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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사 크리스티 코드 - 다섯 가지 코드로 크리스티를 읽다
오오야 히로코 지음, 이희재 옮김 / 애플북스 / 2025년 3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열세 가지 수수께끼>에서 마플은 "인간이란 모두 엇비슷한 존재죠. 다만, 아마 다행스럽게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할 뿐이에요."라고 말한다.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을 추리에 끌고 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관점이나 지위, 시대에 상관 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똑같다는, 그녀의 인생 경험에서 우러난 진리에 근거한 것이다. 미스터리의 주제는 언젠가 낡는다. 하지만 인간의 삶과 심리는 절대로 낡지 않는다... 90년 이상 지난 지금까지도 마플이 계속 사랑받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삶을 녹여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p.34
추리소설을 모르는 사람도 애거사 크리스티라는 이름은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애거사 크리스티가 추리소설에 끼친 영향력은 엄청난데, 보편적 스토리 구성, 클리셰로 정착된 전개 방식 등 추리소설의 틀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셜록 홈즈를 탄생시킨 코난 도일이 추리소설의 캐릭터를 완성했다면, 크리스티는 추리소설의 구성을 완성했다.. 현대의 미스터리, 스릴러 작가들 중에 이들의 영향 아래 놓여 있지 않은 작가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크리스티는 참으로 많고 다양한 작품을 썼고, 여러 편의 걸작이 존재한다. 영어권에서만 10억 부가 넘게 팔렸고, 103개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도 상당히 많다.
크리스티는 50여 년간 70여 편의 장편소설과 수많은 중단편, 희곡, 여행기 등을 집필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데, 그 이유는 대체 뭘까. 이 책의 저자는 2018년부터 나고야 사카에 주니치 문화센터에서 「애거사 크리스티를 읽다」라는 강좌를 진행하며 크리스티의 작품에 대해 해설해 왔다. 매달 한 권씩, 크리스티의 작품 중 한 권을 정해 중요 포인트를 짚어 왔는데, 그동안 분석한 크리스티 소설의 숨겨진 코드를 다섯 가지로 정리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탐정으로 읽다, 무대와 시대로 읽다, 인간관계로 읽다, 속임수 기술로 읽다, 독자를 어떻게 함정으로 이끄는가, 의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했다. 탐정, 무대와 시대, 인간관계, 속임수, 트릭이라는 다섯 가지 코드는 크리스티의 작품을 관통하는 비밀이기도 하고,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소설적 구조이기도 하다. 크리스티의 작품들을 많이 읽어보지 않았더라도, 혹은 미스터리와 크리스티를 사랑하는 마니아들도 만족할 수 있도록 쓰인 책이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해결편을 읽고 나면 그 전까지의 초조한 감정조차 크리스티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음을 깨닫는다. 독자의 입에서 "그렇게 된 거였어?"라는 말이 터져나올 수 있도록, 아주 치밀하고 촘촘한 기획이 깔려 있다. 이 작품은 주요 등장인물이 전 배우, 극작가, 후원자, 무대 의상을 다루는 양장점 주인이고 이야기의 구조가 '3막'으로 표현된 점에서 연극의 형식을 따랐는데, 이조차도 트릭에 기여한다. 진상을 다 알고 다시 처음부터 읽으면 아주 초반부부터 진상을 거의 다 알려주는 힌트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p.214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들은 어디에나 있는 시골 마을이나 전원지대다. 크리스티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세계관에서는 과도한 폭력, 잔인함, 노골적인 성적 묘사 등이 일절 등장하지 않으며, 생활감과 유머, 그리고 로맨스가 있다. 이웃과의 트러블은 늘상 있지만 마을 사람들끼리 떠드는 가십 거리에 불과하다. 사회의 어둠을 파헤치는 하드 보일드나 누아르와 정반대되는 세계관이라서, 독자에 따라서는 너무 미지근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평화로운 시골 마을의 평온한 일상이 살인이라는 비일상적 사건의 위협을 받을 때 독자들은 짜릿한 재미를 느끼게 된다. 살인과 의문, 비밀과 거짓말 사이에서 비로소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인간 본성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그때가 크리스티 소설의 묘미이기도 하다. 탐정의 추리로 수수께끼를 풀고 일상의 질서를 되찾을 때는 나도 모르게 안심이 밀려들 것이다.
크리스티는 자서전에서 탐정소설에 연애 무드가 조성되는 것은 너무 지루하다고 털어놓았다. 그녀의 추리소설 대부분에 크고 작은 로맨스가 나온다는 점을 생각하면 놀랄만한 말이다. 사실 작품 속에 로맨스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점이 크리스티의 작품이 지금까지 꾸준히 읽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한데 말이다. 사랑, 독점욕, 질투심이란 예나 지금이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이다. 크리스티의 말은 추리와 로맨스 사이의 밸런스 조절을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미스터리의 주제는 언젠가는 낡게 마련이다. 하지만 인간의 삶과 심리는 절대로 낡지 않는다는 것. 인간은 어리석고, 실패를 두려워하며, 허세를 부리고, 욕심이 생기면 성급하게 굴고 만다. 반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어리석기에 도리어 사랑스러운 것이 또 인간이다. 수십 년의 시간을 넘어 지금까지도 크리스티의 작품들이 사랑받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삶을 녹여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약 1세기 전의 소설이 지금까지 꾸준히 읽히고 새로운 번역서와 영화,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비밀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크리스티의 소설에 숨겨진 비밀의 코드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