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과학자 - 우리 곁의 자연을 정확하고 아름답게 기록한 과학의 순간들
이동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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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머릿속에 빠르게 흘러가는 생각을 남기기 위해 필기구는 펜 하나만을 단촐히 사용한다. 현장에서 관찰하며 동시에 여러 종류의 펜을 사용할 여유는 없다. 화가들이 풍경화나 정밀화를 한자리에 앉아 그리는 것과는 다르다. 생물은 빠르게 움직이고 바람과 물도 흘러간다. 순간과 변화를 기록한다. 전체보다는 부분을 스케치하기도 하며 생물의 특정 부분만 그리기도 한다. 때로는 근육의 모습을, 때로는 골격 구조를, 때로는 동공의 움직임을 말이다.                p.53


자연을 관찰하고, 분류하고, 이름 붙이는 과학자들은 왜 그림을 그렸을까. 글은 많은 정보를 저장할 수 있지만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에게는 전달할 수 없는 반면, 그림은 전 세계 누구에게든 보여주기만 해도 쉽게 이해시킬 수 있는 기록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림은 과학을 도왔으며, 과학은 그림을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가게 했다. 과학자는 그림을 그리고, 그림은 과학자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이 책은 그렇게 '과학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 




곤충의 변태를 최초로 증명했단 마리아 메리안부터 수많은 고대 생명체의 화석을 발굴해낸 메리 애닝, 남아메리카 탐험의 원조인 알렉산더 훔볼트, 장 앙리 파브르, 찰스 다윈, 신사임당, 정약전 등 과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림은 한눈에 많은 정보를 보여주기에 최적화된 방법이고, 그만큼 과학 분야에서 정보를 담고 전달하는데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누구나 세심히 살피면 자연에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관찰한 것들을 완벽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림 그리는 시간이 추가되어야 한다. 수정하고, 관찰하는 과정의 반복을 통해 또 다른 눈이 열리고, 제대로 이해한 자연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연학자들은 자신이 직접 관찰하고 경험한 내용을 심도 있고 더 체계적으로 전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어설프게 전하거나 왜곡된 생각을 가지면 많은 이에게 부정당하기 좋다.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고, 그 과정에서 무한한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자연에 대한 이해는 인간에게 필요하다. 다른 이유는 없다. 우리가 자연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수천만 년 전부터 인간은 자연의 모든 상황을 견뎌냈고, 생존해왔지만 앞으로 닥쳐올 미래가 더 걱정이다. 그에 대한 대비는 물론 사람답게 살기 위해 자연을 탐구한다.              p.282~283


곤충과 식물을 좋아하는 어린 소녀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꽃을 놓고 그린 작품이 유행해 정물화가 크게 발전하던 시기였다. 농가에서는 새로이 개발한 품종을 소개하기 위해 화가에게 그림을 의뢰하곤 했고, 가장 인기 있는 식물은 단연코 튤립이었다. 어린 소녀는 튤립을 그리는 정물화가인 의붓아버지를 도와 테이블에 꽃을 배치하고 일을 하며 그림을 배워나갔다. 그녀는 그림 속의 꽃이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고 아름다워 보이는지 알고 있었다. 바로 꽃과 함께 작은 곤충이 있으면 더 신선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말이다. 농장주의 입장에서 곤충은 품종개량에 방해가 되는 절대적인 악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러한 곤충들을 그림에 그려 넣은 것이 바로 어린 소녀, 메리안이었다. 


그녀는 애벌레의 마디에 난 털, 무늬, 기문, 그리고 먹은 잎의 부위까지 면밀히 관찰하며 기록했다. 관찰을 바탕으로 꽃과 생물의 자연스러운 연결을 그려낸 것은 이전에는 없었던 파격적인 시도였다. 마리아 메리안처럼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그저 흉내 내고 예쁘게 보이도록 하기보다 본인이 보고 경험한 모든 것을 그대로 그림으로 옮겼던 것은 생물의 형태적 특성뿐 아니라 생태학적 정보까지 담아놓은 훌륭한 연구 결과물이기도 했다. 




이 책은 시대와 언어를 떠나 동식물의 도판을 감상할 수 있다는 장점과 그 그림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과 현장을 생생히 목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진화론의 선구자 찰스 다윈은 '생명의 계통수' 그림으로 역사에 영원히 남았고, 새의 실물 크기 그대로 종이에 옮긴 조류학자, 자연을 측정하고 데이터를 활용해 종이 한 장에 담아낸 과학자, 화석을 발견하고, 실험하고 분류해 그림 기록으로 남긴 고생물학자 등 그림과 과학의 만남이 시대별로 어떤 의미였는지, 또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 냈는지 알게 된 시간이었다. 또한 정약전의 물고기, 남계우의 붓꽃과 나비 그림, 신사임당의 정원까지 우리나라의 자연과학자들의 이야기도 만날 수 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그림 그리는 현장 생물학자'이자 국내 1호 자연과학 책방 '동주'를 운영하는 저자는 오랜 시간 자료를 모으고, 고심 끝에 선택한 각 과학자의 그림 한 점 한 점을 보여준다.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흑백 기록, 수채화로 채색된 컬러 그림, 현장 스케치, 동판화가 보여주는 정교한 선, 연필과 종이는 물론 현미경, 카메라, 태블릿PC를 활용한 도구의 변화 등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자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도 이 책의 장점이다. 지금의 자연을 미래 세대가 온전히 기억할 수 있도록 '과학 그림'을 남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정확하게 자연을 묘사하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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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꼭대기를 여행하다 - 대만에서 미국까지, 수관층 생태학자의 일곱 나무 이야기
란융샹 지음, 강영희 옮김 / 사계절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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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5분쯤 지나 마침내 나무에 매달렸다. 지상에서 겨우 5~6미터 높이에 불과했지만 갑자기 시야가 확연하게 달라졌다. 땅 위에 서서 보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평면이던 세상이 돌연 입체가 되어 솟아오른 듯했다. 마치 전혀 다른 공간에 들어와 있는 듯 말로는 도저히 표현하기 어려운 감각이 휘몰아쳤다. 그날 밤 내내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내가 계속 올라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완전히 다른 세상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이내 알아차렸다.                p.44


가지와 잎이 모여 형성하는 나무의 꼭대기층을 수관층이라고 한다. 나무는 100미터 이상 자라기도 하고, 수천 년의 세월을 살아내기도 한다. 그러한 나무에 직접 오르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등반 기술과 인력, 예산이 필요하고, 수관층의 고유한 생태 환경을 이해할 수 있는 과학 지식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 수관층을 연구하는 과학자는 전 세계적으로 매우 드물다. 이 책의 저자 란융샹은 지난 20년간 대만과 미국을 오가며 오래된 숲의 거목들에 올라 각 나무의 고유한 생태와 숲 건강에 대해 연구해온 수관층 생태학자이다. 


저자는 20년간의 연구 여정을 기록한 이 책으로 2025 대만 문학상 금전장 본상과 신인상을 동시에 수상하기도 했는데, 그만큼 경이롭고 역동적인 수관층 생태학의 세계를 근사하게 펼쳐 보이는 책이었다. 





지상 5미터 높이만 해도 건물 2층 높이에 달하는데, 10미터부터 60미터가 넘는 나무에도 로프에 매달린 채 오르내리는 사진들을 보며 그 생생한 현장감에 감탄했다. 이 책은 치란산의 대만편백나무 숲에서 시작해 타타자의 대만 가문비나무 숲을 거쳐 미국 오리건주의 울창항 개솔송나무 숲과 캘리포니아주의 장엄한 자이언트세쿼이아에 이르기까지 경이로운 나무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나무 위에 머무는 매 순간 경탄과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지만, 사실 현장 작업은 그리 낭만적이지도 느긋하지도 않다는 저자는 과학자의 호기심과 모험가의 용기로 오늘도 거침없이 나무를 오르고 있다. 


물론 탐구의 과정이 항상 예상한 답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고,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조사구 안을 걷는 일은 일반적인 숲길을 산책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다. 뒤엉킨 식물들과 발을 붙잡는 진흙탕, 가로막고 선 작은 개울은 물론이고 제각각으로 쓰러진 고사목들이 끊임없이 길을 막아서는 원시림을 걷는 일은 결코 녹록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탐구와 모험은 어딘가 낭만적인 부분이 있다. 무엇보다 애정 가득한 시선으로, 진심을 다해 도달한 삶의 경험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풍부한 사진들 덕분에 저자의 연구와 탐험을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시간을 통과하고 나서야 나는 훈련된 두 눈으로 숲의 풍부한 세부와 그 사이의 촘촘한 연결을 선연히 읽어낼 수 있게 되었다. 꽃 한송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세계다. 꽃의 안과 밖은 모두 세계의 일부인 동시에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가을날의 따스한 햇살 속에서 이 태곳적 숲은 기꺼이 자신을 열어 나의 탐험을 허락해주었다. 숲은 과묵한 노인 같기도 하고, 두껍고 묵직한 한 권의 책 같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이토록 기나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p.253~254


새벽녘, 하늘이 희붐하게 밝아올 무렵, 높이 60미터가 넘는 상공에 앉아 있는 기분이란 어떤 걸까. 양치식물과 이끼로 뒤덮인 굵은 가지 아랫부분에 걸터앉아 우뚝 솟은 시트카가문비나무 너머 저 멀리 태평양을 바라보는 느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쉽게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전날 내리 비로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는 이끼, 서서히 주변 세상을 비추기 시작한 황금빛 따스함,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안개, 나무 위에 한 층 한 층 그럴듯하게 자리 잡은 작디작은 숲들의 풍경에 대한 묘사를 읽고 있자니 저자에게 나무란 '온몸으로 교감한 동반자이자 삶의 고비마다 자신을 껴안아준 생명의 그물망'이라는 설명이 고스란히 와 닿았다. 인간의 언어로는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하고도 다층적인 생태계가 바로 숲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말이다. 




수관층 연구의 선구자인 마거릿 로먼은 미지의 영역이라는 뜻을 담아 수관층을 ‘세계의 여덟 번째 대륙’이라 부르기도 했다는데, 그만큼 미지의 세계이자 수많은 생태적 비밀을 갖고 있는 신비스러운 곳인 것 같다. 저자는 수십 미터 높이의 나무에 오르는 일에 매혹되어 수관층 연구를 시작했다고 하는데, 대만에서 수목 등반과 산림학의 기초를 익힌 뒤, 전 세계 산림학 연구의 중심인 미국 오리건주립대학교로 옮겨 가 오리건주와 캘리포니아주, 알래스카의 거목에 두루 오르며 수관층 생태학자로 성장해온 과정이 이 책에 모두 담겨 있어 매우 흥미진진했다. 대만에서 미국까지, 대만편백나무에서 시작해 개솔송나무, 귀족전나무, 자이언트세쿼이아 등을 거쳐 다시 대만삼나무까지 일곱 나무의 이야기를 토대로 책이 구성되어 있다. 나무에게서 친밀함과 위안을 느낀다는 저자처럼, 이 책을 읽으며 독자들도 아마 비슷한 느낌을 받지 않을까 싶다. 


서평단으로 미니 테라리움을 함께 받았다. 나만의 작은 숲이 생긴 듯한 느낌이라 책을 읽는 내내 저자와 함께 수목 등반이라는 모험을 즐기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되어 주었다. 종이 위에 박제된 파리한 지식이 아니라 직접 몸으로 맞닥뜨리며 경험하게 되는 생생하고 구체적인 나무의 세계가 궁금하다면, 이 놀라운 책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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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영혼의 왈츠 1~2 세트 - 전2권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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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여러 번의 생을 산다고 한번 상상해 봐.」

「악몽일 거야.」

니콜라가 단박에 말을 자른다.

「태어나서 살다가 죽었는데, 이걸 다시 시작하라고? 삶이 끝나지 않는다는 거잖아. 정말 끔찍하다.」

그녀는 카푸어 교수가 알려 준 무드라 명상을 떠올리며 손가락을 움직인다. 사...... 타...... 나...... 마...... 태어나서, 살다가, 죽어, 다시 태어난다.                   1권, p.299


외제니는 갑작스럽게 쓰러진 어머니로부터 오는 13일 금요일에 어둠의 세력이 세상을 지배해 종말이 올 거라는 믿기 힘든 이야기를 듣게 된다. 운명의 시간이 오기 전에 해결할 방법은 과거로부터 열쇠를 찾아 종말의 신호탄이 될 불부터 꺼야 한다는 거였다. 엄마는 혼수 상태에 빠졌고, 아빠는 외제니에게 '퇴행 최면'이라는 심리 기법에 대해 알려 준다. 일종의 유도 명상인 퇴행 최면 기술을 통해 전생을 방문할 수 있으며, 과거의 여러 삶들을 경험할 수 있다는 거다. 그렇게 외제니는 선사시대의 전생을 경험하게 되고, 다른 여성의 눈과 귀를 통해 보고 들으며 그 감각을 통해 당시의 세계를 인식한다. 과연 그녀는 이 방대한 시간 여행을 통해 현재에 다가올 파국을 막을 수 있을까. 


현재와 전생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이 스펙타클한 이야기는 인류가 불을 발견한 선사 시대의 동굴부터 시작해 사피엔스가 다른 인류종을 학살하는 과정을 거쳐 인류 문명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통과해 나간다. 아포칼립스가 일어나기까지 남은 시간은 단 5일, 외제니는 세상의 종말을 막고 현재를 구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그녀가 전생에서 벌어지는 최초의 인종 학살 범죄를 경험하는 순간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사피엔스가 거짓과 배신과 폭력으로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게 된 순간을 목격하며 스스로가 죽임을 당했으니 말이다. 전생 체험은 단순히 보는 것뿐만 아니라 직접 겪는 것이기에 그 충격은 더욱 컸다. 맛과 냄새와 소리, 느낌까지 고스란히 겪을 수 있는 그곳에서 바로 전까지 함께 사랑을 나누었던 남편으로부터 죽임을 당했으니 말이다. 이 작품 속에 전생 체험이 여러번 반복되지만, 이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해요. 내가 몇 가지 조언을 해줄 테니 꼭 기억했다 실천하도록 해요. 당신의 생각을 조심해요, 그것이 당신의 말이 돼요. 당신의 말을 조심해요, 그것이 당신의 행동이 돼요. 당신의 행동을 조심해요, 그것이 당신의 습관이 돼요. 당신의 습관을 조심해요, 그것이 당신의 성격이 돼요. 당신의 성격을 조심해요, 그것이 당신 영혼의…… 운명이 돼요.」 

「반드시 기억할게요.」                         2권, p.97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죽음 이후의 세계, 전생, 기억, 자유 의지라는 자신만의 핵심 주제를 한층 더 거대한 스케일로 펼쳐 보인다. 분명 판타지임에도 불구하고 문명의 기원과 인류에 대한 통찰이 그 어떤 역사, 인문학서 못지 않게 탁월한 작품이었다. <기억>과 <꿀벌의 예언>을 재미있게 읽었다면, 이 작품이 더 흥미로울 것이다. 두 작품에서 활약한 르네가 이번 <영혼의 왈츠>에서는 딸인 외제니에게 주인공 자리를 넘겨주는데, 인물들이 작품 속에서 성장하고 세대가 바뀌는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도 있다. 


플라톤의 <향연>에 언급된 '영혼의 형제'라는 개념도 작품을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외제니의 엄마는 종말이 다가온다는 경고와 함께 영혼의 형제를 만나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흔해 빠진 사랑, 외로움을 덜어 줄 사랑, 위로받기 위한 사랑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을 찾으라고, 너와 운명적으로 연결된 상대, 네 부족함을 보완해 줄 상대를 만나야만 비로소 온전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본래 인간은 팔이 네 개, 다리가 네 개, 머리는 두 개, 영혼은 하나를 가진 존재로, 한 몸에 남자-여자, 남자-남자, 여자-여자, 이렇게 세 가지 조합이 가능했다. 하지만 신들의 분노를 사게 되어 결국 하나에서 둘로 나누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다시 온전한 존재로 돌아가기 위해 평생을 나머지 반쪽인 영혼의 형제를 찾는 데 바쳐야 했다. '영혼의 형제'라는 개념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 것이다. 그래서 극중 외제니가 자신의 '영혼의 형제'를 찾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부분도 매우 흥미로운 서사로 전개된다. 세상을 구하고, 자신을 완전한 존재로 만들어 줄 사랑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들은 늘 재미있게 읽었지만, 이번 신작은 특히나 흥미진진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그의 압도적 상상력이 최신작에서 더욱 업그레이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놀라운 작품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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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
앨런 레비 지음, 노지양 옮김 / 오팬하우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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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슬픔은 여러 모습일 수 있지만, 슬픔이 한심한 경우는 드뭅니다. 좋은 슬픔은 언제나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말해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미넷은 그 말을 가져와 천천히 곱씹어 보았다. 처음 만난 두 사람이 이렇게 빠르게 마음을 여는 것이 가능한 일이었나? 순수하게 그림 하나를 주고받으면서, 기대하지 못한 선물 하나가 오가면서, 세대와 배경과 출신지가 다른 두 사람이 마음을 확 열어버릴 수 있나?                  p.63


공인회계사로 일하는 미넷은 이상한 편지를 하나 받는다. 어떤 할아버지가 카페에 걸린 그녀의 연필 초상화를 샀는데, 그 그림을 선물로 주고 싶다며 다음 주 목요일에 분수대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온 것이다. 지방검찰청에서 검사로 일하는 남편 데릭과 함게 이상한 편지가 누군가 장난을 치는 건지, 위험한 일에 휘말리는 건지 의심해보지만 두 사람은 먼저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단정한 필체, 최고급 편지지, 경계심을 풀게 만드는 말투, 이름만 있는 서명, 반송 주소 없음. 묘하지만 어딘가 신뢰가 가는 느낌... 편지를 읽고 두 사람이 느낀 것들이다. 그들읜 경찰서에 가서 그 편지에 대한 조언을 구할 수도 있었지만, 직접 만나러 가보기로 한다. 과연 그들에게 편지를 보낸 수수께끼의 남자는 누구일까. 


노신사 '테오'는 한적한 소도시 '골든'에 도착한다. 이 도시에 그가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럼에도 편안하고 포근해 머물기 좋은 곳이라는 것이 그의 첫 인상이었다. 그는 에스프레소가 근사한 한 카페에서 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초상화들을 보게 된다. 흑백 연필화로 그려진 총 92점의 초상화들은 모두 같은 화가의 그림이었다. 그림마다 특별함이 있었다. 화가는 어떻게 이 모든 얼굴을 이렇게나 설득력 있게 그려낸 걸까, 테오는 생각한다. 게다가 이렇게 많은 초상화가 아직도 판매되지 않고 남아 있다는 사실도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이렇게 뛰어난 초상화가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으로 책정되어 있는데도 말이다. 그는 이 92개의 액자가 모두 창문이라면 어떨까 생각하며 그 초상화들을 구매해서 그림 속 사람들에게 선물하기로 한다. 그렇게 한 명씩 직접 만나 눈을 맞추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초상화가 주인을 찾아가기 시작하는데, 이  대가 없는 선의와 무용해 보이는 친절로 인해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까. 




테오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종이 한 장에 불과한 것. 편지든, 사진이든, 티켓이든, 스케치든, 그림이든 왜 그 종이 한 장을 네 조각의 나무틀 안에 끼워 유리판 아래에 넣는 순간,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버리는 걸까? 덧없는 순간을 영구적인 경계선으로 두른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특정한 기억을 고정시키려고 수고스럽게 노력하고 우리 삶의 ‘아주 사소한 순간들’을 붙잡아 두고 보존하기 위해 적지 않는 에너지를 쓰는 행동이 우리 인간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                     p.189


이 작품은 한 70대 음악가의 놀라운 데뷔작으로 자비출판으로 시작해 오직 입소문만으로 밀리언셀러가 되었다. “바로 그 하얀 책(The White Book)”으로 불리며 2025년 전 세계를 뒤흔들었는데, 킨들 조회수 1,300만, 굿리즈 독자 평점 34만 건 돌파하며 엄청난 화제였던 작품이다. 드라마틱한 서사도, 도파민 넘치는 전개도 없는 이 작품이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바라보는 선한 마음과 다정함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작은 기적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대가 없는 친절이나 타인을 향한 온정 어린 시선을 기대하기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다. 그래서 더 이 작품이 주는 울림이 크게 다가오는 거라고 생각한다. 갈수록 사람의 가치가 추락하고 있는 세상 속에서 다정함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도 하고 말이다. 이 작품을 읽으며 다정함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건 나와 다른 타인에게서 나를 발견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발견하는 일이며, 그의 처지가 되어 사유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서로의 잘됨을 위해 움직이는 것 아닐까. 사소하고 작은 그 선택이 어디에서 소멸되지 않고 누군가를 통해 연결되고 확장되어 반드시 다시 내 앞에 나타난다는 것. 그러한 순환이 우리가 말하는 선한 영향력이라는 것 아닐까. 이 작품을 읽으며 누군가는 테오와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보게 되었다. 이 다정한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고요한 기적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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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마거릿 애트우드 외 지음, 남명성 옮김 / 비채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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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얘기였네요." 대로우가 말했다.

기억상실증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이건 연결에 관한 이야기예요. 우린 서로 분리된 존재라고  착각하며 살지만 밑바닥에서 우린 형이상학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나한테는 너무 심오하네." 비니거가 말했다. "난 대부분 사람과 연결되고 싶지 않거든요. 우리 아이들인 샬럿과 로비면 돼요. 그것도 가끔요."                 p.155~156


이야기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6층짜리 허름하기 그지없는 다세대 주택 건물에서 시작된다. 건물 관리인인 '나'는 몇 주 전 코로나로 도시가 폐쇄될 무렵 일자리를 구해,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치매 요양 시설에 들어간 아버지와는 통화 연결이 되지 않은 지 오래였고, 나는 쓰러져가는 건물 지하실 아파트에서 온갖 이상한 잡동사니와 전혀 알지 못하는 여러 세입자와 함께 갇혀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임자가 남긴 옥상 열쇠와 세입자 정보가 적힌 노트 한 권을 발견하게 된다. 무작위로 흩어진 타인들의 삶의 파편들을 보며 나는 그것에 매료된다. 옥상 문을 연 뒤로 세입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하고, 나는 그들을 관찰하며 사람들 몰래 그들의 이야기를 수집한다. 뉴욕 전체가 봉쇄되고, 매일 수백 명이 사망했던 지옥의 한복판에서 그렇게 잠시나마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된다. 장르도, 주제도 제한이 없는 이야기의 항연은 그들을 어디로 데려가게 될까. 


각각 세입자들의 별명과 특징을 기록하는 방식도 흥미롭다. 6B호, 이 여자는 탱고, 타인의 삶 속에서 춤춘다.. 5E호, 기억상실증, 망각에 대한 보편적 욕망을 지니고 있다.. 3E호, 검은 수염, 피가 흐르는 전쟁의 보랏빛 유언장을 열기 위해 온 자, 4E호, 여왕, 그녀를 왕좌에서 끌어내릴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녀는 여전히 자기 슬픔이 여왕이다.. 4A호, 랄라, 검은 무한함을 닮은 눈을 가졌다.. 2E호, 프로스페로, NYU 교수로 '비밀스러운 학문에 몰두' 하고 있다.. 3A호, 월리, 눈물이 음표가 되는 사람... 4B호, 시인, 영혼 위에 그라피티를 쓰는 사람... 등 세입자들에 대한 묘사들이 하나하나 모두 시적이다. 이들의 성격과 외양에 대한 묘사가 이후에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지켜보는 것도 굉장히 재미있었다. 각자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매우 다양하다는 점도 이 두툼한 책을 지루할 틈없게 만들어 준다. 극중 건물 관리인인 '나'가 세입자들과는 거의 모르는 사이에서 시작해 그들에게 딱히 관심을 두거나 할 의도가 없었음에도, 이야기를 들으며 일부 세입자들을 거의 좋아하게 되었다는 점도 이야기가 가진 힘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순간 창백한 연녹색 여인이 나나 다른 사람들처럼 분명히 그곳에 있었는데, 바로 다음 순간 그녀의 의자는 비어 있었다. 옥상 구석은 모두 어둡고 안개가 낀 것 같았으니, 어쩌면 그림자 속에 섞여 사라진 것인지도 몰랐다. 우리를 서로를 바라보았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 여자가 진짜 있었나? 누군가 옛날 핼러윈 복장을 차려입고 우리 모임에 끼어들었던 걸까? 우리가 술에 잔뜩 취한 점을 이용해 그냥 웃자고 장난친 건가?

아니면 혹시...... 절대 그럴 리가 없다.             p.382


이 작품은 마거릿 애트우드의 설계로 실현된 대형 문학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테스 게리첸, 존 그리샴, 에리카 종, 설레스트 잉 등 서른 여성 명의 소설과 논픽션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함께 이야기를 완성했기 때문이다. 첫째 날부터 시작해 열넷째 날까지 이어지는 이야기에는 각각 누가 썼는지 표시되어 있지 않아 더 흥미로웠다. 모든 이야기가 끝난 뒤 책 뒤쪽에 수록된 목록을 찾아보며 내가 예상한 작가가 맞는지 확인하는 재미도 있다. 서평단으로 이 책을 읽으며 각자 파트를 정해주고, 작가가 누구인지 상상해보는 미션이 있었는데, 나에게 주어진 파트는 '넷째 날'이었다. 아기를 입양하려 애쓰는 한 커플의 이야기, 크리스마스를 둘러싼 가족의 이야기, 환자가 죽는 걸 미리 알아차리는 간호사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었다. 엠마 도노휴와 존 그리샴은 맞히지 못했지만, 테스 게리첸의 작품은 예상 적중이었는데, 아무래도 전직 의사였던 작가인데다 메디컬 서스펜스 장르를 많이 써왔기에 익숙한 느낌이 있었던 것 같다. 다들 이 작품을 읽게 된다면 작가를 모르는 채로 쭉 읽어 나가면서 누가 이 글을 썼을지 상상하며 읽으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 


피렌체 사람들 절반이 흑사병으로 죽어가는 사이 도시를 벗어나 이야기를 주고받는 내용의 <데카메론>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우리 모두 실제 팬데믹의 시간을 겪었기에 더 공감하며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데카메론 프로젝트>라는 작품에도 참여한 적이 있다. 《뉴욕타임스》의 편집자들은 700여 년 전 《데카메론》이 공포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고 끔찍한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처럼, 당대 최고의 작가들이 집필한 단편소설들을 한데 모으는 기획했고, 그렇게 29편의 단편들을 모아 단행본으로 출간했었다. 이 작품은 팬데믹이 한참 진행중이던 시기에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로부터 몇 년 후 팬데믹이 모두 종료되고 나서 읽은 <14일>이라는 작품은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아마 그 시기의 기억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이제는 그 지옥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에서 조금 더 거리를 두고 서사를 즐길 수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자, 서른 여섯 명의 목소리로 완성된 거대한 문학적 사건이자 단 한 권의 서사, 유례없이 독특한 경험을 하게 해 주는 이 놀라운 작품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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