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 좋은 [책]방
EP. 16
2022년 10월 2일 일요일
직립보행
오랜만에 대구 중구 삼덕동에 있는 책방 ‘직립보행’을 방문했다. 마지막으로 이곳에 간 날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군. 책방 안에 손님은 없었고, 부부 책방지기는 책을 읽고 있었다. 아직도 두 분의 성함을 모른다. 남편분은 사모님을 ‘보행’이라고 부르던데, 그렇다면 남편분에게는 ‘직립’이라고 불러야 하나. 그런데 발음이 어려워. 남편분은 ‘책방지기’, 사모님을 ‘보행 쌤’이라고 부르겠다.
평점
1점 ★ F
* [절판] 에드거 앨런 포 《우울과 몽상》 (하늘연못, 2002)
책방지기는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단편소설 전집 《우울과 몽상》을 읽고 있었다. 《우울과 몽상》은 절판되기 전만 해도 번역이 안 좋은 책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보행 쌤이 읽고 있는 책은 확인하지 못했다. 보행 쌤은 철학 분야의 책을 주로 읽는다. 이름만 들어도 현기증이 나는 하이데거(Heidegger)와 들뢰즈(Deleuze)의 저서를 무난하게(!) 읽을 정도로 철학에 조예가 깊다.
부부 책방지기와 나, 이 세 사람은 만나자마자 이야기의 꽃을 활짝 피웠다. 대화의 시작은 니체(Nietzsche)였다. 니체의 철학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대화의 주제가 기독교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사이비종교(신천지)까지 언급하게 됐다.
세 사람 모두 최근에 신천지 교인을 만난 적이 있다. 내가 책방 방문이 뜸했던 시기에 포교 목적으로 책방에 자주 방문한 교인이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 그 사람은 자신이 읽고 있던 책을 책방에 팔았다. 그러면서 자기는 이제부터 오로지 성경 한 권만 읽겠다고 하면서 자신을 신천지 교인이라고 밝혔다. 부부 책방지기는 신천지 교인에게 포교 목적으로 책방에 오지 말라고 했지만, 계속 찾아왔다고 한다. 심지어 교인 한 명과 같이 책방을 방문하기도 했다. 다행히 지금은 신천지 교인이 책방에 오지 않는다고 한다.
세 사람은 사이비종교를 비판하는 대화를 한참 나누다가 동성애에 반대하는 기독교까지 비판했다. 10월 1일 토요일에 대구 퀴어 문화 축제가 열렸다. 퀴어 문화 축제가 열리면 기독교 단체들은 동성애와 퀴어 문화 축제 반대 시위를 벌인다. 그들은 여전히 동성애를 ‘인류를 타락시키는 질병’이라고 주장하며 종교의 힘으로 동성애자를 정상적인 인간으로 되돌릴 수 있다고 믿는다(탈동성애 운동). 하지만 동성애에 반대하기 위해 그들이 내세우는 논거는 이미 20년 전에 과학적인 연구와 조사를 통해서 오류로 밝혀졌다.
평점
4점 ★★★★ A-
* [개정판]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돌베개, 2017)
책방지기는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밝혔는데, 이 책이 타 국가 및 민족에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는 국가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아서 아쉽다고 말했다. 이렇게 우리의 대화는 책으로 시작해서 책 밖에 있는 세상으로 대화 범위를 확장하다가 다시 책으로 돌아왔다.
책방에 왔으니 그냥 갈 수 없다. 세 권의 책을 샀다.
* [절판] 피에르 카반느 《마르셀 뒤샹: 피에르 카반느와의 대담》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02)
* 페퍼 슈워츠, 마사 켐프너 《인간의 성에 관한 50가지 신화》 (한울아카데미, 2019)
피에르 카반(Pierre Cabanne)은 예술 비평가로, 그가 쓴 책 몇 권이 국내에 번역되었다. 1966년에 이루어진 카반과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대담을 정리한 책은 1967년에 출간되었고, 십 년 후에 2판, 1995년에 3판이 출간되었다. 번역본은 3판을 저본으로 삼았다. 뒤샹의 예술관과 본인 작품에 대한 뒤샹의 해설을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의 성에 관한 50가지 신화》는 성에 관한 잘못된 통념 50가지와 이를 반박하는 연구 결과들을 소개한 책이다. 앞서 언급한 동성애를 질병으로 보는 믿음과 탈동성애 운동 역시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비과학적인 통념이다.
* [절판] 샤를 보들레르, 박은수 옮김 《보들레르 시 전집》 (민음사, 1995)
마지막 한 권은 좀처럼 구하기 힘든 ‘희귀본’이다. 故 박은수 전 숙명여대 불문학과 교수가 번역한 《보들레르 시 전집》이다. 보들레르(Baudelaire)의 시집 《악의 꽃》 뿐만 아니라 보들레르가 젊은 시절에 쓴 미발표 시까지 수록되어 있다. 《보들레르 시 전집》의 번역 대본은 보들레르 연구의 권위자 클로드 피슈아(Claude Pichois)가 엮은 시 전집이며 플레야드 총서(Bibliothèque de la Pléiade) 제1권이다. 여러 학자의 연구 성과가 반영된 상세한 주석을 담은 ‘결정판’이다.
《마르셀 뒤샹: 피에르 카반느와의 대담》과 《보들레르 시 전집》은 희귀본이라서 가격이 정가보다 높게 책정되어 있었다. 《마르셀 뒤샹: 피에르 카반느와의 대담》은 4만 원, 《보들레르 시 전집》은 3만 6천 3백 원이다. 그리하여 책 세 권의 총합 가격은 98,200원이다.
평점
4점 ★★★★ A-
* [개정 증보판]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교보문고, 2015)
나는 비싼 책을 고르면 책값을 깎아달라는 식의 가격 흥정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 정직하게 98,200원을 냈다. 책방지기는 비싼 책만 고른 내게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더니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의 《오리엔탈리즘》을 덤으로 주셨다. 사 놓고 안 읽은 책이 엄청 많아서 이제 책을 놔둘 자리가 없다. 그래도 좋은 책을 우연히 만나면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