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멸의 문학, 배반의 민주주의 우리시대의 논리 3
김명인 지음 / 후마니타스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한 동안 뜸 했다. 이 '한 동안'은 조금은 긴 '한~ 동안'이다. 자그마치 한 달하고도 닷새는 지났으니 말이다. 그럼 무엇이 뜸 했는가? 뭐 다 아시겠지만, 서평쓰기가 뜸 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뜸하기 전에는 꽤나 많이 썼나보다 하면, 또 그건 아니지만서도, 한 달에 두서너 편은 꾸준히 서평을 써왔다. 일주일에 한 권 이상씩은 꾸준히 읽어 왔고, 그 중에서 몇 권여를 서평으로 남겨왔다. 하지만 요새는 한 달 이상을 쉬었다. 그렇다고 책 읽기를 쉰 것은 아니다. 단지 서평만을 쉬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왜 뜸 했을까?

  몇 가지 이유를 대는 것은 어렵지 않겠다. 우선 현재의 처지가 독서의 여유만을 가지기에도 궁핍한 처지이고, 대략적으로 심리적인 압박과 부담 등으로 인해, 서평쓰기를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이유라면 이유다. 그렇기 때문인지, 서평을 쓰는 것은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마음의 여유가 없이 무턱대고 읽어 내려간 독서는 서평으로 되새김할 건덕지가 남지 못했고, 그런 상태에서 수박 겉핥기식 서평은 무의미하기에, 나는 한~동안을 서평을 쓰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왜 "한 동안 뜸 했었지"를 말하는가?

  아시다시피, 이제 그 '뜸'함을 접고 한 권의 책에 대해 서평을 남기고자 함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알라딘 서평단 모집에 응모해 당첨되어 책 한 권 받아놓고 반드시 읽고 서평을 써야하는 것처럼 그러한 각오와 목적을 가지고 읽기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책도 공으로 얻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서평을 써야하는 강제와 의무를 없었다.

  이 책을 얻기까지의 경로를 얘기하자면, 다분히 나의 개인사가 조금은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어차피 이야기하는 판에 조금 적나라해 보도록 하겠다. 어느 날 이 책의 저자가 나에게 이 책을 내밀었다. 친필 사인과 함께 건네 온 이 책은 저자에게 있어서나, 나에게 있어서는 조금은 의외의 책이었다. 왜 의외냐? 우선 저자와 나와의 관계가 스승과 제자의 관계이면서, 교수와 조교의 관계로 맺어져 있다는 사실을 밝혀야겠다. 그래서 어느 정도 저자의 일거수 정도는 알고 있었다고 생각되었기에, 어떤 책을 출간하기 위해 준비 중이라는 정도는 미리 입감할 수 있었을 것인데, 어느 날 문득 내민 이 책은 그 감지망에 전혀 탐지되지 못했었기에 나에게 의외의 책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 책은 저자에게도 의외의 책이었다.

  "이 글들을 이렇게 엮어서 책으로 묶는다는 것은 나로서는 생각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이 책의 발상은 순전히 후마니타스 편집부의 것이다. 처음 후마니타스의 편집진들이 인천까지 나를 찾아와서 쓴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이 책의 출판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나는 사실 난감한 심정이었다. 자기 글을 사랑하지 않는 글쟁이는 없는 법이지만 그래도 이런 잡다한 글들을 묶어서 칼럼집이다 에세이집이다 하고 엮는 일들이 그리 자랑스러운 일이 못 된다는 사실을 오래도록 학습해 왔던 나로서는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저자의 본 의도는 없었던 것이다. "(후마니타스의 편집진들은) 칼럼들을 전부 수집해서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고 심지어는 홈페이지에 끄적거려 놓은 낙서들까지 전부 원고화해 놓고, 지금과 같은 이 책의 '컨셉'까지도 이미 그려 가지고 온 것이었다." 그랬으니, 이 책을 안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아하! 그래서 나나 저자에게도 의외의 책은 의외의 책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내가 왜 이 책을 서평을 쓰기위해 처음부터 읽기를 시작하였을까? 공으로 받았으니 답례상의 서평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서평을 쓰기에 어느 정도의 주저함을 일으켰으면 일으켰지 서평을 써야한다는 부추김은 절대 되지 못했다. 괜스레 써 놓은 서평은 스승에게 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왜 쓰는가?

  나는 사실 이 책을 나와 저자와의 관계를 어느 선에서 뛰어넘어 보고 싶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뛰어넘어서, 내가 모시는 교수님이라는 관계를 뛰어넘어서, 단지 한 일반 독자로서, 그냥 한낱 인문학도로서, 문학을 사랑하는 청년으로서, 문학평론가 김명인을 읽고자 했던 것이다. 80년대를 불꽃처럼 살아온 김명인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를 읽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 책의 서문격인 머리글을 읽고서 확실히 굳힌 생각이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의 성격이 어떤 면에서는 그의 내면까지를 읽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지금은 그 예측이 굉장히 잘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내가 저자를 알게 된 것은, 대학 4학년 때이다. 우리 과에 새로운 교수님으로 저자가 부임했던 것이고, 그럼으로써 스승과 제자의 관계-맺기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졸업을 하고, 한 번의 시험해서 낙방을 하고 있던 차에, 과 조교가 되면서, 교수와 조교의 2차 관계-맺기가 이루어졌다. 사실 그를 처음 보고, 그의 이름을 들었을 때, 나는 그가 시인인 줄로 알았다. 서점에서 시인 김명인의 시집을 보았고, 거기에 사진 대신 박혀있는 캐리커처를 보았을 때, 저자와 얼핏 비슷해 보여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에 지나지 않았다. 시인 김명인 만큼이나 유명한 문학평론가 김명인이었던 것이다.

  사실 나는 민중문학논쟁을 일으키고, 한국민중사사건으로도 유명한 저자 김명인에 대해서는 전에 아는바가 전혀 없었다. 그가 어느 정도의 유명세를 탔는지도 몰이다. 그가 80년대 중반에 문학평론가로 등단해서 잠시 활동하다가, 90년대 초반 평론을 긴 세월 접었기 때문에, 어쩌면 그러한 상황이 그의 이름을 듣지 못하게 했던 것일 수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하여간 새로운 교수님을 맞이하여 나는 그의 책 <<자명한 것들과의 결별>>(창비, 2004)을 우선 사보게 되었다. 여기에서 어느 정도 그에게 문학평론가로서의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날카로운 시각, 비판적 의식, 그리고 그의 힘 있으면서도 유연한 필치에 일단 합격점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그의 두 번의 투옥, 80년대 학생운동, 한국민중사사건 등에 연루되었다는 사사(私史)를 알게 되면서, 그리고 한창 평론/비평 활동을 하다가 중도에 갑자기 '불을 찾아' 떠난 일 등을 듣게 되면서, 그의 인간적 이력과 내면이 무척이나 궁금해오던 차였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로구나 싶었다. 그것은 충족되었다. 다만 그의 정치적, 문학적 측면에만 국한되었지만, 그것으로도 나는 충분하다. 그의 다른 면은 그와 함께 학교생활을 하면서 어지간히 보아왔기 때문이다. 사실 살짝 그의 일반생활을 보자면, 그의 날카로움과, 예리한 비판적 시각은 찾아보기 힘들다. 사진을 좋아하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학생들에게 매우 자상하고 친근하게 다가가는 것들을 보면, 그의 필치와는 어쩌면 상극이고, 어찌 보면, 참 좋은 대조적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도 생각된다.

   이 책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환멸의 문학', 즉 현재의 문학이라는 것에 대한 그의 견해와, 비판, 그리고 그것의 대안 등을 보여주고 있으며, '배반의 민주주의'는 그의 정치적 면에 대한 단상들을 모아두고 있다. 제목의 배치와는 다르게, 책의 전체배치는 정치면을 앞에, 문학에 대한 것을 뒤에 두고 있을 따름이다.

  이 책에서 그는 우선 정치에 대한 배신감을 말한다. 80년대 학생운동의 중심에 있던 그에게, 90년대를 거쳐 이룩한 민주주의가 2000년대에 들어 '배반'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신식민지화, 미국의 제국주의적 논리, 신자유주의 세계화 등, 한때나마 희망을 걸었던 '노무현 정권'의 무책임함에 대한 강한 배신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미국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전쟁광적인 부시 정권과, 그에 아무런 자존감 없이 밀약을 거듭하는 현 정권, 아울러 미국을 신격화하고 우상화하는, 영원한 우방으로 착각하는 우리의 보수세력들, 그들에 대한 저자의 강한 분노를 읽어낼 수 있다.

  아울러 이 장들에서는 그의 다양한 관심사와 넓은 지식, 그리고 인간적 면모, 가족에 대한 사랑, 그리고 소수자에 대한 그의 관심 등, 그의 다양한 인간적 측면들까지도 찾아볼 수 있다고 하겠다. 다분히 이 글들은 칼럼이면서, 시론(時論)이면서, 읽기이고, 분노와, 경고와, 고백과, 희망이 곳곳에 녹아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단편들이 하나의 커다란 무엇인가로 통일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후마니타스의 편집진들이 책으로 엮은 것이리라.

  문학에 대한 그의 단상들은 이 책의 후반부를 구성한다. 간단히 말하면, 80년대의 역사성의 문학, 그와는 이질적인 90년대의 일상성의 문학, 그러면서 문학권력화하고, 상업주의와 밀교하는 오늘날의 문학에 대해 다분히 반성적 성찰을 보이고 있으면서, 이 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80년대의 역사성과, 90년대의 일상성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각각의 단상들이 일관되게 유기적으로 펼쳐내고 있다.

  "일상성과 역사성의 결합을 어떻게 이루어 낼 것인가. 나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는 순간이 곧 우리 문학이 80년대와 90년대를 제대로 한꺼번에 넘어서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역사와 혁명의 이름 아래 일상성이 소거되거나 연역적으로 재구성되었던 것이 80년대라면 일상성의 발견, 혹은 복원이라는 이름 아래 역사와의 연결 고리를 놓쳐 버린 것이 90년대라고 할 수 있다. 일상 속에 드리워진 역사, 어느 결에 역사의 한 굽이가 되고 마는 일상. 이것을 하나의 텍스트 안에서 통일해 내는 일, 그리하여 우리의 이 지리멸렬하고 무상한 것처럼 보이는 삶이 사실은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 영원한 것을 향한, 가치 있는 것을 향한, 정녕 살아봄 직한 세상의 실현을 향한 간절한 움직임의 일부를 이루고 있음을 드러내 보여 주는 일은 과연 더 이상 불가능한 것일까."

  이처럼 저자는 "환멸의 문학, 배반의 민주주의"라는 제목처럼, 문학에 대한 환멸감, 정치에 대한 배신감을 격분에 차서 분노하고 비판하고 있는 것만이 아니다. 끊임없이 '어떻게'를 물어보며, 조심스레 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스스로 '잡문집'이라고 폄하하고 있는 저자의 태도에서 너무 겸손한 것이란 느낌을 받는다. 이 책은 일반 독자대중에게 '잡문집' 그 이상이 가능하게끔 해준다. 오히려 정치와 문학을 비판하고 있는 다른 어떤 책들보다, 쉽게, 그리고 친근히, 그러면서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 다가갈 수 있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이 글들이 나에게만은 바로 노신의 잡감문이고 리영희의 에세이들이다."

  내심 이 책에 대한 저자의 심중을 읽을 수 있기도 하다. 이 책은 저자에게도 "반가운 것도 사실이다." 내가 볼 때 '노신의 잡감문'과 '리영희의 에세이들'과 더불어 이 책을 또 한 권의 보기로 놓아도 좋으리라 생각된다. 내가 만약 미래에 이런 책을 내놓게 될 수 있다면 이렇게 서문에 써 넣으리라. "이 글들이 나에게는 노신의 잡감문이고 리영희의 에세이들이며, 김명인의 잡문집이다."라고.

(* 별을 다섯 개 주었다. 계면쩍은 일이긴 하지만, 하나를 빼고 4개를 주어볼까 했지만, 그래도 5개가 마땅해 보인다. 6개에서 하나를 빼어서 5개라고 해두기로 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멜기세덱 2006-10-12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바람구두님 말씀을 들었어요! 선생님께 괜히 누가 될까봐, 감히 '들이대'질 못 했습니다;; 죄송해요, 맨날 바람구두님 서재 구경만 하고, 인사 한 번 제대로 못 드렸습니다...ㅎㅎ. 아참 글고, 서재명은 사실, 선생님 아뒤를 보고 흉내를 낸 거에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