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베첸토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최정윤 옮김 / 비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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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청중은 숨 죽이고 연주를 감상했다. 모두 숨이 멎은 듯 했다. 시선은 피아노에 고정한 채 영락없는 바보처럼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백 개의 손으로 연주한 듯하고 당장이라도 피아노가 터져버릴 것 같았던 그 폭발적인 코드 진행이 끝난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말을 잇지 못했고 완전히 넋이 나가버렸다. 그 믿기지 않는 정적 속에 노베첸토는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를 들었고 건반 너머로 쑥 내밀어 피아노 현에 가져다 댔다.             p.57~58


연극으로 상연되며 대성공을 거둔 이 작품은 모놀로그 희곡으로 쓰였다. 이후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피아니스트의 전설>로 영화화되어 세계적으로 사랑받았다. 엔리오 모리코네의 음악으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했을 만큼 유명한 곡들도 많은 작품이다. 비채의 모던 앤 클래식 시리즈로는 2018년에 나왔는데, 지난 달에 영화가 재개봉을 하면서 지금은 영화 포스터 버전으로 책 커버가 바뀌었다. 


이 책은 소설처럼 읽히지만, 실제 연극을 위한 텍스트로 구성되어 있어 일반적인 소설의 구성과 약간 다르다. 저자는 책의 형태로 이 작품을 볼 때 '실제 공연과 큰소리로 읽어야 하는 소설의 중간쯤 되는 것 같다'고 서두에 밝히고 있다. 배에서 태어나 일생을 바다를 떠돌며 살았던 천재 피아니스트 '노베첸토'의 일생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국내에서도 1인극으로, 음악극으로 상연된 적이 있다. ‘모놀로그’답게 호흡은 짧고 전개는 빠르며 대화는 절제되었지만 독백을 통해 인물의 내면을 진정성 있게 보여준다. 무대에 선 배우는 선상의 쇼를 이끄는 진행자가 되어 화려한 입담을 펼치고, 이야기의 화자이자 트럼펫 연주자 ‘팀’이 되어 노베첸토의 삶을 서술하고, 노베첸토 자신으로 분하기도 한다. 무대극으로 봐도 정말 매력적인 작품일 것 같아 궁금해졌다. 언젠가 공연을 하게 되면 보러 가고 싶다. 




하지만 끝은 없었지. 당신이 보지 못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끝나는 곳이야. 세상의 끝/

피아노를 생각해봐. 건반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어. 우리 모두 그게 88개라는 걸 알지. 건반은 무한한 게 아니야. 당신, 당신은 무한하고 그 건반들 속에서 무한한 것은 당신이 만들어내는 음악이야. 건반은 88개이고 당신은 무한해. 난 이런 게 좋아. 사람은 무한하게 살 수 있지. 만약 자네가/              p.76


호화 유람선에서 버려진 아기가 자라면서 피아노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고,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주는 피아니스트가 된다. 어린 시절 피아노 의자에 앉아 다리를 대롱거리면서 했던 첫 연주에 사람들이 모두 숨죽이고 바라보던 장면부터 그의 삶은 결정된 건지도 모르겠다. 어떠한 속임수도 없이 아름답다고 연주를 들은 사람들은 생각한다. 누군가의 눈에서는 눈물이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기도 했다. 그만큼 감동적이었던 연주였다. 그런데 그토록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으면서도, 그는 왜 배에서 내리지 않는 걸까. 천부적인 피아노 실력으로 떼돈을 벌고, 좋은 집도 사고, 뭐든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을 텐데... 어째서 움직이는 감옥에 갇혀 지내는 걸까. 왜 계속 바다를 오가며 사는 걸까. 


단 한 번도 육지를 밟은 적 없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노베첸토는 '존재한 적 없는 음악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떨친다. 육지로 나아가 넓은 세상을 만나는 대신 꼭 2000명만큼의 세상을 접하며 살아가기로 결심한 그는 자신만의 작은 세계 속에서 깊이 있게 살아간다. 사람들을 바라보고, 귀 기울여 듣고, 그들이 지나온 시간과 감정을 건반 위로 옮긴다. '누군가의 눈 속에서, 누군가의 말 속에서, 실제로 그들이 느낀 공기를 들이마신 것처럼' 그 나름의 방식으로 말이다. 그는 사람들이 가진 흔적과 장소, 소리, 냄새, 그들의 땅, 그들의 이야기를 책처럼 읽어낼 줄 알았다. 그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정의한다. '88개의 유한한 건반으로 무한한 음악을 연주하는 일'이라고. 단 91페이지의 짧은 분량이지만, 문장으로 리듬을 만들고, 단어로 피아노 연주를 직조해내는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매 페이지마다 음악이 넘쳐 흐르는 것 같은 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영화를 감동적으로 봤다면, 영상이 미처 담지 못한 노베첸토의 다층적인 세계를 만나볼 수 있는 이 책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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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슬픔은 전문적이고 아름다워 교유서가 시집 3
리산 지음 / 교유서가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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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수같이 내리는 빗속에 폐허가 된 성의 뜰에 도착해/굶기를 밥 먹듯 하는 사이비 귀족에게 재워달라고 부탁하는/루이 14세 시대의 유랑 배우들처럼//방문객들이 도착한다 계속해서 도착한다/앉을 곳을 이리저리 찾는다 계단에 앉는다/문 뒤에 앉은 사람들 때문에 현관문은 열기도 어렵다/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정원에 모여 음식을 만든다              - '겨울 샐러드' 중에서, p.33


'교유서가 시집'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이다. 소후에 시인의 <우주는 푸른 사과처럼 무사해>는 연두색, 원성은 시인의 <비극의 재료>는 빨간색, 리사 시인의 <우리의 슬픔은 전문적이고 아름다워>는 핑크색인데, 표지 빛깔에 맞는 컬러로 그라데이션을 준 내지도 너무 예쁘다. 사실은 이 내지 때문에 교유서가 시집 시리즈를 앞으로 계속 모으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ㅋㅋ 


리산 시인은 아주 오래 전에 문학동네시인선으로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이라는 시집으로 만난 적이 있다. 눈 앞에 장소가 그려지는 듯한 서사성이 강한 시라 매우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 만난 시집도 장면들이 그려지는 듯 스토리가 보이는 시들이라 참 좋았다. 이번에는 '교환독서'로 읽게 되었는데, 한 권의 시집을 함께 읽는 시간이 아주 특별하게 느껴졌다. 시를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시를 읽는 이의 마음에 달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은유와 함축의 의미는 사람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집은 교환독서로 읽기에 정말 훌륭한 텍스트가 아닌가 싶다. 시집을 읽고, 생각하고, 메모된 글을 읽고, 시를 다시 읽으면 내가 보지 못했던 것들도 느끼게 되고, 나와 다른 방식의 감상도 배울 수 있으니 말이다. 세상의 모든 폐허 위에 눈이 내리고, 환하게 불을 밝히며 지나가는 밤 기차를 타고, 허물어져가는 신전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상상을 해본다. 




전나무가 길게 늘어선 숲, 꽃들은 눈처럼 향기롭게 떨어집니다, 발밑으로 길어지는 당신의 낭만,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건, 꿈꾸는 이상적인 울적한 하루가 전부여서, 마른 꽃들은 발밑으로 떨어지고,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허밍을 하는, 이 낡고 오래된 집에서도, 왜 꿈은 오래 꿈꾸던 꿈일 수가 없는지             - '산책에서 돌아오지 않기' 중에서, p.108


이 시집은 특히 '시인의 말'이 좋았다. '오래된 마음은 가라/아무것도 모르는 채 나는 뛰어드네/다시/맨 처음으로'라는 짧지만 임팩트 있는 문구였다. 오래 전에 읽었던 리산 시인의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을 다시 펼쳐 보았다. 역시나 시인의 말은 짧았다. '휴일에 만들어진 맥주는 불량이 많다고 한다. 내 시의 대부분은 휴일에 씌어졌다.'였다. 2013년 5월에 나왔던 시집과 2025년 12월에 나온 시집을 함께 두 손에 들고 오고 가며 번갈아 읽었다. 비슷한 듯 다른 느낌, 시간의 밀도 만큼 다르게 읽히는 시들이 참 좋았다. '겨울 샐러드'라는 시도 즐겁게 읽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요리를 하고 함께 나누어 먹는 파티의 한 장면을 그린 시인데,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게 따뜻함으로/가득하게 아주 많이 철철 넘치게'라는 대목처럼 화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상하게 따스한 느낌이 들어 겨울밤에 읽으면 참 좋겠다 싶은 시였다. 


이번 시집에는 해설 대신 김숨 작가님의 산문이 수록되어 있다. 시같은 소설을 쓰는 김숨 작가님의 글과 소설처럼 읽히는 시를 쓰는 리산 시인의 글이 너무 잘 어울린다. 개인적으로 리산 시인의 산문을 읽어 보고 싶다. 리산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산문이 정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언젠가 시의적절 시리즈에 한번 참여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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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사적인 평범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부희령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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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은 거짓말로 이루어진 거대한 미로다. 수백 개의 서가들, 그 속에 꽂혀 있는 수백 수천만 권의 책들, 책마다 넘쳐나는 깨알 같은 거짓말들. 사람들은 거짓말을 사랑한다. 거짓말은 지나치게 달콤하고 거짓말은 지나치게 아름답고 거짓말은 지나치게 말끔하고 거짓말은 지나치게 어렵고 거짓말은 지나침에 있어서도 지나치게 뻔뻔해서, 모든 두꺼움이 그렇듯, 어리석음과 추함과 두려움을 가려주기 때문이다.                p.33


부희령 작가의 글은 번역가로서의 작업물들로 먼저 만났었다. 소설 작품은 <구름해석전문가>라는 소설집이 기억에 남는데, 독특한 제목과 시선을 사로잡는 표지 이미지때문에 홀린 듯 선택했던 책이다. 언제나 이곳이 아닌 다른 세계를 꿈꾸고 있는 독자로서 세계를 부유하는 소설 속 인물들이 낯설기도 하면서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산문집으로 만나보게 되었다. 역시나 제목과 표지가 참 좋다고 생각을 하며 읽어 보았다. 


표지에도 보여지는 '파파야'라는 제목의 글이 인상적이었다. 갑자기 비가 쏟아져 유리창을 닫으며 열대의 우기를 떠올린다. 오래전 적도 근처의 나라에서 한동안 머물렀었는데, 그 시절의 쏟아지던 비가 생각났던 것이다. 그곳의 비는 온종일 주룩주룩 내리는 것이 아니라 태양이 오전 내내 뜨겁게 내리쬐다, 늦은 오후 무렵 비가 장렬하게 퍼붓는 식이었다. 세상이 다 잠길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처럼 쏟아졌던 것이다. 지금은 그곳에 있지 않지만, 선풍기가 돌아가는 방안의 후덥지근한 공기와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그 시절 자주 먹던 파파야의 단내가 유령처럼 어른거리기 시작한다. 이 글을 읽으며 잘 익은 파파야의 선홍빛 과육에서 달콤한 향기가 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열대 과일 중에서도 파파야는 이국적인 느낌이 있는데,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고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고온다습한 지역에서 먹어야 제맛이라 그런 것 같다. 지금은 한겨울이니 파파야를 한입 먹는 상상만으로도 몸이 데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외롭거나 외롭지 않거나, 바라거나 바라지 않거나, 누구나 언젠가는 보게 될 뒷모습 아닐까. 먼지 쌓인 책들에 둘러싸여 앉아 있다가, 손자들의 끊이지 않는 귀여움에 지쳐갈 즈음, 무거운 카트를 끌고 신호등 앞에서 황급히 걸음을 멈춰야 할 때, 수많은 누군가는 성공이나 실패라는 이름을 벗어버린 반백의 시간과 문득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할머니, 결국 모두가 겪는 순간이라 생각하면, 이유는 모르지만 조금 위로가 되지 않나요.              p.167


이 책의 글들은 쓰기, 마음, 여행, 가족, 세상, 읽기라는 카테고리로 나뉘어 있다. 다 좋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여행 카테고리의 글들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인도의 아쉬람을 시작으로 슬로베니아, 베네치아의 이국적인 풍경들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지는 글들이었다. 여행으로 다녀온 것도 있고, 문화예술위원회의 해외 레지던스 공모에 선정되어 석 달 남짓 머무른 나라도 있었다. 베네치아 여행기의 마지막 글에서 '슬로베니아를 떠나고 나면 베네치아도 류블랴나도 살아 있는 동안 다시 볼 일은 없겠지.' 라는 문장을 읽으며, 그래서 여행일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나라를 가든 항상 그런 마음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 같다. 내가 살아서 여길 다시 올 수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 순간을 눈에, 마음에 꼭꼭 담아 가야지. 세상에는 너무 많은 장소가 있고, 내가 모르는 것들이 있지만,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어디론가 떠날 수 있는 기회는 몇번 안되니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평범'하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누구나 평범해지고 싶다와 평범하지 않고 싶다 사이에서 고민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몽상이 되어 가는 것은 나이를 먹고 점점 더 현실과 타협하게 되면서부터 인 것 같다. 하지만 누구나 훌륭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어떤 평범은 '세상의 완충지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 위로가 되어준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산문은 가장 '사적인' 형태의 글이지만, 그래서 더 공감되고,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지점이 있는 것 같다. '평범하게 살아온 덕분에 더 많은 이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다정한 작가의 이야기를 지금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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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 앤 리즌 3호 : 블랙코미디 라임 앤 리즌 3
오산하.이철용.황벼리 지음 / 김영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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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무대 위에는 작은 핀 조명이 내려온다. 머리 위로 내리꽂히는 조명이 마치 온몸을 수직으로 관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머리 위에 흰빛을 이고 다닌다. 마이크 앞에 선다. 오늘의 관객은 세 명.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의 어리둥절함을 모른 체하고 마이크를 쥐고 입을 연다. 당신의 지옥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고.                - 오산하, '네버 네버 스마일 라이프' 중에서, p.61


라임 앤 리즌 시리즈 그 세 번째 책이다. 이 시리즈는 소설, 시, 에세이, 희곡, 논픽션, 비평, 만화 등 매호 달리 선별되는 다양한 분야의 저자들이 하나의 장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준다. 혼란스러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일종의 색안경이자 문화적 충분조건으로 ‘장르Genre’를 설정하고, 이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시도를 담고자 한다는 것이 기획의도이다. 1호 디스토피아, 2호 오컬트에 이어 3호는 블랙코미디이다. 


'디스토피아' 편에서는 소설가 예소연의 픽션,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기후변화 연구자인 정수종 교수의 논픽션, 그리고 만화가 약국의 작품을 담았다. '오컬트' 편에서는 사진가 임효진의 포토, 소설가 최추영의 픽션, 비평가 윤아랑의 글을 수록했다. 이번 '블랙코미디' 편에서는 오산하 시인과 이철용 극작가, 황벼리 만화가가 각기 다른 장르와 형식으로 ‘웃음’을 해석하는데 에세이, 희곡, 만화라는 분야로 3인 3색의 블랙코미디를 선보인다. 코미디의 원칙 중 하나는 '보는 사람이 불편하지 않도록 비현실성을 삽입할 것'인데 블랙 코미디는 이를 정면으로 거스른다. 오히려 그 불편함을 노리고 파고 들어 풍자하는 것이 블랙 코미디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웃으면 안 되는데 웃긴 상황이 나오는 것이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냉정한 상황 혹은 현실에 존재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유머와 풍자를 자아내는 것이 바로 블랙 코미디의 핵심이다. 




유다: 내 생각인데 말야. 부조리극의 인물들이 자신이 부조리극 속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건 더 이상 부조리극이 아니야. 부조리를 인식한다는 건 이미 그 부조리를 객관화했다는 의미고, 객관화된 부조리는 더 이상 순수한 부조리가 아니게 되니까.

사탄: 애초에 얘길 꺼냈을 때부터 망한 거네요.

유다: 그렇지. 다 너 때문이다.              - 이철용, '로 파티' 중에서, p.117


오산하 시인의 첫 시집 <첨벙 다음은 파도>를 인상깊게 읽었던 적이 있는데,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자유분방하고도 완전히 새로운 종말 너머의 세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수록된 에세이도 결코 평범하지 않다. 시인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겠다는 선언이 잇따르고, 재난 문자가 빗발치고, 도처에 부조리가 만연하던 그 때 계엄령을 마주한다. 그리고 현실보다 더한 블랙코미디는 없다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일상 속 미세한 균열들을 포착해낸다. '에세이'의 형식이기 때문에 처음 ‘블랙코미디’에 대해 쓰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가장 첫 번째로 든 생각이 무엇이었는지부터 어떤 블랙코미디를 말할 수 있을까에 대한 구상 등 작품을 쓰게 된 배경도 수록되어 있어 흥미로웠다. 


이철용 극작가는 사탄과 유다가 철학적 논쟁을 이어가는 부조리극을 보여준다. 거대한 구덩이가 무대 중앙에 있고, 그 구덩이의 좌측과 우측, 그리고 중앙에 등받이가 긴 의자가 하나씩 놓여 있다. 막이 오르면 좌측에는 유다가 앉아 성경을 읽고 있고, 사탄은 창에 꿰뚫린 채 중앙 의자에 앉아 있다. 미사일처럼 쏘아진 창이 사탄을 꿰뚫고 사탄을 몸째로 의자에 박아둔 충격적인 이미지로 시작되는 오프닝이다. 그렇게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는 현실의 부조리에 대해서, 연극으로서 부조리극에 대해서 끊임없이 사유하게 만들어 준다. 마지막으로 황벼리 만화가는 독창적인 화풍으로 '속삭이는 귀'에 대한 서늘한 풍자를 그려냈다. 사람을 죽이는 '말'에 대한 풍자가 놀라울 정도로 현실의 그것과 닮아 있는 작품이었다. 세 작품 모두 웃고 싶지만 쉽게 웃을 수 없는, 우스꽝스럽지만 어딘가 슬픈, 그럼 작품들이었다. 누구나 겪었을 법한, 차마 말로 내뱉지 못했던 일상 속의 부조리를 예리하게 포착해내는 방식이 특별해서 더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다채로운 방식'이 궁금하다면, 라임앤리즌 시리즈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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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디어 제인 오스틴 에디션
제인 오스틴 지음, 김선형 옮김 / 엘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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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당신의 결함은 만인을 싫어하는 경향이군요."

"그리고 당신의 결함은," 받아쳐 말하며 그는 설핏 웃었습니다. "멋대로 만인을 오해하려는 경향이고요."

"어서요, 이제 우리 음악 좀 들어요." ─  미스 빙리가 소리쳤어요. 자기가 끼어들 자리가 없는 대화에 지쳐버린 거죠 ─ 

... 그리고 다아시 씨는, 몇 초쯤 생각을 되짚어보다가, 대화가 끊긴 게 아쉽지는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자베스에게 지나친 관심을 쏟는 건 위험하다고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지요.             p.108~109


올해 초 '제인 오스틴의 편지함'이라는 뉴스레터를 구독했었다. 김선형 번역가의 글을 통해 거의 일년 내내 제인 오스틴에 대해서, 문학 번역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선물받았다. 그리고 그 기획이 시작이 되어 '디어 제인 오스틴 에디션'이라는 책으로 나왔다. 이 시리즈는 제인 오스틴이 태어난 지 정확히 250주년이 되는 2025년 12월 16일을 시작으로, 매년 두 권씩 삼 년에 걸쳐 순차적으로 나올 예정이다. 그리고 두 작품에 대한 번역가의 에세이도 해마다 함께 출간된다. 제인 오스틴의 생일에 맞춰 초판 발행일자를 맞추는 것부터 번역가의 애정 가득한 에세이를 함께 내는 것까지 정말 사랑스러운 기획이다. 


<오만과 편견>은 여러 출판사의 다양한 역자 버전으로 읽어 왔다. 다양한 판본으로 가지고 있지만, 매번 홀린 듯이 데려오게 되는 작품이다. 그리고 19세기 여성의 사랑과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21세기에도 웃음을 자아내고,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니 감탄하며 읽게 된다. 두 남녀가 첫 만남에서 서로가 가진 편견으로 인해 시작부터 삐걱대고, 결코 가까워질 수 없을 것 같았던 이들의 관계가 발전되는 과정을 그리는 것은 현대의 로코물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서사다. 이는 제인 오스틴이 이 작품을 썼던 1813년으로부터 전혀 시간적 거리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경이로운 동시대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소설 기법 또한 매우 현대적이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력과 속절없이 빠져들게 만드는 이야기의 힘 또한 독보적이다. 




그로서는 대단한 승리를 거둔 셈이지, 하고 엘리자베스는 자주 생각했어요. 불과 넉 달 전 오만방자하게 거절한 청혼인데 이제 와서 기쁘고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자 한다니,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득의양양할까! 물론 같은 성별 중에서야 누구보다 너그러운 사람이라는 데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지요. 하나 그도 사람인 이상 승리감을 느끼지 않겠어요. 엘리자베스는 지금에야, 성정과 능력을 감안할 때, 그야말로 정확히 자기와 어울릴 남자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p.503~504


재산이 많은 미혼 남자가 어떤 마을이든 처음 발을 들여놓게 되면, 마을 사람들은 마땅히 자기 딸이 이 남자를 차지하게 될 거라고 믿는, 그런 시절이었다. 부유하고 명망 있는 가문의 신사 다아시와 빙리가 조용한 시골 마을에 머물게 되면서 베넷 부인 역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녀의 최대 관심사는 딸들을 시집보내는 것이었고, 기왕이면 딸들이 결혼으로 신분 상승하기를 꿈꿔왔기 때문이다. 베넷가의 둘째 딸 엘리자베스는 대저택 네더필드의 무도회장에서 부유하고 명망 있는 가문의 신사 다아시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의 무뚝뚝한 태도에 ‘오만하고 무례한 남자’라는 인상을 받는다. 다아시는 그녀를 '아름답고 매력적이지만 자유분방한 여자'라고 판단한다. 그렇게 첫 만남에서 서로가 가진 편견으로 인해 그들의 만남은 시작부터 삐걱대기 시작하는데, 결코 가까워질 수 없을 것 같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이 작품의 원제는 '첫인상'이었다. 다아시의 오만과 엘리자베스의 편견이 두 사람의 잘못된 '첫인상'을 만들었고, 그것이 서로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 역할을 했다. 로에 대한 오해로 티격태격하던 남녀가 우여곡절 끝에 서로의 진심을 알게 되는 것은 거의 대부분의 로맨틱 코미디물에서 기본적으로 전개되는 플롯일 것이다. 이 작품은 바로 그 플롯을 가장 고전적이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여러 가지 장르를 통해 수없이 변주되어 왔다. 영화도 텔레비전 시리즈로도 수차례 제작되었고, 속편 형식이나 관점을 바꾸는 등의 각색으로 재탄생하기도 하고, 완전히 장르를 바꾸어져 색다르게 다시 쓰이기도 했다. 게다가 <브리짓 존스의 일기>처럼 현대판 개작으로 탄생하기도 했고, 웬만한 로맨틴 코미디물들이 대부분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 어느 정도는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제인 오스틴의 작가적 가치를 떠나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일단 재미있다는 것이다. 스토리를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읽을 때마다 재미있는 책이 또 있을까. 촌철살인의 위트와 생기 넘치는 대화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허구의 인물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자, 제인 오스틴을 읽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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