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흠 하나 없는 인간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실수한 적 없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에 대해서 요즘 많이 생각한다. 나의 어떤 과거, 과거의 어떤 발언이나 행동들은 누군가에게 말하기 너무나 부끄러운 것들이라 그것이 세상에 드러날까 두렵다. 나는 농담처럼 새롭게 사귀게되는 연인들에게 '정치할 생각이라면 나를 만나지 말아야한다'고 말하곤 했다.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 없다지만 나는 털면 먼지뿐이야' 하고. '네 정치인생에 나는 치명적 약점이 될거야' 라고 말하며 정치할거면 나랑 헤어져야 해, 를 말하곤 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정치하겠다고 나서는 놈은 하나도 없었다. 뭐 최근에는 친구중에 국회의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해보곤 하는데, 친구라는 포지션이면 내가 딱히 그의 약점이 되진 않을 것 같아서이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또 알게 되면서 가장 견딜 수 없는 건, 과거의 나 자신이다. 여성혐오적인 발언을 일삼던 나... 그때도 물론 나는 늘 당당했고 내가 하는 말에 자신이 있었으며 당시에 부당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서는 닥치는 대신 말하는 사람이었다. 남자아이들과 싸우기도 많이 싸워서, 내가 나를 알기도 전부터 이미 페미니스트였다는 사실을 최근에 깨닫게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때 괜찮은 인간이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얼마나 빻은 인간이었는지, 여성혐오에 일조하는 인간이었는지를, 토요일에 영화 《델마와 루이스》를 '다시' 보며 깨달았다.


여자친구와 토요일에 대전에 갔다. 대전에서 우리 무얼할까, 하다가 <대전아트시네마>에서 델마와 루이스를 재상영한다는 걸 알게되어 우리는 고민없이 이 영화를 보자! 했다. 둘다 아주 어릴 적에 봐서 기억이 희미하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이 영화를 언젠가는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어릴 적에, 십대일 때 이 영화를 봤는데, 다시 보기 전까지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장면은, 브래드 피트가 지나 데이비스를 유혹하는 장면에서 그가 너무 근사했다는 것과, 드라이브 중에 치근덕대는 남자의 트럭을 터뜨린 장면, 그리고 마지막에 절벽을 향해 운전하던 장면이었다. 그때 당시에 고등학교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 여러명과 함께 이 영화를 봤었더랬다. 그리고 방금 언급한 저 장면, 성희롱 했다고 트럭 폭파시킨 장면에서 나는 '어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왜 저렇게까지 해' 라고 했던 거다. 그때 우리반 반장(여고였으므로 당연히 여자였다)이 내게 화를 냈었다. '저게 왜 심하다고 생각해? 저 남자는 잘못했는데?' 라고 해서 내가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트럭까지 터지게 하면 어떻게 해' 라고 했던 거다. 아아, 과거의 나여.... Orz

지금 돌이켜보면 그 당시에 반장은 페미니스트였던 것 같다. 내가 지금 깨닫고 지금 공부하는 많은 것들을, 반장은 그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아주 얌전한 아이를 보고 내가 무심결에 '여자중에 여자' 라고 표현한 거다. 그러자 반장이 내게 그랬다.

'여자다운 게 뭔데?'

나는 갑자기 그 질문을 받고 당황했다. 어?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 같은 거 있잖아..얌전하고....... 라며 얼버무리며 제대로 답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아아, 과거의 나여.... 진짜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때 반장은 날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가부장제와 여성혐오의 곳곳에 나같은 사람이 일조했다고 생각했겠지. 그 당시에 나는 공부를 잘하지도 못했고 페미니즘에 대해 1도 몰랐고, 철학에 대해서라면 더더욱이 알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장에 대해서는 막연하게 '철학적이다'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아, 반장, 너는 지금 어디서 어떤 사람이 되어 있니? 나를 보며 얼마나 답답해했니? 하아. 부끄럽다. 반성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훨씬 나은 인간이 되어있는걸까. 그때의 멍청한 발언과 행동을 더이상 하지 않게 되었는가? 라고 물어보면 또 그렇지도 않다. 나는 그 사실을, 아직도 내가 많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델마와 루이스를 '다시' 보며 깨달았다. 아, 나 아직 갈 길이 멀구나.



















'델마(지나 데이비스)'는 강압적인 남편과 함께 산다. 친구인 '루이스(수잔 서랜든)'과 짧게 여행을 다녀오고 싶은데 그 말을 차마 남편에게 하질 못한다. 남편이 허락해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큰 소리로 말해서도 안되고 남편이 시키는대로만 해야 하는 삶을 사는 델마는, 결국 남편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로, 남편이 먹을 저녁을 전자렌지에 넣어두고 쪽지를 써둔 채, 루이스와 여행을 택한다. 그들은 어느 산장으로 놀러가 이틀밤을 지내고 오기로 했다.

차를 몰고 가는 길, 중간에 델마는 쉬었다 가자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한 펍에 들어가게 되고, 거기에서 술을 한 잔씩 하다가 찝적대는 남자를 만난다. 루이스는 그가 다른 곳으로 가길 바라고, 그래서 '나는 지금 친구와 얘기중이다' 라고 그를 거절하지만, 델마는 결국 그와 술을 마시면서 즐겁게 춤을 춘다. 깔깔대고 웃다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신탓인지 어지러워져서, 루이스가 화장실 간 사이에 바람을 쐬러 가자는 남자의 말에 함께 주차장 으로 나가는데, 거기에서 남자로부터 강간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 이러지 말라며 남자를 거부하다 남자의 뺨을 때렸는데 돌아오는 건 남자로부터의 연이은 폭력이었고, 그렇게 얼굴도 얻어터진채로 차 위에서 뒤집어져 강간을 당할 위기에 처하는데, 그때 루이스가 총을 들고 그 자리에 와서 그만두게 한다. 

"똑바로 들어. 여자가 저렇게 우는 건 좋아서가 아니야."


아, 진짜 가슴 아픈 명대사가 아닌가! 남자는 총 앞에서 강간을 멈추긴 했지만 그녀들을 욕하며 내 거시기를 핥으라고 한다. 이에 폭발한 루이스는 결국 그자리에서 그 남자를 죽인다.




그들의 여행은 이제 도망이 되었다. 델마는 루이스에게 경찰에 신고하자 말한다. 그러나 루이스는 알고 있다. 그들의 말은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네가 술을 마시고 남자랑 춤을 추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목격했고, 그런 이상 남자가 너를 강간하려고 한 건 네 책임으로 사람들이 몰아갈 것이다' 라는 걸, 루이스는 알고 있었다. 나는 이 장면에서 스티븐 킹의 소설속 한 구절을 떠올렸다.



《뉴욕 포스트》같이 저속한 신문들은 테스의 10년 전 사진을, 즉 뜨개질 클럽 시리즈가 처음 출간될 무렵의 사진을 실을 것이 뻔했다. 그때 테스는 이십대 후반이었기에 짙은 금발 머리를 길게 길렀고, 미끈한 다리를 뽐내려고 짧은 치마를 즐겨 입었다. 게다가 그 시절에는 저녁에 외출할 일이 있으면 뒤꿈치 부분이 끈으로 된 하이힐을 신곤 했는데 어떤 남자들은 그 구두를 '남자 꼬시는 신발'이라고 불렀다(물론 그 거인도 예외일 리 없었다.). 테스가 이제는 나이를 열 살이나 더 먹었고 몸무게도 9킬로그램이나 늘었고, 성폭행을 당할 때 거의 촌스러울 정도로 단정한 정장 차림이었다는 사실 따위는 신문에 나올 리가 없었다. 그런 세부 사항은 삼류 신문들이 좋아하는 이야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기사의 문장 자체는 점잖을지도 모르지만(행간에는 선정적인 분위기를 살짝 흘릴 수도 있겠지만), 사람들은 함께 실린 테스의 젊은 시절 사진에서 진짜 이야기를 읽을 것이다. 아마도 인류가 바퀴를 발명하기도 전에 만들어졌을 이야기를. 여자가 야하게 하고 다녔네……당해도 싸지, 뭐. (빅 드라이버, p.271-272)





델마가 술을 마시고 남자와 웃고 떠들며 춤을 춘 건 사실이다. 그건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녀가 섹스를 원한 건 아니었다. '아니'라고 말했고 그렇다면 남자는 '아니'라는 말을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지만 그 장면에서, 루이스가 그 남자를 쏴죽이고 델마가 울던 장면에서, 자꾸만 내 안에서 그런 말이 들렸다. '왜 그렇게 남자의 찍접댐을 받아주지?' 라는. 델마는 계속 그랬다. 브래드 피트를 길에서 만났을 때도 좋아서는 저 남자를 차에 태워주자고 한다. 결국 브래드 피트는 델마와 루이스의 전재산을 가지고 튄다. 이 모든 나쁜 일에 자꾸 델마가 남자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원망이 내게 끼어드는 거다. 게다가 그녀는 문제 해결의 의지가 없고 나약하게만 보인다. 루이스는 '울지만 말고 생각을 좀 해' 라고 델마에게 말하는데, 나야말로 델마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어지는 거다. 아, 저 성격 너무 싫다, 정말 싫어, 저런 사람하고 친구하고 싶지 않아, 라고 나는 델마를 평가하고 있었던 거다. 과거의 내가 아니라 지금의 내가!!!



아.. 갈 길이 얼마나 먼지...



그런데!



중간에 델마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얘기한다. 18살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 4년을 교제하고 결혼한 사실, 자기 인생에 남자라고는 남편 하나뿐이었던 사실을. 그런데 그 남편이, 하나밖에 모르는 그 남자가 강압적이고 폭력적이다. 사회생활도 하지 못하고 집에서 가사노동만 하며 남편의 출근을 뒷바라지 하고 퇴근만 기다리는 델마가, 결국 어떤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었을까? 놀지도 못하고 여행도 못가고 다른 사람들도 만나지 못한 상황속에 어릴 때부터 놓여진 델마는, 어떤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을까? 나는 델마가 나약하고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싫었다. 문제 해결의 의지가 없고 생각할 줄 모르는 채로 자신에게 다가온 위험도 알아채지 못하는 델마가 너무 싫다고 생각했다. 민폐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녀가 일을 망쳤잖아! 라고. 그러나 델마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달라지는 델마를 보면서 이 모든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녀가 문제 해결의 의지가 없었던 것은, 한 번도 그녀에게 문제를 해결할 상황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생각과 행동은 제한되어져 있었고 제약받고 있었다. 강압적으로 누군가 대신해주는 삶을 살아온 델마에게 그런 나약한 성격은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본성은 아니었던 거다.



나는 여자(그리고 남자도)의 성격이 환경에 따라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보게 됐다. 델마는 여행을 하면서, 도망을 치면서, 점점 다른 사람이 되어갔다. 문제 해결에 직접 뛰어들고 자신이 당면한 문제가 어땠는지, 그리고 자신의 과거의 삶이 어땠는지를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은 그러므로 델마의 성장영화이기도 했다. 루이스와 함께 하며 여러 사건을 겪은 델마는,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루이스와 국경을 넘기로 결심하고는,



나는 어느 지점을 이제 지나온 것 같아. 다시는 돌아갈 수 없어.



라고 말한다. 아아. 그녀는 이제 그녀로서 자리한다. 갇힌 그녀가 아니고 억압받는 그녀가 아니고, 온전히 그녀가 되었다. 그전까지의 삶의 모든 패턴과 방향을 누가 대신 결정해주었다면, 이제부터는 그녀가 직접 결정한다. 이것이 맞고, 이것이 옳다. 그녀는 남편과의 통화에서,



당신은 내 남편이지 내 아빠가 아니야.



라고 말하며 남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으로 들어가며, 델마는 이 모든 일들, 지금의 위기들이 자신때문에 일어났음을 루이스에게 사과한다. 그때 루이스가 그런다.



내가 말했잖아, 이건 네 잘못이 아니라고.



그때, 바로 그때, 루이스가 그렇게 말한 그때, 그제서야 갑자기 내가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아, 맞아, 이게 왜 델마 잘못이야? 이게 왜 델마 잘못이냐고. 그런데 나도 무의식적으로 델마를 원망하고 있었잖아 맙소사! 델마를 강간하려는 남자가 없었다면, 그들의 돈을 모두 훔쳐가는 남자가 없었다면, 그랬다면 그들의 인생이 이렇게 절벽으로 향하진 않았을텐데! 애초에 그녀를 어릴 때부터 강압적으로 가둬두고 살았던 남편이 없었다면? 게다가 문제의 그 트럭 폭발 장면! 대형 트럭의 운전사는 길에서 델마와 루이스를 보고는 계속해서 희롱한다. 섹스의 몸짓을 표현하고 입으로 표현한다. 처음에는 그를 무시하던 델마와 루이스였지만, 결국 그를 응징하기로 한다. 가지고 있던 총으로 트럭의 바퀴를 쏴버리다가, 결국 델마가 먼저 그 대형 트럭의 짐칸을 쏜다. 거기엔 기름이 들어있었던건가 보다. 펑-펑- 연이어 커다란 불길과 함께 터져버린다. 남자는 자신의 트럭이 폭발하는 장면을 보면서 여자들을 향해 계속 욕을해대지만, 앞으로는 여자들을 보고 성희롱 하려고 할 때 주춤하게 될거다. 트럭을 쏴버리는 여자일 수도 있어!! 이 장면에서 나는 반장을 떠올리며 반장에게 내 멍청함을 사과하고 싶어졌다. 반장, 내가 그때 너무 멍청했지. 저 트럭을 폭발한 건 하나도 심하지 않아. 저랬어야 해. 만약 저기서 곱게 돌려보냈다면, 저 남자는 그 뒤로도 다른 여자들에게 혀를 날름거리며 성희롱과 성추행을 일삼았을 거야. 반장, 내가 개념녀 프레임에 갇혀있었던 것 같아. 아아, 너는 그때 나를 보며 얼마나 답답했니.




델마는 루이스에게 그때 자신의 강간범을 죽여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만약 그때 네가 나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그 놈을 살려뒀다면, 그 후의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 상상하기가 너무 끔찍하다는 거다. 내가 쏘지 못한 게 후회될 지경이야, 라고 델마는 말한다. 루이스와 델마는 더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되면서 서로에게 고마워한다. 이 길에 네가 동행해서 다행이라고. 결국 이 두 명의 여자앞에 커다란 총을 든 경찰 수십명이 찾아든다. 마치 그녀들이 테러를 일삼았던 것처럼, 그들이 일제히 총을 쏠 준비를 하고는 그녀들 앞에 나타났다. 이에 남자 경찰 한 명이, 이게 무슨 짓이냐 말리지만, 수십명의 남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여자란, 자기들에게 순종하는 상태가 아니라면 처단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델마는 루이스에게 말한다. '잡히고 싶지 않다'고. 잡히고 싶지 않아,는 이 체제에 굴복하고 싶지 않아, 다시 저 속으로 들어갈 수 없어, 나는 이미 어느 지점을 건너왔고 다시 돌아갈 순 없어, 를 모두 담은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최후의 결정을 한다.




내 옆에 친구는 이미 흐느끼고 있었고, 그들이 서로에게 고마워하는 동안, 나 역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내가 이 좋은 영화를 보면서 고등학교 시절에 별 감흥을 받지 못했다니 어린 시절의 내가 원망스러웠고 후회됐다. 처음부터 끝까지 페미니스트들의 페미니즘을 다룬 영화였는데, 내가 몰랐다, 그때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이, 사소하게 그리고 엄청나게 여자들을 압박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영화였는데, 과거의 나는 그걸 너무나 자연스럽게 봤다. 그때는 이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고 친구와 나는 극장을 나왔다. 눈이 빨갛게 충혈된 채였다.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왜이렇게 남자들이 우리를 못살게 굴지?"



시종일관 등장하는 모든 남자들이 그랬다. 그랬는데, 그게 지금 우리의 삶이었다. 강압적인 남편과 강간하려는 남자, 믿어주지 않는 경찰, 돈을 뜯어가는 남자, 아무렇지도 않게 성희롱을 일삼고 성적대상으로 보는 남자. 루이스의 남자친구는 그중 '나은' 남자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뜻대로 상황이 돌아가지 않자, 테이블 위의 모든 것들을 거칠게 손으로 쓸어버리는 폭력적인 성향을 보인다. 여자를 '때리진 않았지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거칠게 변하는 것은, 지금 세상의 소위 '그나마 착한 남자들'과 다를 바가 무엇이랴. 




친구와 나는 영화를 보고 나온 후에 술을 마시면서도 함께 호텔방에 들어가서도 영화에 대해 계속 얘기했다. 나는 아직도 내 안에 여성혐오가 남아있는 것 같아 너무 괴로웠다. 갈 길이 멀었다는 생각에 아득해졌다. 그렇게나 공부를 하고 주의를 기울이는데도 아직도 갈 길이 멀다니... 아직도 많이 부족하구나, 나라는 인간. 친구와 나는 이번 여행에서 델마와 루이스를 함께 본 시간이 가장 좋았다고 얘기했다. 나는 내 안의 빻음을 들여다보고 다시 성찰하기 위해 이 여행을 갔는가보다. 과거의 나를 부끄러워하고 지금의 나 역시 완벽하지 못한 인간임에 절망했지만,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 수확이었다. 그래, 내가 그간 공부를 했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던 거야. 만약 내가 공부하지 않았다면, 이 영화가 이렇게나 분명하게 메세지를 전하고 있음에도 나는 알아채지 못했을지도 몰라. 그래서 나는 더 읽고, 더 보고, 더 듣고, 더 이야기하고, 더 써야 겠다고 새삼 결심했다. 내가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또 쓰는 과정에서 나는 나의 빻음을 수시로 증명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 주변엔 좋은 사람이 많고 공부하는 친구들이 많으니, 나의 빻음을 지적해줄거라 믿는다. 





나는 페미니즘을 부인했다. 이 운동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페미니스트라는 소리를 들으면 이런 말로 들렸다. "너는 성깔 있고 섹스 싫어하고 남성 혐오에 찌든, 여자 같지 않은 여자 사람이야." 이러한 우스꽝스러운 캐리커처는 페미니즘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 페미니즘이 성공하면 잃을 것이 가장 많은 사람들에 의해 조작된 이미지에 불과하다. 과거에 사람들 앞에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절대 아니라고 했을 때를 떠올리면 내가 얼마나 무지했는지 떠올라 부끄러울 뿐이다. 그때 느꼈던 두려움들이 얼마나 부질없었는지 생각하면 또다시 부끄럽다. 결국 내가 외면받을 것이란 두려움이었고, 내가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며 문제나 일으키는 사람으로 보일 것이란 두려움이었으며, 이런 나를 이 사회나 친구들이 받아주지 않을 것이란 두려움이었다. (p.15)







대전 아트시네마는 몇 년만의 재방문인데, 오오, 티켓이 원래 이렇게 예뻤던가?




게다가 고양이가 있는 극장은 처음이다!




아주 좋은 시간이었다. 부끄러웠지만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 이렇게 명백하게 전달하는 메세지를 받아들이는 건 분명 큰 기쁨이다. 정말 좋았다. 내내 생각날만큼. 더 공부하자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더해야 해, 더. 나는 계속 배워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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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7-03-13 1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저 극장까지 찾아오셨어요 아는 사람만 아는 극장인데 ^^
델마와 루이스는 마지막 장면이 정말 충격이었지요.
요즘 알라딘에 페미니스트 관련 리뷰와 페이퍼가 많이 올라오는 것을 읽고 있으면 이제는 세상이 좀 바뀌어갈 것 같은, 진짜로 바뀌어갈 것 같은 희망이 조금씩 생길라고 그래요.

다락방 2017-03-13 11:46   좋아요 1 | URL
몇 년전에 [2데이즈 인 뉴욕]을 대전아트시네마에서 봤어요. 제 기억이 맞다면요. 줄리 델피 나오는 영화였다고 기억하니까 그게 맞을 것 같아요. 그때는 소규모극장 뭐 없을까 찾아내서 알게되었고, 지금은 ‘거기에 그거 있어‘ 알고 있어서 미리 어떤 영화 하나 검색해보고 갔어요. 극장 의자는 너무 낡았지만, 화장실도 별로 안좋지만, 극장 너무 예뻐요. 게다가 이번에 이 좋은 영화를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요!

네, 조금씩 바뀌어갈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선 저도 멈추면 안된다고 생각하고요.
:)

레삭매냐 2017-03-13 1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델마와 루이스 아주 오래 전 작품으로 비디오
로 봤었는데, 극장에서 보면 또 다른 느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티켓은 정말 멋지네요.

다락방 2017-03-13 11:47   좋아요 2 | URL
네, 그랜드캐년이 정말 근사하더라고요! 중간에 해뜨는 풍경을 감상하는 장면이 있는데 진짜 멋있었어요. 그보다는 사실 내용적으로 제가 어릴 때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번 기회에 극장에서 보게 되니 완전 푹 몰입해서 제대로 볼 수 있었어요.

티켓 너무 예쁘죠? 티켓 받으니 기분이 참 좋더라고요. 헷 :)

moonnight 2017-03-13 11: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옛날에 봤을 때 델마가 너무나 싫었어요. 친구 잘못 만나서 루이스 인생 망쳤다고 생각했지요=_=

다락방 2017-03-13 11:59   좋아요 2 | URL
네, 저도 처음에 그렇게 생각이 되어서 민폐라고 생각했거든요. 아아 민폐다 민폐...라고 말이지요. 그렇지만 델마 본래의 성격이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되니까 이 모든 일들이 다 새롭게 보이더라고요. 점차로 성장해 나가고 루이스 옆에서 힘이 되어줘요. 아아 정말 좋은 영화였습니다, 문나잇님!!

[그장소] 2017-03-13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통쾌해요 . 트럭을 쏴버리는 여자 일수도 있어 ㅡ라니!!^^ ㅎㅎㅎ 영화를 눈 앞에 놓고 다시보는 기분이네요! 아~ 또 기꺼이 봐야겠어!!

다락방 2017-03-13 13:47   좋아요 1 | URL
네, 그장소님. 다시 보기에 충분히 정말 충분히 좋은 영화입니다!! >.<

[그장소] 2017-03-13 14:03   좋아요 1 | URL
여성인 스스로를 향한 혐오와 , 자기보호를 동시에 놓고 갈등하던 순간들이 우리에게 있었기에 깨달음도 더불어 큰 게 아닌가 해요 . ^^
이번엔 제대로 다락방님 그 느낌 잘 따라가며 다시 한번 볼게요!^^ 추천 고마워요!^^

다락방 2017-03-13 14:51   좋아요 1 | URL
네, 그장소님은 어떻게 보실지 궁금해요. 보시게 되면 후기 꼭 부탁드릴게요!!

[그장소] 2017-03-13 15:42   좋아요 1 | URL
오케이 오케이~ 오랫만에 영화 리뷰나 해볼까요!^^ 열중 ~ 쉬엇~!! 하고 봅니다~^^

레와 2017-03-13 16: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 장면장면이 떠올라서 눈물이 나요. ㅠ_ㅠ

계속 생각하고 공부하고 글 써줘요. 다락방.
나도 다락방 글 읽고 생각하고 공부할게! ^^


다락방 2017-03-13 16:37   좋아요 1 | URL
응 그래요 그래요. 우리 계속 얘기하면서 앞으로 나아갑시다. 멈추지 않을게요. 불끈!!

건조기후 2017-03-13 19: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도 부족하지만 예전에 정말 얼마나 개소리를 하고 다녔는지. 말도 못 하게 멍청했던 언행들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에 열이 훅 올라요. 멍청이면 멍청이답게 멍청했던 말들 잊어버리기라도 할 것이지 기억은 또 왜 이렇게 생생하게 하고 있는지... 환장이에요 ㅜ

델마와 루이스 장면장면 눈에 선하네요. 다시 보고 싶어요. 저도 어렸을 때 봤던 거랑 느낌이 다를 것 같아요.

다락방 2017-03-14 08:10   좋아요 1 | URL
건조기후님. 그러니까 기억이나 나지 말것이지 제가 했던 멍청한 말과 행동이 고스란히 다 기억나서 심히 괴롭습니다. 이제는 안그래야지 다짐해보지만 제가 어디서 어떻게 또 멍청한 말과 행동을 저지를지 몰라 두려워요. 그나가 그때의 말과 행동이 멍청했다는 걸 이제라도 안다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말이지요. 반성을 모르는채로 계속 그렇게 살았으면 어쩔뻔했어요...하아- 갈 길이 멉니다, 건조기후님. 우리 같이 갑시다.

제가 너무 어릴 때 봐서 델마와 루이스를 너무 제대로 못본 것 같아요. 다시 봐서 좋았어요. 필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좋은 영화는 시간이 지나도 좋네요.
:)

비연 2017-03-13 2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여기 가보고 싶네요..^^

다락방 2017-03-14 08:11   좋아요 1 | URL
상영관 안은 진짜 낡았거든요. 의자도 천 다 찢어지고... 화장실에서 변기 물내리면 바깥까지 소리가 들리고요. 그런데 저렇게 예쁘게 꾸며놓고 고양이도 있고 티켓도 예뻐서 오 예쁘다, 했어요. 후훗.

블랙겟타 2017-03-17 2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안녕하세요. ^^ 오랜만에 들렀어요. 사실 델마와 루이스라는 영화가 제목만 알지 무슨내용인지 몰랐거든요. 마침 오늘 학교내에 페미니즘 독서 소모임이 있어 첫 모임을 오늘 하고 왔는데 이 영화 이야기 하더라구요. 나중에 영화도 보는 기회가 있기 때문에 그때 이 영화를 보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저도 계속 배워야될 것 같아요. ^^;;

다락방 2017-03-19 23:44   좋아요 2 | URL
블랙겟타님, 학교 내에 페미니즘 독서 소모임이라니, 그 모임에 참석하신다니, 와우! 멋져요! 그런 모임이 있다는 것도 거기에 참석하신다는 것도 정말 근사합니다. 헤헷. 공부는 해도해도 끝이 없는 것 같아요. 우리 계속계속 열심히 공부합시다. 델마와 루이스는 페미니즘을 아주 잘 보여주는 영화더라고요. 가장 먼저 얘기되어야 할 작품이고 또 함께 봐야할 작품임에 틀림없어요. 다 보신 후에 어떤 감상을 갖게 되실지 궁금해요. 공부하면서 틈틈이 들러 얘기해 주셔야 해요!
 

아까 휘모리님의 글을 보고 저도 갑작스레 책방출 합니다. 개인에게 팔기로 내놨던 상품들중에 몇 권을 내놓습니다. 한 분 당 두 권까지 선택가능하며, 다른 분들의 선택을 위해 신청 댓글은 '공개댓글'로만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책의 상태는 아주 새것도 있고 낡은 것도 있고 밑줄 그은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습니다. 제가 읽은 것도 있고 읽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책방출 오랜만이네요.

제가 알라딘에서 책방출 하다가 남자 만나서 연애했었는데 말입니다....먼 일이네요. 머어어언 일. 후훗.



2017년 03월 13일 현재 신청가능한 목록입니다. 빨간 엑스표 친 것은 이미 신청완료된 건입니다. 나머지 중에서 선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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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7-03-10 1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탄핵기념 이벤트인가요? 오랜만이네요.

다락방 2017-03-10 17:45   좋아요 1 | URL
네, 그렇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후훗.

무해한모리군 2017-03-10 17: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벤트를 응원합니다. 정작 저는 내일이나 되야 올릴거 같습니다 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7-03-10 17:49   좋아요 2 | URL
수시로 들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닷! ㅎㅎ

[그장소] 2017-03-10 17: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 취지네요! 응원 놓고 갑니다~^^

다락방 2017-03-11 02:49   좋아요 1 | URL
하하 좋은 밤 보내세요, 그장소님!

낭만인생 2017-03-10 2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좋아요. 신청해도되죠... 저는 <내가 원하는 시간> 그리고 <독일병사와 함께한 시간> 탄핵되서 치킨집이 닭이 다 팔려 문닫는 곳이 많다네요..

다락방 2017-03-11 02:48   좋아요 1 | URL
네!! 주소 3종셋트 적어주세요!! :)

2017-03-15 0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피오나 2017-03-10 2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노란새>랑 <남자 없는 여름> 손들어봐요ㅋㅋ

다락방 2017-03-11 02:48   좋아요 0 | URL
네네 피오나님도 주소3종셋트 비밀댓들로 적어주시기 바랍니다. 훗 :)

피오나 2017-03-11 09:0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당ㅎㅎ

2017-03-11 09: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피오나 2017-03-14 17:45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책 잘받았습니다!! 잘 읽을게요^^

다락방 2017-03-14 18:09   좋아요 0 | URL
네, 둘 다 저는 좋았어요! :)

꿈꾸는섬 2017-03-11 0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탄핵기념 이벤트~ 멋져요!
팻걸선언, 저요!

다락방 2017-03-11 05:33   좋아요 0 | URL
네, 팻걸선언! 주소3종셋트 적어주세요!

2017-03-11 1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코코몽 2017-03-11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백한잠, 매디슨 카운티의 추억 부탁드립니다:)♥

다락방 2017-03-11 13:34   좋아요 0 | URL
네네 비밀댓글로 주소삼종셋트 남겨주세요!

2017-03-11 1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렇게혜윰 2017-03-11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탄핵기념!!! 얼른 방이나 빼면 좋겠네요^

다락방 2017-03-13 08:27   좋아요 0 | URL
웃으면서 방을 뺐더군요. 지지자들에게 손까지 흔드는데... 하아-

꿈꾸는섬 2017-03-15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책 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락방 2017-03-15 20:50   좋아요 0 | URL
네 즐겁게 읽으세요!
 
정말 소설이 아닌 현실들

오늘 아침 비연님 페이퍼를 읽으니, 어제 제가 읽은 잡지 《GQ》의 한남에 대한 칼럼이 생각나네요. 저 역시 잊혀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오늘 비연님의 글을 읽으며 떠올린 부분은 이런 거였어요. '프리랜스 에디터' 인 '정미환' 님의 글중 일부입니다.




너무 자주, 무심코 일어나기 때문에 기억하지 않으려 애쓰고 살 뿐이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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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7-03-10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공감됩니다. 한남이라...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는 한 반에 학생 수가 60명이 넘었더랬다. 진학할수록 학생 수가 적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50명은 훨씬 넘겼었는데, 언제나, 항상, 남자 아이들의 수가 많았다. 내가 다닌 학교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복도에 키순으로 일렬로 세워 짝을 정했는데, 그러니까 가장 작은 남자아이와 가장 작은 여자아이가 짝이 되어 맨 앞자리에 앉는 식이었다. 그러다보면 키가 큰 남자아이들은 늘 남자아이와 짝이 되어야 했는데, 맨 뒷자리에 앉는 남자아이들 몇 명쯤은 그렇게 남자아이들끼리 앉아야만 했다. 그 애들은 집에 가서 엄마한테 '나도 여자아이랑 짝하고 싶다'고 말했었다고 했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는 그렇게 남자아이들이 여자아이들보다 많았다.




나는 여중-여고-여대를 다녔다.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교복을 입었는데, 중학교시절 하복을 입고 다니노라면, 나이 많은 남자 선생님이 소매 속으로 손을 넣어서 팔 안쪽을 만지며 말을 걸곤 했다. 아 쓰면서 토할 것 같아.. 어떤 선생님은 가슴 부분 주머니에 들어가 있는 명찰을 자기가 빼준다면서 가지고 다니는 몽둥이로 가슴을 눌러가며 명찰을 빼줬더랬다. '제가 뺄게요' 해도 '가만있어' 이러면서 자기가 빼줬지. 우리는 그때 선생님한테 뭔가 제대로된 반항을 하지도 못한채로 더러운 기분을 참아가며 그저 우리끼리 있을 때만 '저새끼 변태새끼' 라고 말하곤 했다. 아 쓰면서 토나와... 


체육선생님은 남자였는데 백미터 달리기를 시키면 초를 잰다고 도착지점에 서있었고 가슴이 큰 아이들은 출렁거리는 가슴을 보이는 게 죽기보다 싫어서 팔을 안쪽으로 모으고 천천히 달렸더랬다. 나는 국민학교때 학급 대표로 달리기 선수로 나갈 정도로 잘 뛰는 아이었는데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백미터를 이십초 안에도 뛸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내게 이 무거운 가슴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어릴 때부터 브래지어를 차지 않았다면, 큰 가슴이 감춰야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지금은 내 가슴이 가려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때, 어릴 때는 나를 비롯해서 가슴 큰 친구들은 등이 굽었더랬다. 어떻게든 이 가슴을 가리고 싶어서, 크다는 걸 누가 알지 못하게 하려고. 아, 나의 어린 시절에 위로의 건배를!




회사에 한 여직원이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온 적이 있다. 남자부장이 그 찢어진 구멍으로 손가락을 넣더라. 말로는 '이게 뭐냐, 돈이 없냐' 하고 장난치는 식이었지만, 그 구멍에 손가락을 왜넣나. 이러지마세요, 라고 해도 재밌어서 그래~ 라고 퉁쳤고, 고개 숙인 다른 여직원에게는 다가가서 목을 쓰다듬었다. 너는 목에 잔털이 있네, 하면서. 이러지마세요, 라고 여직원이 싫어하자 어휴 가만있어봐, 하더라. 나는 그 사람에게 '그러지 마세요. 그러다 성희롱으로 고발당합니다' 라고 말했더랬다. 여직원들은 '네가 그렇게 말하고난 뒤에는 안그러더라' 라고 말하며 고마워했다. 그런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내가 자리를 비울 때 그런다고 하더라. 여러가지 문제가 섞여서 그는 잘렸다. 그 뒤에는 다른 남자 부장이 들어와서 여직원들에게 성희롱을 했고, 나는 다른 임원 앞에서 그 부장을 부르고 또 과장급또 불러 모아서, '당신이 당장 그 짓을 그만두지 않으면 나는 직접 보쓰에게 말하겠다, 한 번만 더 다른 여직원들로부터 그런 말을 들으면 가만 있지 않겠다' 라고 말했다. 그 뒤로 부장은 그 짓을 멈췄다. 지방에 있는 공장의 공장장도 성희롱을 한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다른 임원에게 가서, 그 사람이 그 짓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걸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당신이 그걸 말리지 못하겠다면, 내가 보쓰한테 들어가서 직접 말하겠다고 했고, 공장장은 그 뒤로 짤렸다. 그 문제 말고도 다른 문제들이 더 있긴 했지만.




회사 직원 한 명은 장녀다. 밑으로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는데, 집에서 못난 과일은 이 장녀와 차녀가 먹는다고 했다. 남동생에게는 예쁜 과일을 두었다가 주고, 깎았다가 준다고 했다. 집안의 온갖 궂은일은 이 장녀의 차지라고 했다. 할머니의 입원이라든가 병원을 모시고 간다든가 손님을 접대한다든가 하는 모든 일은 이 장녀가 하는데, 남동생은 그런 일로부터는 자유롭고 예쁜 과일을 그냥 받아먹으면 되는 거였다.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에는 이런 이야기가 가득하다. 태어날 때부터, 아니, 태어나기도 전부터 여자들에게 가해졌던 폭력과 차별에 대한 얘기들. 그래서 이건 



소.설.이.아.니.다.



이건 현실이다. 이건 사실이고 현실이다. 이건 그간 여자가 살아왔던 삶을 그저 건조하게 풀어놓은 이야기다. 그나마 희망적인 건 곳곳에 '그건 잘못됐다'라고 말하고 고치려고 했던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이고, 그럼에도 절망적인 건, '나는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남자들조차 사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잘못을 반복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이 책은 소설이 아니다. 여자가 태어나서 학교를 다니고 직장을 다니면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저 보여주기만 하는 이 글은, 소설이 아니다. 손쉽게 한 눈에 이것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는 데에 의미가 있긴 하지만, 이건 소설로 써내지 않았어도 사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다. 아니, 여자들만 알고 있는 일일테다. 구체적으로는 잘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다면, 아마도 한국의 절반이 차마 인정하지 못하고 '몰랐다'고 하겠지만, 그들에게 이 책으로 보여줄 수 있어 이 책은 의미가 있다 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만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새삼 우리 엄마는 우리를 아들과 딸이라는 이유로 차별하지 않았다는 것에 크게 감사한다. 아빠는 그렇지 않았다. 아빠도 기본적으로 딸이라서 뭔가 덜해야 한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그렇지만 아빠는 딸이 대학에 가지 않기를 바랐다. 상업고등학교를 가기를 바랐고, 고등학교 졸업 후에 빨리 취업해서 돈을 벌기를 바랐다. 돈을 벌어 그 돈을 아빠 가져다주기를 그렇게나 바랐다. 아빠가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은 아빠 친구중에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취업해서 돈 갖다주는 딸'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빠는 그렇게 되고 싶어했다. 수능을 망쳤다고 우는 나에게 아빠는 엄마가 없는 데서 그랬다. '대학에 가는 것만이 답이 아니다, 공장에 들어가서 돈을 벌어와도 된다' 라고 했다. 딸들을 대학보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공부하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은 아빠가 아니라 엄마였다. 엄마가 그랬다. 지금은 아빠가 제일 잘한 일이 '자식들 다 대학 보낸 것'이라고 말씀하고 다니시지만, 그때 엄마가 그저 아빠에게 순응하고 아빠 말을 잘 듣는 아내였다면, 나는 고등학교 졸업해서 취업해 돈을 다 아빠에게 갖다 바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빨리 졸업하고 돈을 버는 일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지만, 공부에 대한 기회를 여자라는 이유로 차단한거라면 그건 잘못이다. 어쨌든 나는 좋은 엄마를 만나서 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고 자랐다. 공부에 대한 기회도 아들과 똑같이 가졌다. 그렇지만 내가 공부를 못했다는 게 함정..... Orz


새드니스...

슬픔.......




나는 여러 아이들과 또 학부모들이 말하는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해서 못하는' 그런 아이인줄로만 알았는데,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그냥 공부 못하는 아이었어. 하아-



새드니스 어게인...

슬픔 또다시....






그건그렇고,

나의 여덟살 조카가! 시를 썼다! 할머니(엣헴, 우리 엄마다!)가 끓여준 삼계탕을 무척 좋아하는데, 울엄마가 끓여준 삼계탕은 나도 좋아하기 때문에 이 시가 더욱 반가웠다.






조카는 할머니가 해준 삼계탕과 미역국, 시래기 볶음과 취나물 볶음을 좋아한다. 이런 걸 잘 먹는 아이라니 무척 예쁘다. 제 누나가 이런걸 좋아하니 덩달아 다섯살 조카도 이런 것들을 맛있게 잘 먹는다. 하핫.


그나저나 조카가 이런 시를 썼다니, 후훗, 제이모 닮아서 시적 감각이 있군. 나중에 이모랑 콜라보로 시집을 내자꾸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일전에 조카가 제 엄마에게 '엄마 타미 가슴이 따뜻해지게 유자차 한잔 끓여줄래?' 했다는데, 아니, 얘는 책도 많이 안읽으면서 뭘 이렇게 표현력이 좋지? 다섯살 때였나, '이모 하늘이 예쁘니까 우리 나가도 좋겠다' 고 했더랬다. 기가 막힌 아이다 진짜. 며칠전까지만 해도 태권도 쌤이 되고 싶다던 조카는, 피아노를 다시 배우기 시작하면서 피아노가 너무 좋다며, '태권도 잘하는 피아노쌤'이 되고싶다고 장래 희망을 바꿨단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멋지다! 그래야 내 조카지! 사실 나는 조카에 대해서 '음악에 조예가 깊은 과학자'가 되기를 바랐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취미로 음악하고 과학으로 밥 먹고 사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랐지만, 태권도 잘하는 피아노 선생님도 무척 좋다!! 아마도 자라면서 계속 장래희망은 바뀌겠지. 사실, 나로 말하자면, 나 역시...고등학교때는...... 장래희망이 뉴스 앵커였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젠장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런데 지금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냥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지내자, 가 나의 바람이다. 이거면 됐다. 더 바랄 것도 없어. 인생.....


어쨌든 조카야, 배우고 싶은 거 실컷 배우고 말하고 싶은 거 실컷 말하고 쓰고 싶은 것 실컷 쓰렴!!! 네 이모가 다락방이닷!!!!!






나는 진짜 세상에서 엄마랑, 여동생이랑, 남동생이랑, 조카들이 제일 좋다. 완전 짱이얏! 

일전에 한 남자랑 데이트를 하면서, 그런 얘길 했더랬다. '나는 우리 엄마랑, 동생들이랑, 조카들을 사랑하고 그들도 나를 사랑한다는 걸 알아요. 나는 이 사랑만으로 충분히 행복하고 다른 사랑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라고. 정말 그렇다. 이 사랑만으로도 나는 아주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나누면 행복하고 서로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고 안보면 보고 싶은 이런 관계, 이렇게 맺어진 사람이 내게 이렇게나 많다니, 축복 받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음..줌파 라히리의 축복 받은 집이 읽고 싶어지는군.





아 조카 너무 보고싶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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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말 소설이 아닌 현실들
    from 시간의 흐름, 그 속의 책 2017-03-09 19:20 
    다락방님 페이퍼를 보자니, 갑자기 옛 경험들이 떠올라 속이 쓰리다. 중학교 1학년 자율학습인가? 무슨 시간이었지? 암튼 어느 시간의 일이다. 남자 선생님이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50대는 됨직한, 변태스럽게 생긴 사람이었다. 들어올 때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다. 나는 그냥 고개를 쳐박고 딴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선생님이 앞에서 왔다갔다 하다가 제일 앞 구석에 있는 여자아이 앞에 섰다. 하얀 얼굴에 키가 자그마하고 얌전하게 생긴 여자아이였다. 이름은 어느
 
 
꼬마요정 2017-03-09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분명 앞부분 읽을 때는 화가 치밀어올랐는데, 조카의 삼계탕 시가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네요 ㅋㅋㅋ 멋진 시입니다. 하늘이 예뻐서 나가도 좋다니.... 역시 글빨은 타고 나는 거였군요 ㅠㅠㅠㅠㅠ

다락방 2017-03-09 11:26   좋아요 0 | URL
삼계탕 먹고 싶어요, 꼬마요정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점심은 무얼 드실건가요? 곧 점심시간입니다. 훗.

아 진짜 조카 너무 예뻐요. 너무 사랑스러워요. 완전 짱짱!! 꺅 >.<

치니 2017-03-09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조카님 저 나이에 길쭉해요 , 출렁거리는, 가슴이 뜨거워져요, 이런 단어들을 적재적소에 정확히 쓰다니, 엄청난데요!

다락방 2017-03-09 14:17   좋아요 0 | URL
저도 출렁거리는을 쓴 거 보고 놀랐어요. 제 욕심으로는 조카가 책읽기를 좋아했으면 좋겠는데 이 조카님은 책읽기에 관심이 너무 없으셔요 ㅠㅠ 같이 책읽고 싶은데 말이죠 ㅠㅠㅠㅠㅠ

스윗듀 2017-03-09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만 보고는 저런 내용일지 몰랐는데, 구미가 확 당기네요! 오빠랑 차별받는 막내딸1... 다락방님 사랑이 충만한 가족들을 가진 것을 축하드립니다 하핫!

다락방 2017-03-09 14:18   좋아요 1 | URL
스윗듀님, 읽어보세요. 이 책에는 지금을 사는 여성들의 현실이 현실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어휴... 오빠랑 차별 받는 막내딸 이셨군요, 스윗듀님. 이리와요, 가만히 안아줄게요. 토닥토닥...


우리 함께 어깨동무 하고 이 세상을 다 부숴버려요. 새롭게 만듭시닷!!

레와 2017-03-09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 ‘이제 곧 끝나간다고. 조금만 견디면 좋아질거라고. ‘ 정확한 아니다 대략적인 시간이라도 알려주면 좋겠어요.
그러면 견디기 훨씬 수월할텐데.. 세상이 너무 지긋지긋해 다락방


그와중에도 우리 타미는 정말 정말 사랑스럽고요!!

다락방 2017-03-09 16:52   좋아요 0 | URL
내가 사랑하는 타미가 좀 더 좋은 세상에 살게 하기 위해서는 지긋지긋해도 지쳐서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 같아요. 나도 지긋지긋해 그리고 지쳐요. 그래도 포기하지 말자. 사실 다 싹 갈아엎어야만 세상이 좋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몇 번이나 들지만.....하아-

기운냅시다, 레와님. 우리 기운 내요. 서로를 다독이고 어깨 두드려주고 그렇게 기운 냅시다.

비공개 2017-03-09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무슨 다큐보는 느낌이었어요. 거기다 제동생이 82년생 지영이예요 ㅋㅋ 성만 다르답니다
다락방님의 조카님은 정말 멋지네요. 좋은시 읽어서 기분 좋아졌어요 감사해요 ㅎㅎ

다락방 2017-03-09 18:02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이 책이 의미있다, 필요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제가 기대하는 문학에는 부족한 느낌이에요.

히힛 제 조카는 진짜 짱이죠? 삼계탕의 출렁이는 국물이 드시고 싶어지지 않습니까? ㅋㅋㅋㅋㅋ

비연 2017-03-09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조카 넘 좋아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고 행복해요~ 락방님 심정에 백만표의 동감을~
그나저나 위의 저 경험들.. 아 저도 있어요. 갑자기 짜증이 밀려오네요...ㅜ

다락방 2017-03-10 08:12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조카 진짜 너무 좋아요! 완전 사랑해요! 막 안고 싶고 머리통에 뽀뽀해주고 싶고 그래요. 얘기하는 것도 너무나 즐겁고요! 그래서 저런 경험들을 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애쓰고 싶어요. 하아- 너무 더러운 경험이에요, 진짜 피해야 할, 맞닥뜨리지 말아야 할 그런 일이요...

초콜릿우체국 2017-03-10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다 옛기억에 부들부들 하고 있었는데.. 조카님 덕에 금새 따스해져버렸어요~ ㅋ 아직 조카가 없는 저로써는 마냥 부러울 뿐입니다~~ ㅎㅎ

다락방 2017-03-10 10:03   좋아요 0 | URL
초콜릿우체국님, 우리들은 살아가고 있기는 하지만 그 모든 기억들을 모조리 잊고 살아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저 기억하지 않으려고 애쓸 뿐이죠. 고통스럽고 아프고 짜증나고 미쳐버릴 것 같던 기억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모두들 기억을 다 꺼내 말한다면 아마도 이 세상은 폭발해버리지 않을까요. 각자 책으로 써도 한 권으로는 택도 없을 것 같아요. 부들부들, 우리 화가 나면 계속 화를 냅시다.


조카는 사랑입니다, 초콜릿우체국님. 히힛. 제가 이모라는 게, 저에게 예쁜 조카가 둘 이나 있다는 게 너무 좋아요! ♡
 

어제 주문한 책을 배송받아 박스를 풀었는데, 아아, 나는 오늘 또 책을 사고 싶다. 계속 참고 있는데 '마이클 로보텀'의 신간 소식을 알게된 것이다! 조 올로클린 시리즈라니, 나 그 시리즈 너무 좋아, 이건 사야되는데... 하고 장바구니를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아아, 참을것인가 말것인가.... 왜때문인지 갑자기 또 《페미니스트 모먼트》도 사고 싶다. 텀블벅 후원에 참가해서 페미니즘 후드집업티도 받을 예정인데, 그러다보니 페미니즘책 또 사고 싶어졌고, 이미 준비해두고 읽지 못한 페미니즘 책도 수두룩한데 어째서 나는 왜 때문에 이 책도 사고 싶어지는가. 게다가 흑 ㅠㅠ 이승우 신간도 나왔어. 날더러 어쩌란 말인지..도대체 어쩌란 말인지... 게다가 영화로 너무 재미없게 보았던 《레이디 수전》도 궁금해... 인생... 아니, 지름이여...지름, 너는 무엇인가?


난 어쩌지?






















어째서 책은 사고사고 또 사도 계속 사고 싶은걸까. 어째서 읽고 싶은 책은 계속 나오는걸까? 게다가 1,2,3권 늘어놓으면 표지가 기막히게 예쁜, 그리고 야하다는! 《에로티카》도 사고 싶다! 읽고 싶어!

아주 오래전에 내가 즐겨 가던 사이트에 한 여성이 글을 올렸었다. 여행 갔다가 이탈리아 남자를 알게 되어 사랑에 빠졌는데, 그래서 그를 또 만나러 간다, 지난번에도 만나서 호텔에 갔다가 안나왔는데, 이번에도 우리는 아마 그럴 것 같다, 라는 것이다. 몇 개월만에 만나게 되는 거라는데, 아아, 너무 좋지 않은가, 몇 개월만에 단단히 사랑에 빠진 남자를 만나서 호텔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 시간들...그래서일까. 이탈리아가 배경인 에로틱한 소설이라니, 이건 어쩐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같은 것보다 훨씬, 훠어어얼씬 재미있고 야할 것 같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됐을까??

















아, 표지 너무 예쁘다... 궁금하다.....읽고싶다...아니, 사고 싶은건가? 아니, 읽고 싶은건가? 글쎄, 잘 모르겠다...



나는 이제 '책을 사지 않겠다'는 결심을..잊은건가? 인간은 원래 이렇게 쉽게 잊는가? 아니, 나는 이렇게 쉽게 잊는가?




어제는 퇴근길에 여덟살 조카로부터 전화가 왔다. 제아빠가 혹시 아빠나 엄마한테 전화하고 싶어지면 전화하라고 집에 전화기를 놔줬는데, 전화기 밑에는 이모의 전화번호도 써있는 거다. 그거 보고 스스로 전화를 하는 거다. 본인의 의지로! 본인의 마음으로!! 이모 어디냐고 물어 지하철이다 라고 답했더니, 이모네 집에 가면 자기랑도 같이 지하철을 타잔다. 응, 근데 이모랑 지하철 타면 이모 손 꼭 붙잡고 다녀야해! 했더니 응! 한다. 아 진짜 너무나 사랑스러워. 그런 얘기 하다가 뜬금없이



이모, 나는 깍두기랑 김치가 매워.



한다. 아아 뜬금없이 깍두기 김치 얘기는 왜나오는걸까? 어디서 먹었냐 물으니 학교에서 먹었단다. 다른 반찬은? 물으니 안매워, 이런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조카의 목소리가 진짜 너무 사랑스럽고 이렇게 통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 기분이 좋아진 나는, 너랑 통화를 해서 너무 즐겁다고 말했다.



- 타미야, 이모가 타미랑 전화를 하니까 기분이 너무 좋아!

- 응, 그럼 이모 내일 또 전화할게.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이 아이는 뭐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큐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완전 사람 마음을 들었다놨다들었다놨다 하는구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조카야 완전 사랑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어제는 하루가 몹시 길었다. 집에 돌아가 엄마랑 둘이 앉아 와인을 마셨다. 냉동실에 있던 수육을 데우고 오렌지와 치즈를 준비해서는 술상 앞에 앉아 내가 좋아하는 《걸어서 세계속으로》 포르투갈 편을 보았다. 아아, 난 역시 저기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 나는 저기 가서 살거야, 나중에 진짜 저기서 살거야, 라고 말하자 엄마가 '왜 나중에 가, 한살이라도 젊었을 때 가서 살어' 하시는 거다. 아, 엄마 그러고 싶은데 저기 가서 뭐해먹고 살어...돈 벌어서 가져가야지...... 

그래, 내가 포르투갈에서 살려면 먹고 살 수단이 필요한데, 그걸 어떻게 마련할지 내가 알 수가 없으므로, 일단 돈을 모아 그 돈을 들고 가져가야겠다. 얼마나 모아야할까...나는 저기 가서 살거야. 집에 들어와있지 않은 남동생에게 문자메세지를 보냈다.



"나 포르투갈 가서 살거야. 말리지마."



그러자 남동생으로 부터 답이 왔다.



"안말려."



아하하하하하 아무도 안말리는데 나는 왜 못가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는 요즘 좋아하는 남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포르투갈에 정착하면 아주 가끔 나 보러 놀러와요."



그러자 이런 답이 왔다.



"네! 그럴게요!"



우어어어엇 어서 빨리 포르투갈에 가 정착해야겠다. 내가 살 곳은 거기여..... 그 삶은 완벽할 것 같다. 예쁜 하늘 보면서 시도때도 없이 프란세진야와 와인을 먹고 그러다 어느날엔 훌쩍 좋아하는 남자가 날 보러 오는 삶..... 아 졸 퍼펙트....♡




아니, 그나저나 이 의식의 흐름은 왜 '책사고싶다' 에서 '포르투갈에 가서 살겠다'로 끝을 맺게 되는것인가. 왜때문에... 



신이여, 책 지르지 않게 도와주세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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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케 2017-03-08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르투갈에 가시면 로까곶에 꼭 다녀오셔요.

저는 10년 전에 그 어느 바위틈에 보물 하나를 숨겨두고 왔죠.
그거 찾으러 가는 상상이 요즘 저의 페인킬러...
마치 쇼생크 탈출같네요 ㅎ

책지름병 치유를 위한 비방은
서가 맨 왼쪽 아래 첫 번째 칸에 숟가락을 뒤집어 얹어놓으세요.
영험한 비방입니다. 진짜 !!

다락방 2017-03-08 14:31   좋아요 0 | URL
네, 다시 포르투갈을 가게 된다면 로까곶을 꼭 가보겠습니다!
포르투 가서 프란세진야 질리게 먹고 오고 싶어요. ㅎㅎ

그나저나, 서가 맨 왼쪽 아래 첫 번째 칸에 숟가락을 뒤집어 얹어놓으면, 책지름병..이 치유가 된다 그 말씀이시죠, 지금? 영험하다고요??????????? 흐음...그렇단 말이죠?? ㅋㅋㅋㅋㅋ

moonnight 2017-03-08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지름신에게는 그냥 굴복하는 수 밖에는ㅠㅠ;

다락방 2017-03-08 19:07   좋아요 0 | URL
일단 오늘은 참고 넘겼습니다, 문나잇님! 후훗 그렇지만 저 에로티카를 곧 지를것 같아요 ㅋㅋㅋㅋㅋ

2017-03-09 0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3-09 1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