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시 어떻게 가르치고 계세요?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설령 이 말이 과장된 것이라 할지라도 교사는 학교교육에서 언제 어디서든 큰 의미와 비중을 지닌다.
물론 이는 어느 교과나 마찬가지이다. 문학교육, 그 중 시교육도 여기에 해당한다. 그래서 교사들에게 물었다. 설문은 2006년 10월 한 달 동안 전국의 국어교사를 대상으로 진행되었으며 설문의 결과는 응해주신 선생님들께 다시 전달했다. 설문에 답해주신 선생님들께 감사드리며 모쪼록 이번 설문의 결과가 우리의 시교육을 살피는 데 작으나마 성과로 이어지길 바란다.

[성별] 남자 32% / 여자 68%
[교직경력] 4년이하 / 4~8년 / 16~20년 / 20~24년 / 12~16년 / 8~12년
[담당학년] 고2 / 고3 / 고1 / 중2 / 중3 / 중1

예상에 비해 답신은 많지 않았다. 서둘러 마감한 탓이기도 했다. 아무튼 최종응답자 수는 74명이며 응답자들의 교직경력은 10년 미만이 전체의 60% 이상을 차지했다. 또한 중학교 교사와 고등학교 교사의 비율은 35:65로 나타났다.

[가르치기 어려운 분야는 무엇입니까?] 시 40% / 소설 30% / 희곡 20% / 없음 / 수필
[문학장르 중 가장 흥미롭게 가르치는 분야는 무엇입니까?] 시 56% / 소설 34% / 없음 / 희곡 / 수필

시, 관심 많으나 어렵다
교사들은 문학 장르 중에서도 시를 가르친다는 것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본격적인 설문에 앞서 '시교육'에 대한 교사의 개인적인 취향을 물었다. 그 결과 다른 장르와 비교해 보았을 때 '시'를 가르치는 것에 대한 흥미가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더욱 주목해야 할 결과는 시가 가르치기 어려운 문학 장르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교사들에게 '시'란 가장 흥미롭게 가르치는 장르이지만 동시에 가장 가르치기 어려운 장르인 셈이다.

[시 수업에서 시 한 편 당 할애하는 시간은 얼마나 됩니까?] 1차시 36% / 1차시 미만 32% / 2차시 28%

시 수업 상황
시 한 편을 가르치는 시간을 물었다. 설문의 결과를 보면 시 한 편을 수업하는 데 1차시 또는 1차시 미만의 시간을 할애한다는 교사가 전체의 68%를 차지했다.
각각 45분, 50분간 진행되는 중, 고등학교 수업. 이 시간동안 하나의 시를 완전히 이해하고 느끼고 나눌 수 있을까? 현재 우리 교실의 학생 수는 35명 안팎이다. 시교육을 할 때 적정한 한 반의 학생 수는 몇 명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설문 결과에서 공통된 의견은 현재의 학생 수보다는 분명히 적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명의 교사가 35명이나 되는 학생들의 감상을 하나하나 듣고 이야기할 만큼의 시간은 결코 허락되지 않는다. 또 주어진 교육과정 안에서 갈 길은 멀고 가르쳐야 할 것들은 많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한 편의 시를 가르치는데 45분, 50분이면 족한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평가의 형태는 무엇입니까?]
객관식 평가 58% / 질의 응답식 구술평가 12% / 서술형 주관식평가 12% / 단답형 주관식평가 9% / 감상쓰기 7%

평가 형태
평가의 형태를 묻는 설문이다. 대부분의 교사가 두 가지 평가형태를 병행하지만 그 중에서도 객관식 평가를 실시한다는 교사가 58%를 차지했다. 교과서에 자신의 시가 실린 어느 시인의 말이다. "시에 대한 질문에는 모든 것이 정답이 될 수 있으며 모든 것이 오답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교실에서는 아직까지도 다섯 개의 답지 중에 가장 적절한 하나를 고르는 형태의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정답이라기보다는 가장 적절한 대답이 정답의 이름을 얻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시 속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여러가지 모습이 그려내는 삶의 양상, 그리고 이를 통해 학생들이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시각들은 어느 틈에 단 한 가지만을 빼놓고는 모두가 오답이 되고 만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선명한 대안은 없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평가방식이란 평가의 문제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이 정말 문제이다.

[시 수업 방법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개선되어야 한다 77% / 생각해 볼 문제다 19%
[시를 지도한 후에 만족도는 어느 정도입니까?] 대체로 만족 55% / 만족하지 못 함 41%

시교육, 물론 개선되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수업에는 만족한다? 
이렇듯 시교육을 하기에 썩 좋지 않은 상황에서 전체의 77% 이상의 교사들은 지금 바로 이 순간부터 시교육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이 모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체 응답교사의 반 이상이 자신의 시 수업에 대체로 만족하고 있었다.
시 수업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수업에는 만족하는 교사들. 이는 결국 현재의 시교육은 이중의 잣대 아래 진행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 하나는 많은 시를 접하고 그 속에서 다양한 인생을 경험케 하여 세상에 대한 시각을 넓고 깊게 갖도록 한다는 이상적인 시교육론이며, 다른 하나는 학생들로 하여금 정답을 잘 찾아 높은 점수를 받게 하고 좋은 입시결과를 얻게 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시교육론이다. 그래서 전자는 개선으로 이어지고 후자는 만족으로 이어진다.
예상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대답을 보면서 정작 우리가 걱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어느새 안주해 버린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이런 문제는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대답만 횡행할 것이 두렵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만일 현재의 시교육이 개선되어야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시교육이 개선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양한 시교육 방법 부족 51% / 학생수가 너무 많다 22% / 교과서 시 선택 잘못 16% / 학습목표 잘못 7% / 기타 5%

시교육, 개선되어야 하는 이유
절반 이상의 교사들은 시교육의 방법이 다양하지 못한 것을 개선의 이유로 말하고 있다. 색다른 방법론에 대해 교사들은 갈증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시교육 방식을 묻는 설문에서 전체의 75%가 강의식이라 답했으며 학생 발표라 답한 교사는 16%, 토론 수업은 4%의 교사만이 답했다.
분명 시교육 방법이 다양해져야 한다. 하지만 교사들에게만 이를 책임지울 수는 없다. 대학 입학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을 무엇보다 우선시해야 하는 학생과 학부모가 있고, 한 교사가 감당하기엔 벅찬 학생 수와 빡빡하게 주어진 교육과정 등등, 교사에게 주어져 있는 각양의 장애물을 알면서도 교사들에게 시교육의 대안과 방법을 찾안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누군가가 나서서 이러한 희망적 방법을 찾아내고 제공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주체는 누구여야 하나? 물론 교사가 여기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시교육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교직을 희망하는 사람들도 보다 적극적으로 시험적인 노력과 시도에 참여해야 한다. 오래지 않아 시교육을 담당하는 교사가 되었을 때 똑같은 고민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사범대학생들의 모색은 필요하다.

간략하나마 설문을 검토해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좋은 시교육을 해보고 싶다는 교사들의 의지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실로 기쁘고 감사한 일이었다.
(<시교육> 001,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시교육' 편찬위원회, 4~5쪽.)


 

기존의 시(교육)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 그러니까 시교육의 여러 문제들을 재확인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

시는 가르치기 어려운 분야이면서 가르치기 쉬운 분야이다. 말장난 같지만, 오늘날 우리 시교육의 현실에서는 그렇다. 제대로 된 시교육은 오늘날의 교육여건상 무지 어렵고 힘들다는 것은 재삼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가르치기 쉬운 분야이기도 하다는 것은, 오늘날의 시교육 현실을 질타하는 말이기도 한데, 시를 가르치는 것은 무슨 수학공식처럼, 암기과목처럼 되어 버려, 시교육의 현장에서는 뚝~딱 요점정리해서 간단한 공식들, 외워야 할 것들 가르치면 되는 것이니, 어찌 이보다 쉽지 않으랴?

어떤 점에서 시에 교사들이 흥미를 느끼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무엇보다 시를 가르치는 국어교사 본인도 시교육을 제대로 받았을까? 나는 분명 시교육 혹은 교수법을 제대로 배운 기억이 없다. 그리고 오늘날의 국어교사들도 많은 이들이 시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아는 바도 별로 없어 보인다. 그나마 시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니 희망이 보이기도 하다.

위에서 말하듯이 얼마나 시교육이 얼렁뚱땅인지는 시수업상황 설문조사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시 한 편 가르치는데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시 공식에 집어넣고, 몇개 특별한 것 외우게 하면 끝이니 오래 걸릴래야 걸릴 수가 없겠다. 소설 한 권은 대략 300쪽이 넘는다. 시 한 권은 끽해야 100쪽이다. 그런데, 나는 시 한 권을 읽고 이해하는 데 소설 한 권을 읽어내는 것보다는 곱절 이상이 걸린다. 시 한 편은 어지간한 단편소설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걸 우리는 알기는 하는가?

얼마전 안도현 시인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거기서 내가 질문했던 것이 시교육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것이었다. 안도현 시인의 얘기가 재밌다. 안 그래도, 자기 시가('우리가 눈발이라면')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는데, 시인 아들이 그것을 학교에서 배웠다면서 문제를 내더란다. 자기 시이기도 하고, 아들이 그렇게 당당하게 질문을 하니 아니 대답하기가 그래서, 정성껏 대답을 했다는데, 아들 왈, 2개는 맞고 하나는 틀리단다. 허허!

이게 오늘날 시교육의 현주소다. 시를 놓고 객관식 문제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 싶다. 시는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하기에 의미가 있다. 시가 어느 하나의 정답과 일대일 대응을 한다면 그건 시가 아닐지 모른다.

현직 교사들의 태도에도 문제는 있어 보인다. 분명 그들은 오늘날의 시교육에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지만 자기 수업에는 만족을 한다. 그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혹시나, 내 수업은 괜찮은데, 다른 선생들 수업이 문제지 하는 생각일까? 그것도 하나의 해석으로 가능할 듯 하다.

문제는 있지만, 그래도 자기 수업은 괜찮다는 심보로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내가 아는 선생님들 중에서는 제대로된 시교육을 위해 어려모로 도전하고 시도해 보는 분들이 많다. 교육과정이 바뀌고 나라에서 정말 제대로 된 시교육을 하라고 시켜야 바뀌는 것이 절대 아니다. 일선에서의 작은 목소리가 합쳐져 큰 목소리를 이룰 때, 큰 울림으로 울릴때 그때서야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다양한 시교육 방법의 부족을 들고 있는데, 더 근본적인 것은 시를 시로서 대하는 것을 회복해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시를 마음으로 느끼는 것. 그것을 우리 시교육은 회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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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시험, 작시(作詩)를 허(許)하라!

때는 1852년(철종 3) 10월 15일, 창경궁 춘당대. 넓은 마당은 전국에서 모인 유생들로 북적인다. 두-둥, 긴장감을 머금은 북소리와 함께 시험관이 냉랭한 목소리로 시험 시작을 알리며 시제가 적힌 종이를 펼친다. 드디어 공개된 시제는 '대악여천지동화부(大樂與天地同和賦)'. 부산했던 시험장은 한숨 소리로 가득 찬다. 하지만 이내 유생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붓을 들어 글쓰기에 몰두한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과거장. 철종은 큰 걸음으로 유생들이 과문을 작성하는 모습을 살피며 과거장을 거닐고……두-둥, 다시 북이 울리자 유생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붓을 내려 놓는다. 그리고 얼마 후, 급제자를 발표하는 시간이 다가오자 과거장의 긴장감은 절정에 다다른다. "문과 장원에 김준(金準)!" 연이어 올해 정시 문과에 급제한 7명이 호명되고 음악이 울린다. 철종은 급제자들의 노고를 치하하고자 은영연(恩榮宴)을 베푼다.

과거제도는 국가의 관리를 선발하기 위해 고려 때부터 실시된 시험으로 지금의 공무원 선발 시험에 해당한다. 유교의 숭문주의와 입신양명 정신이 지배했던 조선. 그리고 학문을 다진 후 과거를 통해 국가의 관리가 되는 것을 으뜸으로 생각했던 조선시대 사람들. 그들이 느끼는 과거의 중요성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중요한 과거에는 어떤 과목이 포함되어 있었을까? 작시(作詩)가 과거제도에서 매우 중요한 시험 중 하나였음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경국대전과 대전회통을 살펴보면 당시 과거에서는 강경(講經)과 제술(製述)을 시험봤으며 제술에는 작시(作詩)가 필수 과목으로 속해 있어 시를 짓는 능력이 관리 선발의 한 기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조선은 과거에서 작시를 시험 과목으로 선정했던 것일까? 작시를 통해 무엇을 보고자 한 것일까?

일찍이 공자는 "시를 읽으면 품성이 맑게 되고 언어가 세련되며 물정에 통달되니 수양과 사교 및 정치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하여 시가 인성에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를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런가 하면 김경용 교수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작시 능력은 개인의 경학적 지식과 논리를 전개하는 힘, 그리고 한 사람의 인성까지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며 특히 넓은 성품은 국가 관리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었기 때문에 과거에서 작시가 하나의 과목으로 채택되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즉 한 편의 시를 짓기 위해서는 인지 능력과 논리 전개력 그리고 인성 등이 고루 발달해 있어야 하는 만큼, 시를 지어 보게 하면 이 세 가지 능력을 두루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에서는 작시 과목을 채택했던 것이며, 덕분에 유생들은 과거를 준비하면서 자연스레 지식과 인성을 함께 쌓아갈 수 있었으리라.

그렇다면 오늘날의 과거라 할 수 있는 공무원 선발시험은 어떻게 치러지고 있을까? 얼마 전 보도된 내용에는 서울시 공무원 시험의 경쟁률이 162대 1을 기록했다고 한다. 엄청난 경쟁률이다. 경쟁률이 이렇게 높으니 평가는 공정해야 하며 기준은 객관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현재의 공무원 시험은 주로 국어와 영어, 한국사 그리고 지원 분야에 대한 지식을 측정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공무원으로서 갖춰야할 기본 지식을 평가하는 것이 아무리 중요해도 공무원을 선발하는 데 양적인 인지 내용만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

물론 그렇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공무원 선발시험은 논리와 인성 그리고 표현과 정서에 관한 것을 적지 않게 간과하고 있는 셈이며, 덕분에 지금의 교육은 조선의 그것보다 이런 점에서 소홀해진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말한다. "이 시대에도 공무원 선발 시험에 작시(作詩)를 허(許)하라!"고 말이다. 그리하여 교육에서도, 세상을 넓게 보며 만사에 두루 해박하고 다양하게 생각하며 또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인재를 길러내자는 것이다. 시를 통해, 그리고 시교육을 통해 한결 두툼한 인재를 길러내자는 것이다.
(<시교육> 001호, 3쪽.)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서 펴낸 <시교육>이란 잡지의 권두언쯤된다.

공무원 시험에 작시라니? 가상한 상상일 뿐이다. 현실적으로 공무원 시험에 작시를 포함시키는 것이 얼마나 타당한 것인가도 의문이고, 불을 보듯 뻔히 예상되듯이 격렬한 반발도 있을 것이다.

우선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과거의 과거시험과 현재의 공무원 시험을 동급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말하자면 현재의 공무원 시험은 그야말로 행정직 하급관리를 선발하는 시험이다. 그런데 과거의 과거시험은 이와는 조금 성격이 다르지 않겠는가? 격이 조금 다르다.

한가지 더 생각해 볼 문제는, 그때의 작시와 지금의 작시가 또한 다르다는 것이다. 과거시험에서의 작시에는 큰 틀이 있어야 했다. 단순한 인지능력과 논리 뿐만이 아니라, 유교(성리학) 사상을 바탕으로 시 전체에 그것이 함축적이면서도 논리적으로 담겨 있어야 했던 것이다. 거기에 당근 충효예가 빠질 수가 없을 것인데, 이걸 두고 인성이라 하다면, 어쩔수 없으리라.

형식적으로도 정형시의 형태를 띄었으니, 지금의 시와는 사뭇 다르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는 작시를 하더라도 거기에 평가의 기준이 명확했던 것인데, 형식과 내용면에서 명확한 기준은 평가에 어려움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이것이 가능할까? 정형시를 쓰라고 해야할까? 내용은?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예를 지키며 살아가자, 뭐 그런 내용으로 시를 써야 할까? 사랑시를 쓰면 안될까? 풍자시도 어떨까? 해체시를 한 번 써볼까? 어려운 일이다.

딴지 걸자는 건 아닌데, 어떤 식으로든, 문학이든 시이든 간에, 각종 국가고시 등에서 반영된다면 그것의 중요성이 높아지게 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다만 바람직하기만 한 것일까는 다소 의문이다. 하여간 시교육에만 국한하여 생각해도, 진정한 시교육이 국가고시에서 평가될 수 있는 종류는 아닐 것이다. 시교육의 미래를 보다 진중하게 생각해보고 그 대안을 찾아야하지 않을까? "공무원 시험, 작시를 허하라!"고 하는 둥의 가상한 상상은 좀 아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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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2-28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분은 '이를테면'의 의미가 아니라 정말 '작시'를 원한 것일까요? 그랬다면 상상력이 무지 풍부한 것 같아요^^;;;;

멜기세덱 2006-12-28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겠죠? 요즘 논술이 뜨고 있는데, 미래를 내다보고 작시 공부를 좀 해서 그쪽으로 함 나가볼까요...ㅎㅎ 제 생각은 우리나라 시교육은 여러 잡다한 것 빼고, 시가 시로서 다가가고 다가올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거랍니다..ㅎ
 

  바람을 맞다(천양희, "너무 많은 입", 창비, 2005)


  바람이 일어선다 나무가 서 있는 곳은 초록빛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나무는 영원한 초록빛 생명이라고 누가 말했더라

  숲을 뒤흔드는 바람소리 「마왕」곡 같아 오늘은 사람의 말로

  저 나무들을 다 적을 것 같다 내 눈이 먼저 하늘을 올려다

  본다 비가 오려나 거우누별이 물기를 머금고 있다 먼 듯

  가까운 하늘도 새가 아니면 넘지 못한다 하루하루 넘어가는 것은

  참으로 숭고하다 우리도 바람 속을 넘어왔다 나무에도 간격이

  있고 초록빛 생명에도 얼음세포가 있다 삶은 우리의 수난

  목숨에 대한 반성문을 쓴 적이 언제였더라 우리는 왜

  뒤돌아본 뒤에야 반성하는가 바람을 맞고도 눈을 감아버린

  것은 잘한 일이 아니었다 가슴에 땅을 품은 여장부처럼

  바람이 일어선다


  천양희 시인의 시집 󰡔너무 많은 입󰡕(창비, 2005)에 수록되어 있는 시다. 이 시는 먼저 《현대시학》1월호에 발표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2005년 초였으리라 생각된다.


천씨는 미당문학상 후보작 중 독자에게 소개하기로 결정한 ‘바람을 맞다’가 “마들 들판과 수락산의 바람을 맞아가며 틈틈이 구상해두었다가 지난해 11월 가다듬은 시”라고 소개했다. “마침 분위기가 새해와 어울리는 것 같아 시 전문지 ‘현대시학’ 1월호에 신년시로 주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년시로 주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시에 담긴 시인의 의도를 따라 읽는 것은 시읽기의 기본이다. 새해를 맞이하는 벽두에 잡지에 싣는 시에는 흔히들 아는 그런 것들이 담겨있겠다. 시를 이해하는데 있어 이러한 제한을 먼저 내거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며칠 전 대학을 졸업한 후배에게 전화를 받았다. 물어볼 것이 있다며, 이 시가 있는데 몇 구절 해석이 안 되는 곳이 있단다. 그러면서 내가 좀 봐줬으면 한 것이다. 이렇게 물어온 그 후배가 나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는데, 참 부담스런 노릇이었다. 더욱이 이 시를 학교현장에서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에 내 멋대로의 해석은 다소 부적합하다는 사실이 이런 부담을 가중 시켰던 것이다.

 

  먼저 이 시를 한번 읽어낸 후의 인상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것이었다. 첫 구절은 보면 ‘바람이 일어’서고, ‘초록빛 생명’이 중첩되면서, 생동감을 일으킨다. 건너 뛰어 마지막 구절로 가보아도 “여장부처럼/바람이 일어선다”고 말하고 있어 ‘일어섬’의 의지적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일어난다고 하는 것을 그 반대적 의미와 견주어 생각해볼 때, 거기에는 무엇에 대한 지향과 의지, 그리고 생동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우선은 전반부의 ‘초록빛 생명’, ‘영원한 초록빛 생명’과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러한 ‘생명’에 대한 언급은 인간적 삶의 언급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중반부에서 보여지듯 “우리도 바람 속을 넘어왔다”는 것이다. 삶의 굽이굽이를 ‘넘어왔다’는 사실은 또한 앞으로도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이고, 그러한 삶에 대해 ‘여장부처럼’ 담대히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마무리되고 있다고 하겠다.

 

  이렇듯 이 시는 큰 어려움 없이 읽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 시를 더욱 시적이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있다. 바로 ‘바람’이 가지는 중충적, 다의적 의미이다. 다시 말해, 이 시에서 ‘바람’은 다양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고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선 1행에서 ‘바람’은 ‘일어선다’라는 서술어의 도움으로 생명을 동하게 하는 긍정적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바람’은 바람[望]과 동의적으로 이해되어도 좋을 것이다. 3행에서 ‘바람’은 이와는 달리 다소 부정적 의미에서 이해된다. 슈베르트의 「마왕」이 비유적 의미로 동원되면서 ‘마왕’의 유혹과 현혹의 목소리가 아이를 죽게 한 것처럼 ‘초록빛 생명’의 ‘숲을 뒤흔’들고 있다. 이러한 ‘바람’의 부정적 의미는 7행에서 인간적 삶에 부는 ‘바람’으로서 고난과 시련의 부정적 의미로 기능한다고 하겠다. 10행에서 더욱 확실해지고, 마지막 행에서는 다시 첫 행의 ‘바람’과 같은 의미로 전환된다.

 

  이 시에서 ‘바람’이 가지는 의미는 크게 3가지로 나뉠 수 있겠다. 표면적인 의미의 ‘바람’[風]이 바람[望]이라는 긍정적 의미와 시련과 고난이라는 부정적 의미로 나뉘어진다. 그러니까 ‘風/望/수난과 시련’이라는 중층으로 ‘바람’은 이해되어진다.

 

  이러한 시의 해석에서 다시 앞서 말한 신년시로 이 시가 발표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새해 벽두 희망을 제시하는 신년시의 기능에 이 시는 충분히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 이해는 이 정도로 충분하지 않을까?

 

  이 정도는 내게 물어온 후배도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해석이 잘 되지 않는다는 그 몇 구절은 3행과 8행에서 10행의 “삶은 우리의 수난/목숨에 대한 반성문을 쓴 적이 언제였더라 우리는 왜/뒤돌아본 뒤에야 반성하는가”하는 구절이다.

 

  3행의 “숲을 뒤흔드는 바람소리 「마왕」곡 같아”라는 구절은 몇 가지 사전지식을 동원해야 할 것이다. 이 시에서 시인의 괴테의 말을 인용하고 있고, 이 「마왕」이라는 곡도 괴테의 이야기에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위에서 ‘바람’의 중층적 의미를 밝힌 것을 참조하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생각된다.

 

  “삶은 우리의 수난/목숨에 대한 반성문을 쓴 적이 언제였더라 우리는 왜/뒤돌아본 뒤에야 반성하는가”라는 구절은 3행에 걸쳐있다시피 3부분으로 나누어 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 8행에서 “초록빛 생명에도 얼음세포가 있”듯이 ‘삶’에도 ‘수난’이 있다는 이야기다. 앞서 ‘초록빛 생명’은 ‘삶’과 연결된다고 이야기했으니 이것도 어려울 것이다 없다. 이어서 행을 바꾸어 나오는 ‘목숨’은 ‘초록빛 생명’, ‘삶’과 이어지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는 의미의 다른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삶’보다는 그 어감이 앞 행의 ‘수난’과 연결되면서 색다르게 다가온다. ‘반성문’은 삶에 대한 성찰이고 그러한 성찰이 없었던 삶에 대해 자성한다.

 

  이어서 10행에서는 보다 뚜렷이 그러한 자성의 목소리를 높인다. “뒤돌아본 뒤에야 반성하는” 행위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동시적으로 늘 반성하고 자성하며 자신의 삶이 보다 진실되게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반문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어지는 “바람을 맞고도 눈을 감아버린” 행위는 삶에서 오는 시련과 고통을 담대히 맞서 이겨내지 못하고 타협하고 피해버리는 그러한 행위을 의미한다. 이것은 마지막 행에서 분명 잘못한 것이었음을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에 9, 10행이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하나의 성찰이며 거기에 대한 반성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바람이 일어선다”. ‘여장부처럼’ 담대히 삶을 살아가겠다는 그 바람을 담고 있는 신년시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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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12-29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년이 다가오니 이 시가 더욱 와닿습니다. 제 서재로 가져가서 볼게요,
시에 대한 섬세한 고찰, 감사합니다.^^

멜기세덱 2007-01-02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는 배혜경님 되시길 바래요.
 

  백석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주옥같은 시들을 남겨 놓고도 아직 그 온전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는 뛰어난 시인이다. 월북한 시인들이나 이북의 시인들이 해금되면서는 누구보다 정지용이 가장 크게 조명되었다. 하지만 백석은 근래에 들어 그 연구가 전개되고 있으나, 아직도 백석의 시적 가치를 온전히 밝혀내기에는 미미한 수준에 그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백석의 시중에서 <여승>이라던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라는 시를 교과서에서 배워 알 뿐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온전히 백석의 시를 대표하지는 않는다. <여승>에서 보이는 슬프고 애절한 이야기 시적 경향이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서의 시적 자아의 고독의 편지와 같은 경향은 백석의 많은 절창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백석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러가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의 일순위로 꼽히는 김소월과 같은 지역 출신이며, 김소월을 잇는, 그러면서도 가일층 변화된 발전을 보여주는 우리 시사의 최고의 시인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왜 이런 평가를 단정하여 그에게 부여하는가?

    멧새 소리

  처마끝에 명태를 말린다

  명태는 꽁꽁 얼었다

  명태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다

  문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위의 시를 나는 백석의 절창 중의 으뜸으로 꼽는다. 왜 그런가? 제목에 보이는 '멧새'는 시행 어디를 봐도 찾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이 멧새의 울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도 않다. 제목을 빼고 보면 이 시는 영락없는 명태타령이다. 시 제목을 명태라고 한들 이 시가 어디에 내 놓아도 기죽지 않음이 분명하다. 얼핏 제목을 잘못 지은 것만 같지만, 우리는 이 시를 더욱 뜻깊게 읽기 위해서는 행간 사이 사이 숨어있는 시인 백석의 위대성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제목이 '멧새 소리'다. 처음 읽을 때는 들을 수 없던 그 소리가, 두 번, 아니 세 번째 읽을 때는 강원도 어느 바닷가 해변에 길게 널린 명태 사이 사이에 손가락 만한 멧새 한 마리가 숨어 날아다니며 울음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그 소리의 음향을 상상하며 이 시를 다시 한번 읽어보면, 곧 왜 제목이 명태가 아니고 멧새 소리인가를 알 수 있다.

  이 시에서 명태는 시적 화자 '나'와 동일시되는 객관적 상관물이라고 하겠다. 즉 '나'는 추운 겨울 바닷 바람 싸늘히 불어오는 해변가에 '파리'하게 널린 '명태'인 것이다. 그 사이에 시인은 한 편 대조적이면서도, 가일층 쓸쓸하게 하는 음향을 첨가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읽어 보라. 과연 멧새 소리는 이 시의 의미를 최고조로 강화시키는 훌륭한 기능을 하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백석의 위대함이다. 김소월의 운율적 감각에 못지 않는 리듬이 있다. 우리 옛 이야기가 녹아나는 전통과 애환 또한 그의 시에 담아낸다. 그러면서도 시가 한 개인의 고뇌의 산물임을 또한 드러내고 있다. 우리시의 근대성, 혹은 현대성을 또한 찾는다면, 그의 시는 훌륭한 선구자가 될 수 있다.

  이런 백석의 시집은 그리 많지 않다. 그가 살아 생전 내놓은 것은 단 한 권의 시집 뿐이다. 바로 <<사슴>>이라는 시집이다. 아직도 그는 우리에게 청년 백석으로 기억된다. 그는 우리에게 어쩌면 목이 길어 슬픈 '사슴'이었던 거싱 아닐까? 백석의 위대함이 진정으로 조명되고 우리에게 기억되기를 나는 바란다.

 

 

  참고로 백석의 시 전집을 몇 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중에 나는 가운데, 이동순 선생이 편한 <<백석시전집>>을 추천한다. 부록으로 산문을 포함하고, 더욱 좋은 것은 백석의 시어들을 친절히 풀어놓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백석의 생애와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책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번째 책은 이미지가 없지만, 건국대출판부에서 문학의 이해와 감상 시리즈로 출간한 백석에 대한 해설서다. 간단히, 하지만 충실히 백석의 생애를 중심으로 백석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두번째 책은 백석의 애인 자야여사가 백석을 회고하며 쓴 책이다. 그리고 최근에 <<백석 시 바로 읽기>>라는 책이 나왔는데, 얼마나 바로 읽었는지는 아직 확인해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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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우와 연우 2006-06-11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아가요, 백석시전집...그의 시도 좋지만 편한이 이름도 반갑고..

멜기세덱 2006-06-15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석이란 이름은 참 멋진 이름이에요! 그 이름이 반가우실 정도이면...

김희중 2015-01-21 0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득 생각이 나서 <멧새 소리>를 검색하던 중 닉네임이 낯익어 유심히 다시 보니 역시 형이었네요. 전에 세미나에서 같은 질문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어떻게 지내세요? 저는 명태처럼 삽니다. ㅜ
 

나의 긴 한숨을 동무하는

못 잊게 생각나는 나의 담배!

來歷을 잊어바린 옛 時節에

났다가 새없이 몸이 가신

아씨님 무덤 위의 풀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보았어라.

어물어물 눈앞에 스러지는 검은 煙氣,

다만 불타고 없어지는 불꽃.

아 나의 괴로운 이 맘이여.

나의 하염없이 쓸쓸한 많은 날은

너와 한가지로 지나가라.

 

*새없이 : 무엇을 할 사이가 없이 

오하근, <<정본 김소월 전집>>, 집문당. 1995. 에서

 

  김소월의 유일한 시집 <<진달래꽃>>에 수록되어 있는 시이다. 김소월 시인의 짧은 생애는 담배와도 같이 '불타고 없어지는 불꽃'이었다. 너무 짧았기에 아쉬움이 남는 뛰어난 시인 김소월.

  나도 담배를 태운다. 김소월 시인의 이 시는 내가 담배를 피우는 변명이 되어주기도 할 것이다.

  "내력을 잊어바린 옛 시절에 / 났다가 새없이 몸이 가신 / 아씨님 무덤 위의 풀이라고 / 말하는 사람"이 내일부터는 내게 되지 않을까?

  아! 이 놈의 담배를 끊기는 또 더욱 쉽지가 않겠구나!

  담배 한 대 입에 물고 다시 한 번 시를 읊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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