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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탑
윌리엄 골딩 지음, 신창용 옮김 / 삼우반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인간의 삶이란 것이 그저 하루하루를 먹고 마시며 때우는 것을 전부로 한다면, 그 삶이란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을까? 현대를 근근(僅僅)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야 하루하루의 육체적 삶이 눈앞에 놓인 불똥과도 같겠지만, 그들에게 또한 이상(理想)이 있고, 꿈이 있고, 미래에 대한 장밋빛 환상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소중한 꿈과 목표를 가지고 하루하루의 고된 일상과 지루함, 그리고 고통들까지고 감수(甘受)하며 살아간다. 과연 우리가 의도하고 목적했던 바 그 목표를 완벽히 이루어 내는 사람이 많지 않다손 치더라도, 아니 그 가능성이 희박함을 여실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마다의 인간들의 그것에 목숨을 건 인생의 승부를 건다. 과연 그것은 타당한가? 과연 그것은 자기 자신을 내어 던질만한 가치가 있는 승부인가? 그 목표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버리고 희생시킨 그 모든 것들의 가치를 그 목표가 보상해줄 수 있는 것인가?

 

  소설 ꡔ첨탑ꡕ은 본질적으로 이런 물음들을 끄집어낸다. 여기서의 그 목표란 ‘첨탑’으로 상징화되어 나타나고, 그 첨탑에 대한 어쩌면 돈키호테적 무모함의 돌진으로 비추어지는 인생의 승부를 건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이다.

 

  이 소설의 작가 윌리엄 골딩William Gerald Golding은 우리 일반인에게는 참으로 낯선 작가이다. 나도 부끄러운 고백일지는 모르지만 골딩이라는 작가를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되었다. 윌리엄 골딩은 무엇보다 ꡔ파리 대왕ꡕ으로 유명하고, 노벨문학상을 수상(1983년)한 뛰어난 작가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해서 조금은 민망스러울 따름인 것이지, 이 소설을 읽는 데에는 크게 방해를 받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어떤 편견스러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도 해야겠다. 과연 ‘첨탑’은 무엇일까를 좇아가면서 읽어낸 인간 본연에 내재한 문제의식들이 스스럼없이 솟구칠 수 있었던 것은 이 소설 이전의 골딩이라는 작가를 내가 알지 못하였기에 오히려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 「십자가」(  및 강조 필자)


  나는 이 소설을 읽기 전에 이 소설의 제목이 ‘첨탑’인 것에 윤동주 시인의 위에 인용한 시가 오버랩이 되면서, 과연 이 ‘첨탑’의 의미는 무엇이고 이 소설은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인가에 대해 매우 궁금해지면서 책장을 하나둘 조심스럽게 넘겼다. 읽고 난 후의 생각은 위의 시에 나오는 ‘첨탑’이, 이 소설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라는 물음에서 우리는 단적으로 ‘첨탑’이라고 하는 상징적 기호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지는 재삼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이상이요 지향점이다.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적 욕망이요, 목표이며, 타락하고 세속적인 세상과는 다른, 우리를 그것으로부터 격리시켜주는 하나의 이상적 공간이다. 이 ‘첨탑’에 도달하는 것은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고귀한 성인의 반열에 들어가는 것일 터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상에의 도달에는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수반해야만 한다는 것 또한 사실임과 동시에 비극이다. 비극이라 한 것은 그러한 희생을 완벽히 감당해낼 수 있을 만큼 강인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평범한 인간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첨탑’에 대한 상징적 의미를 소설 ꡔ첨탑ꡕ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주인공 조슬린에게 있어 ‘첨탑’ 건설은 하나의 이상이며, 지향점이고, 도달해야만 하는 사명인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 과정에서는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흘려야만 했던 것이다.

 

  이 소설은 “줄거리 자체는 단순하지만, 작가는 여기에 대단히 복잡한 상징체계를 결합시켜 ꡔ파리 대왕ꡕ 이래 작가가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는 주제 의식을 제시하는 대단히 독특한 작품이다.”(역자 후기, 「윌리엄 골딩의 소설 세계와 ꡔ첨탑ꡕ의 의미」, 282쪽) “영국의 중세를 시대 배경으로 주인공 조슬린이 대성당에 첨탑을 건설하는 과정”이 곧 이 소설의 줄거리인 것이다. 이런 단순한 내용 속에 작가 골딩은 심층적 내면을 서술해 내면서, 다양한 상징적 구조물들을 곳곳에 배치시켜 놓음으로써, 단순한 내용을 전혀 단순하게 읽지 못하도록 의도적으로 구조화시켜 놓고 있다. 이것이 작가 골딩의 위대성이라 한다면 누구나 인정 가능한 위대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작가적 역량의 위대성 때문에 이 소설은 우리에게 매우 어렵게 다가온다. ‘재독’을 적극 권장하고 있는 여러 비평가들의 이구동성(異口同聲)까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독(一讀)이건 재독이건 간에 이 소설을 통해 상징적 표현들을 술술이 풀어내고, 이 안에 담긴 작가의 암호와 전략들을 무장해제(武裝解除)시키는 것에 이 소설의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는 하나의 읽기 방법일 터이지만, 그 상징적, 암호적 서술방식을 넘어서, 혹은 그 이전에 우리에게 주는 무언가가 있고, 그것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우리 내면의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 이 소설은 근본적 주제의식이며 작가 골딩이 우리에게 내어놓은 소설 ꡔ첨탑ꡕ의 뛰어난 가치가 되는 것이다.

 

  앞에서 ‘첨탑’이라는 이상에 대한 추구와 도달에의 지향은 “꽃처럼 피어나는 피”같은 희생을 수반한다고 하였다. 이 소설 속에서도 이러한 희생은 필수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작가 골딩은 그것은 단순한 비극으로 마무리 짓지 않았다. 아니 더욱 정확히 이야기한다면 결론을 내지 않았다고 해야 옳겠다.

 

  과연 이상에의 추구를 통해 가져와 그 희생들을 감내해내는 것이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일까에 대한 작가의 물음이 곧 이 소설의 결론이라면 결론이다. 작가는 조슬린의 ‘첨탑’이 아직 무너지지 않고 있음을 애써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했고, 피해를 주면서까지 건설해내고 만 조슬린의 돈키호테적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그 희생된 제물들의 피해를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또한 여운으로, 혹은 작가의 또 다른 목소리로 울려나고 있다.

 

  많은 비평가들이 이 소설의 재독을 권하고 있다. 그 이유는 골딩이라는 작가의 물음에 이제는 답을 찾아보시라는 소리가 아닐까한다. 이제 재독을 남겨진 책임으로 하고, 답을 찾기 이전에 나라는 인생의 ‘첨탑’은 무엇이며, 그 과정 속에서 나는 또 하나의 조슬린이었던 적은 없는 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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