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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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것 제대로 한 번 해본 적 없는 나에게, 사랑이니 이별이니 하는 흔한 연애소설이나 시집은 그리 손에 잘 잡히는 종류의 것들은 아니다. 흔하디 흔한 사랑타령이려니 치부해 버리는 것이기도 하고, 내가 다가갈 수 없는 다른 세계에 대한 이질감이거나 그것에 대한 반감의 작용이기도 할 것이다. 아직까지는 그런 것들이 내 책읽기의 오랜 습성으로 남아있기도 하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내게도 변화가 있을 것이다. 아니 있기도 했었다. 원태연이었던가? "손가락으로 원을 그려봐.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라는 느끼한 제목의 연애시집을 구구절절 가슴으로 느끼던 시절도 있었던 것이다. 첫사랑의 기억이 내게는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 첫사랑은 누구였던가 물어오면, 그 이름을 거론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런 내게도 학창시절의 짝사랑 쯤은 있었던 것인데, 그때의 그 마음을 녹여주기에 원태연이 그 시집은 참으로 탁월했다.

그런 경험은 그 이후로 내게 찾아오지 못했던 것 같다. 사랑이라는 그 애틋한 이름으로 명하기에는 가슴 들끓어오른 적이 없었다는 얘기다. 거기에 연애시집도, 사랑타령의 이야기들도 찾아오지 못했음은 분명한 일이다. 그러나 세상에 사랑을 말하지 않는 시가 어디있겠으며, 사랑을 담지 않고서 어떻게 감동의 이야기가 있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보면 사는 것은 사랑하는 것의 다름아니리라. 그러나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닌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들어 느끼는 것은 가을을 부쩍 탄다는 것이다. 20대 후반의 나이에, 제대로 된 사랑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삶에 이리저리 치이며 사는 나에게, 가을을 어느 누구에게 보다도 씁쓸한 계절이었는가 보다. 그런 가운데 나는 정이현을 만났다. 정이현의 소설집『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올가을의 시작에 즈음하여 읽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 이 책『달콤한 나의 도시』를 그 가을의 끝자락에서 읽어내었으니, 올 가을은 정이현의 '사랑타령'에 푹 빠져 지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이현의 '사랑타령'은 남다르다. 그것은 낭만적이지도, 달콤하지도 않았다. 때론 무섭게 치를 떨게도 했고, 잔인해 보이기도 했으며, 사랑이라 이름하기엔 너무 이성적이고 현실적 인물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단편「순수」에서처럼 "세 번 결혼하고 그때마다 남편을 잃은 여자"가 "세번째 남편의 죽음 때문에 경찰의 조서를 받"고 있는 이야기는 그 제목을 의심하게끔하는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

정이현의 대부분의 소설에서 이런 아이러니가 보여진다. 짓궂게도 그녀의 이야기는 그 제목과는 단순하게 볼 때 정반대의 내용처럼 읽혀지기 때문이다. 이런 아니러니적 명명의 방법은 그 의미를 역설적이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런 역설들을 진지하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그녀의 첫번째 소설집이다.『달콤한 나의 도시』에는 그 정도는 조금 떨어지지만 여전히 정이현 특유의 그와같은 어법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런 점이 정이현 소설읽기를 이 가을의 시작과 끝에서 함께 할 수 있게한 이유이기도 하겠다.

무엇이 달콤한가? 그녀들의 도시가 과연 달콤한 것이었는가?하는 의문부호는 이 소설 읽기의 뒷자락에서는 확실히 새겨진다. 오은수라는 30대의 여자, 그리고 그녀의 동갑내기 친구들이 보여주는 그녀들의 도시, 그녀들의 사랑은 '달콤'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연하와의 돌발적 사랑도, 영수와의 현실적 연애도, 그녀에게 사랑의 '달콤'함을 주지는 못한다. 바로 여기에 아이러니적 제목짓기에서 오는 역설의 어법이 자리한다. 정이현은 왜 이 소설에 '달콤'함이란 수사를 동원하는가?

"……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다만 가장 먼저 도착하는 버스에 무작정 올라타지는 않을 것이다. 두 손을 공중으로 내밀어본다. 손바닥에 고인 투명한 빗물을 입술에 가져다 댄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서울의 맛이다."(강조는 필자)

'무장적 올라타지 않'는 것,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맛. 어쩌면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첫사랑은 낭만과 달콤함으로 기억되지만, 그렇게 기억되기까지는 '실패'와 '이별'이 전제되고 있지 않은가? 나는 거기에 정이현의 아니러니적 어법의 의미가 숨어 있다고 본다. 연하의 남자와의 돌발적 사랑도, 영수와의 결혼을 위한 연애도, 모두 떠나보내고 난 후에는 지나간 옛추억, 낭만 혹은 달콤함으로 남게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제는 '무작정 올라타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아무맛도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달콤하지 않은 도시에서 할 수밖에 없는 것, 바로 그것이 현실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오은수가 앞으로도 '무작정 올라타지 않'을 것처럼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녀는 아무맛도 없는 그녀의 도시에서 머지않아 곧 '달콤'함을 찾으려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결코 '달콤'하지 않은 그녀들의 사랑얘기는 내게 사랑에 대한 회의나 현실에 대한 직시를 갖게 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또한 정이현의 의도일 것이다. 오은수를 비롯한 세여자의 '뒷담화'를 엿듣는 한 느낌으로 시종일관 흥미로움에 읽혀진 이 소설이 어느덧 내게 "너도 한 번 '달콤'함을 찾아보아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악마의 유혹처럼 다가오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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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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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이 '우행시'로 울었다고 하면 약간은 과언이고 '상투적'이겠으나, '우행시'는 지금 큰 인기를 얻었있다. 영화 '우행시'로 많은 관객들을 울렸다고 한다. 지금은 그 여세가 미약해진 듯한 느낌이지만, 소설 '우행시'만큼은 아직도 베스트셀러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으니, 많은 사람들을 울린건 맞는 말인듯 싶다. 몇 만이 울었을까? 아니 몇 십만? 몇 백만이 울었을까? 그 수치가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많은 사람들에겐 눈물 짖게 하는 '시간'이 되었을까? 이것은 이 소설(난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다. 다만 편집된 홍보물만을 보았을 뿐이고, 이나영이 여주인공이란 사실을 알 뿐이고, 남자 주인공의 이름이 뭐였는지 생각나진 않지만, 하여간에 그 얼굴만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영화는 말할 수 없고 소설을 말할 뿐이다. 하긴 영화 이전에 소설이었으니 소설만을 말하는 것이 그리 크게 잘못되지는 않을 듯 싶다. '진짜 이야기'는 소설이었으니까.)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문제가 될 듯 싶다.

나는 이상하게도 '베스트셀러'라는 말이 붙으면 거리낌이 생긴다. 많은 이들이 읽었고, 재밌다고들 야단에 법석을 해도 괜히 손길이 가질 않는다. 이것도 하나의 편견이겠지만, 이런 것들에는 상업적 냄새가 많이 풍기고, 큰 기대에 대한 실망감을 얻는 경우가 많고, 뭐랄까 품격이랄까? 그런 것들이 떨어지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일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아직' 베스트셀러인 이 책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읽었다. 왜일까? 공지영이라는 작가의 이름때문은 분명 아니다. 나는 아직 그 작가의 어떤 책도 읽지 않았다. 그 이름은 아직까지는 대중적 인기 작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소설가로서의 그의 높은 이름은 언젠가는 나에게 읽혀야 될 그 어떤 책무로 지워질 것이긴 하다. 하지만 아직은 그 책무를 피부로 느끼지 못하기에, 그 공지영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내가 이 책을 읽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럼 무엇때문인가? 이 책이 왜 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 하는 그런 궁금증 때문도 아니다. 이 책이 그렇게도 재미있나 하는 호기심도 아니다. 나는 그런 궁금증과 호기심의 발생을 차단하는 방어막의 고질적 편견 비슷한 것들이 내장되어 있기 때문에, 분명코 그런 이유에서는 아니다. 그럼 왜일까?

오늘은 10월 31일, 지금은 그 '밤'이다.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귓가에 맴돌게 하는 '그날의 마지막 밤'인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이 노래를 틀어 놓고 지냈다. 아니 그건 오늘만이 아니었다. 10월에 들어서 이 노래를 자주 들었던 것이다. 김광석의 노래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도 나는 이 계절 가을이 오면서부터 자주 듣느다. 이 가을이라는 계절감은 그냥 나를 울적하게 한다. 흔히들 이것을 두고 가을 탄다고들 하는데, 그렇다면 나는 가을을 타는 것이 분명하다. 28의 지금의 나에게는 썩 어울리지 못한 감상이라고 하겠으나, 현재의 나의 마음 속에서는 이런 가을의 노래들이 충분히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가끔씩 울고 싶을 때가 있다. 마지막으로 울어보았던 때가 언제였을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삼국지를 읽으면서 한 번 울었고, 그리고 그걸 드라마로 보면서 또 한 번 울었고, 타이타닉을 보면서도 청승맞게 울었고, 아마겟돈을 보면서 살짝이 울었던 기억이 나기는 한다. 그러나 그 이후로, 꽤나 많이 울지 못했다.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지 않아서, 나는 더욱더 울고 싶었다. 적어도 이 계절 가을에는, 가을을 타는 이 계절에는 더더욱 울고 싶었던 것이다.

분명 '우행시'로 많은 이들이 울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집어 들었다. 다만 나도 '울고' 싶어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에는, 밤잠을 조금씩 늦춰가면서 이틀에 걸쳐 읽어낸(보통 내가 책 한 권을 읽는데에는 3~4일이 걸린다.) 지금에는 눈물이 나지 않는다. 왜일까? 이 책이 결코 슬프지 않아서도 아니다. 그리고 이 책의 이야기가 감동이 없어서도 아니다. 하지만 울음이 나지 않는 것은 나만의 탓일까? 하긴 내가 감수성을 많이 잃어버린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영화를 봤어야만 했던 것일까?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울지 못했던 충분한 이유가 이 책에는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은 분명 한 남자, 그것도 사형수의 이야기이고, 한 여자, 비극적 상흔을 가지고 있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둘이 만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15살의 나이에 근친으로 부터 폐륜적인 상처를 받은 주인공 '유정', 어려서부터 어머니는 도망가고, 술만 먹고 때리기만 하는 아버지 밑에서 동생과 함께 어렵게 자라다, 아버지도 잃고, 동생도 떠나보내고, 소년원을 전전하고, 감옥을 수차례 다녀오고, 결국엔 사회의 낙오자로, 그리고 자신의 여자를 지켜줄 어떤 능력도 없었고, 다른 사람의 죄까지도 떠 맡아야 했던 남자 주인공 '윤수'. 그 둘은 정말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으면서도, 어떤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때로는 그 둘이 동일시되기까지도 한다. '유정'은 말한다. "윤수와 나는 거울처럼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분명 '유정'에게는 '윤수'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윤수'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 둘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두 문제적 인간은 모두다 아픔을 가지고, 그래서 모두다 이 사회에서는 불완전한 인간으로, 이상한 인간으로 분류된다. 즉, '유정'은 정신병원에 다녔어야 했던 것이고, 그의 어머니로부터 미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도 갖게 한다. 그리고 '윤수'는 감옥이라는, 사형수라는 아주 극단적인 방법으로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그 둘의 '같음'은 그 둘을 만나게 했고, 그럼으로써 그 둘을 변화시켰고, 그리고 그들에게 '행복한 시간'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거기까지 가기위해서는 중요한 매개가 있었다. 바로 '모니카 수녀'이다. '모니카 수녀'는 유정과 윤수 모두를 껴안을 수 있었던 인물이다. 어쩌면 성녀같은 인물이기도 한데, 재밌는 것은 유정은 이 '모니카 고모'와 간혹 동일시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우리'에는 이 세명 모두가 포함되는 것은 아닐까?

유정과 윤수가 만나기 전까지는 그 둘은 분명 '같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유정과 윤수는 세상의 모든 것들과 자신이 같지 않음에 분노하고 괴로워했다. 그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소외시키는 기제로 작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로의 만남으로 서로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리고 그러한 '진짜' 모습을 보면서 '진짜 이야기'를 하게되면서부터 서로가 '같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이 그들에게 '행복한 시간'을 갖게 해준 이유인 듯 싶다.

그런데 작가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유정은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에게 고모를 닮았다고 말하지만, 그리고 유정도 자신의 모습에서 고모의 모습을 찾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자신은 어머니와 같았음을 깨닫는다. 또한 윤수와의 만남에서 '이주임'도 '진짜 이야기'를 하게되면서 그들과 '같음'에 합류한다. 그리고 그러한 '같음'은 용서를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피해자의 어머니의 용서, 주인공 유정의 어머니에 대한 용서, 그리고 유정에게 벗어날 수 없었던 고통을 주었던 사촌오빠에 대한 용서, 그리고 윤수의 자신에게 죄를 모두 뒤집어 씌웠던 선배에 대한 용서,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용서, '국선변호사'에 대한 용서, 그리고 검사, 판사 등에 대한 용서를 통해서 그들은 모두 '같음'을 공유하게 된다.

이 '같음'은 모두가 인간이라는 사실, 그리고 살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사실, 결국엔 모두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에서의 '같음'이다. 그러하기에 그 '우리'의 범주에는 다만 유정과 윤수만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 그렇게 많은 이들이 울었던 것인가? 윤수의 죽음 앞에서 모든 이들이 그렇게 울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울음이 나오질 않았다. 내가 이상한 것인가?

나는 내가 울 수 없었던 이유를 다만 내 무감각해진 감수성의 탓으로만 돌릴수는 없을 것 같다. 유정은 '상투'를 혐오했지만, 결국은 이 소설이 가지는 '상투'를 피해가지는 못했다는 점, 이 소설은 다분히 신파조의 성격이 강하다는 점, 극단으로 치달았던 두 남녀 주인공이 만나서 서로의 같음을 인정하게되는 데 까지의 개연성, 그 둘이 변화하여 무슨 성자, 성년가 되어버린 듯한 모습들, 그런 것들이 나는 너무나도 상투에 침식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했던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 소설은 그 결말이 어느정도 예상이 될 수 있었다. 그래도 이 소설이(영화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었던 것은 신파조의 공식은 아주 성실히 따르고 있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소설에서 이 '타는' 가을의 '울음'을 얻을 수는 없었지만, 죽음에 대한 몇 가지의 성찰들을 얻을 수 있었다는 데에 어느 정도의 성과는 있었다는 데에 위안을 얻기로 한다. 그리고 이런 경구를 얻은 것에 만족할 수는 있었다. "인간의 얼굴은, 그리고 눈은 대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가. 그것은 하나의 연설문보다 더한 웅변을 담고 있다.", "생명이라는 말의 뜻이 살아 있으라는 명령이기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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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연습
조정래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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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한 사람이 썼다고 하기에는 이 방대한 작업, 그러면서도 그 방대한 양에 비례하여 보여지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현실, 뿌리깊은 아픔, 그리고 인간적 삶의 다양한 면모들을 빈틈없이 묘사하고 있는, 이 크나큰 작업의 모든 것은 한 사람에게서 나왔다. 이 시대 한국 소설 문단계의 거목 조정래 작가. 그는 말한다.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는 인간의 삶, 그것은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연습'이"었다고.

  대하장편소설의 대가 조정래 선생이 오랫만에 대하가 아닌 장편소설을 내놓았다. '인간연습'. 1943년생인 그는 60 중반의 나이에 그간의 위대한 작업임과 동시에 지난할 수 밖에 없었던, 그러나 한국 소설사에서 길이 남을 거대한 작품들을 남기는데 온 전력을 쏟아부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연로의 나이에 또 한 권의 책을 내놓았으니, 우리는 여기에 아무런 조건없는 찬사를 붙여도 모자랄 것은 없다. 하지만, 여기 그가 내어 놓은 이 책에는 그간의 거대 작업의 종착점, 아니 종착을 지향하는 그의 글쓰기의 하나의 정류장으로써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래서 '인간연습'이란 제목에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우리의 초점을 모을 필요가 있다.

  <태백산맥>을 통해 그는 말한다. "그들도 인간이다." <아리랑>을 통해 우리에게 단절되었던 일제시대의 비참한 역사를 폭로한다. <한강>을 통해 전후의 우리 현실을 일깨운다. 이러한 작업들이 관통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 책 <인간연습>에 답이 있다.

  "인간은 기나긴 세월에 걸쳐서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모색하고 시도한다. 그 고단한 반복을 되풀이하는 것이 인간 특유의 아름다움인지도 모른다.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는 인간의 삶, 그것은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연습'이다."

  그렇다. 그러한 작업들을 통해 작가 조정래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연습'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 그로 인한 전쟁, 이데올로기의 이편과 저편에서 싸우고 죽였던 것, 일제의 참혹한 학살과 만행으로 고통받아던 우리 민족의 아픔, 그런 가운데도 조국과 민족을 일으키고자 죽음을 불사한 지사들의 모습, 반공과 이데올로기에 희생되고 억압된 남한 사회의 모습과 그 안에서도 '인간답게' 살고자하는 자들의 고통. 이 모든 것들이 '연습'이라는 것이다.

  역사가 진보한다고 할 때, 그 진보는 무엇보다 '인간다운 삶'으로서의 나아감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진보를 한다한들 그것은 퇴행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저마다의 '인간다운 삶'의 추구로 인해 다툼도, 전쟁도, 고통도, 아픔도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성공과 행복과 기쁨 또한 한데 어울려 인간 삶의 희로애락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끝이 없이 반복하고, 마치 불교의 윤회처럼 돌아간다. 이를테면 과거의 역사가 미래의 거울이 되듯이 말이다.

  여기 <인간연습>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전향수로써 현시점을 살아가는, 한때는 이데올로기의 추종자로서, 그리고 지금은 그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로서,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들을 통해, 이전의 그의 삶들이 그저 연습이었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공산주의의 시작은 무엇인가? 모든 사람들이 잘 살아보자는데서 시작한 매우 단순한 논리 아니었겠는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현시대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이 크게 부각되면서 오히려 본질적 대안으로 접근되어진다. 유럽의 선진국가들에서는 이 사회주의의 이상을 둔 정당이 집권하여 나라를 이끌고 있지 않는가? 자본주의의 발원지에서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하지만 이상할 것은 없다. 우리의 삶은 그간 연습이었고, 그 연습을 통해 얻어진 결과를 가지고 수정을 하고 보완을 해 지금 또한 새로운 연습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 지금의 연습은 보다 인간다운 삶을 살게끔 하여 미래에 보다 발전적 기반을 가지고 삶을 연습하는 바탕이 될 것이다.

  조정래 선생의 이 책은, 그가 지금까지 이룩해왔던 거대한 작품들을 갈무리하는, 아니 마무리하는 선상의 끝에 놓일 수 있다. 이것은 참으로 시의적절하다고 할 타이밍에 나온 것이기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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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가족
공선옥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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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 나는 공선옥 작가와 몇 번의 통화를 가질 수 있었다. 내가 조교로 일하는 곳에서, 지역 중고등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방학 중에 연수를 하는데, 여러 강좌 중에 <소설가와의 만남>이라는 시간이 있고, 그 시간을 공선옥 작가가 맡기로 했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업무상의 통화였지만, 내게는 참 흥분되는 일이었다.

  공선옥 작가가 온다기에, 나는 공선옥 작가에게 사인이라도 받아둬야 겠다고 생각해서, 가장 최근작인 이 책을 다짜고짜 샀다. 그리고 읽었다. 읽지도 않고 사인을 받기에는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공선옥이란 이름, 작가 공선옥을 그전에는 알지 못했다. 공씨 작가는 공지영 밖에 몰랐기 때문에, 이 공선옥이란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 꽤 궁금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그를 만나게 되는 날이 꽤나 기다려졌다.

  몇 번의 통화에서 나는 공선옥 작가가 어떤 사람일거라는 추측을 조금은 할 수 있었다. 연수 강좌를 맡았기에, 몇가지 서류와 함께, 강의 원고를 작성해 나에게 보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소설가라는 사람이 원고를 어떻게 써야되느냐, 3시간 동안 말해본 적이 없어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겠다느니, 말주변이 없다느니 하는데, 그 목소리 또한 왠지 털털한 느낌이기도 했고, 순진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생각과는 다른 느낌. 왠지 말을 조용조용 조리있게 잘 할 것만 같고, 분위기 고상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일거에 무너져 버렸다. 옆집 아줌마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 것은 공선옥 작가에 대한 무례일까? 그건 아닐거라는 생각은 이 책 <<유랑가족>>을 읽으면서 얻게 되었다.

  그녀의 그런 목소리, 그런 솔직한 대답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었고, 오히려 그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가난한 작가일 뿐./ 가난하여 '이 땅 어디에도 삶의 터전을 마련하지 못하고 떠도는' 유랑민처럼/ 나 또한 가난한 '유랑작가'일 뿐." (작가의 말)

  자기는 가난한 작가, 그리하여 '유랑작가'이니, 고상한 척, 잘아는 척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유랑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털털해 지고, 또한 옆집 아줌마처럼 생활력 강하고 모든 닥치면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해치워야하는 그런 작가여야 하지 않을까?

  이 책 <<유랑가족>>은 떠도는 가족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 이전에, 왜 유랑, 즉 떠돌아야 하는 가족이 될 수 밖에 없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가난이라는 문제, 가난한 사람들의 삶, 거기에서 오는 많은 아픔들, 고통들, 그래서 결국에는 유랑해야만 하는, 그래야만 질긴 생명 부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 하다.

  구성은 5개의 짧은 이야기들이 하나의 유기적 관계를 형성하며 한 편의 연작소설을 이루고 있다. 각각의 단편들이 등장인물의 중복, 또는 장면의 교차, 또는 가난이라는 주제의 큰 틀 안에서 하나의 유기적 구성을 갖게된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인물은 작가의 분신처럼 생각되어지는 '한'이라는 사진작가이다.

  이 '한'이라는 사진작가는 어쩌면 작가와 동일시 되어진다. 공선옥 작가는 가난이라는,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들을 한 장의 사진처럼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기에 그렇다. 그러면서도 이 '한'이라는 인물, 그리고 이 '한'의 가족들 또한 그 '가난'이라는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즉 가난한 작가 공선옥처럼 '가난하다.' 그러기에 나는 '한'을 보면서 공선옥 작가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 질긴 삶의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는데, 거기에 대한 몇 가지 나의 의문은, 이제 가난타령은 진부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선옥 작가는 왜 이리 가난에 천착하는 건가? 라는 의문이 든다. 이 둘은 어쩌면 같은 맥락에서 나오는 의문이리라.

  '가난' 타령은 이전 소설에서 많이 애용되어 왔다. 2~30년대의 사실주의 소설, 대표적으로 현진건의 소설에서나, 1950년대 이후의 전후소설에서 이 '가난'의 모습은 너무 많이 나왔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서 더이상 '가난'의 이야기들은 적어도 소설에서는 더이상 먹히지 않는 소재가 아닐까? 98년의 IMF이후 가난이라는 것이 이슈가 될만도 했지만, 빠른 요즘 세상에서 잊혀지는 것 또한 빨라, 그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진부한 것이 되어버리지 않았나? 그런데 유독 공선옥은 가난이라는 이야기를 써내고 있다.

  왜 이리도 가난에 천착하는가? 작가의 말 중에서 "나는 가난한 작가일 뿐"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가난 이외에는 어떤 이야기도 하지 못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가난을 가장 잘 아는 작가라는 뜻일까? 가난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을 경험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작가는 그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 곧 '가난'을 이 시대에 끊임없이 문제제기 하면서, 소외되어 있는 이 시대 이 세대의 가난의 모습들을 문제적인 것으로 부각시키고, 그에 대한 이 사회의 해결책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지도 모른다.

  가난이 먹히지 않는 소설계에서 공선옥 작가의 '가난'이야기는 그녀를 계속적으로 가난한 작가로 만들고 있는 것이지 모르겠다. 잘 팔리는 소설을 써야 가난에서 면할 수 있는 방법이기때문에, 진부한 소재로 외면받는 가난이야기는 잘팔리기에는 애당초 그른 것이 아닌가? 그럴 수록, 작가가 가난할 수록, 공선옥은 가난 이야기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나는 공선옥 씨처럼 유행적인 담론이 아니라 자기의 독자적인 경험과 사유에 의해 굳건히 뒷받침된 소설을 쓰는 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일층 제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선옥 씨는 우리에게 참으로 귀중한 존재다. 먼 훗날 누가 21세기 벽두에 한국인들은 어떤 삶을 살았던가 하고 물을 것이라면 우리는 이 물음에 대비한 타임캡슐 안에 공선옥 씨의 소설들을 넣어두어도 될 것이다."

  작품의 해설을 쓴 방민호 평론가의 말이다. 그렇다. 누구도 쓰지 않는 이 시대의 가난의 모습들을 보여주는 공선옥은 그렇지 않은 다른 소설가에 비해 어떤 면에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먼 후일에 그의 가치가 더욱 돋보이게 될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공선옥 작가의 가난말하기가 그래도 이 당대에 이슈가 되고 잘 팔렸으면 좋겠다. 그래야 이 지독한 가난에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겠는가?

  며칠전에 공선옥 작가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번 연수에 강좌를 맡을 수 없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신 권지예 소설가가 온다고 한다. 그래서 부랴부랴 <<꽃게무덤>>을 사놓았다. 그런데,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공선옥 작가를 만나서 꼭 사인을 받아두고 싶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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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결혼했다 - 2006년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이당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월드컵의 열기가 차츰 식어가고 있다. 식어가고 있다는 진행형이기도 하겠지만, 어느 중요한 순간에서는 ‘확’이라는 부사를 붙이기에 적절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국 對 스위스전 말이다. 한국이 스위스를 이겼다면, 원정 첫 승의 쾌거와 함께, 원정 사상 첫 결승 토너먼트 진출이라는 기념비적인 사건이 일어날 수 있었던 아주 중요한 한 판이었으니, 또한 국민들의 기대는 2002년의 재현을 부르짖고 있었으니, 스위스전의 아쉬운, 그리고 어이없는 패배는 이번 독일월드컵에 ‘확’이라는 찬물을 끼얹기에 충분했다. 

  그 순간에 나는 어떤 공황과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한국 팀의 패배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이제는 무슨 낙으로 사는가 하는 그런 공허감 말이다. 결승 토너먼트가 남아 있었지만 그것은 남의 잔치이니 흥분과 기대는 사그라질 수밖에 없는 것. 그런 상황에서 나는 생각했다. 아하! 그게 있었지.

 

  2002 월드컵의 영광 안에는 내가 없었다. 나는 그때에 군대에 있었던 것이고, 8강전 스페인과의 경기, 사상 처음으로 4강에 진출하는 역사적 순간, 홍명보의 마지막 승부차기의 골이 들어가는 순간, 나는 대한민국 육군 보병 제9사단 백마부대 28연대 3대대의 관문 위병소에서 근무 중 이상무를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월드컵, 그것도 내가 사는 이 땅에서 치러지는 월드컵, 그것도 우리나라로서는 전무후무할 역사를 펼치고 있던 그 순간을 군대에서 보냈다는 비애는 이번 월드컵은 누구보다도 뜨겁게 보내야 한다는 열망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만반의 준비를, 물질적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붉은 악마 티도 샀고, 붉게 빛나는 악마 뿔도 일찌감치 사 두었다. 그러던 와중에 이 책 󰡔아내가 결혼했다󰡕에 머리두건을 끼워 판다는 정보를 입수, 이거다 하고 낼름 사버렸다. 책보다는 머리두건이 필요했던 것이다.

 

  온갖 무장을 하고 월드컵 응원에 여념이 없던 나에게 이 책은 내 책장 어딘가에서 소리도 없이 숨어 있었다. 그 때, 내 공허감을 무엇으로라도 채워야 할 그 순간에, 왜 이 책이 생각났을까, 그것도 이 책은 내 시선에 한 눈에 박혀왔던 것이다.

 

  제목이 특이하다. “아내가 결혼했다”(?) 이것은 모순 혹은 역설이다. 아내라는 존재는 이 현대사회에 있어 ‘결혼했음’을 전제하고서야 가능하다. 이미 결혼을 했으니, 남편이 있고, 그리고 아내가 가능한 것이다. 그런 아내가 무슨 결혼을 하는가? 그게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그래서 여기에는 모순이 있다. 역설이다. 역설이라는 것은 모순 형용, 혹은 모순 어법을 통해서, 자체로는 모순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의 통찰이 있고 진리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 “아내가 결혼했다”라는 모순 형용 속에는 어떤 진리를 담고 있는가? 어쩌면 작가는 이 모순된 문장 끝에 하나의 부호를 붙였을 만하다. <아내가 결혼했다?> 조금 망설이다가 이것을 가로 안에 넣지는 않았을까? <아내가 결혼했다(?)> 가로 안에 넣을 바에야 생략의 묘미를 발휘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의문부호. 이것은 저자의 의도이건 아니건 간에 내가 이 책을 대면하는 첫 마당에서 강력하게 부각되어졌고, 궁금증은 스위스전 이후의 월드컵 공황을 어느 정도는 채울 수 있을 거라는 위안으로 다가왔다.

 

  “아내가 결혼했다”라는 이 문장 자체는 역설과 동시에 반사회적 서술 혹은 ‘내뱉음’이다. 반사회적이라고 하는 것은 법과 도덕과 질서로 ‘계약되어진’ 사회에 대하여 그 법과 도덕과 질서, 즉 사회적 가치를 이반하고 무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일부일처라고 하는 법적 도덕적, 이 사회의 질서적 가치로부터 이 문장은 이탈, 혹은 배신을 때리고 있으니 이 문장은 반역, 좋게 말해 혁명적이다. 혁명은 사회를 변혁하는 것, 궁극적으로 그 사회를 뒤엎는 것이기에 반사회적이므로, 이 문장에도, 나아가 이 소설에게도 ‘혁명적’이라는 수식이 가능하리라.

 

  이 소설의 줄거리는 아주 간단하다. 이 소설은 크게, 한 남자가 자신의 이상형이라고 할 수 있는 ‘완벽한’, 혹은 완벽에 가까운 여자를 만나서 사랑하게 되고, 그 여자와 결혼하게 된다. 그런데 이 여자는 ‘유별난’ 사상의 소유자로서 일부일처제적 사회 가치에 반대하고, 개인적으로는 일처다부를 꿈꾸고, 나아가 다부다처의 사회를 상상하기도 한다. 이런 사상의 소유를 가진 이 여자는 그것을 현실화하기에 이르고, 결국 결혼을 한다. 이러한 것이 이 사회에서는 인정받을 수 없기에 다른 사회로의 이주, 이것은 망명이겠다, 다른 나라로의 이민을 하면서 끝내게 된다. 결국 이민을 갖는지, 이민 이후에는 어떤 생활을 펼치게 되는지는 속편의 가능성을 남기면서 독자의 상상과 기대를 재촉하면서 끝을 맺는다.

 

  이렇게 간단한 줄거리라지만, 이것은 하나의 장편 소설을 충분히 구성하고 있다. 어째서 그것이 가능할까? 이 사회에서는 이것은 하나의 ‘불륜’으로 낙인찍을 수 있다. 이것이 조금 엇나가면 하나의 야설화가 가능하다. 그러면 충분히 장편이 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리 야한 부분은 눈을 씻고 찾아는 봤지만,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능했을까? 바로 ‘축구’와의 접목이다. 2~3쪽의 짧은 부분들의 이야기들은 축구 에피소드와 연결되면서 나름의 재미를 유발한다. 그로써 이 짧은 줄거리가 살이 붙어 장편이 되기 가능했던 큰 이유가 아닐까한다.

 

  제목도 특이하지만 축구와의 접목은 색다르다. 그 색다름은 월드컵이라는 열기와 만나 대중적으로 이 책은 부흥했다. 많이 팔렸다는 얘기다. 솔직히 말해 이야기 자체의 재미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나오는 축구 에피소드들이 내겐 더 재미있었다.


일부일처제의 통념에 대한 소설적 논의에서 단 3인의 등장으로 장편을 이루어 낼 만큼 작가의 역량은 눈부시다. 월드컵 4강전을 관전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도 이 작품이 지닌 미덕이다. -김윤식(문학평론가)


보편적 윤리관을 뛰어 넘는 주제가 월드컵 결승전을 관전하듯 경쾌하게 전개된다. -김원일(소설가)


  김윤식 교수나 김원일 작가는 이 이야기가 월드컵 경기를 보는 것 같다는 찬사 비슷한 축사를 하고 있지만, 이 소설 자체가 ‘축구’라는 큰 테제를 벗어나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또 하나의 의문부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소설의 제재가 가지는 특이성, 전통적 사회가치에 대한 의문부호를 던지고 있는 주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의 이야기 진행은 내 입장에서는 흥미진진이라는 사자성어보다는 ‘뻔’하다는 인상을 읽어갈 수록 높여만 갔다. 나만 그랬던 것인가? 갈수록 이야기 진행보다는 축구 에피소드들이 더욱 흥미진진했다. 왜일까?

 

  나는 그 문제를 이 소설이 가지는 주제의식, 그리고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법에서 찾을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일부일처제라는 통념에 대해 의문부호를 달아놓고 있는 이 소설이, 중대하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의 묘미가 무거운 주제를 쉽게 풀어나가는 데 있기도 하지만, 역으로 그 무거운 주제를 쉽게 풀어나가는 것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의문부호를 달아 놓기는 했으나, 소설적 논의 안에서 작가 혹은, 작가의 대변인으로서의 화자는 나름대로의 설득력 있는 견해를 내놓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 소설의 문제점으로 지적 가능하다. 어쩌면 너무 쉬워서 탈인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소설이 <세계문학상>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기에는 조금 모자란 듯 보인다. 여기에는 어쩌면 상업적 논리가 크게 작용해 보인 듯하다. 월드컵이라는 상황과, 소재의 논쟁적 요소는 이 소설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소설 자체는 그 관심에 부흥하기에 불충분했던 것이다.

 

  나는 여기에 소설적으로도 몇 가지 점에서 다소 고전적인 면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이 소설의 주인공, 그 ‘아내’라는 인물의 고전성이다. 고전소설 중에 「박씨전」이 있다. 이 ‘아내’라는 인물은 거반 ‘박씨’라는 인물과 동급이라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 만능이라는 얘기다. 인물이 특출나게 예쁜 것이 아닌 것만 빼고. 그리고 작중인물들의 현학취미 또한 약간의 불쾌감을 자극한다. 폴리아모리니 뭐니 하는 인류생물학적 용어의 빈번한 사용도 그렇거니와, 이 여자는 거의 전문연구자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로, 작가는 이 여자는 책이 무진장 많다는 것을 전제했다.

 

  이 책을 읽기 얼마 전 나는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섹스의 진화󰡕(사이언스북스, 2005.)를 읽은 적이 있다. 여기서는 인간의 성적 습성이 전 지구적 동물사회에서는 매우 특이한 별종이라는 논점을 보이고 있고, 거기에서 인간의 섹스가 유전자 전쟁이라는 주 테제아래 진화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아내가 결혼했다󰡕에서도 일부일처니, 일부다처니 하는 논쟁적인 문제를 다루면서도, 단순히 인간의 유전자 번식을 거의 유일한 목적으로 결혼과 섹스를 보는 관점이 조금 미흡해 보인다.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적인 것이다. 이것을 단순한 유전자 번식 외의 어떤 것으로라도 설명해내야 하지 않을까?

 

  지금은 월드컵이 끝나갈 무렵이다. 4강이 가려졌다. 스위스는 16강에 조1위로 올랐으나, 16강 진출국 중 가장 약체로 꼽히는 월드컵 처녀 출전국 우크라이나에 무릎을 꿇었다. 그것도 승부차기까지 가서 한 골도 넣지 못하고 월드컵 역사상 전무한 승부차기 3 : 0 패를 기록하고 탈락했다. 아이고, 고소해라.

 

  반면에 프랑스는 조별예선 이후 승승장구, 강호 스페인을 물리치더니, 8강에서는 브라질을 꺾었다. 아이고, 이런! 우리가 올라갔으면 브라질도 이길 수 있었던 거 아니야! 아이고 배 아파라. 브라질이 떨어졌으니 이번 월드컵의 격이 조금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왜 일까? 고만고만한 팀들이 4강에 남았다. 독일 對 이탈리아, 포르투갈 對 프랑스. 누가 이길지 모르는 이 상황이 내게 어떤 흥미를 자극하고 있으니 말이다.

 

  스위스전 이후 월드컵 공황을 이 책으로 채우려고 했으나, 그것은 다소간의 실패로 돌아갔다. 이 책이 누구 말대로 가독성이 뛰어나서, 나는 이 책을 읽는데, 이틀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축구에 관한 에피소드를 읽어나가는 재미가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이지만. 이제는 잠시 월드컵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한다. 2006 독일 월드컵의 주인공은 누가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으니 말이다. 조심스럽게 예측하건데, 독일의 2연패에 점수를 조금 더 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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