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일드 호더
프리다 맥파든 지음, 이민희 옮김 / 밝은세상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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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폭풍이 몰아치고, 거대한 나무는 쓰러지기 직전이고, 내 옆엔 칼을 든 피투성이 아이가 서 있다. 오늘 밤 나는 아이를 집으로 들이려고 한다. 이 밤에 그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놀랍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문을 밀어 열고 아이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손짓한다. 잠시 망설이던 아이는 급히 안으로 들어선다. 문을 닫는 순간, 아이를 집 안으로 들인 결정이 심각한 실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등골을 타고 올라온다.              p.72


천둥 번개를 동반한 시속 100킬로미터의 강풍이 불어 닥칠 거라는 기상청의 예보가 시작된다. 숲속 오두막에 사는 케이시는 낡은 지붕이 걱정이다. 며칠 전부터 집주인에게 부탁이 아니라 거의 애원하다시피 지붕을 고쳐 달라고 했지만, 여전히 방치된 상태다. 오두막의 지붕이 무너지거나, 오두막 위로 우뚝 솟아 있는 나무가 쓰러지거나 어느 쪽이든 위험하다. 케이시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일하다 쫓겨난 이후 잠시 문명과 단절된 삶을 살아보고자 이 집에 왔다. TV도 없고, 휴대폰도 처분해 버렸다. 낡고 오래된 오두막이 거센 폭풍우를 견뎌낼 수 있을 지가 문제다. 물론 케이시가 오늘 밤 그로 인해 죽는다 해도 자신을 그리워할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결국 그날밤 폭풍우가 밀어닥친다. 오두막은 정전이 되고, 전화도 불통이고, 도로 사정도 엉망이라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없다. 어떻게든 오두막에서 버텨 보기로 하고 나름의 준비를 해본다. 그런데 창고에 숨어 있는 피범벅인 여자아이를 발견하게 된다. 손에 칼을 쥐고 있는 아이의 배낭에서도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자신을 경계하는 수상한 아이를 달래 집으로 들여 음식을 챙겨주고, 침대를 양보해주지만 자신이 잘한 건지 케이시는 의문이 든다. 폭풍이 몰아치고, 거대한 나무는 쓰러지기 직전인데, 칼을 든 피투성이 아이를 집으로 들였으니 말이다. 아이는 경계심 많은 야생동물처럼 날을 세우고 있었고, 이름이 뭔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아무 얘기도 하지 않는다. 게다가 아이의 모습은 누군가에게 심한 학대를 당해온 것처럼 보였다. 기껏해야 중학생으로 보이는데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이곳까지 오게 된 걸까. 케이시와 아이는 폭풍우 치는 밤을 무사히 버텨낼 수 있을까. 




경찰에 전달하겠다며 넬에게 집 주소와 열쇠를 건네받은 나는 경찰서를 지나쳐 곧장 매사추세츠를 향해 달리고 있다. 내가 하려는 일을 리가 알면 기절초풍하겠지만 나는 멈출 수 없다. 리는 법이 미치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고통받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우리 엄마 같은 사람과 살아본 적이 없을 테니까. 

아이들을 오래도록 지켜본 사람만이 아는 세계가 있다. 내가 넬과 리에게 거짓말을 하고 매사추세츠를 향해 달려가는 이유다.           p.310


이 작품은 지금 가장 핫한 작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프리다 맥파든의 신작이다. <하이드메이드> 시리즈가 많은 사랑을 받았고, 이후에 출간된 <네버 라이>, <더 코워커>등의 작품들이 연이어 잘 되면서 거의 전작품이 다 출간될 기세로 줄줄이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프리다 맥파든의 작품은 항상 중독성 있는 스토리로 페이지 터너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구성도 탁월하고, 반전도 놀라우며, 현실적인 캐릭터까지 독자들을 몰입하게 만들어줄 요소들로 가득하다. 스릴러 장르에서의 긴장감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프리다 맥파든의 작품들은 눈을 뗄 수 없는 전개로 그걸 해낸다. 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극강의 재미를 선사해 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 신작은 판형도 작고, 그리 두껍지 않은 편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역시나 몰입감이 대단한 작품이었다. 이야기는 폭풍우 치는 오두막에서 사투 중인 케이시의 현재와 과거 엘라의 학창시절이 교차로 진행된다. 비밀을 가지고 있는 소녀와 과거에 무슨 사건에 연루되어 학교를 그만둔 여성, 그리고 주변에 있는 수상한 남자들, 폭풍우 치는 밤에 고립된 장소에서 벌어지는 심리전이 대단했다. 프리다 맥파든은 이 작품에서 가정 폭력의 심각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친권자인 부모가 가해자인 경우 가정에서 벌어지는 폭력이 아이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버리는지, 가정 내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외부에 있는 사람들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어떻게 무기로 변하는지, 매일 폭력을 당하면서도 부모 곁에 있을 수밖에 없는 아이들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어느 나라에서 일상화된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아이들의 존재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현실 속 엘라와 앤턴, 케이시가 끝내 포기하지 않기를, 행복해질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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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드 호더
프리다 맥파든 지음, 이민희 옮김 / 밝은세상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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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극강의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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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감성 디어 제인 오스틴 에디션
제인 오스틴 지음, 김선형 옮김 / 엘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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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 메리앤이 탄성을 올렸어요. "옛날에는 나뭇잎 떨어지는 광경을 보고 있자면 얼마나 황홀한 느낌에 휩싸였는지 몰라! 산책하면서, 바람에 날려 사방에서 소나기처럼 휘몰아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즐거웠는지! 낙엽, 계절, 공기가 어우러져 내 안에 일으키던 감정들은 또 얼마나 풍부했는지! 이젠 그렇게 바라볼 사람도 없겠네. 귀찮은 일거리로만 여기고 황급히 다 쓸어서 눈에 안 보이는 데로 치워버릴 테지."

"모든 사람이 너처럼 죽은 나뭇잎을 열렬하게 좋아하는 건 아니야." 엘리너가 말했지요.                p.140


사실 대부분 제인 오스틴하면 먼저 떠올리는 것은 남녀가 서로 오해하고, 헤어지고, 갈등하고, 다시 만나는 서사, 즉 로맨스 소설에 대한 일종의 선입견이다. 하지만 그 편견을 가뿐하게 넘어서는 것이 1811년에 출간된, 제인 오스틴의 첫 소설, <이성과 감성>이다. 로맨스, 이성과 감성의 대립 구도 외에도 당대의 중요한 정치, 사회적 이슈를 반영하고 있으며 날카로운 사회적 문제의식을 문학적으로 매우 뛰어나게 구현시킨 작품이기 때문이다. 김선형 번역가는 이 작품에 대해 '번역만으로는 옮길 수 없는 중요한 행간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그에 대한 내용은 <디어 제인 오스틴>이라는 에세이에서 자세히 만나볼 수 있다. 


<이성과 감성>은 매사에 지나치게 신중한 맏딸 엘리너의 절제된 이성과 매사에 지나치게 감정적인 둘째 메리앤의 정직한 감성이 가족에게 닥친 위기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그로 인해 오랜 세월 살아온 저택을 떠나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게 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중에 맏딸인 엘리너와 둘째 메리앤의 완전히 상반된 성격의 차이가 사사건건 부딪히며 극에 재미를 더해준다. 두 자매의 성향 차이는 각자의 남성관에도 반영되어 이들의 로맨스 서사도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18세기의 감성은 21세기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래서 더 재미있게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고, 타인들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의연한 모습을 보이는 이성적인 면에 있어서는 이해는 하지만 다소 안타까운 부분도 들 것이다. 두 자매의 행동과 사고는 지나치게 극단적이지만, 사실 누구에게나 있는 두 가지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성과 감성이 모두 필요한 것이기에 조화롭게 잘 어우러져야 할텐데, 그것도 쉽지만은 않은 것이고 말이다. 그래서 이 작품 속 두 자녀의 이야기를 보며 언제쯤 이성과 감성이 '소통'할 수 있게 되느냐에 포인트를 주는 것도 작품에 더욱 몰입하게 되는 포인트가 될 것이다. 




엘리너는 차마 명랑할 수 없었어요. 그 기쁨은 종류가 달라서 다른 감정은 몰라도 명랑함으로 이어지진 않았어요. 메리앤이 구사일생으로 회복해 삶, 건강, 친구들을 되찾고 애지중지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살아 돌아왔다는 생각을 하면 심장이 섬묘한 위안의 감각으로 가득 차올라 열렬한 감사로 뜨겁게 팽창했어요 ─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기쁨도 드러나지 않았고, 어떤 말이나 미소로도 표현되지 않았답니다. 오직 엘리너의 가슴속에서만, 그 고요하고 강인한 만족감이 머물러 있었어요.                p.477~478


'디어 제인 오스틴 에디션'은 제인 오스틴이 태어난 지 정확히 250주년이 되는 2025년 12월 16일을 시작으로, 매년 두 권씩 삼 년에 걸쳐 순차적으로 나올 예정이다. 작가가 생전 완성된 여섯 권의 소설을 출간된 순서에 따라 출간한다는 것도 의미가 있다. 그래서 이번에 <이성과 감성>, <오만과 편견>이 나왔고, 내년에 <맨스필드 파크>, <에마>, 그리고 내후년에 <노생거 애비>와 <설득>이 차례로 출간된다. 그리고 두 작품에 대한 번역가의 에세이도 해마다 함께 출간된다. 제인 오스틴의 생일에 맞춰 초판 발행일자를 맞추는 것부터 번역가의 애정 가득한 에세이를 함께 내는 것까지 정말 사랑스러운 기획이다. 각 소설을 해석하고 번역하는 과정에서 건져 올린 번역가의 단상들을 엮은 에세이도 매우 기대가 된다. 


<이성과 감성> 역시 다양한 판본으로 이미 나와 있지만, '디어 제인 오스틴 에디션'이 특별한 것은 바로 '각주'에 있다. 김선형 번역가는 영미권에서 출간된 여러 유력한 오스틴 판본과 연구서, 제인 오스틴 북클럽 등에서 얻은 방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방대하고 꼼꼼한 주석을 달았다. 고전 문학을 읽을 때, 옮긴이의 주석을 꼼꼼히 다 살피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김선형 역자의 각주들은 일부러 찾아서 읽고 싶을 만큼 깊이 있고, 재미있었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대한 부연 설명을 비롯해 이 두 단락은 오스틴의 작품 중 남자 주인공을 처음 소개하는 묘사 중에서도 가장 길고 친절하다 라던가, 이 대화는 독자가 인물의 행동을 이해하게 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식이다. 또한 작품에서 매우 중요하게 쓰이는 표현에 대한 원문과 해석, 단어의 문맥적 의미 등 깨알같은 팁들로 가득하다. 각주를 잘 따라가다 보면 시대적, 사회적 맥락을 더욱 잘 이해해 이 작품을 더 풍부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디어 제인 오스틴 에디션'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번역이 왜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앞으로 이어질 다른 작품들도 기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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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베첸토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최정윤 옮김 / 비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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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청중은 숨 죽이고 연주를 감상했다. 모두 숨이 멎은 듯 했다. 시선은 피아노에 고정한 채 영락없는 바보처럼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백 개의 손으로 연주한 듯하고 당장이라도 피아노가 터져버릴 것 같았던 그 폭발적인 코드 진행이 끝난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말을 잇지 못했고 완전히 넋이 나가버렸다. 그 믿기지 않는 정적 속에 노베첸토는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를 들었고 건반 너머로 쑥 내밀어 피아노 현에 가져다 댔다.             p.57~58


연극으로 상연되며 대성공을 거둔 이 작품은 모놀로그 희곡으로 쓰였다. 이후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피아니스트의 전설>로 영화화되어 세계적으로 사랑받았다. 엔리오 모리코네의 음악으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했을 만큼 유명한 곡들도 많은 작품이다. 비채의 모던 앤 클래식 시리즈로는 2018년에 나왔는데, 지난 달에 영화가 재개봉을 하면서 지금은 영화 포스터 버전으로 책 커버가 바뀌었다. 


이 책은 소설처럼 읽히지만, 실제 연극을 위한 텍스트로 구성되어 있어 일반적인 소설의 구성과 약간 다르다. 저자는 책의 형태로 이 작품을 볼 때 '실제 공연과 큰소리로 읽어야 하는 소설의 중간쯤 되는 것 같다'고 서두에 밝히고 있다. 배에서 태어나 일생을 바다를 떠돌며 살았던 천재 피아니스트 '노베첸토'의 일생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국내에서도 1인극으로, 음악극으로 상연된 적이 있다. ‘모놀로그’답게 호흡은 짧고 전개는 빠르며 대화는 절제되었지만 독백을 통해 인물의 내면을 진정성 있게 보여준다. 무대에 선 배우는 선상의 쇼를 이끄는 진행자가 되어 화려한 입담을 펼치고, 이야기의 화자이자 트럼펫 연주자 ‘팀’이 되어 노베첸토의 삶을 서술하고, 노베첸토 자신으로 분하기도 한다. 무대극으로 봐도 정말 매력적인 작품일 것 같아 궁금해졌다. 언젠가 공연을 하게 되면 보러 가고 싶다. 




하지만 끝은 없었지. 당신이 보지 못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끝나는 곳이야. 세상의 끝/

피아노를 생각해봐. 건반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어. 우리 모두 그게 88개라는 걸 알지. 건반은 무한한 게 아니야. 당신, 당신은 무한하고 그 건반들 속에서 무한한 것은 당신이 만들어내는 음악이야. 건반은 88개이고 당신은 무한해. 난 이런 게 좋아. 사람은 무한하게 살 수 있지. 만약 자네가/              p.76


호화 유람선에서 버려진 아기가 자라면서 피아노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고,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주는 피아니스트가 된다. 어린 시절 피아노 의자에 앉아 다리를 대롱거리면서 했던 첫 연주에 사람들이 모두 숨죽이고 바라보던 장면부터 그의 삶은 결정된 건지도 모르겠다. 어떠한 속임수도 없이 아름답다고 연주를 들은 사람들은 생각한다. 누군가의 눈에서는 눈물이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기도 했다. 그만큼 감동적이었던 연주였다. 그런데 그토록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으면서도, 그는 왜 배에서 내리지 않는 걸까. 천부적인 피아노 실력으로 떼돈을 벌고, 좋은 집도 사고, 뭐든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을 텐데... 어째서 움직이는 감옥에 갇혀 지내는 걸까. 왜 계속 바다를 오가며 사는 걸까. 


단 한 번도 육지를 밟은 적 없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노베첸토는 '존재한 적 없는 음악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떨친다. 육지로 나아가 넓은 세상을 만나는 대신 꼭 2000명만큼의 세상을 접하며 살아가기로 결심한 그는 자신만의 작은 세계 속에서 깊이 있게 살아간다. 사람들을 바라보고, 귀 기울여 듣고, 그들이 지나온 시간과 감정을 건반 위로 옮긴다. '누군가의 눈 속에서, 누군가의 말 속에서, 실제로 그들이 느낀 공기를 들이마신 것처럼' 그 나름의 방식으로 말이다. 그는 사람들이 가진 흔적과 장소, 소리, 냄새, 그들의 땅, 그들의 이야기를 책처럼 읽어낼 줄 알았다. 그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정의한다. '88개의 유한한 건반으로 무한한 음악을 연주하는 일'이라고. 단 91페이지의 짧은 분량이지만, 문장으로 리듬을 만들고, 단어로 피아노 연주를 직조해내는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매 페이지마다 음악이 넘쳐 흐르는 것 같은 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영화를 감동적으로 봤다면, 영상이 미처 담지 못한 노베첸토의 다층적인 세계를 만나볼 수 있는 이 책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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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슬픔은 전문적이고 아름다워 교유서가 시집 3
리산 지음 / 교유서가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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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수같이 내리는 빗속에 폐허가 된 성의 뜰에 도착해/굶기를 밥 먹듯 하는 사이비 귀족에게 재워달라고 부탁하는/루이 14세 시대의 유랑 배우들처럼//방문객들이 도착한다 계속해서 도착한다/앉을 곳을 이리저리 찾는다 계단에 앉는다/문 뒤에 앉은 사람들 때문에 현관문은 열기도 어렵다/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정원에 모여 음식을 만든다              - '겨울 샐러드' 중에서, p.33


'교유서가 시집'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이다. 소후에 시인의 <우주는 푸른 사과처럼 무사해>는 연두색, 원성은 시인의 <비극의 재료>는 빨간색, 리사 시인의 <우리의 슬픔은 전문적이고 아름다워>는 핑크색인데, 표지 빛깔에 맞는 컬러로 그라데이션을 준 내지도 너무 예쁘다. 사실은 이 내지 때문에 교유서가 시집 시리즈를 앞으로 계속 모으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ㅋㅋ 


리산 시인은 아주 오래 전에 문학동네시인선으로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이라는 시집으로 만난 적이 있다. 눈 앞에 장소가 그려지는 듯한 서사성이 강한 시라 매우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 만난 시집도 장면들이 그려지는 듯 스토리가 보이는 시들이라 참 좋았다. 이번에는 '교환독서'로 읽게 되었는데, 한 권의 시집을 함께 읽는 시간이 아주 특별하게 느껴졌다. 시를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시를 읽는 이의 마음에 달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은유와 함축의 의미는 사람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집은 교환독서로 읽기에 정말 훌륭한 텍스트가 아닌가 싶다. 시집을 읽고, 생각하고, 메모된 글을 읽고, 시를 다시 읽으면 내가 보지 못했던 것들도 느끼게 되고, 나와 다른 방식의 감상도 배울 수 있으니 말이다. 세상의 모든 폐허 위에 눈이 내리고, 환하게 불을 밝히며 지나가는 밤 기차를 타고, 허물어져가는 신전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상상을 해본다. 




전나무가 길게 늘어선 숲, 꽃들은 눈처럼 향기롭게 떨어집니다, 발밑으로 길어지는 당신의 낭만,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건, 꿈꾸는 이상적인 울적한 하루가 전부여서, 마른 꽃들은 발밑으로 떨어지고,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허밍을 하는, 이 낡고 오래된 집에서도, 왜 꿈은 오래 꿈꾸던 꿈일 수가 없는지             - '산책에서 돌아오지 않기' 중에서, p.108


이 시집은 특히 '시인의 말'이 좋았다. '오래된 마음은 가라/아무것도 모르는 채 나는 뛰어드네/다시/맨 처음으로'라는 짧지만 임팩트 있는 문구였다. 오래 전에 읽었던 리산 시인의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을 다시 펼쳐 보았다. 역시나 시인의 말은 짧았다. '휴일에 만들어진 맥주는 불량이 많다고 한다. 내 시의 대부분은 휴일에 씌어졌다.'였다. 2013년 5월에 나왔던 시집과 2025년 12월에 나온 시집을 함께 두 손에 들고 오고 가며 번갈아 읽었다. 비슷한 듯 다른 느낌, 시간의 밀도 만큼 다르게 읽히는 시들이 참 좋았다. '겨울 샐러드'라는 시도 즐겁게 읽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요리를 하고 함께 나누어 먹는 파티의 한 장면을 그린 시인데,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게 따뜻함으로/가득하게 아주 많이 철철 넘치게'라는 대목처럼 화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상하게 따스한 느낌이 들어 겨울밤에 읽으면 참 좋겠다 싶은 시였다. 


이번 시집에는 해설 대신 김숨 작가님의 산문이 수록되어 있다. 시같은 소설을 쓰는 김숨 작가님의 글과 소설처럼 읽히는 시를 쓰는 리산 시인의 글이 너무 잘 어울린다. 개인적으로 리산 시인의 산문을 읽어 보고 싶다. 리산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산문이 정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언젠가 시의적절 시리즈에 한번 참여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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