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권력 - 개마고원신서 26
강준만.권성우 지음 / 개마고원 / 2001년 12월
평점 :
절판


  권력(權力)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힘'이다. "남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이고, "복종 시키는 힘"이다. 그렇다면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 '힘'의 근원에 따라 그 권력은 정당성을 획득한다. 그 '힘'의 근원이 권력의 소유자에게 있는가? 아니면, 그러한 권력의 부여자(그러한 권력에 대해 인정하고 복종한 자)에게 있는가? 어쩌면 이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와도 같을 것이고, 또한 다를 것이다. 권력의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것은 그 둘의 공존과 복합의 산물인 것은 아닐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인류의 시조로 내셨을 적부터 거기에는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아담을 먼저 만들어 아담에게 권력이 있었다 말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아담은 하와보다 육체적 힘이 있었다.(이것은 현대의 남녀의 육체적 특성을 고려했을 때에 가능하다고 하겠다. 누가 알겠는가? 하와가 아담보다 더 덩치가 컸을지!) 둘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노동을 해야했고, 육체적 힘이 강한 아담은 그 노동에 더 효과적이었을 터이다. 하여튼 하와는 이러한 아담에게 '복종'함으로써 그에게 권력이 있음을 '인정'하였을 터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이 어디 인류의 조상이 될 수 있었겠는가?

  인간의 관계는 사회를 형성해 나아감에 있어서, 이 권력의 소유와 인정을 반복하여 왔던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가정을 구성하고, 집단을 구성하며, 나아가 부족과 나라를 형성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과정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한 사회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는 어느 곳, 어느 것 하나 권력이 존재할 수 밖에는 없게 되었다. 그렇게 볼 때 권력은 타협과 공존과 평화의 또다른 이름이 아닐까? 하여간에 작금의 우리사회 어디에도 권력 아닌 것은 없다.

  현대 사회에 있어서 권력은 정치권력, 이른바 정권으로 대표된다. 여기에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권력이 있으니, 그것은 경제적 권력, 천하게 말하여 돈의 힘이다. 아차! 태고로부터 권력의 상징이 무력이 빠질 수는 없겠다. 이밖에 사회는 곳곳에서 권력과 그에 대한 복종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힘은 있으되, 복종이 없다면, 그 힘의 행사에 대해 그 누구하나 인정함이 없다면, 그것은 권력이 될 수 없다. 애써 그것을 권력이라 한다면, 정당성 없는 권력이 되겠다. 이 태초부터 존재하여 온 이 권력이라는 것은 그 정당성, 이른바 힘에 대한 인정과 복종이 있어야 함을 현대의 살아가는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곳에 권력이 존재한다고 하였으되, 여기 또 하나의 권력이 있으니, 그것은 권력 아닌 권력, '문학권력'이다. 문학과 권력, 이 두 단어가 합성되어지리라고는 많은 이들이 생각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한다. 하지만 현대적 의미의 문학이라는 것은 근대의 산물이고, 이 근대라는 것은 어느 때보다도 힘의 논리가 지배하여 왔던 시기가 아니었는가? 이성의 힘이라 포장된 가장 야만적 살육이 진행되었던 근대에 형성되어, 현대(엄밀한 의미에서 현대라는 명명이 가능한가는 의문이지만)의 초첨단과학적 무력과 그보다 무서운 자본주의적 경제의 권력이 지배하는 이 사회에서의 문학에 권력이 존재하는 것은 무척이나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영국에서의 '문학'의 진흥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따져보면 '문학권력'은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것이리라.(테리 이글턴의 <<문학이론입문>> 서론<문학이란 무엇인가>와 제1장<영문학 연구의 발흥>을 참조하면 좋겠다.)

  더 따져볼 것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문학을 '한다'는 것에서부터 문학을 향유하는 것에까지 이 '권력'이 작용하고 있음은 그리 깊이 파고 들어가서 찾아내야 하는 어려운 문제는 아닐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누군가의 문학작품을 읽고 거기에 감명을 받았다고 할 때, 그 작품의 작가에게 일종의 문학적 권력을 부여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그런 종류의 작은 권력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나의 거대한 문학권력이 형성될 수 있고, 이미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권력은 앞에서 이야기한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 '문학권력'에 대한 비판이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문학계에서 작용하는 이 '문학권력'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현재의 대한민국 문학계에 존재하는 그 힘은, 정당하게 부여받은 '권력'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이 책 <<문학권력>>은 바로 그 정당성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권력의 정당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애초에 권력은 '인정'(복종)에서 오는 것이라고 하였으되, 그것은 지속적 인정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권력이라는 것은 끊임없는 권력에 대한 인정의 지속이 있을 때에는 그 정당성이 유지 존속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지속이 중단되어 회의되었을 때에 그 권력은 그 순간 정당성을 잃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부당한 권력이라 이름하지만, 그것은 더이상 권력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 <<문학권력>>에서는 현재의 우리 문학계의 권력의 정당성, 즉 그 권력이 오용되어 권력에 대한 회의와 의문이 만연하고 있음을 폭로하고 있다. 그렇다면 더이상 그것은 문학'권력'이랄 수 없다. 대신 그 권력에 물음표를 달아줄 수는 있겠다. 물음표를 달아 준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그 권력이 다시 정당성을 갖기 위한 자기 갱신을 해야한다는 것, 그리하여 다시금 그 권력에 대한 인종과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이 책의 표지에는 이런 물음을 던진다. "'한국 문학의 위기'는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가?"라는 물음. 그 물음 옆으로는 큰 글씨로 "문학권력"이라고 써 놓았다. 따라서 이것은 이 책이 표방하고 있는 지금의 문학'권력'에 물음표를 달아 놓아서, 이제 스스로 성찰하여 갱신하고, 다시금 정당성을 찾으라고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문학권력'이 왜 그 정당성을 잃게 되었는가? 역사적으로 권력은 자기 갱신을 모른다. 권력의 소유는 그것에 대한 소유욕을 낳고, 이러한 소유욕에 의해 잘못된 권력의 행사를 낳는다. 자연히 이것은 썩을 수 밖에 없다. 문학'권력'도 그러한 권력의 역사적 향방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일까? 자신들의 문학권력을 지속하기 위해 그것은 끌어들이지 말았어야 할 것들을 끌어드리고 말았다. 저열한 상업주의와 결탁하게 된 것이다. 자신들의 권력을 지켜줄 호의병들을 모아들였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문학에 과대한 상업적 포장을 하고, 대단한 문학인 것인냥 선전유포하고, 자본과 미디어와 결탁하여 결국은 문학대중들을 오도해온 것이다. 여기에는 또한 억압과 소외를 그 이면에 동반한다. 그러한 권력옹호를 지탄하고 비판하는 이들에 대한 억압과 폭력이 행사되는 것은 또한 오염된 권력의 당연한 처사 아니었는가?

  온갖 잡다한 문학권력유지 행위가 자행되어 왔다. 말이 좋아 '주례사비평'이지 그것은 "100% 30kg 감량"이라고 선전하는 다이어트식품 사기와도 같은것 아닌가? 자신들을 비판하는 그 어떠한 행위도 원천차단을 행하고 있음을 이 책에서는 폭로하고 있다. 어쩌면 이 문학권력은 이제 썩을 대로 썩은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현재까지의 오염된 권력의 패퇴에는 그 부작용이 공공연해지고, 더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때에, 이러한 폭로의 함성이 거세졌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문학계의 '권력'은 그러한 단계에 접어든 것은 아닐까하는 작은 기대를 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는 강준만의 이 책이(강준만과 권성우의 공저라고는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강준만의 작업이다. 사실 강준만의 편역이라함이 더 정확하겠다.) 나온지 5년이 되었지만, 아직 이 '문학권력'은 무너지지 않았음을 본다. 사실 그 시간이 그리 긴 시간이라고 하기에는 오늘날의 문학권력이 너무나 공고한 것은 아닐까한다. 그리하여 이 책은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끝으로 나는 이 책을 평가하면서 별 5개를 주었다. 책 자체의 평가라기 보다는 이 책에서 회의되고 비판되는 '문학권력'이 어서 빨리 정당해 질 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이 절실하여, 그에 대한 응원의 작은 힘이나마 보내주고자 함에서의 별 5개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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