친 존재감' 답게 미친 사람이 쓴 일기와 같은 느낌을 받곤 하였다. 하지만, 이 책의 번역가 정진영 씨는 정신 질환과 관련된 생애 때문에 형성된 작가에 대한 그릇된 시각은 작가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는데 요용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러브크래프트의 정신 상태가 불안정했는지 제대로 증명할 수 있는 자료는 없지만, 불안정한 심리 상태가 무조건 작품 구성에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인간이 낯선 미지의 환경이나 장소 앞에서 원초적인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처럼 러브크래프트 역시 분명히 그런 심리적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그가 꾸었던 꿈들을 토대로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 ' 를 소설로 실감나게 반영하고 있다. 그가 은둔자라는 오명을 받으면서까지 평생 호러소설 ' 외골수' 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자신의 소설들을 지금까지 꿈 속에서 경험한 환상적인 체험을 기록하기 위한 자신만의 일기로 여긴 것이 아닐까하는 추측도 해본다.
러브크래프트의 일기 아니 소설 속에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무섭고도 불쾌하게 만드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의 소설 한 편을 읽기 시작하게 되면 작품 전반 내내 흐르는 긴장감이 만들어내는 호기심 때문에 눈을 뗄 수가 없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로테스크한 그의 소설들이 읽고 싶어지게 되는 이유가 남의 일기를 훔쳐보게 되면 더 읽고 싶어지게 되는 유희적인 욕구와 같은 카타르시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