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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진 세계에서 우리는 - 파국의 시대를 건너는 필사적 SF 읽기
강양구 지음 / 북트리거 / 2025년 7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때요? 이제 힘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던 그들이 다르게 보이죠? <노인의 전쟁>에서 남다른 동료애로 사지를 종횡무진 누비는 노인 병사처럼, 이 순간에도 세상 곳곳에서 노인들은 자신만의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소설은, 그저 먼 미래의 전쟁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곁 누군가의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p.35
극심한 불평등, 성별, 종교적 갈등, 기후 위기로 인한 재앙, 소셜미디어가 부추기는 극단주의 등 어쩌면 우리는 망가진 세계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디스토피아를 전망한 음울한 SF보다 현실이 더 잿빛인 상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좋은 SF는 현실을 지배하고 제한하는 틀에서 벗어나는 상상력을 극한까지 밀어붙여 지금과 다른 삶을 상상하도록 자극한다.
이 책은 STS(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프랑켄슈타인>, <멋진 신세계>, <1984>를 잇는 SF 열여덟 편의 작품을 발굴해 소개하고 있다. SF의 상상력에 기반을 두고 과학기술과 역사, 정치, 경제, 문화를 넘나들며 펼쳐지는 저자의 유려한 글은 순식간에 지금과 다른 삶을 상상하도록 만들어준다.
하나의 세계가 끝이 나고, 20년 뒤 종말 후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스테이션 일레븐>이라는 작품을 인상적으로 읽었던 적이 있다. 문명이 몰락한 세상에서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공연하는 유랑 악단, 첨단 우주정거장에서 살며, 지구에서의 삶을 잊으려고 노력하는 물리학자가 등장했던 이 작품은 여타의 디스토피아 소설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작품이었다. 끔찍하고, 무서운 장면들 대신, 평화롭고 아름다운 분위기가 이어진다고 할까. 세상이 종말을 맞이한 뒤에도 단지 생존하는 것 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는 유랑 극단의 존재는 그저 살아남는 것 외에, 인간에게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도록 해주었다. 강양구 작가는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의 <스테이션 일레븐>을 소개하며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 예술 활동에 공을 들여온 인류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혹독한 환경에서 생존하기에도 벅찼던 인류가, 먹고사는 일과 무관해 보이는 예술 활동을 활발하게 했던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세상이 망해도, 알 수 없는 인생의 미스터리는 계속된다는 것, 그래서 이러한 작품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이 뭉클하게 다가온다.

<크로스토크>를 읽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지금 우리에겐 혼자서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도서관이나 모두가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든 새벽 세 시의 거리처럼 고요한, '자기만의 방'이 필요합니다. 역설적으로 그런 자기만의 방, 나만의 고요한 공간이 확보되어야만 비로소 타인과 깊이 있고 진정한 소통도 나눌 수 있죠. p.199
'어느 날 아무런 전조도, 이렇다 할 원인도 없이 달이 폭발했다.' 라는 충격적인 이야기로 시작한 <세븐이브스> 또한 흥미롭게 읽었던 적이 있다. 전체 3권으로 된 방대한 분량의 작품이었는데, 과학과 테크놀로지가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어 다소 문체도 다소 딱딱하고, 낯선 용어들과 설정 들이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하드 SF' 장르의 작품이었다. 닐 스티븐슨은 눈부신 상상력과 천재성으로 인류사를 다시 쓰는 장대한 스케일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행성의 충돌로 시작해 지구가 파괴되고, 세계의 해체와 재건의 시간을 지나 인류의 재탄생이라는 우주 대서사극을 만들어냈다. 특히나 이 작품의 매력은 우주물리학, 양자역학, 로켓공학, 로봇공학, 인공지능, 생물학, 유전공학, 무선전신 및 프로그래밍 언어학, 철학, 문화인류학, 심리학, 정치학 등 방대하지만 검증 가능한 이론들로 무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강양구 작가는 SF 미학의 핵심에는 '경이감'이 아니라 정교한 '사고실험'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 우리의 욕망과 과학기술이 데려다 줄 세계를 정교하게 그려 내고, 과연 그것이 최선인지 혹시 다른 가능성은 없는지를 상상하게 하는 그런 사고실험의 결과물이 바로 SF여야 한다고 말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학기술은 삶을 구석구석 좌지우지하는 실체이기 때문에, SF 소설 속 과학기술에 기반을 둔 상상력 또한 지금 여기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과 겹칠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읽었던 <스테이션 일레븐>, <세븐이브스>를 비롯해서 <노인의 전쟁>, <킨> <백년법>, <리틀 브라더>, <영원한 전쟁>, <드라이>, <크로스토크>, <소멸 세계> 등 이 책에 수록된 SF 작품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너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물론 이 책에 실린 SF를 읽지 않아도 내용을 이해하고 주제 의식에 공감하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강양구 작가는 오늘이 비록 세상의 마지막이라 하더라도 '그다음'을 상상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 SF가 지닌 힘이라고 말한다. 재난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SF작품을 읽어야 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서 비롯된다. '망가진 세계'에서 우리가 SF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