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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크스가구 OL다. 마르크스가시패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전환형 복합불황 시대에방식이 미래에는 실패 이한 2) 행복 방정식의 변환, 3) 사회 개조의 프레임 구브구조의 대안 마련 등의 단계를 거쳐 대응해야 한다.
겨채은 3장에서 살펴 본 대전환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원적으로 1)인식 전환, 2) 행보)축, 4)다양한 하부구조의 대기본적인 해결책은 3장에다. 환경, 기술 혁신, 양극화, 공기술 혁신, 양극화, 공급과잉, 인구감소, 부채 문제, 글로벌불균가지 영역의 문제에 대해서 모든 국가가 동시에기서과 리더십 등 8가지 영역의 문제에 대해서 모든 국기하현 복합불황의 방어기제를 마련하면 된다. 그러나 불가능하다. 8가지를 모두 변화시키려면 사회 전체, 그리고 인간성마저 바꿔야 한다. 또하 아직 전환형 복합불황이 본격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도 약하다. 결국 세계는 전환형 복합불황에 빠져야만 해결책을 찾 아내려 노력할 것이다. 그렇다면 원초적인 해결책은 무엇일까? 이는 인간의 행복 방정식을 바꾸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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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켄트 하루프 지음, 한기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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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처음 들어본 작가라는 점, 죽음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인물의 얘기라는 점이 관심을 끌었다. 바로 전에 읽은 소설이 너무 난해해서 책장이 잘 안 넘어가 읽으면서 고통스러웠던 것과 달리 이 소설은 한 자리에서 다 읽었다. 책장이 잘 넘어간다. 예전에는 약간 비하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안다. 책장을 잘 넘어가게 쓰는 것도 한 능력, 재능이라는 거 말이다. 아무나 못하는 커다란 힘이라는 거. 혹자는 쉬운 소설을 쉽다고 무시할지 모르지만. 어찌 보면 소설 말고도 활자로 된 것의 기본조건은 독자가 읽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축복>400페이지 정도 되지만 카페에 앉아 한 자리에서 다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휘리릭 읽힌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지만. 그 정도로 재밌다는 거다. 물론 소재적인 면이나 줄거리로 보면 흥미 있다, 재미있다란 말을 하기엔 조심스럽다.(암 말기 환자의 마지막 시간들에 대한 얘기니까) 마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처음엔 너무 많은 인물들이 나오는 듯하지만. 점점 소설 속 마을 사람들의 삶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짤막한 39개의 챕터들. 문체는 각 장의 길이만큼이나 간결하다. 이런 형식을 정말 좋아한다. 문체 때문인가 작가의 영혼이 맑아서인가. 소설을 읽다보면 투명한 느낌마저 든다.

 

노작가가 써서인가 삶을 관조하는 차분한 시선이 느껴진다. 뭔가 감정이 절절하게 표현되거나 눈물이 날 정도로 슬프게 쓴 것도 아니다. 감정이 절제되어 있다. 대드라는 인물이 죽기전 한 두달 얘기인데 아주 담담하다. 그의 마지막 시간에 대해서 쓰고 있지만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슬프거나 우울하진 않다. 읽고 나서도 감정이 정화되는 듯한 - 정리되는 듯 마음이 잔잔하게 가라앉는다.(좋은 의미다.) 죽음이라는 소재에 대해서 썼지만 어둡지 않다. 죽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

 

소설의 첫 부분부터 인물이 곧 죽으리란 걸 알고 있어서인지 짧지 않은 소설을 읽어가며 대드의 아내와 딸과 함께 대드라는 인물의 죽음을 서서히 마음으로 준비해갈 수 있다. 죽음이라는 결론이 처음부터 나오지만 이상하게 끝까지 흥미를 잃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죽음이 삶의 다는 아니기에. 우리모두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열심히 살아가기에 그런 거겠지. 소설에 등장하는 갑작스런 죽음이나 반전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너무 억지스런 죽음, 독자에게 충격만을 주기 위한 죽음은 싫어하기 때문이다,

 
인물의 죽음이 처음부터 예고되어서인지 차분하게 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 어떤 경우는 인물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책속으로 머리를 비집고 들어가서 거기로 가지마! 그 사람을 만나지마!”라고 말리거나 되돌리고 싶어서 미쳐버릴 것 같은 소설도 있는 데 말이다. 어떻게 보면 과장되지 않고 담담해서 현실과 비슷한 느낌도 들지만, 막상 현실에서 죽음은 예고 없이 오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죽음이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현실과는 달라서 <축복>이란 소설이 묘하게 안정감을 주는 지도 모르겠다. 대드의 죽음이라는 미래를 알기에 소설을 차분히 그의 인생을 돌아보며 혹은 나 자신의 인생을 함께 되짚어보며 읽을 수 있어서 좋다고나 할까. <축복>을 통해 실제로는 죽음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치면 한다는 혹은 죽기 바로 전 하곤 한다는, 삶을 되돌아보며 후회하거나 갈망하거나 용서를 빌고 싶은 여러 가지 경험을 간접적으로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디션 프로 심사평에 나오는 "말하듯 노래하라, 공기반·소리반으로 노래하라"는 방법이 글쓰기에도 있다면 <축복>이란 소설이 그렇게 쓰여진 것 같다. 소설속 인물들의 감정이나 문체가 과장되거나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고 담담하다. 한 때는 독자를 죽음으로 유혹할 수 있을 정도록 강렬하고 열정적인 글을 꿈꿨지만, 이제는 <축복>같은 글을 쓰고 싶기도 하다. 전혀 멋부리지 않은 찬찬한 문장들로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전할 수 있는 글을.

 

인간은 완벽하지 않으니까 대드의 삶에도 후회하는 아니 어긋난 것들이 있다. 아들 프랭크나 클레이턴의 일등. 왜 죽음이 다가오면 우리는 서로 용서를 빌고 용서를 바라는 것일까. 어떤 면에서는 타협하지 않는 대드라는 인물이 가장 공감하기 힘든 인물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의 부모님과 그의 생에 대한 얘기를 읽으면서 조금은 이해가 가기도 했다. 내가 여자여서인가 남자보다는 여자인물에게 시선이 더 갔다. 엄마를 잃은 앨리스라는 소녀, 11세 딸을 교통사고로 잃은 여자, 유부남과 사랑에 빠졌다가 사랑의 상대를 잃은 여자. 여자들은 뭔가 삶에서 소중한 것들을 다 상실한 사람들로 보이기도 한다. 남자 중에서는 라일 목사라는 인물이 기억에 남는다. 공격받을 걸 알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남자.

 

한 순간 원하는 걸 이루어 행복하지만 인간은 다음 순간 절망의 바닥으로 내리꽂히기도 한다. 이 책은 그게 인생의 단면이라는 걸 보여주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작은 시골 마을의 따뜻하고 인간적인 내용을 흐뭇하게 읽다보면 확 찌르는 부분들이 나와서, 그런 부분을 읽을 때는 마치 달콤하고 부드러운 딸기 생크림 케이크에 아주 작고 쓴 맛이 나는 돌맹이가 콕 숨겨져 있는 듯 하달까. 미국 국가를 부르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지만 미국이 전쟁을 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하는 부분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 부분이 맘에 들었다.      

 

퇴근 후 카페에서 <축복>을 다 읽고 버스타고 집에 오는 중. 버스에서 내려 집을 향해 걷는데

문득 불어오는 바람. 1초의 순간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란 시구도 생각났다. <축복>은 우리가 습관적으로 반복적으로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이 일상이 너무도 소중하고, 익숙해서 느끼지 못하는 "살아있음"의 상태도 소중하다는 걸 느끼게 해준 소설이라고 감히 조심스럽게 말해본다. 나에게 <축복>은 잠간 하루의 한 순간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바람"의 존재를 느끼게 해준 소설이다.

 

소중한 일상, "평범한 삶"의 가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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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과 반전의 순간 Vol.1 - 강헌이 주목한 음악사의 역사적 장면들 전복과 반전의 순간 1
강헌 지음 / 돌베개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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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헌 그는 누구인가? 음악평론가로 알고 있었다. 강의를 재미나게 한다고 했다. 말을 잘 한다는 말이다. 음악 강의 뿐 아니라 명리학, 와인등 상관없어 보이는 분야들의 강의를 한다고 해서 신기하게 생각했었다. 재밌다는 말을 들었지만 잊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반하다. 글도 잘 쓰고 말도 잘하고 유머도 있다? 요즘 유행하는 뇌색남인가ㅎㅎ 책을 볼 때 챙겨 보는 것 중 하나가 작가이력인데, 검은 표지를 넘기면 나오는 작가 프로필이 범상치 않다.


"전복과 반전의 순간" 제목 참 잘 지은 것 같다. 음악에 관한 책이란 것도 맘에 드는데, 전복과 반전의 순간이라니..읽고 싶어진다. 물리적인 시공간을 뛰어넘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움직일 수 있는 음악의 힘이 잊혀지고 작아져 상업적으로 변한 것 같아서 씁쓸한데. 이 책은 음악사를 통해 전복과 반전의 순간을 돌아보며 다시 그런 순간이 어디로부터 올 것인가를 묻고 있다. 


음악 하면 아이돌 Kpop이 떠오르고(나만 그런가??ㅎㅎ) 인디락이나 재즈? 클래식 정도. 쉴 때나 뭘 할 때 듣고 싶을 때 위로나 유희의 곁다리로 듣는 음악. 가게에서 영업용으로 흘러나오는 음악. 요즘엔 전복이란 단어를 떠올리기 힘든 음악이지만, 이 책을 보면 지금 혹은 바로 내일이라도 "새로운 전복의 가능성"이 음악에 나타날 수 있을 것만 같다. 제일 어둡고 황폐할 때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음악의 "전복과 반전"은 종종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암기과목이란 선입견으로 어렵게 여기고 읽지 않고 피했더니 더 모르게 된 역사, 모르니 더 어렵고의 악순환 중인데 이 책은 역사란 어렵고 딱딱한 것이란 생각을 날려버리는 책이었다. 역사적인 이야기를 이렇게 재밌게도 할 수 있구나. "재즈를 최하위계급의 문화가 처음으로 문화의 주류로 진입한 사건으로, 로큰롤을 10대라는 또 하나의 마이너리티들이 문화의 주인이 된 사건으로" 보는 이런 시선/관점...그 과정을 너무 재밌게 풀어 놓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저자의 개인적 관점이 녹아들어간 내용들. 맥락을 가지고 사건들을 구성해서 나 같은 사람은 사건만 보고는 알 수 없는 의미를 만들어냈다. 사회역사적 배경들, 숨겨진 사실들을 모아 새롭게 해석해놓았달까. “A가 성공했다가 자살했다.”란 한 문장을 당시 주위 사람들과의 연관과 성공할 수 있었던 사회적 이유와 자살은 음모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모아 글을 썼다고나 할까. 이런 식으로 써놓아서 추리소설이라도 읽듯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


2장 " 청년문화의 바람이 불어오다-통기타 혁명과 그룹사운드"는 이 책에서 가장 재밌게 빠져들어서 읽었던 부분이다. 한국 얘기임에도 불구하고 잘 몰랐던 얘기라, 시대적 배경이나 몰랐던 얘기들이 너무 재밌더라. 김승옥이나 이청준, 산울림, 얼마전 세시봉으로 알려진 송창식 윤형주등...이런 사람들이 나오니까 좀더 생생하달까, 더 가까운 얘기인 듯 해서, 좀 더 몰입했달까.


"아 이래서 그렇게 됐구나" 전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하는 한편, "글쎄 한국판 플레이보이인 선데이 서울에 김승옥 이청준의 소설이 실렸다더라" 등 술자리에서 툭툭 던지면 시선집중되는 그런 잔얘기들도 많은 책. 재미있으면서도 위험한 책. "전복과 반전"이라는 제목에 버금가는 내용들.


처음 책을 펼쳤을 때는 각주가 너무 많아서 깜짝 놀랐다. 하지만 막상 책을 읽다 보니 각주를 챙겨 읽게 된다. 각주 보통은 안 좋아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각주를 소중히 여기게 되다. 박학다식한 저자의 사유여행에 각주를 통해 조금이나마 동참할 수 있달까. 책은 정말 재밌는데 내용을 다 옮길 수도 없고. 이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글을 쓰고 싶은데. 어떻게?? 이런 고민을 하게 할 정도로 재밌었다고 생각해주면 좋겠는데.


끝으로, 음악이 혹은 사회가

새로운 페러다임으로 진화할 수 있는 전복과 반전의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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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음
조르조 아감벤 지음, 김영훈 옮김 / 인간사랑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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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감벤의 책 중 읽어본 책은 <호모사케르> 한 권이다. 꽤 밀도가 높아 읽는데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벌거벗음>은 <사케르>보다 쉽게 읽혔다. 그의 13번째 번역된 책인가? 아감벤의 다른 책들은 어떤 게 있는지 궁금해 찾아보니 다른 책들도 얇다. 솔직히 얇아서 기뻤다. 시작하기에는 부담이 없는 외형이다. 그렇다고 한 마디로 쉽게 말할 수 있는 내용의 책은 아니다. 아감벤에 대해 잘 모르기에 해석하기 쉽지 않고, 같은 용어도 경우에 따라 다르게 이해해야 하는 작가인지 몰랐다. 그 예로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벌거벗음"은 그의 다른 책들에서 많이 나오는 개념인데, 이 책에서는 다른 책들과 조금 다른 의미로 쓰였다고 하더라. 벌거벗은 사진들을 가지고 이런 글은 아마 아감벤밖에 못 쓰지 않을까. 그는 "벌거벗음"을 (신학적 주술의) 베일을 벗겨내고,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방법으로 생각하는 듯 하다. 

 

아감벤의 글쓰기 형식 맘에 든다. <벌거벗음>은 10편의 글로 이루어져 있고, 열 편의 글들은 다시 번호가 매겨진 글들로 구분된다. 1.~ 2.~처럼 번호로 나뉘어진 짧은 글들이 좋다. 아감벤만의 문체 형식인가 글쓰기 개성인가. 번호로 짤막하게 나뉘어진 글은 안정적인 기분을 느끼게 한달까. 뭔가 정리된 듯한 느낌이랄까. 미로처럼 복잡하게 꼬인 세계로 나를 끌어들여 머리를 쥐어뜯도록 괴롭히는 게 아니라, '이 글에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1번 2번 3번 이야.' 라고 꼭꼭 집어 얘기해주는 듯 하다. 하지만 (아감벤은 "철학자"니까~~) 책의 내용이 "1+1=2"처럼 명쾌하게 딱 떨어지지는 않는다.  음 그의 글은 생각하게 한다. "난 그가 미웠다."같은 문장처럼 읽는 순간 이해되는 글만 있는 것은 아니고, "구원은 창조에 앞선다."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게 무슨 뜻이지?"하며 그의 글을 계속 읽어나가게 하고, 한 번 더 생각하게 하는 글들도 있다는 거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더 넓은 부분까지 보게 한달까. 

 

신학적인 개념들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흥미롭다. (1.창조와 구원) "세계를 구원하는 것은 피조물로서 인간이 가지는 힘이다" "예술과 시, 비평과 철학은~통합을 추구하지만 여전히 ~ 신과 인간의 실천적 행위 두 작업으로 분리되어 있다." (7.벌거벗음)"완전한 벌거벗음은 지옥의 저주받은 육체에만 존재한다." "벌거벗은 신체를 본다는 건 모든 비밀 너머, 객관적 속성 이전이나 그 너머에 있는 순수한 지식-인식 가능성을 깨닫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후 혹은 부활한 육체에서 이미 목적을 이루었기에 쓸모없어진 "무위"개념을 끌어내는 것은 "아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란 생각을 하게 했다. 신을 믿든 안 믿든, 심판 종말까지는 생각해 보았지만 종말 후의 세상이나 최후의 심판 다음날 아침을 맞은 인간들을 상상해본 적은 없기 때문이다. 

 

아감벤은 정치에 관한 책을 꽤 썼다. 현실과 변혁에 대해 관심이 많기 때문일까. <세속화 예찬>이나 <목적없는 수단>의 경우 부제가 "정치미학을 위한 10개의 노트" "정치에 관한 11개의 노트"일 정도다. <벌거벗음>에서도 정치와 연관시킬 수 있는 내용들이 꽤 있다. 그의 사상이 뚜렷한 실천방법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지만, 내 눈에는 그의 책들이 현실에 대한 "저항"을 하기 위한 새로운 사유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감벤은 "기 드보르"를 좋아해서 그에게 책을 바치기도 했고, "드보르의 책들은 저항 혹은 엑소더스를 위한 매뉴얼이나 도구로 사용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난 아감벤의 이 문장을 다시 아감벤의 책에 돌려주고 싶다. 아감벤의 책은 현실에 대한 '저항을 위한 매뉴얼"로 쓰면 좋을 것 같다고 말이다. 

 

어떤 면이 그렇냐고? 다 글로 쓸 순 없고, 말로는 더더욱 안 되니 ㅠㅠ 각자 읽어보는 게 가장 좋겠지만. 간단하게 <<벌거벗음>>에서 보자면. (5.할 수 없음) 인간을 잠재성(가능성)으로부터 분리해 무능력하게 만드는 권력과 "할 수 없는 자유를 빼앗는 자본주의"와 "하지 않을 자유를 빼앗긴 인간"에 대한 글, (6.페르소나 없는 정체성) 개성이나 인격이 사라지고 단지 번호로 이루어진 "새로운 정체성"이 떠도는 세상에서, 나를 잘 알고 늘 곁에 있는 거대기계 뒤에 "나를 조종 기소하려는 이들이 있는 것은 아닐까"란 글에선 인터넷 세상이 떠오르기도 하고. (8.영광스러운 몸) 신의 뜻을 이루었기에 이미 목적을 달성한 부활한 육체의 -"원래의 활동에서 분리된 생식,소화기관 "에서 새로운 육체의 사용가능성을 탐구하는 부분 등. (9.황소의 굶주림 : 안식일,축제일,무위) "정지 요소를 포함하며 사람들의 일을 무화시키는" 안식일과 축제 개념을 통해 그는 일종의 저항, 탈출, 해방 등을 꿈꾸는 것 같다. 특히 (2.동시대인) "동시대인"이란 개념이 독특하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인간형 같다. (시대 장소를 막론하고 이런 존재는 항상 필요할지도) 동시대인이 되기가 쉽진 않아 보이지만. 부자나 CEO, 공무원 되고 싶은 아이들만 있는 세상 말고, 좀 고생스런 인생이겠지만 1% 정도는 "동시대인"이 되고 싶은 사람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건 - 나는 될 자신도, 용기도 없기에 - 좀 이기적인 생각인걸까.       

 

동시대인? 그냥 우리 주변에서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만은 아니라는 거. 

 


"동시대적인 사람, 그의 시대에 진정 속해 있는 사람은 시대와 일치하지도,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이런 점에서 비시대적이다. 그러나 바로 이 단절과 시대착오 때문에 또한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그들의 시대를 더 잘 보고 파악할 수 있다.(23p)~
동시대인은 시대의 빛이 아니라 어둠을 인식하기 위해, 그곳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존재이다. 동시대성을 경험하는 자들에게 모든 시대는 어둡다. 동시대인은 정확이 이 어둠을 볼 줄 아는 사람이며, 그는 현재의 암흑에 펜을 적셔 글을 쓰는 사람이다.~어둠을 인식하는 일은 ~시대가 발하는 빛을 가로막고 시대의 어둠을 발견하는 능력이다.(27p)~
현재의 어둠에서, 우리에게 도달하려고 하지만 결코 그럴 수 없는 빛을 지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동시대인이 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이다. 그렇기에 동시대인은 드문 존재이다. 그렇기에 동시대인이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용기를 필요로 하는 문제이다.(29p)~
동시대인은 그의 자의성이 아니라 그가 응답해야 하는 긴급사태의 요청에 따라 역사를 `인용`할 수 있는 인물이다.(3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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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말하다 - 폴오스터와의 대화
폴 오스터 지음, 제임스 M. 허치슨 엮음, 심혜경 옮김 / 인간사랑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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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글쓰기에 대한 내용을 전달하기 좋은 형식인 것 같다. 딱딱한 이론이 아닌 작가의 "입말"을 통해 들을 수 있으니까. 폴 오스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다 읽어가는 게 아까울 정도로 재미난 책, 폴 오스터를 몰랐다면 그의 책을 읽어 보고 싶게 만드는 책이랄지. 작가의 일기, 편지, 에세이등 사적인 글을 좋아하는 나에겐 딱인 내용들이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만 말해야한다.' 지만, 어리석게 가벼운 독자인 나는 작가를 좀더 알고 싶기에(작품을 잘 이해하고 싶어서란 핑계를 대가며) 이런 글을 찾아 읽거나 저자강연회를 찾아다닌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저자강연회는 작가에겐 스트레스/고난인 현실 앞에서, 이런 인터뷰책은 (작가를 덜 괴롭히면서, 강연회보다는 좀더 심도 깊은 대화를 통해)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열 네 번의 인터뷰.


- 절제와 연기


쓸 때마다 리뷰와 서평이 뭔지 헤깔려하며 책에 대한 내용을 한 문장에 담고 싶어 하거나 좋은 구절을 다 적고 싶어 하다가 실패 좌절하곤 하는 나에게 꼭 필요한 팁. “절제-모든 것을 다 말하려다간 결국 중요한 말은 못 하게 된다.” 절제가 중요한 걸 알면서도 하기 힘들다. 욕심을 조절할 수가 없다. 슈스케를 봐도 내지르기만 하는 사람들은 탈락하고, 강약조절이나 절제는 잘 하는 사람이 하더만. 절제도 하나의 실력인가 보다. 알면서도 절제가 안 된다. 중요한 말을 하기에 앞서 쓰잘데기 없는 말을 쓰다 지쳐버린다.

“소설가는 다른 인간성, 다른 배역을 소화해내야 합니다. 소설 쓰기는 한 입으로 동시에 여러 말을 하는 행위입니다. 다종다양한 목소리를 내지요." 소설쓰기를 배우가 연기하는 것에 비유 ->소설 쓰기가 어떤 건지 한 번에 알게 하다. 등등 인터뷰중에 숨은그림 찾기처럼 글쓰기에 대한 내용들이 쏙쏙 박혀 있다.


- 위로 받고 절망하기


폴처럼 성공하고 유명한 작가는 글쓰기가 못 견디게 즐겁고, 쉬지 않고 쓸 내용이 흘러넘칠 거라는 약간은 삐뚤어진 심술 섞인 생각.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그도 글쓰기가 대단히 즐거운 건 아니고 글을 안 쓰면 상태가 더 나빠지기 때문에 쓰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활동”이라고 한다. 글이 산소 같은 사람이 작가? 책상에 앉아도 아무 생각 안 나고, 한 문장 쓰고 나면 머리가 휑해질 때 폴을 보고 위로받기 -> 폴 오스터도 매일 두 단락이 "하루 동안 할 수 있는 작업량의 전부"이며, 그렇게 쓰는 데 여섯 시간이나 걸린다고. 여섯 시간 동안 두 단락의 글을 쓰기 위해 고심하는 작가를 떠올리니 휘리릭 대충 넘긴 책장들이 미안하고 찔린다. 그러다 “하나의 책이 또 다른 책을 물어다 줍니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할 이야기가 더 많아진다.”는 말에 쓰고 싶어도 쓸 게 없는 난, 시기심 발동 + OTL


- 글은 왜 쓰는가?


"왜 쓰는지는 나도 모릅니다. 답을 안다면 아마 쓸 필요가 없겠죠. 하지만 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쓰는 겁니다. 우리가 글쓰기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글쓰기가 우리를 선택하는 겁니다. 그리고 나는 글쓰기를 누구에게도 권하고 싶지 않아요. 젊은이들이 글을 쓰고 싶다고 하면 나는 이렇게 말해줍니다. **하게 다시 잘 **해 보라고, 글쓰기에서 돌아오는 **은 거의 없습니다. 돈 한 푼 만져볼 수 없을지도 모르고, 유명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방구석에 틀어박혀 어떻게 살아남을지 걱정할 것입니다. 당신에게 엄청난 **의 경지를 사랑하는 **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모든 작가들이 조금씩은 **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입은 **의 소유자, 글쓰기 외에 다른 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무능력자거든요. 한편, 내가 글을 쓰고 있을 때는 아무리 어렵고 때로는 고된 일이라도, 글을 쓰지 않을 때보다 **합니다. ** 있음을 느끼니까요. 반면에 글을 쓰고 있지 않을 때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경질적인 **에 지나지 않습니다."(396p)  **궁금하면 책 읽어보기 ^^ !!


- 그의 책을 읽고 싶다! 폴 오스터의 책들을 읽고 싶게 하는 글.


"근본적으로, 내 작품은 개인이 겪는 좌절과 체념, 세상에 대한 절망과 니힐리즘, 덧없는 인생이기에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 언어의 부적절함, 그리고 개인간의 상호 고립 등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살아있으며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의 아름다움과 환희, 숨 쉴 때마다 느끼는 기쁨, 피부에 와 닿는 삶의 즐거움들도 표현하고 싶습니다. ~ 내 작품은 삶과 죽음,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 행동의 의미를 헤아려보려는 노력에 대한 것입니다. ~ 존재의 의미를 어떻게든 찾아내려고 기를 쓰면서 던지는 질문들입니다. 내 작품의 등장인물을 움직이게 하는 힘도 그런 질문들에서 나옵니다."(105-106p)



   <우연의 음악> "이 책을 탈고 했던 바로 그날,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장벽과 예속, 자유에 대한 바로 그 책을 탈고한 날에 말이죠."


                        <기억의 서> "고독이란 단어의 양면성을 철저히 살펴보는"



<달의 궁전> "신화로서의 달, 찬란한 다이애나, 우리 내부의 어두운 모든 것들의 이미지로서의 달은 상상, 사랑, 광기입니다."



            <다리 위의 룰루> "남자들은 그녀를 보면 정신이 나가 버립니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그녀의 애인들은 하나씩 자살하고, 미치고, 타락합니다."


                                         

                               <폐허의 도시> "무너져 가는 사회에 대한 책“



<브루클린풍자극> "나는 조용히 죽을 만한 장소를 찾고 있었다. 누군가 내게 브루클린을 추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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