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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는 과학자 - 우리 곁의 자연을 정확하고 아름답게 기록한 과학의 순간들
이동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7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머릿속에 빠르게 흘러가는 생각을 남기기 위해 필기구는 펜 하나만을 단촐히 사용한다. 현장에서 관찰하며 동시에 여러 종류의 펜을 사용할 여유는 없다. 화가들이 풍경화나 정밀화를 한자리에 앉아 그리는 것과는 다르다. 생물은 빠르게 움직이고 바람과 물도 흘러간다. 순간과 변화를 기록한다. 전체보다는 부분을 스케치하기도 하며 생물의 특정 부분만 그리기도 한다. 때로는 근육의 모습을, 때로는 골격 구조를, 때로는 동공의 움직임을 말이다. p.53
자연을 관찰하고, 분류하고, 이름 붙이는 과학자들은 왜 그림을 그렸을까. 글은 많은 정보를 저장할 수 있지만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에게는 전달할 수 없는 반면, 그림은 전 세계 누구에게든 보여주기만 해도 쉽게 이해시킬 수 있는 기록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림은 과학을 도왔으며, 과학은 그림을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가게 했다. 과학자는 그림을 그리고, 그림은 과학자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이 책은 그렇게 '과학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

곤충의 변태를 최초로 증명했단 마리아 메리안부터 수많은 고대 생명체의 화석을 발굴해낸 메리 애닝, 남아메리카 탐험의 원조인 알렉산더 훔볼트, 장 앙리 파브르, 찰스 다윈, 신사임당, 정약전 등 과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림은 한눈에 많은 정보를 보여주기에 최적화된 방법이고, 그만큼 과학 분야에서 정보를 담고 전달하는데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누구나 세심히 살피면 자연에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관찰한 것들을 완벽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림 그리는 시간이 추가되어야 한다. 수정하고, 관찰하는 과정의 반복을 통해 또 다른 눈이 열리고, 제대로 이해한 자연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연학자들은 자신이 직접 관찰하고 경험한 내용을 심도 있고 더 체계적으로 전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어설프게 전하거나 왜곡된 생각을 가지면 많은 이에게 부정당하기 좋다.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고, 그 과정에서 무한한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자연에 대한 이해는 인간에게 필요하다. 다른 이유는 없다. 우리가 자연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수천만 년 전부터 인간은 자연의 모든 상황을 견뎌냈고, 생존해왔지만 앞으로 닥쳐올 미래가 더 걱정이다. 그에 대한 대비는 물론 사람답게 살기 위해 자연을 탐구한다. p.282~283
곤충과 식물을 좋아하는 어린 소녀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꽃을 놓고 그린 작품이 유행해 정물화가 크게 발전하던 시기였다. 농가에서는 새로이 개발한 품종을 소개하기 위해 화가에게 그림을 의뢰하곤 했고, 가장 인기 있는 식물은 단연코 튤립이었다. 어린 소녀는 튤립을 그리는 정물화가인 의붓아버지를 도와 테이블에 꽃을 배치하고 일을 하며 그림을 배워나갔다. 그녀는 그림 속의 꽃이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고 아름다워 보이는지 알고 있었다. 바로 꽃과 함께 작은 곤충이 있으면 더 신선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말이다. 농장주의 입장에서 곤충은 품종개량에 방해가 되는 절대적인 악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러한 곤충들을 그림에 그려 넣은 것이 바로 어린 소녀, 메리안이었다.
그녀는 애벌레의 마디에 난 털, 무늬, 기문, 그리고 먹은 잎의 부위까지 면밀히 관찰하며 기록했다. 관찰을 바탕으로 꽃과 생물의 자연스러운 연결을 그려낸 것은 이전에는 없었던 파격적인 시도였다. 마리아 메리안처럼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그저 흉내 내고 예쁘게 보이도록 하기보다 본인이 보고 경험한 모든 것을 그대로 그림으로 옮겼던 것은 생물의 형태적 특성뿐 아니라 생태학적 정보까지 담아놓은 훌륭한 연구 결과물이기도 했다.

이 책은 시대와 언어를 떠나 동식물의 도판을 감상할 수 있다는 장점과 그 그림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과 현장을 생생히 목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진화론의 선구자 찰스 다윈은 '생명의 계통수' 그림으로 역사에 영원히 남았고, 새의 실물 크기 그대로 종이에 옮긴 조류학자, 자연을 측정하고 데이터를 활용해 종이 한 장에 담아낸 과학자, 화석을 발견하고, 실험하고 분류해 그림 기록으로 남긴 고생물학자 등 그림과 과학의 만남이 시대별로 어떤 의미였는지, 또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 냈는지 알게 된 시간이었다. 또한 정약전의 물고기, 남계우의 붓꽃과 나비 그림, 신사임당의 정원까지 우리나라의 자연과학자들의 이야기도 만날 수 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그림 그리는 현장 생물학자'이자 국내 1호 자연과학 책방 '동주'를 운영하는 저자는 오랜 시간 자료를 모으고, 고심 끝에 선택한 각 과학자의 그림 한 점 한 점을 보여준다.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흑백 기록, 수채화로 채색된 컬러 그림, 현장 스케치, 동판화가 보여주는 정교한 선, 연필과 종이는 물론 현미경, 카메라, 태블릿PC를 활용한 도구의 변화 등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자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도 이 책의 장점이다. 지금의 자연을 미래 세대가 온전히 기억할 수 있도록 '과학 그림'을 남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정확하게 자연을 묘사하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