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쩍 지나가버린 토요일의 날씨는 차갑지 않았다. 서울 어딘가에 남아 있을 거무튀튀한 잔설(殘雪)이 다 녹을 정도로 그날은 미온(微溫)했다. 그러나 세상은 미온(未穩)하다. 용산의 대역죄인이 풀려났다. 탄핵을 열심히 외친 광장이 한풀 꺾였다. 탄핵이라는 두 글자를 크게 새긴 독자들의 마음도 광장이다. 대역죄인의 석방 소식에 격분한 독자들의 눈에 화(火)가 맺혀 있다. 활활 타오르는 독자들의 눈을 마주친 책은 소심해진다. 뜨거워진 독자들의 눈에 책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도 화를 삭인 독자들은 평소처럼 책을 읽는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세상이 어지러운 마당에 한가하게 책 읽을 때냐고 째려보면서 말한다. 그들은 모른다. 점점 혼탁해지는 세상을 견디면서 살아가는 독자들이 왜 책을 읽는지를.
서울 독서 모임
<달의 궁전>


찬쉐, 강영희 옮김
《격정세계》 (은행나무, 2024년)
2025년 3월 8일 토요일, 오후 2시~4시
장소: 투썸플레이스 을지로입구역점
<달궁>을 만든 독자들
삽하나, 헤르메스, 마욤, 레삭매냐, 시진,
습습, 숨, 대장물방울, Jarrett, 최해성(독서 모임 후기 엮은이)
독서 모임 <달의 궁전>(달궁) 올해 첫 번째 책은 중국의 작가 찬쉐(殘雪)의 장편소설 《격정 세계》다. 《격정 세계》에 나오는 인물들은 책이 없으면 살 수 없는 독자들이다. 이들에게 책은 공기요, 밥이요, 사랑이다. 《격정 세계》에 나오는 독자들은 ‘비둘기’라는 이름의 북클럽의 정규 회원이다. ‘비둘기’ 모임에 한 번 참석하게 되면 ‘문학’을 바라보는 독자들의 눈빛이 달라진다. 소설 속 독자들은 유독 문학을 좋아한다.
이 소설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한마(寒馬)다. 한마는 자신보다 책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샤오쌍(小桑)을 만나면서부터 소설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다. 샤오쌍의 소개로 ‘비둘기’ 모임에 참석한 이후부터 한마는 ‘읽는 인간’에서 ‘글 쓰는 인간’으로 성장한다. 한마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격정 세계》는 독서와 글쓰기를 예찬하는 소설이다. 진심으로 책을 사랑하는 독자는 글쓰기도 좋아한다. 글을 쓰는 모든 독자는 작가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천쉐는 이 세상에 글 쓰는 독자들이 많을수록 좋다고 말한다. 샤오쌍과 한마는 작가 찬쉐의 분신이다. 책을 잘 읽는 샤오쌍도 글쓰기의 장점을 강조한다.
“우린 진심으로 사랑에 휩쓸리고자 하지. 우리가 읽기와 쓰기를 갈망하는 것처럼. 사랑의 결과는 예측할 수 없지만 읽기와 쓰기는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게 다른 점이지. 바로 이 때문에 인류는 문학을 발명했어.”
(326쪽)
《격정 세계》를 추천한 헤르메스 님은 살기 팍팍한 시대에 왜 책을 읽어야 하고, 또 문학을 좋아해야 하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면 이 책을 읽으면 된다고 했다. 그렇지만 헤르메스 님을 제외한 달궁 독자들은 《격정 세계》를 비판하는 견해를 쏟아냈다(독서 모임 후기 엮은이도 비판하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줬다).
레샥매냐 님(알라딘 서재 마을에 북 리뷰를 쓰고, 독서 모임 전날에 《격정 세계》 리뷰[주]를 남긴 그 레삭매냐 님이다)은 소설 속 나오는 사람들 모두 문학에 ‘미친 자들’이라고 평가했다. 문학을 읽으면서 자신의 삶을 개선하고 발전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인물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고 했다. <달궁> 독자들은 ‘비둘기’ 북클럽 모임 회원들이 커다란 갈등 없이 화목하게 지내고, 결국 서로 사랑해서 연인이 되어가는 과정이 단조롭다고 지적했다. <달궁> 모임장 삽하나 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격정 세계》는 그야말로 ‘없는 세계(utopia)’다. ‘개인의 삶을 구원하는 문학’을 지나치게 예찬하는 인물들이 부담스럽고, 오히려 기괴하다. 소설에 나오는 동물들은(검은 고양이, 표범, 새 등)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다.
《격정 세계》를 비판하는 <달궁> 독자들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질수록 헤르메스 님은 차분하게 《격정 세계》의 장점을 설명하면서 책의 매력을 지키려고 했다. 독서 모임 후기를 어떻게 써야 할지 머리를 굴리던 나는 <달궁> 독자들이 ‘치고받는’ 대화를 정말 흥미롭게 관전했다. 이래서 내가 <달궁>을 안 나올 수 없다니까.
[(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
* [절판] 안토니오 그람시, 린 로너 엮음, 양희정 옮김, 《감옥에서 보낸 편지》 (민음사, 2000년)
[ROUTLEDGE Critical THINKERS 26]
* 스티브 존스, 최영석 옮김, 《안토니오 그람시 비범한 헤게모니》 (앨피, 2022년)
* 마이크 곤살레스 & 이언 버철 외, 이수현 옮김, 《처음 만나는 혁명가들: 마르크스, 레닌, 룩셈부르크, 트로츠키, 그람시》 (책갈피, 2015년)
헤르메스 님은 ‘비둘기’ 북클럽의 성격을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가 내세운 개념인 ‘진지전(War of position)’으로 설명했다. 그람시는 이탈리아 공산당을 세운 사회주의 정치인이다.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부의 탄압을 받아 옥중 생활을 한 그람시는 감옥에서 자신의 생각을 담은 편지를 남겼다.

그람시의 주장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완전히 장악한 이탈리아에 혁명이 성공하려면 부르주아 기득권과 부르주아 문화에 장기적으로 저항해야 한다. 러시아 혁명처럼 정면으로 맞서서 신속하게 ‘기동전(war of maneuver)’을 수행하면 혁명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1905년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을 지켜본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은 사회주의의 위력을 습득하면서 그들의 투쟁 전략을 예상한다. 따라서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들은 참호 속에 숨어서 싸우듯이 진지전을 펼쳐야 하며, 자본주의에 맞서서 뒤집을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비록 혁명이 달성하는 데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자본주의의 참호들을 하나하나씩 점령하면 부르주아 기득권의 헤게모니(hegemony, 지배권)는 무너진다. 이때 사회주의자들이 기동전을 펼칠 기회가 생긴다.
‘비둘기’ 북클럽은 문학과 독서를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중국의 검열 방식에 정면으로 저항하지 않는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기동전이 아닌 진지전이다. ‘비둘기’ 북클럽의 일차 목표는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이 책을 좋아하도록 변화시키는 것이다. ‘비둘기’ 북클럽 회원이자 샤오쌍의 직장 동료인 샤오마(小麻)는 문학 읽기가 인간을 각성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작업’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문학의 힘을 ‘감염’으로 비유한다.
“문학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최근 난 스스로 변화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의 변화도 이끌어냈어요. 이것이 바로 문학의 감염력이죠.”
(464쪽)
‘비둘기’ 북클럽 회원들의 문학 예찬은 책 밖에 있는 독자들에게도 계속 강조한다. ‘비둘기’ 북클럽 회원들의 신조는 문학에 등 돌린 (소설 속 허구의 세계와 현실의) 독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 건전한 ‘구호’다. 독서와 문학에 제대로 미친 독자들이 많으면 독서와 문학의 강점을 무시하는 냉소주의에 맞설 수 있다.
[바벨의 도서관 24]
* 포송령,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해제), 김혜경 옮김, 《요재지이》 (바다출판사, 2012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송병선 옮김, 《픽션들》 (민음사, 2011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1]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송병선 옮김, 《알레프》 (민음사, 2012년)
[보르헤스 선집 1]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황병하 옮김, 《불한당들의 세계사》 (민음사, 1994년)
[보르헤스 선집 2]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황병하 옮김, 《픽션들》 (민음사, 1994년)
[보르헤스 선집 3]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황병하 옮김, 《알렙》 (민음사, 1996년)
[보르헤스 선집 4]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황병하 & 송병선 옮김, 《칼잡이들의 세계사》 (민음사, 1997년)
[보르헤스 선집 5]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황병하 옮김, 《셰익스피어의 기억》 (민음사, 1997년)
찬쉐는 중국보다는 서구에서 인정받고 있다. 그녀의 문학 세계는 아르헨티나의 작가 보르헤스(Borges)와 견줄 만하다고 평가받는다. 보르헤스는 허구와 현실을 철저히 구분 짓는 경계를 허문 이야기꾼이다. 보르헤스의 소설에 나오는 세계와 인물들은 비현실적이다. 헤르메스 님은 찬쉐의 문학 세계에 한 축을 담당하는 ‘환상성’은 포송령(蒲松齡)의 기담 소설집 《요재지이》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보르헤스는 《요재지이》에 실린 기담을 ‘사실주의(realism) 소설’이라고 했다. 그는 왜 환상 소설을 실제와 같은 이야기라고 말한 것일까? 보르헤스에 따르면 중국 독자들은 미신을 믿기 때문에 환상적인 이야기를 실제의 사건으로 이해하면서 읽는다. 나를 포함한 <달궁> 독자들은 《격정 세계》를 ‘비현실적’ 이야기로 느꼈지만, 반대로 중국 독자들은 ‘현실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다.
여전히 사람들은 소설을 즐겨 읽는 독자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허구적인 이야기가 그렇게도 재미있냐면서 비아냥거린다. 심지어 문학을 즐겨 읽는 독자들을 현실 도피자로 규정한다. 그들의 생각은 틀렸다. 책 한 권 읽지 않고, 눈동자와 머릿속에 유튜브만 있는 사람들을 비난해야 한다. 유튜브가 전부인 그들은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 그래서 현실을 똑바로 보려는 의지력, 즉 생각하는 힘이 책을 읽는 독자보다 부족하다. 유튜브는 알기 쉽게 세상물정을 알려준다. 유튜브는 온몸으로 세상을 느끼고 싶지 않은 현실 도피자들의 낙원이다. 하지만 유튜브는 세상의 진실을 알려주지 않을 때가 있다. 유튜브에 중독된 사람은 유튜브의 거짓말을 먹으면서 살아간다. 유튜브가 말하지 않는 진짜 현실을 ‘소설’이라면서 무시한다. 유튜브에 갇힌 사람이 생각하는 소설은 ‘가짜’ 또는 ‘거짓’이다. 이렇게 소설의 정의를 잘못 알고 있으니 문학을 좋아할 리가 없다.
책을 즐겨 읽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
하지만 책을 멀리하면서 유튜브에 매달린 삶은 불행하다.
[주] <문학이 너희를 구원하리라>, 레삭매냐 (2025년 3월 7일 작성)
https://blog.aladin.co.kr/723405103/16284512
레삭매냐 님은 <달궁> 모임에 오실 때마다 책에 대한 정보를 간략히 설명한 글을 A4 용지에 정리해서 <달궁> 독자들에게 나눠 준다. 《격정 세계》 모임에 참석한 독자들을 위해 레삭매냐 님은 소설 속 등장인물을 소개한 글(마욤 님이 찍은 첫 번째 사진에 나온 A4 용지)을 작성했다. 독서 모임 후기를 쓰는 데 많이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