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맞다(천양희, "너무 많은 입", 창비, 2005)


  바람이 일어선다 나무가 서 있는 곳은 초록빛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나무는 영원한 초록빛 생명이라고 누가 말했더라

  숲을 뒤흔드는 바람소리 「마왕」곡 같아 오늘은 사람의 말로

  저 나무들을 다 적을 것 같다 내 눈이 먼저 하늘을 올려다

  본다 비가 오려나 거우누별이 물기를 머금고 있다 먼 듯

  가까운 하늘도 새가 아니면 넘지 못한다 하루하루 넘어가는 것은

  참으로 숭고하다 우리도 바람 속을 넘어왔다 나무에도 간격이

  있고 초록빛 생명에도 얼음세포가 있다 삶은 우리의 수난

  목숨에 대한 반성문을 쓴 적이 언제였더라 우리는 왜

  뒤돌아본 뒤에야 반성하는가 바람을 맞고도 눈을 감아버린

  것은 잘한 일이 아니었다 가슴에 땅을 품은 여장부처럼

  바람이 일어선다


  천양희 시인의 시집 󰡔너무 많은 입󰡕(창비, 2005)에 수록되어 있는 시다. 이 시는 먼저 《현대시학》1월호에 발표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2005년 초였으리라 생각된다.


천씨는 미당문학상 후보작 중 독자에게 소개하기로 결정한 ‘바람을 맞다’가 “마들 들판과 수락산의 바람을 맞아가며 틈틈이 구상해두었다가 지난해 11월 가다듬은 시”라고 소개했다. “마침 분위기가 새해와 어울리는 것 같아 시 전문지 ‘현대시학’ 1월호에 신년시로 주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년시로 주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시에 담긴 시인의 의도를 따라 읽는 것은 시읽기의 기본이다. 새해를 맞이하는 벽두에 잡지에 싣는 시에는 흔히들 아는 그런 것들이 담겨있겠다. 시를 이해하는데 있어 이러한 제한을 먼저 내거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며칠 전 대학을 졸업한 후배에게 전화를 받았다. 물어볼 것이 있다며, 이 시가 있는데 몇 구절 해석이 안 되는 곳이 있단다. 그러면서 내가 좀 봐줬으면 한 것이다. 이렇게 물어온 그 후배가 나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는데, 참 부담스런 노릇이었다. 더욱이 이 시를 학교현장에서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에 내 멋대로의 해석은 다소 부적합하다는 사실이 이런 부담을 가중 시켰던 것이다.

 

  먼저 이 시를 한번 읽어낸 후의 인상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것이었다. 첫 구절은 보면 ‘바람이 일어’서고, ‘초록빛 생명’이 중첩되면서, 생동감을 일으킨다. 건너 뛰어 마지막 구절로 가보아도 “여장부처럼/바람이 일어선다”고 말하고 있어 ‘일어섬’의 의지적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일어난다고 하는 것을 그 반대적 의미와 견주어 생각해볼 때, 거기에는 무엇에 대한 지향과 의지, 그리고 생동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우선은 전반부의 ‘초록빛 생명’, ‘영원한 초록빛 생명’과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러한 ‘생명’에 대한 언급은 인간적 삶의 언급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중반부에서 보여지듯 “우리도 바람 속을 넘어왔다”는 것이다. 삶의 굽이굽이를 ‘넘어왔다’는 사실은 또한 앞으로도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이고, 그러한 삶에 대해 ‘여장부처럼’ 담대히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마무리되고 있다고 하겠다.

 

  이렇듯 이 시는 큰 어려움 없이 읽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 시를 더욱 시적이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있다. 바로 ‘바람’이 가지는 중충적, 다의적 의미이다. 다시 말해, 이 시에서 ‘바람’은 다양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고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선 1행에서 ‘바람’은 ‘일어선다’라는 서술어의 도움으로 생명을 동하게 하는 긍정적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바람’은 바람[望]과 동의적으로 이해되어도 좋을 것이다. 3행에서 ‘바람’은 이와는 달리 다소 부정적 의미에서 이해된다. 슈베르트의 「마왕」이 비유적 의미로 동원되면서 ‘마왕’의 유혹과 현혹의 목소리가 아이를 죽게 한 것처럼 ‘초록빛 생명’의 ‘숲을 뒤흔’들고 있다. 이러한 ‘바람’의 부정적 의미는 7행에서 인간적 삶에 부는 ‘바람’으로서 고난과 시련의 부정적 의미로 기능한다고 하겠다. 10행에서 더욱 확실해지고, 마지막 행에서는 다시 첫 행의 ‘바람’과 같은 의미로 전환된다.

 

  이 시에서 ‘바람’이 가지는 의미는 크게 3가지로 나뉠 수 있겠다. 표면적인 의미의 ‘바람’[風]이 바람[望]이라는 긍정적 의미와 시련과 고난이라는 부정적 의미로 나뉘어진다. 그러니까 ‘風/望/수난과 시련’이라는 중층으로 ‘바람’은 이해되어진다.

 

  이러한 시의 해석에서 다시 앞서 말한 신년시로 이 시가 발표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새해 벽두 희망을 제시하는 신년시의 기능에 이 시는 충분히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 이해는 이 정도로 충분하지 않을까?

 

  이 정도는 내게 물어온 후배도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해석이 잘 되지 않는다는 그 몇 구절은 3행과 8행에서 10행의 “삶은 우리의 수난/목숨에 대한 반성문을 쓴 적이 언제였더라 우리는 왜/뒤돌아본 뒤에야 반성하는가”하는 구절이다.

 

  3행의 “숲을 뒤흔드는 바람소리 「마왕」곡 같아”라는 구절은 몇 가지 사전지식을 동원해야 할 것이다. 이 시에서 시인의 괴테의 말을 인용하고 있고, 이 「마왕」이라는 곡도 괴테의 이야기에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위에서 ‘바람’의 중층적 의미를 밝힌 것을 참조하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생각된다.

 

  “삶은 우리의 수난/목숨에 대한 반성문을 쓴 적이 언제였더라 우리는 왜/뒤돌아본 뒤에야 반성하는가”라는 구절은 3행에 걸쳐있다시피 3부분으로 나누어 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 8행에서 “초록빛 생명에도 얼음세포가 있”듯이 ‘삶’에도 ‘수난’이 있다는 이야기다. 앞서 ‘초록빛 생명’은 ‘삶’과 연결된다고 이야기했으니 이것도 어려울 것이다 없다. 이어서 행을 바꾸어 나오는 ‘목숨’은 ‘초록빛 생명’, ‘삶’과 이어지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는 의미의 다른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삶’보다는 그 어감이 앞 행의 ‘수난’과 연결되면서 색다르게 다가온다. ‘반성문’은 삶에 대한 성찰이고 그러한 성찰이 없었던 삶에 대해 자성한다.

 

  이어서 10행에서는 보다 뚜렷이 그러한 자성의 목소리를 높인다. “뒤돌아본 뒤에야 반성하는” 행위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동시적으로 늘 반성하고 자성하며 자신의 삶이 보다 진실되게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반문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어지는 “바람을 맞고도 눈을 감아버린” 행위는 삶에서 오는 시련과 고통을 담대히 맞서 이겨내지 못하고 타협하고 피해버리는 그러한 행위을 의미한다. 이것은 마지막 행에서 분명 잘못한 것이었음을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에 9, 10행이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하나의 성찰이며 거기에 대한 반성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바람이 일어선다”. ‘여장부처럼’ 담대히 삶을 살아가겠다는 그 바람을 담고 있는 신년시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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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12-29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년이 다가오니 이 시가 더욱 와닿습니다. 제 서재로 가져가서 볼게요,
시에 대한 섬세한 고찰, 감사합니다.^^

멜기세덱 2007-01-02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는 배혜경님 되시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