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로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박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


                                        ―오탁번, 「굴비」 전문

 

  오탁번 교수의 '시 창작'에 관한 글이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다. 재미있는 글이다. 그 글에서 오탁번 시인은 딸의 같은 반 친구가 모스부호로 쓴 연애편지에 진정한 시인의 자세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 옳은 말이다. 솔직하고 정성이 담긴 시가 곧 감동이 될 수 있을테니.

  위의 시는 아마도 구전되던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다가 어느덧 눈가에 고인 눈물을 발견했다. 왠지 모를 슬픔이 나를 찾은 것이다.

  생각해 보라. 이 두 부부의 애절한 사랑! 어쩌면 바보같은 사랑 뒤에는 그 시대를 살아온 우리 민중들의 한이 있고 슬픔이 있고 고통이 있다. 찢어지는 가난,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삶의 현실 속에서 그대로 이 부부는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은 변치 않던가?

  요즘의 풍족한 삶에는 이제 이런 사랑이 남아 있는가? 나의 눈물은 이 애절한 사랑에 대한 감동이면서 동시에 이 시대의 잊어버린 참된 사랑에 대한 아쉬움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무나 시인이 될 수는 없지만, 누구나 詩人이 될 수는 있다.


  시는 늘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한 번쯤은 시라는 것을 긁적거렸을 것입니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학창시절 첫사랑을 품었던 순정을 주체할 수 없어 일기장에 혹은 예쁜 편지지에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써내려가 본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기억이 없나요? 없으면 아무래도 바보라고 불러야겠죠.

 

  제가 고등학생 때 무척 감동 깊게 읽은, 아니 감동 그 자체였던 시집 한 권이 있습니다.《손끝으로 원을 그려봐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라는 원태연 시인의 시집인데요, 흔히들 연애시라고 부르더군요. 그 때는 그 시집에 담긴 시구 한 구절구절이 그렇게 제 마음을 울리고 때리고 감동을 그야말로 들이 붓더군요. 여러분들도 사춘기 시절 저 같은 추억이 한 번쯤 있었을 것입니다. 없었다면 자신이 정상인지 의심해 봐야하지 않을까요?

 

  그 때 제 일기장에는 유치찬란한 사랑의 노래가 가득했었답니다. 일기라고는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한번을 써본 적이 없는 제가 일기도 꼬박꼬박 한 달쯤을 제 사랑의 시와 함께 써 내려갔던 기억이 저를 지금 부끄럽게 하기도 하는군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창피함을 무릅쓰고 이렇게 털어놓느냐 하면, 시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렵지도, 시를 쓴다는 것이 무슨 특별한 것도 아니라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시가 왜 어려울까? 시를 쓰려면 특별한 재능이 필요한가? 하는 의문을 갖고 이야기를 풀어가 보겠습니다.

 

  먼저 위의 질문을 해결하기 전에 우리는 그렇다면 시가 과연 무엇일까? 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괜히 따분한 시론을 늘어놓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제가 여러분들께 자세히 말씀드릴 만한 능력이 되지 못하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생각하는 시는 이렇습니다. 그것이 꼭 정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틀린 얘기는 아니니까 잘 한번 들어보세요.

 

  여러분들이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지만, 많이 들어본 동양의 경전 중에 <<시경(詩經)>>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 이런 말이 있어요, “시는 마음이 흘러가는 바를 적은 것이다. 마음속에 있으면 지(志)라고 하고 말로 표현하면 시가 된다.” 이 글귀를 보고 뭔가 느껴지는 것이 없나요? 저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유레카를 외치듯이 ‘야 시가 별게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경>>의 말대로라면 시는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마음속에는 우리의 생각과 느낌과 감동과 기쁨과 슬픔과 아픔과 그리움과 기타 등등 여러 가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말로 표현하거나 글로 쓰면 시가 된다는 얘기인 것이죠. 간단하지 않습니까? 시는 이렇게 간단한 것입니다. 이것이 시의 전부는 아니지만, 시에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시의 출발이 되기 때문에 우리가 시를 쓰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한 가지를 기억하고 갑시다. “시는 마음이 흘러가는 바를 적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마음속 감정과 정서를 있는 그대로 적어내면 시가 되는 것이죠. 이것을 알면, “시가 왜 어려울까?”라는 의문에도 쉽사리 답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를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보통 시를 읽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앞에서 시는 “마음이 흘러가는 바를 적은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읽으려고만 하는 사람들은 자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흘러가는 바”는 읽어서는 안 되고, 느껴야 하는 것이죠. 시가 어렵다 어렵다 하는 사람들은 시를 느끼고 그 안의 감정과 정서를 찾아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시를 읽고 분석하고 주제가 무엇이고, 어떤 표현방법들이 사용됐는지를 파악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니 자연히 어려울 수밖에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김소월 시인의 <엄마야 누나야>를 같이 보겠습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랫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이 시의 주제가 무엇일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 타계하신 김춘수 시인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김춘수 시인의 말을 빌면, 이 시는 “메시지가 없고 정서만 있”다고 합니다. 제가 볼 때에도 이 시는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울리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이 시를 알고 혹은 애송하고 있다면 이 시에 담긴 표현방법이 어떻고, 주제가 어떻고 해서가 아니라, 읊으면 읊을수록 살아가는 가슴속의 어떤 울림 때문이 아닐까요?

 

  이렇듯 시는 먼저 가슴으로 느껴야 합니다. 마음은 읽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시는 하등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물론 가슴으로 느낄 수 없는 그런 시도 있습니다. 예컨대, 30년대의 모더니즘 시들이 그러하고, 현대의 해체시 등이 그러하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는 우리가 가슴으로 느끼는데 충분합니다. 지금부터는 읽으려 하지 말고, 느끼고 감동을 찾으려 하십시오. 그러면 시가 충분히 쉬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를 쓰는데 있어서는 어떠하겠습니까? 시는 꼭 재능이 있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것일까요? 이미 예측하고 계시겠지만 제 대답은 No입니다. 위에서 어려운 <<시경>>의 구절을 운운해 가면 말씀드렸듯이, 시는 “마음이 흘러가는 바를” 적으면 되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왜 우리는 시를 쓰는 것에 어려움을 느낄까요?

 

  그것은 우리가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정서를 그냥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해 내야하는데, 자꾸 멋있는 말, 분위기 있는 말, 뭔가 품격이 있어 보이는 말만 자꾸 고르다 보니, 시 쓰기가 자꾸 어려워지는 것이죠. 단언하지만, 그것은 어려워지는 것이 아니라, 전혀 시가 아닌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고요? 계속 말하지만, 시는 “마음이 흘러가는 바를 적은 것”이기 때문이니까요. 자꾸 꾸미다 보면 자기 마음은 어디로 훌쩍 달아나 버리고 가짜만 남게 되니 그게 어디 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박목월 시인의 <불국사(佛國寺)>라는 시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흰 달빛 

    자하문(紫霞門)

 

    대웅전(大雄殿) 

    큰 보살


    바람 소리 

    솔 소리 

   

    부영루(浮影樓) 

    뜬 그림자


    흐는히 

    젖는데 

 

    흰 달빛 

    자하문

 

    바람 소리 

    물 소리


  이 시는 불국사의 풍광들을 있는 그대로 나열해 놓고 있습니다. 보고 느낀 것들을 아무런 꾸밈과 수식 없이 늙어놓고 있는 것이죠. 어떤 것이 마음속에 들어와 무언가 감정과 정서를 자극할 때, 그것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풀어내면 한 편의 시가 되는 것이지, 그것을 이리저리 꾸미고 멋진 말들로 치장해버리면 처음의 감정과 정서는 온데간데없이 빈껍데기만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시를 쓰는데 재능이 있어야만 쓰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불세출의 천재만이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시를 쓰는 재능이 있다면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기는 할 것입니다. 솔직히 그 재능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얼마나 잘 보는가,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얼마나 잘 표현해내는가, 이런 것들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것이라면 타고나지 않았더라도 얼마든지 길러낼 수 있습니다. 일기장에 끄적이던 한 줄 한 줄이 하나의 시가 된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작은 수첩 한 귀퉁이에 틈틈이 적어두다 보면 자연스레 그런 능력이 길러질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렵다고 생각하고 “나는 시란 것하고는 친해질 수가 없어”하며 지레 겁을 먹고 달아나 버리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장차 국어교사가 되실 분들입니다. 헌데 이 중의 많은 사람들이 시를 어렵게, 그리고 따분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 합니다. 평생 시 한 편 써보지 않고서 국어교사가 된다는 것이 어쩌면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요? 어쨌거나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제가 중 고등학교를 다닐 적에 받은 국어수업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거의 기억이 없지만)은 중학교 2학년 때 어느 초가을 햇살이 따사하게 비칠 무렵 국어 시간에 선생님께서 대뜸 시 한 편을 낭송해 주셨을 때입니다. 지금 그 시가 무엇인지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그 이후로 제가 줄곧 시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후로 학교 백일장에서 상은 도맡아 타기는 했지만 지금은 시 쓰는 것이 누구보다도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 쓰기를 그만둘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시는 내게 기쁨도 주고 때로는 위로도 해 주는 좋은 친구와 같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시가 절대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시는 뛰어난 재능이 있는 사람만이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것은 “시는 마음이 흘러가는 바를” 있는 그대로 적어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러분들이 시를 써본다면, 여러분은 아주 좋은 친구 한 명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멋진 국어교사가 될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란 말이 이럴 때 쓰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시는 누구나 쓸 수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犧牲’의 詩的 形象化

 

Ⅰ. 緖論

 

  우리의 詩史에서 ‘희생’은 시적 주제로서 많은 시들을 통해 나타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형기 시인의 「낙화」나, 한용운 시인의 여러 시들에서 ‘희생’을 노래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희생’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 나아가 전 우주적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요건이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의 ‘희생’을 통해 자식은 성숙한 인간이 되고, 자연의 그것을 통해 인간들은 풍요와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세상사의 많은 일들은 그 ‘희생’을 전제로 이룩된 것이라 하겠다. 이렇듯 우리의 현실 속에 ‘희생’이 있는 이상, 시적 주제로서 ‘희생’을 노래하는 시들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희생’은 각각의 시들에서 다양한 성격의 ‘희생’으로 주제화된다. ‘희생’이 필요한 이유와 원인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며, 그것을 통한 결과와 모습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희생’이 주제화된 두 편의 시를 통해 그 ‘희생’이 어떠한 모습으로 다르게 형상화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각각의 시를 분석적으로 독해하면서 ‘희생’의 시적 형상화가 어떻게 다른가를 확인하도록 하겠다.


 

Ⅱ. 本論

 

  “詩者持也, 持人情性”(劉勰,『文心雕龍』)이라는 말이 있다. “시에는 사람의 감정을 담고 있다”는 말이다. 모든 시에는 감정과 정서가 담겨있다. 여기서 살펴볼 두 편의 시에는 ‘희생’에서 비롯되는 감정과 정서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이성복 시인의 「금빛 거미 앞에서」와 김혜순 시인의 「추수(秋收)」두 편의 작품을 차례로 분석하면서 ‘희생’의 시적 형상화를 대비해 보겠다.

 

1. ‘强要된 犧牲과 아픔’으로의 形象化 ― 이성복의 「금빛 거미 앞에서」

 

        오늘은 노는 날이에요, 어머니

        오랫동안 저는 잠자지 못했어요

        오랫동안 먹지 못했어요 울지 못했어요

        어머니, 저희는 금빛 거미가 쳐놓은

        그물에 갇힌 지 오래 됐어요

        무서워요, 어머니

        금빛 거미가 저희를 향해 다가와요

        어머니, 무서워요

        금빛 거미가 저희를 먹고

        흰 실을 뽑을 거예요

            - 이성복, 「금빛 거미 앞에서」,『남해 금산』, 1986.

 

  제목이 “금빛 거미 앞에서”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금빛 거미”이다. ‘거미’는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곤충이다. 독거미의 공포감이나 그 잔인한 살인행위―먹이를 실로 감아 조이고 말려 죽여 먹는 그런 잔인한 행위―를 기억하기에 우리에게 ‘거미’는 매우 부정적 이미지로 고정되었다. “금빛 거미”는 그러한 ‘거미’의 이미지 덕분에 다소 아이러니하다. ‘금빛’이라는 색체 이미지는 정지용의「향수」에서 보이는 “금빛 게으른 울음”에서 보이듯 아름답고 환상적인 이미지로 기억된다. 그렇다면 ‘금빛 거미’는 모순형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적화자는 여성이다. ‘이에요’, ‘했어요’ 등의 어투에서 우리는 시적화자가 여성임을, 나아가 어린 나이의 소녀나 처녀 정도일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시적화자의 상황은 매우 처절하다. “잠자지 못했”고 “먹지 못했”으며 그렇다고 ‘울지’도 못 했다. 게다가 시적화자는 “갇힌 지 오래 됐”으며 무서움에 떨고 있는 비참한 상황이다. “노는 날”에는 그저 ‘어머니’를 생각하고 마음으로 하소연할 뿐이다.

  이런 비참한 상황에 처한 원인은 무엇인가? 그 원인은 “금빛 거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금빛 거미”는 모순 형용이며 반어적 표현이다. ‘금빛’으로 치장된 ‘거미’를 생각해보면 아픔답다기보다는 환상적인 이미지가 강하게 떠오른다. 이것은 ‘거미’의 이미지를 한층 공포스럽게 부각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금빛 거미”의 상징적 의미가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마지막의 두 행에서 이 “금빛 거미”가 시적화자를 먹이로 하여 “흰 실을 뽑을” 것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거미’에게 이 ‘실’은 삶의 필수 수단이다. 집을 짓고 먹이를 구하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도구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금빛 거미”는 시적화자의 희생을 강요하여 취하는 것이다. 시적화자의 상황을 고려할 때 시적화자가 공장에서 착취당하는 노동자일 수 있다는 생각을 쉽사리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금빛 거미”는 시적화자를 착취하고 빨아먹는 악덕 자본가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다.

  이상을 정리해 보면 시적화자는 그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다. 그 희생의 대가는 과연 무엇일지 알 수 없다. 시적화자는 희생을 강요당하면서도 분노하고 저항하지 못하고 있다. 울지도 못하고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시적화자는 그저 마음속으로 울며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하소연하고 있는 것이다.

 

2. ‘自然의 獻身的 犧牲’으로의 形象化 ― 김혜순의 「추수(秋收)」

 

        다 이루었도다 하면서

        드디어 드러눕는다 너른 들판

        다 싸웠도다 하면서

        드디어 목을 내어 주는 가을 열매

 

        절대로지지 않으리 하면서

        폭양(暴陽)을 안고 뒹글던 것

        절대로 울지 않으리 하면서

        칠흑(漆黑) 같은 폭풍우 밤에

        두 주먹 불끈 쥐고 소리소리 지르던 것

        어느 것 하나 내색하지 않고

        다 이루었도다 하면서 머리를 숙이고

        지프라기 마른 가지 불쏘시게 잿더미로 스러져

        내려앉은 천만 년 묵은 어머니 품

                        ― 김혜순, 「추수(秋收)」, 1994.

 

  가을은 무엇보다도 결실의 계절이요, 수확의 계절이다. 우리에게 가을은 ‘추수’의 풍경으로 많이 기억된다. 풍요와 축복의 계절인 가을은 과연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이 시는 바로 이러한 질문의 해답을 제공한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하며 생을 마감한다.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온 메시아로서 그 구원의 사역을 죽음으로써 “다 이루었”던 것이다. 그것은 인류를 위한 희생의 결과이며, 그 희생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아가페적 사랑인 것이다.

  이 시에서는 예수의 말을 인유하며 시작한다. “다 이루었”다는 말의 주체가 여기서는 예수가 아니라 우리에게 결실과 풍요를 주는 땅이요, 자연인 것이다. 그 자연은 예수와 같은 헌신적인 희생을 우리에게 바쳤기에 예수처럼 “다 이루었도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처럼 생을 마감한다. 우리에게 “목을 내어 주”고 “폭양(暴陽)을 안고 뒹굴”었으며, “칠흑(漆黑) 같은 폭풍우”를 감내 했던 자연, 곧 이 땅은 이제 “드러눕는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것처럼 이 땅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드러눕는” 것이다.

  자연의 이러한 헌신적 희생은 곧 우리의 ‘어머니’와 동일시된다. 말하자면 자연의 우리 인류의 ‘어미니’인 것이다. 이 땅은 곧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결실을 주고 풍요를 준다. 이 또한 우리의 생명을 잉태하고 양육하는 ‘어머니’와 같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시적화자는 시 전체에서 예수와 자연, 그리고 ‘어머니’를 일치시킨다. 그럼으로써 자연의 그 ‘희생’의 의미를 고취시킨다. 그 헌신적이고 무대가적인 ‘희생’은 얼마나 고귀하고 가치있는 것인가? 그렇기에 이제는 “다 이루었도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시적화자의 어조는 다소 슬픔과 비애감을 느끼게 한다. 단순히 자연의 ‘희생’의 가치를 예찬하고 있지만은 않은 것이다. 기독교에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기념하여 울며 기도하듯이, 우리가 ‘어머니’의 그 헌신적 사랑을 회상하며 눈물로 통곡하듯이, 시적화자는 다분히 눈물을 머금고 자연과 이 땅의 그 ‘희생’의 위대함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Ⅲ. 結論

 

  이상에서 살펴본 두 시에서 우리는 ‘희생’이라는 공통된 기류를 포착할 수 있었다. 하나는 강요된 ‘희생’이요, 다른 하나는 헌신적 ‘희생’이다. 결국 이 둘의 ‘희생’은 전혀 다른 이유에서의 ‘희생’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전혀 다른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이성복의 시에서는 강요된 ‘희생’이 주는 비참함과 잔인함을 형성하며 그 ‘희생’이 얼마나 비극적이고 비인간적인가를 형상화하고 있다. 반면 김혜순의 「추수(秋收)」에서 보이는 헌신적 ‘희생’은 그 가치와 고귀함을 형성하며 우리에게 자연에 대한 깊은 인상을 형상화한다.

  시에는 감정과 정서를 담고 있다고 하였으되, 그 감정과 정서는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우리는 여기서 재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서론에서 언급한 이형기의 「낙화」에서 보이는 ‘희생’은 인생의 젊음에서 성숙을 위해 필요한 자기 수양으로써의 ‘희생’이며, 한용운의 시에서 나타나는 ‘희생’은 ‘님’에 대한 자기 사랑의 표현으로써의 그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희생’의 시적 형상화를 통해 우리는 ‘희생’의 의미에 대해 더욱 다각적인 접근을 할 수 있게 된다. ‘희생’은 언제나 아름다울 수 없으며 그 ‘희생’을 우리는 가벼이 볼 수 없음을 또한 음미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