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서 보면 희곡, 멀리서 보면 연극
No. 3
『고도를 기다리며』
2023년 12월 19일 ~ 2024년 2월 18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2024년 1월 6일 토요일 오후 2시 공연 관람
대구 공연
2024년 3월 29일 ~ 3월 31일
아양아트센터 아양홀
3월 30일 토요일 오후 2시 공연 관람
[원작]
사무엘 베케트, 오증자 옮김 《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2000년)
연출 오경택
조연출/무대 감독 최현서
[출연진]
신구 (에스트라공/고고 역)
박근형 (블라디미르/디디 역)
박정자 (럭키 역)
김학철 (포조 역)
김리안 (소년 역)
아일랜드의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는 소설 《율리시스》(Ulysses)를 쓰면서 수많은 수수께끼를 심었다고 공언했다. 비평가와 연구자들이 《율리시스》에 묻힌 수수께끼들을 발굴해서 정답을 알아내느라 끙끙댈 것이고, 그 사이에 자신의 불멸이 보장되리라 생각했다.
* 제임스 조이스, 이종일 옮김 《율리시스》 (전 2권, 문학동네, 2023년)
* [제4 개역판] 제임스 조이스, 김종건 옮김 《율리시스》 (어문학사, 2016년)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는 젊은 시절 파리에서 2년 동안 영어 교사로 일했다. 타지에서 같은 고향 사람인 조이스를 만났다. 조이스의 문학에 매료된 베케트는 그의 비서가 되었다. 베케트는 시력이 좋지 않은 조이스를 위해 글을 읽어주거나 원고를 대신 써줬다.
* [절판] 사무엘 베케트, 이원기 옮김 《사무엘 베케트 희곡 전집》 (전 2권, 예니, 1993년)
40대 중후반의 베케트는 중견 작가임에도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쓴 소설들이 난해한 데다가 사생활을 잘 드러내지 않은 성격이라서 일반 독자들은 베케트를 어려워했다. 이때 당시 베케트는 조이스처럼 영원히 마르지 않은 명예를 듬뿍 마시는 불멸의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중년의 위기를 느낄 만한 나이에 접어든 베케트는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아래 《고도》)를 발표한다.
‘고도(Godot)’는 희곡에서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극 중 인물들뿐만 아니라 관객들 모두 하나가 되어 고도의 얼굴 한 번 보기 위해 하염없이 기다린다. 《고도》는 끝이 있는데도, 제대로 끝났다고 할 수 없는 희곡(play)이다. 왜냐하면 이제 ‘고도’는 실체가 없는 인물이 아니라 각자 스스로 알아야 하는 하나의 거대한 수수께끼가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도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일은 정답 없는 수수께끼를 푸는 놀이(play)와 같다. 연극이 끝나도 관객들은 이 놀이는 끝내려고 하지 않는다. 관객들의 머릿속에 자꾸만 고도가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두 권으로 된 《사무엘 베케트 희곡 전집》에 『고도를 기다리며』와 같은 장막극뿐만 아니라 단만극도 수록되어 있다. 《고도를 기다리며 외》(용경식 옮김, 하서, 1995년)은 알라딘에 등록되지 않은 책이라서 검색하면 나오지 않는다. 이 책은 『고도를 기다리며』를 포함한 열두 편의 희곡이 수록되어 있다. 제일 밑에 있는 얇은 책은 국립극장이 발간한 『고도를 기다리며』 프로그램 북이다. 작품 분석, 연출 정도, 배우들의 인터뷰 등을 볼 수 있는 자료다.
생전에 베케트는 고도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고 밝혔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근거를 대면서 고도가 누군지 추측했다. 그렇지만 베케트는 독자와 관객들이 스스로 풀어야 하는 ‘고도’라는 수수께끼를 남겼으면서도 다양한 해석을 반기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새로운 해석들이 줄줄이 나오면 작품을 왜곡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고, 연출가들에게 대본에 적힌 대사나 지시 사항을 충실히 지킬 것을 요구했다. 수수께끼를 만든 사람이 수수께끼를 푸는 놀이를 마음껏 즐기지 못하도록 규제를 가한 셈이다.
* 그레고리 번스, 홍우진 옮김 《‘나’라는 착각: 뇌는 어떻게 인간의 정체성을 발명하는가》 (흐름출판, 2024년)
《고도》를 두세 번 읽어도, 서울에서 한 연극 『고도』를 봤는데도, 고도가 무엇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십여 년 전에 고도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을 시도한 글을 쓴 적이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이 누군가가 먼저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남들과 다른 특별한 한 고도를 드디어 찾았다면서 우쭐거린 그때 내 모습이 부끄럽다. 신경과학자 그레고리 번스(Gregory Berns)는 자신의 책 《‘나’라는 착각》에서 우리 뇌가 타인의 생각을 너무 쉽게 흡수한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믿는 생각, 내 견해가 온전히 내 머릿속에 나온 것이라고 ‘착각’한다.
수수께끼가 된 고도를 기다리는 게임도,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푸는 놀이를 지금부터 중단한다. 고도가 내 머릿속에서 자꾸만 자길 보러 오라면서 나댄다. 나는 더 이상 고도를 만나고 싶지 않다. 그것은 ‘내가 만나고 싶은 고도’가 아니라 ‘타인이 만났던 고도’다. 고도에 지나치게 집중하면 배우들의 연기에 몰입하기 힘들다. 대구에서 하는 연극 『고도』을 볼 땐 고도를 찾지 않을 것이다.
잘 가라, 고도. 오늘은 배우들의 목소리, 숨소리, 몸짓에 집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