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당근 스콜라 창작 그림책 100
마리아호 일러스트라호 지음, 김지은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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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 한 권과 차 한 잔이면 지루할 틈이 없다는 토끼 씨는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하다. 주변에 친구가 없어 가끔 외로웠지만, 식물들을 돌보고, 조용히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왔다. 길고 어두운 겨울이 지나고, 토끼 씨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 봄이 왔다. 토끼 씨는 당근 씨앗을 듬뿍 뿌리고, 날마다 물을 주고, 말을 걸고, 노래도 불러 주었다. 그렇게 사랑을 주어 기른 씨앗 하나가 어느 날 눈에 띄게 잘 자란 것을 발견한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며 당기고 당겼더니 커다란 당근이 나타난다.


안녕하세요, 토끼 씨!

세상에, 당근이!




말하고 걸어 다니는 당근이라니, 토끼 씨는 깜짝 놀라서 후다닥 도망친다. 하지만 집까지 따라온 당근 씨는 집 안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니고, 그렇게 차분하고 점잖은 토끼 씨와 발랄하고 쾌활한 당근 씨의 색다른 동거 생활이 시작된다. 누가 집에 같이 있는 게 익숙하지 않은 토끼 씨와 호기심 넘치는 장난꾸러기 당근 씨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당근 씨, 친구는 어떻게 사귀는 거예요?




당근 씨는 소파에서 방방 뛰며 흙을 다 묻혀 놓고, 토끼 씨가 아끼는 음반을 가지고 놀고, 집안을 어지르며 춤을 추고, 불을 꺼버리고, 어항을 흔들기도 하며 당근 씨를 안절부절 못하게 만든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토끼 씨는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시내로 간다. 누군가 당근 씨를 맡아 준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물론 그런 토끼 씨의 마음을 모르는 당근 씨는 외출하는 것이 마냥 신나기만 한다. 당근 씨앗을 샀던 농원에 가고, 슈퍼마켓의 채소 코너에도 가보고, 도서관에 가서 책도 뒤져 보지만 어디에도 걷고 말하는 당근에 대한 설명은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당근 씨는 세상에 딱 하나뿐인 특별한 당근이었으니 말이다. 




스콜라 창작 그림책 100번째 책이다. 이번 작품은 클라우스 플루게상을 수상한 마리아호 일러스트라호 신작 그림책이다. 조용하고 내향적인 토끼와 활발하고 외향적인 당근의 성향 차이가 유쾌하게 펼쳐지는 이 사랑스러운 이야기는 친구를 사귀는 방법이 궁금한 아이들에게도, 우정을 키우는 방법에 대한 조언이 필요한 어른들에게도 공감할 부분이 많을 것 같다. 게다가 섬세한 그림과 따뜻한 색상이 정말 너무 예쁘다. 토끼와 당근의 너무 다른 성격이 컬러의 채도로 대비되는 것도 귀엽고, 만화식 구성으로 둘의 모험이 펼쳐지는 것도 아주 재미있다. 


어릴 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서 두꺼운 고전책을 일부러 찾아 읽곤 했었는데, 오히려 지금은 그때보다 그림책을 더 많이 보는 것 같다. 그림책이 주는 여유와 위로, 상상력이 내가 잊고 있던 것들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그림책을 좋아하는 당신에게 이 사랑스러운 주홍빛 그림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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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진 세계에서 우리는 - 파국의 시대를 건너는 필사적 SF 읽기
강양구 지음 / 북트리거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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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때요? 이제 힘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던 그들이 다르게 보이죠? <노인의 전쟁>에서 남다른 동료애로 사지를 종횡무진 누비는 노인 병사처럼, 이 순간에도 세상 곳곳에서 노인들은 자신만의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소설은, 그저 먼 미래의 전쟁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곁 누군가의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p.35


극심한 불평등, 성별, 종교적 갈등, 기후 위기로 인한 재앙, 소셜미디어가 부추기는 극단주의 등 어쩌면 우리는 망가진 세계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디스토피아를 전망한 음울한 SF보다 현실이 더 잿빛인 상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좋은 SF는 현실을 지배하고 제한하는 틀에서 벗어나는 상상력을 극한까지 밀어붙여 지금과 다른 삶을 상상하도록 자극한다. 

이 책은 STS(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프랑켄슈타인>, <멋진 신세계>, <1984>를 잇는 SF 열여덟 편의 작품을 발굴해 소개하고 있다. SF의 상상력에 기반을 두고 과학기술과 역사, 정치, 경제, 문화를 넘나들며 펼쳐지는 저자의 유려한 글은 순식간에 지금과 다른 삶을 상상하도록 만들어준다. 


하나의 세계가 끝이 나고, 20년 뒤 종말 후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스테이션 일레븐>이라는 작품을 인상적으로 읽었던 적이 있다. 문명이 몰락한 세상에서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공연하는 유랑 악단, 첨단 우주정거장에서 살며, 지구에서의 삶을 잊으려고 노력하는 물리학자가 등장했던 이 작품은 여타의 디스토피아 소설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작품이었다. 끔찍하고, 무서운 장면들 대신, 평화롭고 아름다운 분위기가 이어진다고 할까. 세상이 종말을 맞이한 뒤에도 단지 생존하는 것 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는 유랑 극단의 존재는 그저 살아남는 것 외에, 인간에게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도록 해주었다. 강양구 작가는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의 <스테이션 일레븐>을 소개하며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 예술 활동에 공을 들여온 인류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혹독한 환경에서 생존하기에도 벅찼던 인류가, 먹고사는 일과 무관해 보이는 예술 활동을 활발하게 했던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세상이 망해도, 알 수 없는 인생의 미스터리는 계속된다는 것, 그래서 이러한 작품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이 뭉클하게 다가온다. 




<크로스토크>를 읽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지금 우리에겐 혼자서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도서관이나 모두가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든 새벽 세 시의 거리처럼 고요한, '자기만의 방'이 필요합니다. 역설적으로 그런 자기만의 방, 나만의 고요한 공간이 확보되어야만 비로소 타인과 깊이 있고 진정한 소통도 나눌 수 있죠.               p.199


'어느 날 아무런 전조도, 이렇다 할 원인도 없이 달이 폭발했다.' 라는 충격적인 이야기로 시작한 <세븐이브스> 또한 흥미롭게 읽었던 적이 있다. 전체 3권으로 된 방대한 분량의 작품이었는데, 과학과 테크놀로지가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어 다소 문체도 다소 딱딱하고, 낯선 용어들과 설정 들이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하드 SF' 장르의 작품이었다. 닐 스티븐슨은 눈부신 상상력과 천재성으로 인류사를 다시 쓰는 장대한 스케일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행성의 충돌로 시작해 지구가 파괴되고, 세계의 해체와 재건의 시간을 지나 인류의 재탄생이라는 우주 대서사극을 만들어냈다. 특히나 이 작품의 매력은 우주물리학, 양자역학, 로켓공학, 로봇공학, 인공지능, 생물학, 유전공학, 무선전신 및 프로그래밍 언어학, 철학, 문화인류학, 심리학, 정치학 등 방대하지만 검증 가능한 이론들로 무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강양구 작가는 SF 미학의 핵심에는 '경이감'이 아니라 정교한 '사고실험'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 우리의 욕망과 과학기술이 데려다 줄 세계를 정교하게 그려 내고, 과연 그것이 최선인지 혹시 다른 가능성은 없는지를 상상하게 하는 그런 사고실험의 결과물이 바로 SF여야 한다고 말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학기술은 삶을 구석구석 좌지우지하는 실체이기 때문에, SF 소설 속 과학기술에 기반을 둔 상상력 또한 지금 여기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과 겹칠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읽었던 <스테이션 일레븐>, <세븐이브스>를 비롯해서 <노인의 전쟁>, <킨> <백년법>, <리틀 브라더>, <영원한 전쟁>, <드라이>, <크로스토크>, <소멸 세계> 등 이 책에 수록된 SF 작품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너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물론 이 책에 실린 SF를 읽지 않아도 내용을 이해하고 주제 의식에 공감하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강양구 작가는 오늘이 비록 세상의 마지막이라 하더라도 '그다음'을 상상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 SF가 지닌 힘이라고 말한다. 재난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SF작품을 읽어야 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서 비롯된다. '망가진 세계'에서 우리가 SF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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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 야외생물학자의 동물 생활 탐구
이원영 지음 / 글항아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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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기후변화는 어느새 기후위기가 되었고, 이제는 기후슬픔이 세계 각지로 번지고 있다. 인간보다 더 취약한 존재인 동물들은 기후변화가 초래한 삶의 위기를 온몸으로 겪어내는 중이다. 그들의 현재는 언제 우리의 미래가 될지 모르며, 이미 얼마간은 현실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더더욱 우리는 야생의 위기, 야생의 슬픔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p.16~17


지구온난화로 인해 발생한 예측 불가능한 이상기후와 해수면 상승,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기후재난은 지구를 살아가는 인간과 동물의 삶을 바꾸고 있다. 특히나 그 중에서도 극지동물들은 하루하루 기후변화의 최전선에서 그 영향을 가장 먼저, 가장 극심하게 겪어내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동물이 살 수 없는 곳에선 인간도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동물을 위하고 돌보는 일이 좀더 근본적이고 전체적인 차원에서 우리의 미래를 돌보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이 책은 바로 거기서 시작되었다.


 '펭귄 박사'로 알려진 저자는 야외생물학자이자 동물행동학자이다. 극지연구소 선임 연구원으로 남극과 북극을 오가며 동물을 관찰하고 기록하고 연구한다. 이 책은 ‘야생’이란 길들여지지 않은 장소를 현장 삼아 그곳에서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생존하고 번식하는 온갖 동물의 분투기를 담고 있다.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친 골목부터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야생까지, 드넓은 지구에서 동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한 연구가 지구의 건강을 되돌리는 데, 동물들에게 살만한 야생을 돌려주는 데 어떠한 역할이라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쓰인 책이다. 동물의 생존과 번식, 진화의 과정과 그들의 본성까지 다정한 ‘관찰자의 눈’으로 바라보고,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과정이 매우 흥미진진했다. 짝짓기, 집단생활, 공생, 인지와 감정, 의사소통, 동물윤리 등 동물 삶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를 아우르며, 생생한 풀컬러 동물 사진과 구체적인 연구 사례까지 실려 있어 정말 볼거리가 많은, 눈이 즐거운 책이었다. 




팬데믹이 잦아들면서 사람들은 다시 거리를 빼곡하게 채우고, 자동차는 도로를 메웠다. 거리로 나왔던 동물들은 또다시 어디로 자취를 감추었을까? 아마도 어딘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도시가 자신들에게 삶터를 내어줄 날을... 생태계는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다양한 동물이 긴 시간에 걸쳐 관계를 만들어온 복잡한 시스템이다. 인간과 비인간 동물의 진정한 공존은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고 존중하는 데서 출발한다.              p.320


동물의 짝짓기에 관련된 장에서는 펭귄의 이혼율이 매우 높다는 결과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일부일처제를 유지하면서 한 짝과 사는 게 자연스럽고 규범적인 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파트너를 바꾸지 않고 일생을 보내는 건 위험한 전략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스스로 고른 짝이 좋은지 나쁜지 함께 지내보기 전엔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펭귄 역시 일부일처제를 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펭귄목 18종 가운데 평생 같은 짝과 함께하는 종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특히 황제펭귄의 이혼율은 85퍼센트, 임금펭귄의 이혼율은 75퍼센트라고 한다. 게다가 일부일처제를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엄격한 의미에서 그것이 잘 지켜지지는 않아서, 약 90퍼센트 이상의 조류종에서 혼외 자식이 태어난다는 보고가 있다고 하니 흥미로웠다. 게다가 이런 걸 다 어떻게 조사한 것인지도 매우 놀라울 따름이다. 동물의 세계에선 이처럼 사회적 일부일처가 유전적 일부일처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인간의 관점이 아닌 동물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번식과 생존의 세계가 인상적이었다. 


인간처럼 말을 하진 않지만, 동물들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한다는 점과 단지 본능이라 생각했던 행동도 복잡한 신호가 오가는 체계를 갖춘 동물들 고유의 언어라는 점도 흥미로웠다. 또한 동물을 연구하는 과학자로서 누구보다 동물들을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이 크다고 자부하는 저자가 현장에서 관찰한 바에 따르면 펭귄을 포함한 야생동물이 자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고백(?)도 재미있었다. 기후위기로 인해 생존의 조건 자체가 흔들리는 지금, 우리는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전환기에 내몰리고 있다. 오죽하면 이러한 기후변화를 경험하면서 우울감을 느끼는 심리적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가 생겨나기도 했으니 말이다. 생태슬픔 혹은 기후슬픔이라는 용어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우울로 이어진다. 인간들뿐만 아니라 지구 각지에서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주요 동물들도 여러 위기를 겪고 있다. 서식지가 파괴되고, 개체군이 고립되어 사라질 위험에 처하고, 침엽수림 면적이 줄고, 주요 먹이원이 되는 동물의 개체수가 감소하면서 더욱 생존을 위협받고 있으니 말이다. 도시를 포함한 지구는 모든 동물이 공유하는 삶의 터전이다. 이 책을 읽으며 지금이야말로 동물들을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함께 공존하는 세상을 위해 노력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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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석산의 서양 철학사 - 더 크고 온전한 지혜를 향한 철학의 모든 길
탁석산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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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세계가 있는 그대로 존재하고, 우리는 원래 알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세계에 대해 질문하게 되지 않을까요. 왜, 세계는 이런 모습이고,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며, 우리는 왜 살고 있는지 등을 묻게 될 겁니다. 즉 우리는 설명을 요구합니다. 우연이나 뜻하지 않게 생긴 지식이 아니라 이성을 이용한 객관적인 설명을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알고 싶어 하고, 세계에 대해 호기심과 놀라움을 지닌 우리가 던지는 질문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네 가지 원인을 들어 설명합니다.               p.73


철학은 어렵다. 쉬운 철학, 누구나 할 수 있는 철학이란 없다. 체계가 있어야 하고, 주장에 대한 정당화가 필요한 이론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가가 아닌 일반 대중들을 대상으로 한 철학 책은 끊임없이 나온다. 왜 그럴까. 철학이야말로 우리의 삶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학문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닐까. 그렇다면 철학을 시작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살펴 보아야 할 것은 2500년이 넘는 철학의 역사이다. 철학사 없이, 철학은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단순히 철학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술하고 있지 않고 저자의 개성과 주관으로 풀어낸 <러셀 서양철학사>와 조금 더 공정하고 균형 잡힌 철학사를 위해 다소 어렵고 딱딱하게 있는 그대로 풀어낸 <틸리 서양철학사>에 비해 이번에 만난 <탁석산의 서양철학사>는 어려운 주제별 분석이 아니라 철학자 위주로 소개하는 방식이라 보다 초보자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버전이었다. 물론 하드커버 양장에 656페이지라는 분량은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지만, 굉장히 가독성이 좋고 정리가 잘 되어 있어 누구라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는 철학사라고 할 수 있다. '난해하고 어려울 것 같은' '추상적이고 실제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철학이 생각보다 쉽고,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더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요청대로 일단 소설 읽듯이 한 번 편하게 읽고, 그 다음에 정독하는 것을 추천한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야기 형식이 필요합니다. 이야기는 연역할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우연으로 우리를 애태우게 하지 않으면, 이야기는 없습니다. 따라서, 끝까지 이야기를 따라가야만 합니다. 그래야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하여, 결론을 예측할 수 없지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은, 어떤 이야기든 받아들일 수 있느냐가, 이해의 특성입니다. 키르케고르 말대로, 이해는 언제나 사건 뒤에만 옵니다. 리쾨르도 이에 동의합니다. 그는 좋은 이야기는 좋은 허구와 같다고 하면서, 근대주의의 실제와 상상의 구분을 허뭅니다.               p.536~537


이 책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대부터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를 거쳐 중세, 르네상스에서 근대, 계몽주의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의 역사를 온전히 만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철학사란 단순히 철학 이론의 연대기적 나열과 설명이 아니라 철학 이론간의 관계, 그것들이 산출된 시대, 그리고 그 이론을 제공한 사상가들과 관련된 연구로 오랜 기간 숙고된 인간의 사유가 어떻게 발전했는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수학 문제를 풀지 않고, 답을 본다면, 그 문제를 알고 풀었다고 할 수 없는 바와 같이, 철학은 스스로 사고하지 않으면, 무엇도 얻을 수 없다. 철학 지식이란 사유의 결과인데, 그 결과는 이미 책에 나와 있다. 그 지식을 외운다고, 철학 사유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니 철학사를 읽으면서, 자신의 사유로 철학자들의 작업을 좇아가면, 아주 훌륭하고 아름다운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서양에서 철학은 신비주의, 연금술, 마술 등과 오랜 세월 함께해 왔다. 그러므로 서양 철학의 역사를 온전히 살피려면, 그 모든 영역을 두루 다루어야 한다. 어쩌면 그래서 철학사를 다루는 책이 다양한 판본으로 계속 쓰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철학 교수는, “철학사는 특색과 장점이 저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그 종류도 또한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국내에도 여러 철학사 책들이 출간되어 있는데, 각각의 장단점이 있을 테니 다양하게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서양철학사는 그 내용도 방대하거니와 분량도 엄청나서 한번에 요약할 수도, 읽고도 제대로 다 소화했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정말 교과서처럼 자주 들여다보고, 여러 번 재독해야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이 책은 〈철학 입문서〉이자 〈철학사 맥락 읽기〉 안내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차근차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내고 있어 더 좋았다. 저자의 해석을 자제하고 철학자들의 주장과 비판을 맞세움으로써, 독자 스스로 사유의 여정에 나서게 한다는 점도 더욱 적극적인 독서의 시간을 만들어 준다. 절대 만만하지 않은 분량이지만,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철학사를 찾고 있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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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석의 한국사 한 권 - 한 줄 코드로 재밌게 읽고 평생 기억하는
서경석 지음, 염명훈 감수 / 창비교육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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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대개 시험을 보기 위해 한국사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왕-업적'으로만 짝을 지어 외우고 넘어가는 경우가 참 많아요. 그런데 사실 대부분의 성과 뒤에는 기획 단계부터 중간 과정, 최종 결과에 이르기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한 신하와 수많은 실무진들이 있었을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사람들은 왕만을 기억하는 경우가 많아, 이런 현실이 안타까울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꼭 중요한 역할을 한 신하만이라도 함께 알아 가시라고 추천하고 싶습니다.              p.42~43


방송인 서경석이 한국사 이야기꾼이 되어 돌아왔다. 한국어교원 2급 자격 취득, 공인중개사 합격, 한국사능력검정시험 1급 만점 등 자타공인 공부의 신이라 불리는 그는 그는 십여 년 전부터 사람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재밌게 소개해 주고 싶다는 꿈을 키워왔다. 그 결실로 만들어진 이 책은 재미있게 읽고 평생 기억할 수 있는 한국사 이야기를 보여준다. 특유의 입담이 글 속에서도 고스란히 발휘되어 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길고 방대한 한국사를 술술 읽을 수 있도록 풀어내고 있다. 유쾌한 만화, 다양한 사진과 연표 자료도 곳곳에 배치되어 이해를 도와준다. 


무엇보다 수많은 한국사 책들 중에서 이 책의 특별한 점은 저자의 노하우를 담은 ‘한 줄 코드’를 통해 각각의 시대별 주요 사건과 인물을 기억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동예의 무천, 책화, 단궁, 과하마, 반어피의 앞 글자를 사용해 '동무랑 책 들고 단과반에 간다'로, 흑창, 역분전, 사성제도, 사심관제도, 기인제도, 결혼정책, 훈요십조라는 왕건의 업적을 '왕건의 흑역사는 사기 결훈이다'로, 순서대로 만들어진 반일 단체들 보안회, 헌정연구회, 대한자강회, 신민회를 '보정해! 자신있게!'로 외우는 식이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요약하는 이 '한 줄 코드'는 한국사를 한 번 읽고 평생 기억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한국사를 다루는 책을 꽤 많이 읽어 봤지만, 이 책은 그 중에서도 가장 쉽게 머리에 들어오고 정리가 잘 되어 있는 느낌이다. 공부 잘하는 학생의 잘 정리된 노트를 빌려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래서 한국사에 관심있는 성인들뿐만 아니라 청소년들에게도 권해주고 싶은 책이었다. 




'숙종' 하면 여러분은 어떤 이미지가 제일 먼저 떠오르시나요? 많은 분들이 장희빈의 남자로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드라마의 단골 소재로 워낙 자주 나오니까요. 숙종은 왕비가 셋이나 있었지만 왕비를 통한 후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후궁들 사이에서 나온 아들이 후대 왕들이 되지요... 적장자가 없는 궁 안에서 왕실 여인들을 둘러싼 권력 다툼이라니, 이 얼마나 좋은 이야깃거리입니까?! 그렇다 보니 미디어에서 숙종의 이미지는 이 여자 저 여자에게 '휘둘리며' 줏대 없이 살아가는 갈대 군주의 모습인 경우가 많았습니다만, 실상 숙종은 이름에 엄숙할 숙자를 쓸 만큼 상당히 카리스마있게 권위를 '휘두른' 왕이었습니다.                p.173~174


학창시절에는 역사와 한국사를 참 재미없게 배웠었다. 연도별로 일어난 사건을 외우고, 그 사건을 일으킨 사람을 외우는 식으로 단순한 사실의 나열을 그저 암기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가장 지루했던 과목이 바로 역사였고, 당연히 성인이 되어서도 별로 기억에 남는 게 없었다. 그런데 그 재미없었던 역사가 조금씩 재미있어 지려고 하는 중이다. 역사가 그저 복잡하고 어려운 개념의 나열이 아니라 우리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 그 자체라는 것을 드라마처럼, 소설처럼 만나게 되면서부터다.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였던 역사를 보다 친근하고 재미있는 서사로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도 이런 책이 의미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저자는 한 방송에서 학창 시절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을, “왜적이 쳐들어왔는데, 이러고 있(일오구이)을 수 없다.”라고 기억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사실 내용을 모두 외우기에는 한국사가 복잡하고 까다로운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특별한 암기법이 있다면 더 오래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현대사의 주요 사건 연도를 쉽게 기억하는 방법을 이런 식으로 정리해두기도 했다. 1차 개헌 연도인 1952년은 "오이? 국회 의원들이 날 안 좋아해?"라고, 2차 개헌 연도인 1954년은 "글쎄, 5는 세우고 4는 버리는 거라니까!",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난 1961년은 "그냥 읽어도 61.5.16, 거꾸로 읽어도 61.5.16", 그리고 6차 개헌 연도인 1969년은 "삼육구, 삼육구! 3선 개헌은! 6차 개헌이고! 1969년!"이라고 외울 수 있다. 저자가 갖가지 재치와 센스를 발휘해 만든 이러한 내용들은 이 책에 꽤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으니 기억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중간 중간 시대별 주요 사건들을 정리한 핵심 요약 정리도 역시나 잘 외워지도록, 한 방에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도록 도식화되어 있어 좋았다. 현직 역사 교사의 감수를 받아 정확성과 전문성도 놓치지 않았으니, 한국사를 제대로 마스터하고 싶었던 이들에게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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