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년 6월 권장도서 - 김훈의 (남한산성)
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김훈의 소설을 읽었다. 두 번째다. 『칼의 노래』가 그 처음이었다. 사실 김훈이란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이 『칼의 노래』덕분이다. 아니 정확히는 노무현 대통령 때문이었고, 더 정확히는 사상 초유의 탄핵사태 때문이었다. 노무현의 탄핵은 대한민국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민주공화국 역사상의 치욕이라기 보다는, 스타크래프트의 종족간 싸움보다도 질 낮은 블랙코미디였다고 난 생각한다. 우리 역사에서 이 탄핵의 처음이(이 탄핵으로 물러난 것은 아니지만) 노무현이었다는 사실이 웃기는 노릇이라는 것, 노무현을 탄핵한 세력이 진작에 탄핵되어 없어졌어야 할 인간들이었다는 사실이 이 블랙코미디를 가능케 한다.

『칼의 노래』가 탄핵이라는 이벤트에 당첨되었던 것 때문인지, 외롭고 고독한 사나이 노무현의 간택을 받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 모든 때를 잘 만났기 때문인지, 무엇보다도 김훈의 소설이 탁월했었기 때문인지,  그것들을 가릴 필요는 딱히 없다. 하여간 중요한 것은 이 소설이 시류를 탔다는 것이고, 김훈의 소설이 얼마나 탁월했던 것인지 아닌지에 관계 없이 세상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는 것, 그로 인해 어느 정도 과대평가 되었을 수도 있고, 그로 인해 그런 것에 상관 없이 많이 팔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모든 것을 고려한다고 해도 소설이 개떡 같은 탄핵세력 같았다면야 아무리 떠들어도 읽히지 않았을 것은 자명한 노릇이다. 내가 읽은 『칼의 노래』는 이러한 연유에서 읽혀졌을 가능성이 컸고, 또한 그런 연유에서인지 그리 달가운 평가가 내려지지 않는 작품이기도 했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읽었다. 김훈이 『칼의 노래』로 인해 세상의 주목을 받으면서, 잇다른 작품들을 내어놓고, 대중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우리나라 소설계의 거목으로 부각된 지금, 이 소설 『남한산성』은 그런 이유들로 세간의 입에 오르내려 떠들석하다. 『칼의 노래』와 어느 정도 겹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 세간이라는 것은 주로 언론을 통해서 주도되고 있는 것인데, 이전의 것은 시류를 잘 탔다는 점과 지금의 것은 김훈이라는 이름의 상업성에서 오는 것이라는 점에서 차이는 있다. 어쨌건 나는 『남한산성』을 읽었고, 지금 리뷰를 쓰고 있다. 『칼의 노래』에는 리뷰를 다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그리고 지금 리뷰를 쓰는 이유는 리뷰를 쓰게끔 하는 무언가 마음의 동함을 『남한산성』에서 받았다는 것이기도 하다.

우선 이 책 『남한산성』은 빠르게 읽힌다는 데에 나름의 장점이 있겠다. 소설이 빠르게 읽히고 느리게 읽힘에 그 장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빠르게 읽힌다는 것은 느리게 읽히는 것보다 서사적 강점을 더 많이 지닌다는 것을 뜻할 수는 있다. 빠르게 읽힌다는 것은 복잡스럽지 않다는 것이고, 서사의 진행이 간명하다는 것이며, 그 간명한 진행이 지루하지 않고 흥미롭게 이어진다는 것을 뜻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소설 『남한산성』은 바로 그런 것들을 분명 지니고 있었다. 밤의 야심을 틈타 읽은 이 소설을 새벽녘까지 끌고와 마침내 모두 읽어낸 후에, 이른 아침 이렇게 리뷰를 쓰게하는 그 힘을 분명 가지고 있다.

  "칸은 붓을 들어서 문장을 쓰는 일은 없었으나, 문한관들의 붓놀림을 엄히 다스렸다. 칸은 고서를 끌어 대거나, 전적을 인용하는 문장을 금했다. 칸은 문채를 꾸며서 부화한 문장과 뜻이 수줍어서 은비한 문장과 말을 멀리 돌려서 우원한 문장을 먹으로 뭉갰고, 말을 구부려서 잔망스러운 문장과 말을 늘려서 게으른 문장을 꾸짖었다. 칸은 늘 말했다.
  ― 말을 접지 말라. 말을 구기지 말라. 말을 펴서 내질러라."
 (284쪽)

김훈의 소설은(이 소설 뿐만 아니라, 『칼의 노래』에서도) 칸으로부터 붓놀림의 엄한 다스림을 받은 듯 하다. "문채를 꾸며서 부화한 문장", "말을 멀리 돌려서 우원한 문장", "말을 구부려서 잔망스러운 문장", "말을 늘려서 게으른 문장"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칸의 이런 엄함으로 인해 "글을 짓는 일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던 것 처럼, 이 소설을 읽어내는 데에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것인가 보다.

이 소설의 이런 빠르게 읽힘과 더불어 장점이랄 수 있는 것은 여러 인물군상의 다양한 구도설정에 있다. 얼핏 이러한 구도가 복잡스러움으로 얽히고 설킬 수 있지만, 여기서는 지극히 간명한 문체로 처리되면서 그런 복잡성을 타파한다. 여러 갈래의 샛길이 있고, 그것은 큰 길, 곧 대로를 향하다가, 다시금 두 갈래의 길로 나뉜다. 그 두 갈래의 길은 본래의 길이었다. 길이 갈리고, 다시 합치고, 원래의 두 길로 돌아가는 이 구도의 설정은 길의 얽히고 설키며 이루어지는 긴장감과는 다른, 간명함의 극치를 이루는 데서 오는 어떤 이질적 종류의 긴장감을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더욱 빠르게 읽히는 힘을 발휘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버티는 힘이 다하는 날에 버티는 고통은 끝날 것이고, 버티는 고통이 끝나는 날에는 버티어야 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었는데, 버티어야 할 것이 모두 소멸할 때까지 버티어야 하는 것인지 김류는 생각했다. 생각은 전개되지 않았다. 그날, 안에서 열든 밖에서 열든 성문은 열리고 삶의 자리는 오직 성 밖에 있을 것이었는데, 안에서 문을 열고 나가는 고통과 밖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고통의 차이가 김류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날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김류는 느꼈다." (94쪽)

이것은 김류의 길이다. 김류 앞에는 김상헌의 길과 최명길의 길이 두 갈래로 나 있었던 것이다. 그 길 사이에서 김류는 시간의 길을 가고 있다. 어느 길로든 합쳐져야 할 것인데, 그 합쳐져야 할 길이 "김류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시간을 기다리면서 그 가운데의 길로 느리게 걸음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길은 임금의 길과도 조금 다르다. 임금의 길은 최명길의 길과 김류의 길 사이에 있는 또다른 길이었는지 모르겠다. 묘당의 길도 제각각이며, 체찰사의 길과, 김상헌의 길과, 최명길의 길과, 당상의 길과, 당하의 길과, 간관의 길이 또한 제각각 달랐다. 성안의 백성의 길은 저마다  다른 듯 하나 그 길은 어쩌면 같은 길, 삶기만이라도 하자는 길이었다. 정명수의 길은 또다른 삶의 길이었다. 비난하지 못하는 길, 어느 누구의 길도 나무랄 수 없다. 제각기 나름대로 "아름다운" 길일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수어사는 어느 쪽이오?
  이시백이 대답했다.
  ―  나는 아무 쪽도 아니오. 나는 다만 다가오는 적을 잡는 초병이오."
(218쪽)

이시백의 길은 이처럼 또 달랐다. 여기에 자못 김훈의 목소리라고 여겨지는, "조선에 그대 같은 자가 백 명만 있었던들"이라는 언설은 쓸데없이 보이기까지 한다. 이시백은 그것이 그의 길이었거늘, 이시백 같은 자가 많지 않았음을 한탄하고 있을 필요는, 이 소설에서는 하등 없어 보인다.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 받는 자들의 편이다."라는 김훈의 말은 이시백과 겹쳐져서는 아니된다. 그런 점에서 이 한탄이 쓸데없어 보이는 것이다. 과연 김훈은 누구의 편이란 말인가? 김훈의 길은?

그렇다면 '고통 받는 자들'은 누구일까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임금으로서나 당상으로서나 당하로서나 저 나름의 고통이 있겠으되, 김훈의 '고통 받는 자들'은 민중으로 기운다. 그러므로 김훈의 길은 민중의 길로 합쳐진다. 임금이 성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것은 임금의 길, 종묘사직을 보존하는 길이었다. 그 길에 다시 당상과 당하의 길이 합쳐지고, 양반의 길이 합쳐진다. 남겨진 성 안에는 김훈의 그 '고통 받는 자들'의 길이 있다. 이시백은 성 안에 있었지만 그도 다시 성밖의 임금의 길로 합쳐져야 할 것이다.

  "백성들이 날마다 몇 명씩 성 안으로 돌아왔다. 봄농사를 시작하기가 너무 늦지는 않았다.
  서날쇠는 뒷마당 장독 속의 똥물을 밭에 뿌렸다. 똥물은 잘 익어서 말갛게 떠 있었다. 쌍둥이 아들이 장군을 날랐고, 아내와 나루가 들밥을 내 왔다. 다시 대장간으로 돌아온 날 나루는 초경을 흘렸다.
  나루가 자라면 쌍둥이 아들 둘 중에서 어느 녀석과 혼인을 시켜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며 서날쇠는 혼자 웃었다."
(363쪽)

이것이 곧 민중의 길이다. 김훈은 이렇게 그들의 편을 들고 있다. "봄농사를 시작하기"에 "너무 늦지는 않았다"는 안도감 속에 민중의 삶의 길이 열렸다는 희망이 담긴다. 나루가 초경을 했다는 사실은 또한 그 희망의 씨앗이다. 서날쇠의 웃음 속에서 민중의 아들과 또한 그 딸들은 질긴 생명을 살아가면서, 늦은 봄농사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그것이 곧 민중의 길이고, 그들 편에선 김훈의 길이다. 그길은 곧 희망의 길이다. 임금의 길에서는 그런 희망의 메세지를 김훈은 남기지 않았다.

흔히 임란과 호란을 우리는 우리 민족의 치욕스런 한 장면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임란과 호란의 치욕의 비중은 조금은 다르게 느껴진다. 우리 인식 속에 더 큰 치욕은 임란으로 기억되며, 또한 더 큰 자랑은 이순신 장군의 용맹함을 부각시키는 임란에 있다. 호란은 그러한 임란의 기세에 눌려 조금씩 잊혀져 간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호란의 그 치욕을 우리가 잊지 않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박씨전』이란 고전소설은 또 다른 종류의 『남한산성』이랄 수 있겠다. 요즘식으로 한다면 환타지계열이겠다. 호란의 치욕에 대한 반향으로서의 작품이 『박씨전』이라 한다면, 우리에게 호란의 치욕의 잊지 못함을 말하는 것은 그것으로 충분할 듯 싶다. 이 소설 『남한산성』은 '고통 받는 자들'의 편에서 이 땅의 고통 받는 민중의 길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지 싶다. 그 길을 김훈은 '남한산성'에 올라가 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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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훈이 "남한산성"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11-05 02:31 
    남한산성 - 김훈 지음/학고재 2007년 10월 31일 읽은 책이다. 올해 내가 읽을 책목록으로 11월에 읽으려고 했던 책이었다. 재미가 있어서 빨리 읽게 되어 11월이 아닌 10월에 다 보게 되었다. 총평 김훈이라는 작가의 기존 저서에서 흐르는 공통적인 면을 생각한다면 다분히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매우 냉정한 어조로 상황을 그려나가고 있다. 소설이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개입이 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읽었음에도 주전파..
 
 
프레이야 2007-05-28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의 리뷰입니다...

마노아 2007-05-28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감동 받았어요. 멜기세덱님 멋져요^^

Passionian 2007-05-28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작가의 필체에 영향을 많이 받으셨나보네요. 리뷰 문체가 완전 김작가 풍입니다.

멜기세덱 2007-05-28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이런 보잘 것 없는 것에도 감동하시면, 감동하실 일 너무 많으셔서 피곤하셔요...ㅎㅎ
마노아님> 제가 멋진 걸 이제야 알아 주시는 군요....ㅎㅎ^^;;
Passionian님> 과분하고 당치 않으신 말씀이세요. 부화한 문장, 우원한 문장, 잔망스러운 문장, 게으른 문장 투성이인걸요. 김훈 작가에게 누가 될 따름입니다. 다만 부끄럽게도 기분은 좋네요..ㅎㅎ

2007-07-02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07-02 17:09   좋아요 0 | URL
^^;; 저의 첫 트랙백이에요...ㅎㅎㅎ

책속에 책 2007-08-03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 리뷰를 긴 줄 모르고 읽었어요..서평 잘 읽었습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조금 전까지 나는 『눈먼 자들의 도시』를 여행하고 오는 참이다. 단 한 사람을 뺀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눈이 먼, 혼란과 무질서와 더러움과 굶어 죽어 지독한 썩은내가 진동하는, 굶주린 개와 고양이가 죽은 시체를 물어뜯는, 그런 도시를 여행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긴장감과 지독한 더러움과 냄새를 참아내야 하는 고통을 수반하는 고난의 여행이다. 난 지금 그 여행으로 충분히 지쳐있으면서도 이렇게 즉각적으로 리뷰를 끄적이고 있다. 왜냐하면 아직 그런 긴장과 괴로움은 해체되지 않았으며, 자칭 눈 뜨고 있다는 나라의 사람들에게 눈먼 자들이 주는 어떤 일침을 가하기 위해서.

  자동차를 몰고 집으로 가던 도중, 횡단보도 앞에서 빨간불에 멈춰선 김에, 보는 능력도 멈춰 서버렸다.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를 시작으로 한편 그를 도와주면서 그의 자동차를 훔친, 그러나 그의 눈멂까지도 훔쳐버린 눈먼 자동차 도둑. 첫 번째로 눈먼 남자를 진찰한 의사, 그에게 진찰받은 아이, 노인, 검은 색안경을 쓴 여자. 이들은 눈 멂은 전(全)도시적으로 전염되어버린다. 이른바 ‘눈먼 자들의 도시’가 된다. 그러나 그 도시에 단 한명의 눈뜬 자가 있으니, 의사의 아내는 이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이단아가 된다. 모두가 눈이 멀었을 때 단 한 명의 눈뜬 자는 타자일 수밖에 없겠다.

 

  주제 사라마구는 이 소설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할까? 비교적 간단해 보인다. 우리가 눈을 떴다고 우쭐대지 마라. 너희들의 눈뜸은 눈 멂만 못하느니라. 우리가 확실히 이 세상을 본다고 여기지만, 본질적으로 우리는 온통 하얀 백색의 세상을 보는 것이라고, 너희가 보는 것은 이 세상의 진실, 이 사회의 본질, 그리고 우리 자신의 본모습을 지극히 하얗게 바라보는, 백색 악의 질병, 곧 눈멂의 상태에 갇혀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눈 크게 뜨고 우리 현재를 잘 살펴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눈뜬 자들의 삶의 모습과 세상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다만 눈뜸과 눈멂의 차이일 뿐이다. 그 차이를 부각시킨다면 ‘환상적’ 리얼리즘이라고 하면 되겠다. 다만 환상적이든 그렇지 않던 간에, 리얼리티는 이 소설에 살아있다. 우리 눈뜬 자들의 도시는 여기 『눈먼 자들의 도시』에 올곧이 그려져 있다. 너무나도 리얼리티하게 말이다.

 

  눈이 먼 사람들은, 그들의 눈멂이 위험한 전염병으로 인식되는 순간, 그들은 통제되어지고 감시되어진다. 이것은 곧 이 사회의 눈뜬 자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다름 아니다. 우리 눈뜬 자들은 이 사회적 정치적 체제 속에서 감시되고 통제되어진다. 오늘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의 외곽에서는 총을 들고 경계를 서고 있다. 다만 그들은 우리의 적으로부터 우리를 지킨다고 거짓말 치고 있을 뿐이다. 이 통제된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눈먼 자들의 비인간적, 비윤리적, 비도덕적, 비인격적, 수많은 非적 행위들은 또한 우리 눈뜬 자들의 공간에서도 우리가 알게 모르게, 오히려 눈뜬 자들의 공간에서보다 더 잔인하게, 더 다양하게 자행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주제 사라마구의 이런 의식 이면에는 인간의 본질적 삶의 방식 혹은 진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를테면, 첫 번째로 눈먼 남자의 자동차를 훔친 도둑이 눈먼 자들 중에서 가장 첫 죽음의 희생자로 기록되어짐으로써 그 죗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다는 점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인간적 본질, 곧 인간적 윤리의식과 도덕의 본질은 바로 이런 보편적 권선징악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죽음의 순간에 개과천선의 태도를 보인다. 이것 또한 보편적 개념의 윤리의식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이 소설에서 주의 깊게 볼 대목 중의 하나는 바로 눈먼 자들의 눈먼 자에 대한 약탈과 강간이 아닐까 한다. 눈먼 재소자들에 대한 눈뜬 군인들의 무차별적 총알 세례와는 또 다른 방식의 우리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다. 인간의 지배욕과 탐욕, 그리고 모든 비인간적 요소를 작가는 이 상황에 담아 재현하고 있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비인간적 죄악의 모습, 현대 사회체제에서 자행되고 있는 이러한 약탈과 강간을 우리는 이 소설적 사건에서 축약과 상징적, 비유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눈뜬 자들의 세상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사라마구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눈먼 자들의 도시』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다름 아니라는 얘기인데, 그렇다면 거기에는 어떤 희망적 요소를 가지고 있을까? 거두절미 하건대, 주제 사라마구는 무엇보다 의사의 아내의 희생적 행위와, 인간적 연대와 유대를 그 희망, 곧 인간성의 회복과 인간 본질의 회복의 희망적 요소, 원인자로 보고 있다. 그렇다. 이 아가페적 사랑의 희생과 인간관계의 연대와 유대는 이 소설의 다양한 장면에서 보이는 약탈자와 지배자들, 탐욕과 권력의 이합집산과는 그 본질적 성격이 전혀 다르다. 그것은 생명의 연대요 유대인 것이다. 그것이 있기에 우리 눈뜬 자들의 도시에는 아직 희망이 있다. 우리 눈뜬 자들의 이 도시 어딘 가에도 ‘의사의 아내’는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작가의 개입이다. 적당한 용어를 찾자면 편집자적 논평 비슷한 것도 삽입되어 있는 것 같다. 이 소설의 끝자락에서 첫 번째로 눈먼 남자의 집을 찾아가서 만난 작가인 눈먼 남자가 바로 주제 사라마구의 현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 장면은 다소 개연성이 부족할 수 있다. 왜냐하면 눈이 먼 세 가족이 움직였다면 이산가족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함께 움직여야 마땅하건만, 눈먼 작가 남자만 남과 여자인 아내와 딸만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서 개연성을 얻기가 어렵다. 결국 작가라는 인물과의 만남은 이 소설에서 불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편집자적 논평의 성격을 띤다면 얘기는 다르겠다.

 

  이 장면에서 작가라는 인물은 주제 사라마구의 가면이다. “내가 여자들이라고 말한 사람들은 내 아내와 두 딸이오, 내 말은 언제 여자들이라는 말을 쓰는 게 좋은지에 대해 내가 알아야 한다는 거요, 나는 작가요, 우리는 그런 것들을 알아야 하는 사람들이지요.” 이런 작가라는 존재에 대해 낯간지러운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는 기분이 좋았다. 상상해 보라, 작가가 내 아파트에 살고 있다니”. 주제 사라마구는 작가라는 인물 설정을 통해 작가라는 존재의 본질적 모습에 대해 살짝 언급한다. “이제 아무도 그걸 읽을 수 없소, 따라서 그 책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소.”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눈이 먼 독자들에게는 더 이상 작가라는 존재는 의미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오늘 우리 눈뜬 독자들의 현실에도 적용되는 사라마구의 쓴 소리일 수도 있다. “나는 내 집에 이성에 귀를 기울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소”, 결국 이 세상에 이성이 없는 비인간들에게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의미 없는 존재가 되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엿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란 삶에서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인내나 얻는 사람”이기에 그는 여전히 작가적 삶을 위해 인내하고 있는 것을 지도 모른다. 이런 소설을 통해 세상 사람들, 곧 눈을 뜨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이성을 되찾을 수 있도록 호소하면서 말이다.


  “지금 이대로 살아가자는 거요, 지금은 우리 둘 다 살 수 있는 곳을 가지고 있소, 나는 내 아파트가 어떻게 되는지 계속 주의 깊게 지켜볼 생각이오, … 방금 또 하나의 해결책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소, … 당신들이 이곳으로 들어오고, 우리는 이곳에 당신네 손님으로 사는 거요, 이곳은 우리 모두가 살 수 있을 만큼 넓으니까”


  여기에는 작가의 주제의식이 담겨 있다. ‘이대로 살아가자’는 것은 곧 의사의 아내를 중심으로 한 7인의 연대와 유대를 유지하자는 것이다. ‘또 하나의 해결책’은 또 다른 연대와 유대를 이루고 살아가자는 것이 된다. 곧 첫째도 연대요, 둘째도 연대하는 삶의 방식이다. 이것이 사라마구가 말하고 있는 이 눈 떠 있다고 착각하는 우리 눈먼 현대인들에게 말하는 본질적 눈 뜸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 하나의 재미있는 요소는 이런 작가의 개입이 이 소설의 리얼리티, 혹은 온 도시의 사람들이 눈이 멀었다는 비현실적인 논리를 독자들로 하여금 보다 현실화 시켜 받아들이도록 하는 효과를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 나는 지금 책을 쓰고 있소”라고 말하면서 마치 작가 자신이 이 환상적 현실을 경험하여 진술하고 있다고 여기게끔 독자들을 유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 함정은 “작가란 다른 사람들과 똑같소, 모든 것을 알 수도 경험할 수도 없소, 따라서 물어보아야 하고 상상해야 하오.”라는 서술을 통해 살짝 피해갈 수 있는 여지를 주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여기 작가는 이 소설의 주인공들에 의해 쓸려면 똑바로 쓰라는 호통을 듣기도 한다. “말을 알아야 할 의무가 있어요, 따라서 그런 형용사들은 우리에게 아무 쓸모가 없다는 걸 아실 거예요”라고 소설 똑바로 쓰라는 호통이다.

 

  이상의 것들 이외에 이 소설은 재미있는 요소들은 많이 가지고 있는 작품임에 분명하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본질적 문제의식, 그리고 보편적 문제 해결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보기 드문 수작인 것도 사실이다. 또한 작가의 문체에서도 독자로 하여금 소설적 상황을 보다 사실적으로 혹은 몰입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문장부호의 극소적 사용이다. 특히 대화의 상황에서 대화를 나타내는 “”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다만 반점만을 찍고 있는 점이다. 문자 기호 자체가 시각성에 기반을 두고 있어 이 소설적 상황과는 적절한 배합을 이루지 못하는 성격이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문자기호의 시각적은 극단적으로 해체시키면서, 말하자면 대화를 문장부호를 사용하여 처리할 경우의 시각성을 없애버림으로써 소설적 상황에 독자로 하여금 일부분이나마 체험하게끔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은 작가의 문체적 특성에 기인하면서 작가의 주도면밀한 소설적 구성이라고 볼 수 있겠다.

 

  여러모로 좋은 작품을 읽는 기쁨이 남는다. 우리 사회에 대한 주제 사라마구의 환상적 리얼리즘의 면모는 이 작품 하나만을 읽어 본 나에게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주제 사라마구의 다른 작품들을 사라, 마구! 곧 마구 사서 읽으라는 암묵적 강요로 작용하기에 충분하리라. 우리 사회의 내면적 눈먼 장님들인 우리들에게 세상을 보다 ‘주의 깊게’ 살펴보고 인간의 본질과 본성을 회복하여 진정한 눈을 뜨도록 요구하고 있는 작품이 바로 이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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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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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예술이 다 그럴 것이지만, 특히나 문학은 발품을 많이 팔아야 한다. '문학'하면 시와 소설로 대표되는데, 시를 쓴다는 것이 얼핏 머릿속으로만 상상하여 꾸며내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기실은 발품을 팔아가며 세상을 보고 자연을 보고 그 안의 온갖 사물을 보고 또 보아야 참 된 몇 줄의 시 한편이 나오는 것이다. 좋은 시인은 발품을 많이 판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일일이 조사해 본 결과는 아니다. 의심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있을 것이다.'로 읽으면 될 것이다.)

그런데 뭐니 뭐니 해도 소설만큼 작가의 발품이 많이 필요한 것을 찾기는 어렵다. 『토지』를 쓴 박경리 선생이나 『아리랑』『태백산맥』『한강』의 대작을 완성한 조정래 선생 등이 보여주듯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수십 수백 리 길의 발품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발품이라는 것이 다만 돌아다니는 것뿐만은 아니다.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 정리해야 하고, 등장 인물에 알맞은 언어, 문화, 생활까지, 나아가 다양한 분야의 왕성한 독서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품을 모두 팔았을때 한편의 소설은 탄생될 수 있는 것이다.

살만 루슈디의 소설 『분노』를 일으면서 먼저 든 생각이 바로 루슈디의 발품이 무척이나 많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해박함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한 편의 소설을 쓰기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의 치밀한 구성 또한 이러한 발품의 노력의 성과이기도 할 것이다.

살만 루슈디는 독서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이름이다. 어쩌면 그의 책 한 권쯤은 읽어낼을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전자일 뿐이고, 그가 『악마의 시』를 써 시끄런 소동을 일으켰다는 정도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또한 쉽게 읽힐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익히 알고 있기도 했다. 이 책 『분노』를 읽으면서도 나는 그러한 내 생각을 마냥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일주일간 이 책을 읽어내면서 시종일관 앞장으로 돌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말릭 솔랑카 교수'다. 그는 영국의 '사상사 학자'였고, '인형 제작자'였고, 순간의 '분노'에 휩싸여 처자식을 죽이려했던 적이 있었으며, 이때문에 처자식을 버리고 뉴욕으로 도피한다. 뉴욕에서 은둔하며 지내던 그의 삶을 속내 깊이 파고드는 서술로 이 소설은 구성되어 있다. 그는 뉴욕으로 건너온 이후에도 그가 제어하지 못하는 순간적 '분노'를 표출하고, 이로인해 고통스러워한다.

이 소설의 테마는 바로 이 '분노'이다. 그가 왜 분노하고, 어떻게 분노하는지 명쾌히 말해주지 않는다는 데에 이 소설의 난해함이 있으며 동시에 긴장감이 생긴다. 그가 무엇에 분노하는가 또한 명확하지 않다. 겉만 본다면 그의 분노는 정신이상에서 기인하는 듯하다. 한마디로 '미친 것'이다. 간혹 그는 몽유병 환자같은 행동을 보인다. 하지만 그것 또한 확실하게 서술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분노는 사소한 것에서 기인하는 듯도 하고, 어떤 뿌리 깊은 심연에서부터 오는 것인 듯도 하고, 아무런 이유없음에 기인하는 정신질환에서 기인하는 듯도 하다. 그러면서도 그가 어떻게, 어떤 행동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지도 우리는 쉬이 알 수도 없다. 이 점에 대해 분노한다면 우리는 이 소설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furia'는 분노, 광기를 뜻하는 라틴어이다.(p.70 각주 참조) 동시에 부정적인 감정만 내포하는 것이 아니라, 열광, 격정 등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p.436 각주 참조) 따라서 '푸리아'는 이중적이며 역설적이다. 중의적 표현이라는 소리다. 이 소설에서 솔랑카의 분노는 그의 '열정'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소설의 결론은 그가 분노로부터의 해방을 이뤄냈을 것으로 짐작하게 한다. 그가 만들어낸 '퍼핏 킹'들의 그 증거이기다.

그런데 그의 분노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왜 분노하는가? 왜 뜬금없이 처자식을 죽이려 했는가? 그의 순간적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왜? 왜? 왜? 우리는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분노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가족, 친구, 또는 알 수 없는 그 누구-에 의해서건, 우리를 감싸고 있는 환경에 의해서건, 세상의 온갖 체제에 의해서건 끊임없이 분노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솔랑카의 분노는 어쩌면 이런 분노 유발의 원인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하는 듯 하다. 우선 그가 사상사를 강의하면서도 별난 취미인 인형 제작을 하는 것을 바라보는 그의 대학 동료 교수들의 편견에서 그의 분노가 유발되는 것은 아닐까? 그의 '리틀 브레인'이 왜곡되고 자신을 배반하는 상황이 또한 그를 분노케 하는 것은 아닐까? 후반부에 그의 어릴적 아픈 기억이 고백되는 것에서 알수 있지만, 의붓 아버지의 성추행에서도 깊은 분노의 원인이 있기도 한 것은 아닐까?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그의 '분노'를 유발하고 그 분노에서 그를 주체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모든 분노의 외적 원인에도 불구하고, 그가 직면한 가장 큰 원인은 그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 소설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 푸리아의 역설은 분노라는 동전의 이면에 열정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외적 분노의 인자는 내적인 분노를 유발하지만, 그 모든 것은 다른 이면의 열정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닐라'의 등장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그는 분노로부터의 해방구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확실히 열고 있고, 이 소설은 그런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끝맺고 있는 것이다.

살만 루슈디가 이 소설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분노 유발 인자로부터 우리가 자유로울 수 없음을 한 인물을 통해 보여주면서, 그 분노가 어떻게 열정과 삶의 긍정적 측면으로 변화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루슈디의 해박함과 폭넓은 지식, 그리고 명쾌한 독설, 칼날 같은 풍자, 머리아프게 하는 난해함은 이 소설을 더욱 가치있게 만들어 주고 있으면서도, 어렵게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를 분노케 하는 모든 것들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방될 수 있고, 우리 내면에 내재한 그 '푸리아'를 어떻게 열정의 푸리아로 이끌어 낼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어렵게 읽어내면서도, 충분한 이해를 갖지 못했으면서도, 루슈디의 『악마의 시』를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루슈디의 어법의 매력을 이 책은 충분히 가지고 있다. 나의 '푸리아'는 이런 쪽으로 작용했으면 하는 작은 갈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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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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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캐비닛』을 읽고난 후의 느낌이랄까, 흔한 감상이랄 것은 조금 남달랐다는 정도이다. 조금 독특한 소설이라고나 할까. 이 소설을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으로 직접 고른 한 문학평론가의 말처럼 "또 한 명의 괴물 같은 작가를 갖게" 된 거 같지는 않다. 평범의 언저리 그 이상이었다고 하는 것이 그 작가의 역량이 범인의 그것보다 높다고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 소설이 평범의 언저리에서 조금 벗어난 것은 작가의 어떤 필력때문이라기 보다, 이 소설의 이야기가 된 소재의 약간의 독특성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작가는 우리에게 '캐비닛' 하나를 던져주고는 뭐 특별할 것 없은 없다고 말한다. "우아하고 낭만적인 상상을 떠올리는 짓은 일찍감치 집어치우""볼품없고 낡아빠진 캐비닛", "상상할 필요도" 없는 "평범한 캐비닛"이라고 수차례 말한다. 그럴 바에야 왜 그따위 '평범'하고 특별할 것 없는 '캐비닛'을 던져주는 것인가? 여기에 조금은 호기심이 발동한다. 그래서 그 '캐비닛'을 열어보게 하는 것이다. 뭐 '칠천팔백예순세 번'의 자물쇠를 열려는 시도 같은 것은 우리에겐 필요없었으니, 호기심의 발동은 즉각적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겠다.

이 '캐비닛'을 열고 부터는 사실 흥미로웠다. '루저 실바리스'와 '심토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허허 이게 무슨 소린가 하는 궁금증들을 유발하고 있다. "우리가 이해하건 이해할 수 없건 상관없이, 우리가 부정하고 있는 환상과 마법은 우리 삶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이 도시에서, 각자의 집에서, 심지어 우리 몸속 깊은 곳, 대장이나 맹장 같은 곳에서 매순간 일어나고 있으며 또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이 소설에서는 증명해 보이겠다는 듯 하다.

에이 그런게 어딨어? 하고 우리는 처음엔 반문한다. 그렇다고 이 소설을 다 읽은 후에도 그 반문이 역전되는 것은 아니다. 조금 누그러진다면 또 모를까. "에이 그런게 어딨니? 있다면 뭐 할 수 없고." 사실 이 소설속의 이야기들을 우리가 믿기에는 너무나도 허무맹랑할 뿐이다. '새끼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는 남자' 이야기라든가, 샤워를 하고 나오자 자신의 성기가 사라져버렸다는 남자', '시간을 잃어버리는' 사람들, 도플갱어, '고양일로 변신하고 싶'은 사람 등등, 별의별 특이한 인간군상들이 등장한다. 이걸 어떻게 믿어? 난 도무지 못 믿겠다. 하지만 이런 일이 정말로 있을까 하는 의문이 조금은 일었다고 해야겠다. 그런 의문이 이 소설을 끝까지 읽게 했던 것이다.

작가는 이 이야기들은 죄다 '거짓말'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아니 죄다 거짓말이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이야기들 속에는 혹시 '나도?'라는 물음을 하게 만든다. <저도 심토머인가요?>란 장에서 그 물음에 대한 답이 나온다. 그 답은 '아직'은 아니라는 것이지만, 조금만 더 있으면 우리도 '심토머'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는 듯 하다. 하기사 이 소설의 화자 '공대리'도, 그리고 '손정은'도 조금씩은 '심토머' 기질이 보이고 있다. 나도 어떤 점에서 '심토머'일 수 있는 부분들이 있는 듯도 하다.

우리는 나름대로 조금씩은 '특이한' 부분들이 있다. 남들과는 다른 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어느 한 부분이라도 달라야 하는 것이 이땅을 살아가는 사람의 당연지사 아니던가? 그런데도 모든 것은 획일화 표준화 하려는 이 사회에서 저마다 조금씩의 '심토머' 기질을 숨기고 잘라내려고만 한다는 것은 잔인한 처사가 아닐까? "대표성의 잣대에 기대지 말고 개별성의 잣대로 사람을 대해달라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성숙하고 깊이 있는 인간관계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존중이 우리의 세상을 얼마나 아름답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은 그저 '평범한 캐비닛'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안에 담은 것들은 특이와 이상(異相)과 다른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무언가는 지극히 평범한 교훈에 다름 아니라는 얘기인 것이다.

이 소설 전체의 이야기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한다. 특이한 것들을 모아놓고는 이것은 하등 특이할 것이 없다는 작가의 '구라' 속에는 다른 것을 인정하고 존중한다면 그 '특이'는 저마다 가지고 있는 '평범'의 다른 모습일 거라는 얘기 아닐까? 나는 그렇게 본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다양한 환상적 상상적 소재들은 소설의 흥미와 재미를 이끌어 내기에 효과적인 것들이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을 읽어내는데 그리 지루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느꼈던 여러가지 아쉬움들로 인해, 그런 흥미와 재미에도 불구하고 다소 높은 평가를 하기에는 석연찮을 수 밖에 없었다. 여러 심사위원들이 그런 아쉬움들을 몇가지 지적하고 있지만, 어떤 치밀한 구성이나 이야기의 개연성 등은 소설의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있다. 그러니까 이야기의 전개의 치밀함에서 오는 소설에 대한 흡인력보다는 이야기들의 특이한 소재의 흥미성만 강하게 남는다는 얘기다.

심사위원 중 하나였던 은희경의 심사평을 들어보자. "몇 가지 아쉬움을 말하자면, 우선 소설이 좀 길다.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해도 길면 늘어지게 마련이다. 쓰는 사람이 재미있어야 재미있는 소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늘 읽는 사람을 의식하여 독자보다는 늦게 그리고 조금 웃어야 톤과 길이의 균형을 잃지 않는다. 이 작품은 더구나 병렬형 구성이다보니 독자는 금방 패턴에 익숙해지는데, 이미 이 작품과 낯을 익힌 독자에게 자기 소개를 하는 듯한 초기 설명을 반복할 필요는 없다. 중간중간 화자가 권력자가 되어 훈계하는 내용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부분이 있는데 이 역시 작가가 화자와 동일시되는 부분에서 좀더 냉정해져야 하지 않나 생각된다."

이 소설은 소설로서는 다소 실패한 것이 아닌가 한다. 누구의 말처럼 "또 한 명의 괴물 같은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보다 소설자체의 내구성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 아쉬움이라면 그런 아쉬움이다. 특이한 것들을 갖다 놓았지만 뻔한 이야기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소설의 내구성이라고 한다면 그런게 좀 부족하다 싶은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읽었고, 그래서 읽어난 후의 아쉬움이 크다. 김언수라는 소설가에게 그 아쉬움의 폭만큼의 '기대'는 남겨 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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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1-09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구아바
키란 데사이 지음, 원재길 옮김 / 이레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아직까지 우리에게 인도라는 나라는 '신비'라는 단어로 기억된다. 신들의 나라, 불교의 발상지, 각종 기행자들과 수도자들이 존재하는 곳으로 말이다. 이와는 좀 이질적으로 보이는 것 같지만, 실은 다를 바가 없는 '미개함', '더러움'으로도 다가온다. '신비'하면서도 '미개'한 나라, 인도는 아직까지 그런 나라로, 제3의 세계로 우리에게는 그다지 가깝지 않은 나라로 남아 있다. 많은 배낭여행객들, 특히 대학생들이 배낭여행의 목적지로 인도를 찾는 경우가 많다. 배낭여행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도전'과 '극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런의미에서 인도는 좋은 도전의 장소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신비'스러움을 맛볼 수 있는 서비스가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것들은 오늘날의 또다른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이라고 본다. 이전의 서구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전략이었던 오리엔탈리즘은 바로 동양에 대한 타자화였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신비'와 '미개'라는 색칠을 하고, 그것에 대한 도전과 개척을 선도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인도, 아니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바라보는 시각들도 이러한 오리엔탈리즘과 그 성격이 전혀 다르지 않다. 이런 시각은 우리를 편견에 사로잡히게 한다. 여기에서 또다른 인종차별과 같은 제국주의적 오만과 폭력이 뒤따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에서 벗어나, 그 세계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소설『구아바』는 그런 점에 있어서 인도에 대한 보다 현실적이고 리얼한 인식을 갖을 수 있게 한다. 현대 인도의 사회와 현실을 우화적으로 그려놓고 있는 이 소설에서, 인도 사회의 부패와 모순들에 대한 풍자에서 오는 비판을 읽음과 동시에, 우리 안의 인도에 대한 오랜 편견들에 단호한 일침을 맞게 된다. 이것이 이 소설이 우리에게 의미를 갖게 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한다.

줄거리는 다소 간단하다. 삼파드라는 청년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비정상으로 치부된다. 사회 속에 융합할 수 없어 답답한 심정에서 삼파드는 그 사회를 떠나 '숲'을 찾고, 거기에 자신만의 안락한 보금자리를 찾는다. 그 숲의 한 나무에 올라살게 되면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소동 등을 그리고 있다. 그 소동들 속에서 바로 현대 인도 사회의 온갖 모순들과 부패와 타락이 그려져 있으며, 이것을 우화적으로, 풍자적으로, 작가는 조소하면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우화의 중심은 '삼파드'라는 주인공이다. 마치 고전영웅소설의 주인공처럼 삼파드는 기인한 출생의 전조를 가지고 태어난다. '삼파드'라는 말은 우리말로 '행운'이라는 뜻이다. 그 이름을 갖게 되는 만큼 그의 출생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명명은 하나의 아이러니다. 즉 반어적 명명이다. '삼파드'는 이 사회에서는 결코 '행운'을 만드어낼 수 없는 인물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사회의 밖으로 그는 탈출하게 되는 것 아닌가.

사회에 융합하고, 사회속에서 '정상인'들과 함께 살아갈 수 없었고, 결코 그 안에서 그의 이름처럼 '행운'으로 살 수 없었던 삼파드는 그 속에서 탈출하여 밖으로 나왔을 때 편안과 행복을 맛볼 수 있었다. 그는 자유를 찾은 것이다. 자신들과 다름을 '비정상'으로 치부하고 자신들과 같을 것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벗어나서 '삼파드'는 진정 자유로울 수 있어서, 그때부터 그의 이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삼파드가 나무에 올라가자, 사람들은 그를 무슨 도통한 도사처럼 떠받들게 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면서 소동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가게 된다. 삼파드는 결코 다른 사람이, 즉 사회 안에서 '비정상'이었을 때와 결코 달라진 것이 없지만, 그가 나무위에 올라갔다고 해서, 그의 말은 성인의, 도사의 말처럼 신성성을 부여받게 된다. 이것을 통해 인도의 사회가 얼마나 터무니 없는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삼파드가 마치 그들의 과거를 투시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지만, 실상은 우체국에서 일하면서 그들의 편지를 보고, 떠벌인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로인해 그는 졸지에 도사가 되어 버린다. 여기서 다시 삼파드의 불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회속에서 사람들은 삼파드를 '비정상'이라는 굴레에 가두었다면, 이제는 나무위의 도사로 그를 가둔다. 사람들이 모이고, 가족들은, 특히 그의 아버지는 그를 통해서 큰 몫을 잡으려고 한다. 인도 사회 내의 이런 어리석음들, 부에대한 욕심과 욕망, 비윤리적 가족관계 등이 이 소설 속에서 풍자되고 비판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가부장적 권위주의와 여성에 대한 성적차별 등이 인도 사회의 내재되고 내면화된 고질적인 병폐임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삼파드라는 인물을 통해서 그려지고 있는 현대의 인도 사회의 문제들은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서도 유효한 문제들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삼파드는 숲 속에서의 대소동으로 인해 또 다른 곳으로 자유를 찾아 떠나야 했거나, 아니면 "부글부글 끊는 가마솥"에 빠져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삼파드의 부재함, 삼파드를 사회 안에 품을 수 없음은, 이 사회에서 결코 '행운'을 찾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사실 역자의 말처럼 이 소설이 20대의 젊은 작가의 작품이란 사실이 다소 믿겨지지 않은 것은 이러한 자신의 모국에 대한 현실인식과 그 사회의 문제점 들을 신날하게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여러 사회에 내재한 보편적 문제들에 대한 예리한 문제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다. 나는 이 책에서 하나의 대안이 제시되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바로 이 사회가 제2, 제3의 삼파드를 껴안을 수 있어야 하고, 그들이 이 사회 안에서 '자유'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에 우리 사회에 '행운'이 깃들고, 그로인해 '구아바' 나무가 주는 풍요롭고 풍족한 맛있는 과실의 열매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자유와 행복은 바로 거기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사족이지만, 이 소설에 다소 아쉬운 점에 하나가 치밀하지 못한 번역이다. 군데군데 비문이 있고, 조사의 사용이 부적절하여 해석에 애를 먹었다. 예를 들면, 216쪽 중간에 보면 "그들은 소년을 헝그리 홉에게 다그쳤다."이 있다. 여기서 문맥상 '소년'의 이름이 바로 '헝그리 홉'이다. 즉 '소년'은 '헝그리 홉'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소년을 헝그리 홉에게 다그"칠 수 있는가? 둘 중 하나가 빠져야 할 것이다. 또 236쪽에 보면 "물론 원숭이들이 시체를 전시하는 문제에 관한 모든 내용을 담을 계획서였다."에서 '원숭이들이'는 '원숭이들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치밀하지 못한 번역으로 인해 책을 읽으면서 눈살을 찌풀이게 되는 것이 참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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