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말은 오전 10시, 책방 <일글책>에서 시작한다. ‘서양 인문 고전 읽기’ 모임이 <일글책>에서 진행된다.
※ <일글책> 공식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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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글책> 책방지기는 고전 읽기 모임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파이데이아 회원이다. 파이데이아(paideia)는 ‘고대 그리스식 교육’을 뜻한다. 고전 읽기 모임 명칭은 ‘위대한 저서(great books) 읽기 프로그램’이다. 미국 시카고 대학은 학생들의 교양 교육을 위해 읽어야 할 ‘위대한 저서’ 즉 100권의 서양 고전 도서 목록을 만들었다. 도서는 연차별로 나누어져 있으며 12년에 걸쳐 읽어야 한다. 학생들은 ‘위대한 저서’에 포함된 모든 책을 전부 읽어야 졸업할 수 있다. 독서와 토론을 병행한 시카고 대학의 커리큘럼은 오늘날 ‘시카고 플랜’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 호메로스, 천병희 옮김 《일리아스》 (도서출판 숲, 2015)
* 호메로스, 천병희 옮김 《오뒷세이아》 (도서출판 숲, 2015)
<일글책> ‘서양 인문 고전 읽기’ 모임은 파이데이아 독서 토론 프로그램 방식과 같다. ‘위대한 저서’ 1년 차에 포함된 도서를 읽는 중이다. 올해 1, 2월에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완독했다. 3월부터 《오뒷세이아》를 읽기 시작했다.
《오뒷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을 끝난 뒤 고향으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의 험난한 여정을 그린 서사시다. 오디세우스는 귀향하는 과정에서 온갖 기이한 일들을 겪는다. 《오뒷세이아》 9권에 오디세우스 일행은 ‘로토스’라는 열매를 먹는 부족이 사는 섬에 닿는다. 부족은 오디세우스 일행에게 자신들이 먹고 있던 열매를 먹어보라고 권한다. 열매를 먹은 부하들은 꿀처럼 달콤한 맛에 중독되어 귀향하기를 잊어버리고 만다. 오디세우스가 억지로 부하들을 함선으로 데려오면서 일행은 다시 바닷길에 오른다.
나는 ‘로토스’와 관련해서 발제문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반복적인 쾌락에 빠지게 만드는 ‘로토스’가 있었나요? 실제로 그런 ‘로토스’가 있었으면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쾌락 중독에 벗어나는 비결이 있나요? 아니면 오디세우스처럼 로토스를 먹지 못하도록 도움을 준 사람을 만난 적이 있나요?”
새벽에 발제문을 만들다가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책’이라는 로토스를 10대부터 먹기 시작했고 지금도 계속 먹고 있다. 책을 너무 많이 샀고, 너무 많이 읽는 바람에 독서보다 재미있는 다양한 경험(영화 보기, 여행, 연애 등)을 하지 못했다. 남들이 보기에 외골수 같은 내 삶이 단조롭고 지루하게 보였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책만 보는 나랑 대화하기가 쉽지 않고, 친해지기가 어려운 특이한 사람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서글픈 내 과거가 묻은 발제문을 가슴에 품은 채 <일글책>으로 갔다. 내 이야기를 모임을 통해 풀어헤치려고 했다. 아니, 그런데 모임에 참석한 분들 모두가 자신들의 로토스가 ‘책’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책을 너무 좋아하면서 느꼈던 고충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그분들이 꺼내놓은 이야기가 다 내 이야기라서 내 발언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재미있게도 대화가 옆길로 샜는데, 어느새 자신들이 가본 책방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마도 우리는 20여 분 동안 책방 이야기만 계속했다. 역시‥…. 애서가는 독서가 힘들고 괴롭다고 투정 부려도 책을 손에 놓지 못하며 책을 더 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뭔가에 홀리듯이 책방으로 향한다. 나는 발제문에 관련된 내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고, 딱 이 말 한마디만 했다. “우리 언젠가는 알라딘 서점이나 다른 책방에서 만날 거예요.”
주말이면 꼭 가는 책방이 <직립 보행>이다. <직립 보행> 부부 책방지기는 내 주말 친구다. 정말 이 두 분이 없으면 내 일요일은 책만 읽는 날이 되었을 것이다. 대구의 인문학 전문 책방을 꼽으라면 나는 <일글책>과 <직립 보행>이라고 말하고 싶다. <일글책>이 있어서 나는 고대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직립 보행> 덕분에 근현대 철학을 접할 수 있었다.
* [절판] 오에 겐자부로, 정수윤 옮김 《읽는 인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50년 독서와 인생》 (위즈덤하우스, 2015)
<직립 보행>에 가면 무조건 세 권의 책을 산다. 그런데 가방 안에 이미 알라딘 서점과 다른 책방에 구매한 책들이 있어서 딱 한 권만 샀다. 그 책은 바로 故 오에 겐자부로의 《읽는 인간》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책이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고 했다. 이 소설 속 주인공 헉(허클베리 핀의 애칭)은 흑인 노예 짐을 그의 주인 노부인에게 돌려주려고 생각했다. 짐은 노부인의 ‘재산’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헉은 짐을 돕기 위해 남의 재산을 훔치면 지옥에 간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거부한다. 그 순간 헉은 마음속에 되뇌던 말을 내뱉는다. “그래, 나는 지옥으로 가겠다(All light, then, I’ll go to hell).” 힘든 유년 시절을 보내고 있던 오에는 그 구절을 읽은 이후로 ‘지옥으로 가겠다’라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2년 전부터 나는 ‘책만 사는 인간’으로 살아오고 있다. 진짜 내 모습, ‘읽고 쓰는 인간’이 그리워졌다. 무의미한 일상을 벗어나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을 때, 어느 분이 내 알라딘 블로그에 댓글을 남겼다. 그분은 책을 비판한 서평을 쓴 내게 감사하다고 전했다. 그 댓글을 보면서 마음속에 했던 말을 내뱉었다. “그래, 나는 로토스를 먹겠다.”
내 곁에 책 읽는 내 욕망을 벗어나게 해줄 오디세우스 같은 구원자는 없다. 그러면 내가 만든 욕망에 지배당하지 않도록 나 스스로 지켜야 한다. 그러려면 써야 한다. 독서가 욕망이라면, 서평 쓰기는 의무다. 좋은 책을 고르고 싶은 독자를 위해서 내 의무를 충실히 이행한다면 독서는 중독이 아니다. 중대한 행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