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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의 누이들
빌럼 얀 페를린던 지음, 김산하 옮김 / 만복당 / 2022년 4월
평점 :
평점
4점 ★★★★ A-
“아, 어머니, 빈센트는 진정한 나의 형제였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가 죽은 지 며칠 후에 테오 반 고흐(Theodorus van Gogh)는 자신의 참담한 심정을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밝힌다. 빈센트와 테오는 서로 다른 몸에 들어있는 하나의 영혼이었다. 그들이 주고받은 수백여 통의 편지는 분리된 영혼을 더욱 끈끈하게 만들었다. 테오는 반쪽 영혼이 별이 된 지 일년 후 그의 곁으로 갔다.
형제가 남긴 방대한 편지가 워낙 유명하다 보니 많은 사람은 외로운 빈센트가 테오에게 많이 의존했다고 생각한다. 빈센트가 동생의 도움을 받으면서 예술 활동을 한 건 사실이다. 빈센트에게 테오는 경제적 후원자일 뿐 아니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혈육이었다. 하지만 빈센트와 정신적 교감을 나눈 혈육이 또 한 명 있다. 그 사람은 바로 빈센트가 가장 아꼈던 여동생 빌레민(Wilhelmien, 애칭 ‘빌’)이다.
빈센트의 그림을 좋아하는 예술 애호가들도, 심지어 빈센트의 생애를 조사하면서 연구한 학자들마저도 간과하거나 잘 모르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빈센트에게 세 명의 누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형제의 유명세에 가려진 세 누이의 삶을 조명한 《반 고흐의 누이들》을 쓴 저자 빌럼 얀 페를린던(Willem-Jan Verlinden)도 이 책을 쓰기 전까지 세 누이를 모르고 있었다. 반 고흐 가는 6남매로 이루어져 있다. 목사와 결혼한 안나(Anna)는 ‘빈센트’라는 이름이 붙여진 첫 아이를 출산하지만,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는다. 정확히 일 년 후에 태어난 아이는 죽은 형의 이름을 물려받는다. 그 이후로 안나(2녀), 테오, 엘리사벗(Elizabeth, 4녀, 애칭 ‘리스’), 빌(5녀), 코르넬리우스(Cornelius, 애칭 ‘코르’)가 태어난다.
빈센트는 테오뿐만 아니라 누이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편지는 빈센트가 살았던 당시에 멀리 떨어져 지낸 사람들이 유일하게 사용한 연락 수단이다. 반 고흐 가 사람들은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근황을 확인했다. 저자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편지를 바탕으로 빈센트의 세 누이의 삶을 복원한다. 그리고 반 고흐 가의 후손들을 직접 만나면서 공개되지 않은 세 누이의 초상 사진과 그 밖의 자료를 얻는 데 성공한다.
《반 고흐의 누이들》이 이전에 출간된 수많은 빈센트 반 고흐 관련 책과 차별화되는 지점들이 있다. 첫 번째 지점, 저자는 각종 서신과 기타 자료에 남아 있는 세 누이의 시선으로 빈센트의 삶을 바라본다. 빈센트와 테오의 편지는 예술사적 가치가 있는 텍스트로 평가된다. 그동안 학자들은 예술을 주제로 한 편지 내용을 토대로 ‘예술가 반 고흐’의 삶을 복원하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오빠 빈센트’에 대해 솔직하게 감정을 밝힌 누이들의 편지가 사료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둘째 안나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오빠 빈센트에 대한 불편한 심정을 드러낸다. 그녀가 생각하는 빈센트는 자기 주관이 뚜렷한 예술가가 아니라 아버지의 말을 따르지 않은 철부지 오빠다. 그러면서 제멋대로인 그를 인간적으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안나는 가부장 권위와 가족 간의 정을 중시했다. 그녀는 화가가 되고 싶은 열망이 거대해진 빈센트를 문제아로 취급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같은 피로 이어진 관계에서 물과 기름 같은 관계로 변하게 되고, 가족에게 실망한 빈센트는 고향을 떠나 본격적으로 타국 생활을 시작한다. 《반 고흐의 누이들》은 연구가들의 손에 의해 달라붙은 ‘예술가’라는 덧칠을 완전히 벗긴 빈센트를 보여준다.
그래도 《반 고흐의 누이들》의 저자는 미술사가다. 당연히 이 책에 빈센트의 작품에 대한 저자의 분석 작업이 포함되어 있다. 두 번째 지점. 저자는 빈센트의 작품에 반영된 당대 유럽의 사회적 · 경제적 · 문화적 지형을 살핀다. 빈센트가 네덜란드에 살면서 그린 초기작 대다수는 방직공과 농민을 모델로 하고 있다. 시골 노동자의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빈센트의 초기작들은 후기에 나온 걸작에 비해 주목도가 낮다. 하지만 저자는 이 작품들이 어떻게 사회적 상황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탄생하였는지 설명한다. 빈센트는 모델을 구하지 못해 마을에 사는 가난한 주민들을 모델로 삼아 그림을 그렸다. 여기서 저자는 근대화가 진행 중인 네덜란드의 궁핍한 시대를 읽어낸다. 빌과 빈센트는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빈센트는 빌에게 보낸 편지에 자신이 읽은 책들, 특히 프랑스 작가들의 소설을 권했다. 빈센트의 작품 중에 책이 있는 정물화가 있다. 이 그림들과 문학에 관한 내용의 편지는 빈센트의 예술 활동 및 독서에 영향을 준 당대에 유행한 문학과 출판시장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다.
세 번째 지점. 저자는 남성 중심의 역사가 주목하지 않은 여성의 우정을 소개하고, 그 속에서 흐르기 시작한 네덜란드 페미니즘 제1 물결의 성취를 언급한다. 네덜란드의 중산층 집안 출신 여성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노동은 사회복지 일이었다. 그러나 결혼한 여성은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빌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는 간호사로 일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 그녀는 암스테르담과 헤이그에서 활동한 페미니스트들을 만나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했다. 그리하여 헤이그에 여성을 위한 도서관이 세워졌고, 빌은 이 도서관 회원으로 활동했다. 테오의 아내 요한나 봉어르(Johanna Bonger, 애칭 ‘요’)는 빈센트와 테오의 형제애를 세상에 알리는 데 이바지한 인물이다. 요와 리스는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친한 사이다. 그들은 편지로 책과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편지에 나타난 두 사람의 관계는 올케와 시누이라기보다는 관심사가 비슷한 친구에 가깝다.
세 누이를 포함한 반 고흐 가의 여자들(어머니 안나와 요)은 오랫동안 반 고흐 형제의 주변인, 또는 예술과 무관한 인물로 소개되었다. 《반 고흐의 누이들》은 ‘반 고흐 형제’라는 이름의 먼지에 묻힌 여성들의 삶과 목소리를 이해하기 위한 책이다. 묵은 먼지를 털어낸 그녀들의 이야기는 ‘고독한 천재’가 아닌 ‘예술에 푹 빠진 사람’ 빈센트 반 고흐를 볼 수 있는 창(窓)이다.
※ 미주(尾註)알 고주(考註)알
* 185쪽
뤼시앵[주] 피사로는 1887년에 빈센트와 테오를 함께 그렸고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도 같은 해에 빈센트를 그린 바 있다.
* 229쪽
클로드 모네, 아르망 기요맹,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도 테오에게 추모의 편지를 보냈다. 카미유 피사로는 장례식에 직접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대신 아들 루시앙[주]을 보냈다.
[주] 185쪽에 언급된 ‘뤼시앵 피사로’와 229쪽의 ‘카미유 피사로의 아들 루시앙’은 같은 사람이다. 2쇄가 나오면 이름 표기를 하나로 통일해서 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