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신세계 - 동물이 가르쳐준 인간의 12가지 경이로운 감각
재키 히긴스 지음, 이민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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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네눈박이귀신고기의 두개골 안에서 어떻게 이러한 메커니즘이 일어날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을지 묻자 더글러스는 웃으며 말했다. "그건 철학자들의 영역으로 남겨두겠습니다." ... 이 의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사실에 근거한 사고 위에 더 많은 상상력을 더해야 한다. 공작사마귀새우의 사례는 다른 생명체의 눈을 통해서 세계를 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주었는데, 심해 공간에서 끌어올린 '네눈박이' 생명체의 눈을 통해서 세계를 보려면 우리의 상상력을 극한까지 밀어붙여야 한다.              p.84


우리는 감각 기관을 통해 대상을 인식하는 지각으로 주변 세계를 느낀다. 이러한 감각 덕분에 책표지를 보고, 손에 전해지는 무게를 느끼고,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가끔 보면서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들으면서도 귀 기울이지 않으며, 들이마시는 공기 속 향기를 자각하지 못한다. 익숙함이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하고, 세계의 경이에 눈과 귀를 닫게 하는 것이다. 이 책은 인지의 영역 너머에서 작동하는 수많은 감각들을 경험하게 해준다. BBC, 내셔널지오그래픽, 디스커버리 채널 등에서 약 20년 동안 야생 동물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온 저자는 세계 곳곳에 있는 과학자들을 직접 취재하며 알게 된 놀라운 발견들을 통해 인간에게 오감 이상의 더 넓은 미지의 감각 세계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공작사마귀새우는 동물계 '최고의 색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영장류의 인지 능력이 있는 것처럼 눈을 마주치는 행동을 하는데, 이는 공작사마귀새우가 지닌 수많은 시각적 능력의 하나일 뿐이다. 그들의 눈은 표면이 낱눈이라고 부르는 육각형 수정체 수천 개가 촘촘히 박혀 있는 구조로 밝고 선명한 서로 다른 색의 작은 덩어리들을 가지고 있다. 빨강, 주황, 노랑, 파랑, 분홍, 보라색이 흩어져 있는데, 마치 눈 속에 무지개가 숨어 있는 것과도 같다. 각 줄의 세포들이 각기 다른 파장을 흡수하기 때문에, 공작사마귀새우가 보는 세계는 수많은 색으로 가득하다. 실제로 감각신경학 연구를 이끌었던 저스틴 마셜 교수는 '이 정도의 색 지각 능력이라면 어이없이 과한 것이 아닌가 싶어 당황스러웠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그야말로 공작사마귀새우의 눈은 이 세상 눈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색각은 우리 인간이 세상을 보는 많은 방식에 대해 새로운 통찰을 던져준다. 




먼지거미는 자연의 시간을 상징하는 부적 같은 존재다. 우리는 우리에게도 시간을 감지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바 있다. 이 발견에 용기를 내어 인공 시계는 내던지고 우리의 몸속 시계에 따라도 되지 않을까. 먼지거미가 손쉽게 발현하는 생체리듬이 우리가 꿈꿔온 시간여행 아닌가.... 어쩌면 우리의 여덟 다리 친구에게 길을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존스는 말했다. "이 거미들이 어떻게 매일 아침 아무 해도 입지 않고 시차를 조정하는지 알아낼 수 있다면,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능하게 해줄지 상상해보세요...."                 p.367~368


먼지거미는 사람 머리카락 한 가닥의 1000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움직임도 탐지해낸다. 그들은 그 미미한 움직임이 바람에 흔들린 것인지, 수컷 구애자가 접근하는 것인지, 영양 만점 먹이가 잡힌 것인지 구문한다. 또 흥미로운 점은 거미들이 어둠 속에서 거미줄을 부분적으로 수선하는 게 아니라, 매일 밤 아예 처음부터 새로 짓는다는 것이다. 주행성인 먼지거미들은 한밤중, 해가 뜨기 전부터 깨어 움직인다. 바치 빛을 앞질러 예측하듯이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도 시계 장치처럼 규칙적으로. 한편 신경초라 불리는 미모사는 가지와 잎이 햇볕이 강한 쪽을 향해 자라는 식물이다. 미모사를 빛이 들어가지 않는 공간에 두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자, 태양과 햇빛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직접 빛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시간을 감지하는 식물이라니 놀랍기 그지 없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우리는 사실 감각이 허락한 만큼만 세상을 경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세계 곳곳에 있는 과학자들을 직접 취재하며 알게 된 놀라운 발견들에 대해 읽으며 인간에게 5감 이상의 더 넓은 미지의 감각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감탄도 하게 되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집을 짓는 먼지거미는 아주 특별한 생체시계를 가지고 있고, 큰뒷부리도요는 수만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집을 찾을 수 있는 방향감각이 있으며, 공작사마귀새우는 인간보다 4배 더 넓은 스펙트럼을 볼 수 있는 색각을 지녔다. 빛이 전혀 없는 심해에 서식하는 귀신고기는 출중한 시각 능력을 소유했으며, 큰회색올빼미의 예리한 청력은 소리 하나만으로 놀랍도록 정확하게 먹잇감을 찾아내어 귀로 보는 능력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 외에도 흡혈박쥐, 골리앗메기, 블러드하운드, 참문어 등 열두 종의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경이로운 감각들을 통해 미지의 감각 세계를 상상해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들어주는 책이다. 가능성을 상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을 해낼 수도 있는 존재로서 인간 감각의 새 지평을 여는 이 책을 통해 지각의 '멋진 신세계'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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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고 싶어서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 일의 시대는 어떻게 읽는 사람을 집어삼켰는가
미야케 가호 지음, 서영찬 옮김 / 동아시아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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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 일하다 보니 책을 못 읽게 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구나'라고 느꼈다. 애당초 일본의 노동 방식에 따라 일하다 보면 책을 여유롭게 읽을 수 없게 되는 게 보통이다. 대부분이 그런 노동 방식을 따르고 있다. 일주일에 5일은 거의 회사에 나가고, 남는 시간에 일상적인 볼일을 보거나 인간관계를 꾸려나가다 보면 책 읽는 시간 따위는 없어지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아니, 책도 읽을 수 없게 만드는 노동 방식이 ‘보통’인 사회가 이상한 거잖아!?’                p.8~9


어릴 때부터 평생 책을 곁에 두면서 살아 왔지만, 이런 나에게도 책을 '별로' 읽지 못하던 시기가 있다. 소위 말하는 책태기라던가 그런 이유가 아니라, 정말 시간을 하나도 낼 수가 없어서였다. 이직을 하고, 한참 미친듯이 회사 업무가 바쁘던 시기가 있었다. 일이 밤늦게 끝나니 집에 오면 그대로 뻗어 버렸고 휴일에 시간이 나도 피곤하니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몇 년간은 책을 거의 읽지 못했다. 그때는 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놈의 일 때문에 책을 읽을 수가 없잖아!'라며 회사를 그만두고, '책도 읽을 수 없게 만드는 노동 방식'부터 잘못된 거라고 문제를 제기하고, '책을 읽지 못하게 된 어른'을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한 사회의 노동사를 통해 들여다볼 생각을 하다니... 정말 놀라운 책을 만났다. 


일본의 문예평론가인 미야케 가호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는 책벌레였고, 책과 관련된 공부를 하고 싶어 대학교 문학부에 진학한 문학소녀였다. 책을 계속 읽으려면 돈이 어느 정도 필요했기 때문에 취업 할돵을 했고, 한 IT기업에 들어가게 된다. 좋아하는 책을 많이 사기 위해 취직한 셈이다. 그런데 직장에 들어가고 나서 깜짝 놀란다. 일주일에 5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오전 9시 반부터 저녁 8시 넘어서까지 회사에 있어야 한다는 혹독함 때문이었다. 덕분에 회사 업무 외에 다른 일을 할 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았고, 그저 전철을 타고 집과 회사를 오가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일이었다. 그렇게 1년째를 넘길 무렵, 자신이 책을 전혀 안 읽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시간이 없어서라기 보다, 책을 펼쳐도 눈이 저절로 감기거나, 책대신 스마트폰만 쳐다보다가 시간이 다 가버린 것이다. 일을 하고 있으면 책을 읽을 수 없게 되는 걸까. 그렇게 회사에 다니면서 마음먹은 대로 책을 읽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3년 반 만에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 




그렇기에 책을 읽으면 타자의 맥락에 접할 수 있다. 자기에게서 멀리 떨어진 맥락에 접하는 일, 그것이 독서인 것이다. 그리고 책을 읽지 못하는 상황이란 새로운 맥락을 만들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에게서 떨어진 곳에 있는 맥락을 그저 노이즈라고만 생각해 버린다. 노이즈를 머릿속에 넣을 여유가 없다. 자기와 관련된 것만을 갈구하고 만다.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하고 있으면 책을 읽지 못한다. 일 이외의 맥락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p.286


저자는 '일하면서도 책을 읽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든다' 라는 문제의식을 꾸준히 탐구해 왔다. 어떻게 해야 일하면서도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어떤 방식으로 일해야 인간답게, 노동과 문화를 양립시킬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은 근대 이후 일본의 노동과 독서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추적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저자의 사유를 따라가다보면, '일을 하면 책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 장시간 노동으로 책 읽을 시간을 빼앗겼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오늘날 대다수 사람들이 노동과 문화의 양립에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은 책이 노동에 노이즈가 되는 사회의 출현에 있으며, 90년대 이후 노동자들에게 체화된 신자유주의의 정신이 읽기라는 비효율적인 행위를 밀어내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지금 당장은 일과 이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멀리 떨어진 타자의 맥락을 아는 것'이므로 일하는 것 이의외 맥락을 받아들일 여유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런 사회야말로 건전한 사회라는 저자의 말에 매우 공감이 되었다. 특히나 '반신'으로 일하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대목이 흥미로웠다. 너무도 전력을 다해 일하는 것이 미덕인 사회에서 번아웃을 겪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렇게 지친 사람들은 읽는 능력을 잃어 버리게 된다. 그러니 사회의 노동 방식을 전신이 아니라 '반신'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신으로 '일의 맥락'을 갖고, 나머지 반신은 '일과 별개의 맥락'을 받아들이는 여유가 생긴다면, 일하면서도 책을 읽을 수 있는 사회가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일뿐만이 아니라 육아, 돌봄, 공부, 사적인 관계 등으로 정신없이 바쁠 때 우리는 새로운 맥락을 알고자 하는 여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니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반신으로 일하기'가 당연한 사회가 된다면 일을 하면서도 책을 읽을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책을 읽지 못하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문제'라는 점을 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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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한다 말하기엔 조금 숨이 차지만 - 러닝 앤솔러지
김연수 외 지음 / 판미동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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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원하지 않는 인생에 갇혀 억지 연기를 하며 그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에게는 남다른 체력과 정신력이 요구된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면, 다르게 살았더라면, 20대로 돌아간다면,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저랬다면 등등의 백만 가지 가정과 후회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주기적으로 자기혐오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달리기는 그저 산삼이고 명약이다. 심리 상담과 정신과 약물 치료와 친구와의 사교와 일에서의 성취도 못 해 주는 일을 30분가량의 달리기는 간단하고 즉각적으로 해준다. 바로 ‘다 괜찮다’는 감각으로 스스로를 빙 두르는 것.                 - 노지양, ‘Middle'중에서, p.54~55


달리기는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쉽게, 아무런 준비 없이도 시작할 수 있지만, 생각보다 지속적으로 하기는 쉽지 않다. 지면을 박차는 느낌, 이마를 스치는 바람, 나만의 리듬과 호흡으로 기분 좋게 시작하지만, 곧 종아리는 불에 덴 것처럼 무겁고, 심장이 너무 뛰는 바람에 숨 쉬기조차 힘들어 진다. 형편없는 달리기 실력은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잘하지도 못하는 걸 나는 왜 하려는 걸까 자괴감이 든다. 그래서 매일 달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며칠 달려 보면 싫어지는 패턴이 반복되는 것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 이건 달리기만의 문제는 아니다. 어떤 일을 해야할 때 그 일을 대하는 나의 태도, 삶의 방식과도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김연수 작가는 말한다.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므로, 못하는 것을 좋아할 수도 있고, 좋아하는 일을 매일 하다 보면, 점점 더 잘하게 돼 결국 평생 할 수 있게 된다고. 그래서 자신이 글쓰기와 달리기를 지금까지 계속 해올 수 있었다고 말이다. 김연수 작가는 소설가이기 이전에 30년 넘게 달려 온 베테랑 러너이기도 하다. 일산 호수공원 근처에서 살아온 것이 20년이 넘었는데, 살아오면서 마음이 불안한 시기마다 호수공원을 찾아가곤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걷기만 했다가, 달려 보겠다고 마음먹은 건 20대 후반, 두 번째 장편소설을 쓰느라 애를 먹던 시기였다. 소설을 쓰기 위해 다니던 잡지사도 그만두고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았지만, 기대와는 달리 글쓰기가 잘 되지 않아 당황하던 시기였다. 눈앞이 캄캄해진 어느 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절망감이 밀려왔고, 달리기를 하자고 생각했다고. 그렇게 3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날의 자신을 한없이 칭찬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참 잘했어. 그게 너를 구한 거야. 이렇게 달리기는 누군가의 삶을 구원해주기도 한다.  




여기서부터는 나의 본능이 작동한 방식, 나의 달리기에 관한 이론이다. (이 단어를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속도가 빨라질수록 시간은 상대적으로 느리게 흐른다. 외부의 기구나 동력 없이 나의 힘으로 내 몸의 속도를 더 빠르게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유일한 행위가 바로 달리기다. 이때 달리는 사람의 시간은 아주 미세하게 느려진다... 달리는 동안 현재는 길어지고 미래는 지연된다. 반면 달리는 동안 과거로부터는 더 빠르게 멀어진다. 시간의 흐름에 거리라는 독립된 변수가 개입했기 때문이다.                - 윤이나, ‘달리는 건 도망이지만 도움이 된다’ 중에서, p.124~125


다양한 영역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일곱 명의 작가가 ‘러닝’에 관해 다채롭게 풀어낸 에세이 앤솔러지이다. 이 책은 꾸준히 달려 온 작가들에게 각자의 달리기를 표현하는 키워드 하나를 청하고, 그 단어를 실마리 삼아 각자의 달리기에 대해 써 달라고 제안하며 시작되었다. 달리기가 저마다의 고유한 세계를 지탱하는 방식이라면, 일곱 작가들의 다양한 키워드는 그들의 삶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김연수 작가의 호수공원, 노지양 번역가의 올드팝, 박은지 시인의 맥주, 윤이나 작가의 부상, 김연덕 시인의 사랑, 김혜나 작가의 속초, 최유안 작가의 핑계까지 각자 다른 키워드를 통해 풀어내는 달리는 작가들의 '내가 달리는 이유'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공감되고 이해가 되었다. 무엇보다 단순히 달리기를 예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방식 자체가 참 좋았다. 


인생은 본래 만만치가 않아서 끊임없이 예상치 못한 전개로 우리를 비틀거리게 한다. 내 인생도 예외가 아니다. 러너로 산다고 항상 인생에 햇살이 비치고 삶의 의지를 불태우는 명언이 난무하게 되는 건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구질구질한 인생의 한복판에서 불안과 우울에 맞서고자 고군분투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달리기는 정말 추천해주고 싶은 방법이다. 달릴 때 생기는 몰입, 쾌감, 기운을 통해서 행복해지는 것도 있고, 바깥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되면서 이전에는 몰랐던 가능성의 세계를 보게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힘껏 지면을 디디면서 뇌를 지치게 하는 것으로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각종 공포증과 두려움이 서서히 줄어들기도 한다. 실제로 달리기를 통해 삶이 바뀌고 공황과 불행에서 해방되었다는 사람들도 꽤 많다. 태어나 단 한 번도 제대로 뛰어본 적 없었다고 하더라도, 가장 간단하고 원초적인 방법으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만으로 인생이 서서히 달라지기도 한다. 가끔은 그저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숨이 차곤 한다. 그러니 러닝을 하든 안 하든, 이 책을 통해 앞으로 달려나갈 수 있는 방법을 배워둔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자신만의 속도로, 내게도 작은 하늘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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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스텝 위픽
박재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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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구원받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지 않니."

구원이라니. 그 거대하고 추상적인 단어를 듣고 해원은 말문이 막혔다. 해원은 항변하고 싶었다. 회장과 맨발 산행 회원들이 순자를 구원하고 있다는 건 착각에 불과하다고. 피도 안 섞인 사람들과 어떻게 하나가 되냐고. 하지만 순자의 평온하고 해말간 얼굴을 지켜본 지난 며칠을 상기했을 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순자는 정말 구원받은 것처럼 보였다. 단절과 외로움으로부터.              p.66


해원은 5년의 연습생 기간을 거쳤지만 데뷔하지 못한, 소위 한물간 가수 지망생이다. 최근에는 모창 능력자를 가리는 서바이벌 예능 <히든 싱어>에 섭외되어 연습 중이었다. 히든 싱어의 주인공은 한때 아이돌 그룹의 메인 보컬이었지만 지금은 솔로로 활약 중인 가수 이현이었다. 매력적인 외모와 뛰어난 보컬로 해원의 나이에 전성기를 이루고 평생 쓸 돈을 다 벌어서 이제는 돈 욕심이 없다고 인터뷰하던 삼십대 여자 가수 이현. 해원은 오래전부터 이현과 이어져 있다고 믿었다. 연습생 시절부터 이현의 노래를, 마치 이현처럼 잘 부른다는 소리를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원은 히든 싱어에서 자신과 똑같은 목소시를 내는, 운명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이현이 발견하기를 상상하며 설렌다. 


예능 다시 보기를 눌르려던 참에 엄마로부터 연락이 온다. 벨소리를 무음으로 해놓고 영상을 한참 보다 다시 보니 부재중 전화가 네 통 찍혀 있었다. 전부 엄마가 보낸 것이었다. 카톡을 확인하니 집으로 와라. 비상이다.라는 메세지가 있었고, 해원은 7년 만에 본가로 내려간다. 여러 가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며 도착해 보니, 엄마는 웬 중년 여자와 함께 였다. 엄마는 산에 오르다가 삐끗했다며 발목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함께 있던 여자는 맨발 산행을 하는 모임의 회장이라고 했다. 근대화의 문제적 현상, 세계와 단절된 현대인들, 땅과 접촉해야 전일성 회복을 명복으로 맨발 산행을 한다는데, 해원에게 방송 출연 전 산에 올라 좋은 기운을 받아 보라고 권유한다. 엄마는 맨발 산행을 통해 불면증이랑 우울증이 완치되었다며 회장을 대단하신 분이라며 맹목적으로 치켜세운다. 




교회의 교인들도 입을 모아 신이 있다고 증언했었는데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해원은 순자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믿고 싶은 것을 믿기 위해 그럴듯한 이유를 자꾸 만들어내고 갖다 붙이는 것이다. 해원과 둘이 살 때도 순자는 그랬다. 세상에 자기편은 없으며 모두 저 좋을 대로 사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라는 믿음에 갇혀 순자는 해원도 그 범주에 넣었다.                   p.86~87


해원은 맨발 걷기 모임이 단순한 건강 동호회인지 사이비 다단계인지 알 수가 없다. 가족인 자신도 하지 못한 엄마의 구원을 다른 사람이 했다니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사이비에 빠진 가족 구하는 법을 검색해보기도 한다. 왜냐하면 맹목적인 엄마 순자가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가족이 사이비에게 빠졌을 경우 손절하거나, 직접 그것을 경험해 보고 허술한 믿음을 공량하는 방법이 있다는 글을 보고 해원은 회장이 권유한 맨발 산행에 참여하기로 한다. 직접 맨발로 산을 걸어보니 땅의 촉감이 생생했다. 선득한 느낌이 발끝에서 올라와 온몸으로 파고들었고, 해원은 엄마와 회장이 반복해 말하던 전일성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하나가 되었다는 감각. 내가 나인채로, 느슨하게. 이 모임은 정말 사이비일까? 사이비는 의도를 가지고 진짜인 척하는 가짜라고 하는데, 그 논리대로라면 이현의 눈에 운명처럼 들고자 그녀를 모창하기로 한 해원도 사이비는 아니었을까. 


‘단 한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어 판형이 작고 가볍지만, 양장본이라 튼튼하고 색감이 예뻐 소장용으로 너무 멋진 '위픽 시리즈' 신작이다. 구병모 작가의 <파쇄>를 시작으로 그 동안 무려 101편이나 되는 작품들이 위픽 시리즈로 나왔다. 나도 꽤 많이 읽어 왔는데, 디자인도 예쁜데다 골라 읽는 재미가 있어 너무 좋아하는 시리즈이다. 작품의 키워드가 되는 문장을 이미지로 사용해 심플하지만 멋스러운 표지도, 작품과 찰떡같이 어울리는 알록달록한 색감도 너무 좋다. 박재연 작가는 올해 신춘문예 당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신인 작가라 이번에 <히든 스텝>으로 처음 만나보게 되었다. 히든 싱어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누군가의 정체성과 연결시켜 풀어나가는 방식이 매우 흥미로웠다. 실제로 가장 진짜 같아 보이지 않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실제 그 가수였을때, 어떻게 나를 몰라보냐고 주변 사람들을 탓하게 되는데...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고 믿는 것에 대해,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토대 위에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보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읽으며 애초에 누군가를 온전히 안다고 믿는 것부터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단 한 편의 이야기’를 깊게 호흡하는 특별한 경험, 위픽과 함께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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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신재민 지음 / 북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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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한테 복수하고...... 싶으신 거 아니었어요?"

아버지가 멋대로 죽어 버린 이상 영영 물 건너간 복수였다. 하지만 100년, 1,000년도 이르다던 그 해답이 생가 아래에 있었다.

"하고 있잖아요, 지금."

재헌은 그가 앗아간 지난 세월과, 그가 선사한 모든 불행을 떠올렸다. 전부 다 아버지 잘못이었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되갚아 줘야 했다.                 p.115


2017년 정유년, 해가 바뀐 지 보름이 채 안 된 어느 날 이운암 전대통령 생가에서 화재가 발생한다. 정확한 화재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경찰은 방화로 추정하고 있었다. 이운암 생가는 그가 퇴임 후 민간에게 개방해 그의 일생을 전시하는 일종의 박물관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한옥을 복원하는 것은 단순히 건물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모로 까다로운 부분이 많았다. 도편수는 불에 탄 생가를 절대 복원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고, 도편수의 후계자가 되지 못했던 아들 재헌은 그에 반발이라도 하듯 생가를 복원해달라는 전대통령 손자의 의뢰를 받아들인다. 


재헌은 아버지를 가장 닮았으면서도 가장 증오했던 아들이다. 다시 지어선 안된다는 생가를 굳이 복원하려는 재헌은 지하실에서 기묘한 공간을 발견한다. 집이란 것이 위치부터 각 건물의 조화, 균형, 동선까지 모든 게 아귀가 맞아야 하는 건데, 그곳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집 전체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대체 전 대통령 일가와 아버지 도편수는 대체 뭘 숨겨온 것일까. 한편 대형 트럭 기사 시록은 어머니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통화한, 평생 만난 적 없던 아빠의 존재를 찾다가 이운암 생가까지 가게 되고, 그곳에서 재헌과 맞닥뜨린다. 국내 최고 도편수였던 범근의 영향력으로 업계 전체가 복원을 반대한 가운데, 재헌은 한배를 탄 시록과 함께 점차 작업을 진전시켜 가는데... 과연 생가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진심일지도 몰랐다. 우리가 겪는 모든 시련은, 그들 나름의 우주적인 사랑일지도 몰랐다. 아득히 커서 인간이 견뎌 낼 수 없는 사랑. 신이 인간에게, 이운암이 국민에게, 지범근이 재헌에게 그래 왔다. 그리고 재헌 또한 그 사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서로를 이해 못 해 반복되어 온 영원한 사슬이었다.

"그럼 당신도 이해해 줘요. 아버지니까."

이제 사슬을 끊어야 했다.                 p.377


이 작품은 영화 <커미션>을 만든 감독 신재민이 시나리오를 소설로 발전시킨 것이다. '제13회 교보문고 스토리 대상' 대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수목 신앙과 한옥 건축 등의 전통적 요소, 대한민국의 어두운 현대사를 결합한 오컬트 호러로 서늘하고 오싹한 서스펜스를 선사한다. 무더운 여름 날씨를 한방에 날려 버릴 만한 긴장감이 페이지마다 가득하고, 호러와 미스터리를 넘나들며 암울한 역사와 저주를 엮어내는 솜씨 또한 탁월하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고, 공간적으로도 다양한 장소를 교차시켜가며 보여주고 있어 지루할 틈없이 읽을 수 있었다. 


아름다운 우리의 전통 건축물인 한옥을 색다른 방식으로 묘사하는 것도 흥미로웠다. 화재가 난 이후의 생가 모습을 '지붕이 무너지고 기둥이 뚝 부러져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거대한 괴물의 머리가 아가리를 떡 벌리고 있는 것 같았다.'라는 식으로 그려내고 있어 마치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공포 영화 배경처럼 느껴지게 하고 있으니 말이다. 역사가 오래된 관습이 미신처럼 전승되며 어느새 신앙으로 변모하게 된 것과 불타 버린 생가를 다시 원래대로 회복시키려는 '복원'이라는 개념이 그 속에 잠들어 있던 건드리면 안되는 존재를 다시 깨우는 일이 된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앗아간 지난 세월과 그가 선사한 모든 불행에 대해 영혼을 팔아서라도 되갚아 줘야 한다고 복수를 다짐하는 아들의 서사 또한 서사에 긴장감을 더해준다. 자, 저주를 품은 집을 복원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긴 세월 동안 잠들어 있던 생가의 비밀은 무엇일지 궁금하지 않은가. 요즘같은 계절에 읽으면 공간의 온도가 서늘해 질만한, 한국적 요소가 담긴 오컬트 호러의 정수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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