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년 새해 새 날이 밝았다. 많은 이들이 2009년 1월 1일을 기다릴테지만, 이 날을 더욱 손꼽아 기다리는 이들이 있으니, 지금은 좀 시들해졌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문학청년들의 꿈과 희망의 약속이 담긴 <신춘문예>가 그것이다. 당선자들은 미리 통보를 받았겠지만, 그래도 새해 첫 날 신문에 자신의 작품과 얼굴이 실린 지면을 대하는 느낌은 남다를 것이 분명하다. 그보다도 신춘문예에 도전했으나 아쉽게 탈락한 이들, 언젠가 자신도 신춘문예 당선을 꿈꾸면 올 해는 누가, 어떤 작품이 당선되었나를 유심을 찾아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오늘 일제히 신춘문예를 주관하는 각종 일간지에서 당선자와 당선작을 지면에 실었다. 얼핏 살펴본 느낌은, 이전과는 좀 다른 성격의 작품들이 당선의 영광을 얻은 듯 하다. 다른 분야는 모르겠지만 <시> 부분 만큼은 그런 특징이 도드라진다. 조금있으면 <문학세계사>에서 당선자들의 작품집을 내겠지만, 여기에 당선작들만이라도 모아놓고 맛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2009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맆 피쉬(양수덕) 

    땡볕더위에 잎맥만 남은 이파리 하나
    지하도 계단 바닥에 누워 있던 청년은
    양말까지 신고 노르스름한 병색이었다
    젊음이 더 이상 수작 피우지 않아서 좋아? 싫어?
    스스로 묻다가 무거운 짐 원없이 내려놓았다
    맆 피쉬라는 물고기는 물 속 바위에 낙엽처럼 매달려 산다
    콘크리트 계단에 몸을 붙인 청년의
    물살을 떨다 만 지느러미
    뢴트겐에서 춤추던 가시, 가물가물
    동전 몇 개 등록상표처럼 찍혀 있는 손바닥과
    염주 감은 손목의
    그림자만이 화끈거린다
    채 풀지 못한 과제 놓아버린 손아귀
    청년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세상의 푸른 이마였던 그의
    꿈이 요새에 갇혀서
    해저로 달리는 환상열차
    잎사귀인지 물고기인지를 한 땀 바느질한
    지하도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이들이
    다리 하나 하늘에 걸칠 때 

본심 심사를 황지우, 최정례 시인이 맡았다. 심사평에서 "양수덕씨는 다른 응모자들에 비해 개성있는 언어를 활달하게 구사하고 있다. 언어에 개인적 표현이 많아 소통부재의 위험이 보이기도 하나, 당선작 ‘맆 피쉬’에서는 지하도의 걸인이라고 하는 익숙한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밀한 묘사력과 참신한 비유로 대상을 섬세하게 구현해내었다."고 평가했다. 개인적 생각으로는 당선작이 보여주는 '소통부재의 위험'이 아쉬움이 남는 시다. 

당선자 양수덕 씨는 늦깎이 신춘문예생이다. 55세의 나이로 문단에 등단한 양수덕 씨의 시인으로서의 활동을 기대해 본다.
[2009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보기
[2009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평 보기
[2009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소감 보기 

[2009 한국일보 신춤문예] 시 부문 당선작 

    무럭무럭 구덩이(이우성) 

    이곳은 내가 파 놓은 구덩이입니다
    너 또 방 안에 무슨 짓이니
    저녁밥을 먹다 말고 엄마가 꾸짖으러 옵니다
    구덩이에 발이 걸려 넘어집니다
    숟가락이 구덩이 옆에 꽂힙니다.
    잘 뒤집으면 모자가 되겠습니다
    오랜만에 집에 온 형이
    내가 한 눈 파는 사이 구덩이를 들고 나갑니다
    달리며 떨어지는 잎사귀를 구덩이에 담습니다
    숟가락을 뽑아 들고 퍼 먹습니다
    잘 마른 잎들이라 숟가락이 필요 없습니다
    형은 벌써 싫증을 내고 구덩이를 던집니다
    아버지가 설거지를 하러 옵니다
    반짝반짝 구덩이
    외출하기 위해 나는 부엌으로 갑니다
    중력과 월요일의 외투가 걱정입니다
    그릇 사이에서 구덩이를 꺼내 머리에 씁니다
    나는 쏙 들어갑니다
    강아지 눈에는 내가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친구에게 전화가 옵니다
    학교에서 나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나는 구덩이를 다시 땅에 묻습니다
    저 구덩이가 빨리 자라야 새들이 집을 지을 텐데
    엄마는 숟가락이 없어져서 큰일이라고 한숨을 쉽니다 

당선자 이우성 씨는 올해로 서른을 맞는다. 서러운 서른에 대한 위로의 선물로서는 최고의 선물을 받은 셈이다. 심사를 맡은 이는 신경림, 김사인, 김기택 시인이다. "이우성의 시는 감각과 상상력이 희귀하고 개성적이며 생기있고 활력이 있다. 목소리도 힘있고 거침없고 속도감과 리듬감이 있어 신인다운 신선함이 돋보였"고 "함께 응모한 그의 다른 작품들이 편차 없이 고르게 살아있는 감각을 보여주어 앞으로 계속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이 컸기 때문"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경향신문과 한국일보의 당선작을 보면서, 이전과의 당선작의 특징들이 달라졌다는 것을 확연히 느꼈다. 한국일보 시 부문 심사위원들이 심사평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응모작의 경향이 변화하고 있음을 확인한 것도 고무적인 일이었다. 최근 수년 동안 신춘문예나 문예지 응모에서는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포스트모던하고 전위적인 실험시를 흉내 내는 시들이 많았다. 실험정신과 발랄한 어법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젊은 시가 문단에 활력을 준 것은 긍정적이지만, 삶의 현장과 역동적으로 맞물리지 못하고 헛바퀴를 돌리는 듯한 아쉬움을 준 것도 사실이다. 이번 응모작들에서는 이런 흐름이 크게 줄어든 반면 삶의 현실을 체감하거나 강하게 끌어당겨 미적으로 형상화하려는 시도는 상대적으로 늘었다. 이것은 기존의 역량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시적 경향이 변화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의 경제적인 어려움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2009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당선소감, 심사평 보기 

[2009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즐거운 장례식(김지희) 

    생전에 준비해둔 묫자리 속으로
    편안히 눕는 작은 아버지
    길게 사각으로 파 놓은 땅이
    관의 네모서리를 앉혀줄 때
    긴 잠이 잠시 덜컹거린다
    관을 들어 올려
    새소릴 보료처럼 깔고서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 죽음
    새벽이슬이 말갛게 씻어 놓은 흙들
    그 사이로 들어가고 壽衣 위에
    한 겹 더 나무그늘 옷을 걸치고
    그 위에 햇살이불 끌어당겨 눕는 당신
    이제 막 새 세상의 유쾌한 명찰을 달고
    癌 같은 건 하나도 안 무섭다며
    둘러선 사람들 어깨를 토닥거린다
    향 같은 생전이 다시 주검을 덮을 때
    조카들의 두런대는 추억 사이로
    국화꽃 향기 환하게 건너온다 

[2009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보기
[2009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소감 보기
[2009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평 보기 

[2009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오늘은 달이 다 닳고(민구) 

    나무 그늘에도 뼈가 있다
    그늘에 셀 수 없이 많은 구멍이 나있다 바람만 불어도 쉽게 벌어지는 구멍을 피해 앉아본다
    수족이 시린 저 앞산 느티나무의 머리를 감기는 건 오랫동안 곤줄박이의 몫이었다
    곤줄박이는 나무의 가는 모근을 모아서 집을 짓는다
    눈이 선한 저 새들에게도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연장이 있다 얼마 전 죽은 곤줄박이에
    떼 지어 모인 개미들이 그것을 수거해가는 걸 본 적이 있다
    일과를 마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와서 달이 떠오를 무렵 다시 하늘로 솟구치는데,
    이때 달은 비누다
    뿌리가 단단히 박혀서 번뇌만으로는 달에 못 미치는 나무의 머리통을 곤줄박이가 대신,
    벅벅 긁어주는지, 나무 아래 하얀 달 거품이 흥건하다
    오늘은 달이 다 닳고 잡히는 족족 손에서 빠져나가 저만치 걸렸나
    우물에 가서 밤새 몸을 불리는 달을 봐라
    여간 해서 불어나지 않는 욕망의 칼,
    부릅뜨고 나를 노린다 

[2009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보기
[2009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소감 보기
[2009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평 보기 

[2009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술빵 냄새의 시간(김은주) 

    컹컹 우는 한낮의 햇빛,
    달래며 실업수당 받으러 가는 길
    을지로 한복판 장교빌딩은 높기만 하고
    햇빛을 과식하며 방울나무 즐비한 방울나무,
    추억은 방울방울 *
    비오는 날과 흐린 날과 맑은 날 중에 어떤 걸 제일 좋아해? **
    떼 지은 평일의 삼삼오오들이 피워 올린 하늘
    비대한 구름떼
    젖꽃판 같이 달아오른 맨홀 위를 미끄러지듯 건너
    나는 보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후끈 달아오르고 싶었으나 바리케이드,
    가로수는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인 바리케이드
    곧게 편 허리며 잎겨드랑이며 빈틈이 없어
    부러 해 놓은 설치처럼 신비로운 군락을 이룬
    이 한통속들아
    한낮의 햇빛을 모조리 토해내는
    비릿하고 능란한 술빵 냄새의 시간
    끄억 끄억 배고플 때 나는 입 냄새를 닮은
    술빵의 내부
    부풀어 오른 공기 주머니 속에서 한잠 실컷 자고 일어나
    배부르지 않을 만큼만 둥실,
    떠오르고 싶어

*1991년에 발표된 일본 애니메이션 제목.
** '추억은 방울방울' 에 나오는 대사. 

[2009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보기
[2009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소감 보기
[2009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평 보기 

[2009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구름모자를 빼앗아 쓰다(최정아)

    한 떼의 구름이 내게로 왔다. 한쪽 끝을 잡아당기자 수백 개의 모자들이 쏟아졌다. 백 년 전에죽은 할아버지의 모자도 나왔다. 그 속에서 꽹과리 소리와 피리 소리도 났다. 할아버지는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쓰고 어깨 흔들며 춤을 추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삼십년 전에 죽은 아버지의 모자를 긴 손에 들고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자 속에서 망사 모자를 집어 들었다. 망사 모자를 쓰자 세상도 온통 모자로 가득했다. 빌딩이 모자를 쓰고 있었고, 꽃들은 모자를 벗겨달라고 고개를 흔들고 있었고, 새떼들은 모자를 물고 날아갔다. 수세기에 걸쳐 죽은 친척들도 줄줄이 모자를 쓰고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고 할아버지는 꽹과리를 치고 새들은 노래를 부르고 나는 그들을 데리고 바다로 간다. 둥둥둥 북을 친다. 풍랑에 빠져죽은 영혼들이 줄지어 걸어 나온다. 파도에게 모자를 던져준다. 모자를 쓴 파도가 아버지처럼 걸어온다. 갈지자로 걸으며 손을 흔든다. 친척들은 환하게 웃으며 춤을 춘다. 아버지가 두루마기를 입고 넘어진다. 그러나 아버지는 영영 일어서지 못한다. 아버지 모자를 다시 구름이 빼앗아간다. 

[2009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당선소감 보기
[2009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평 보기 

<세계일보>는 이번에 시 부문 당선작을 내지 못했고, <중앙일보>는 <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변경되어 지난 해 8월쯤에 치러졌다. <서울신문>에서는 정영효 씨의 「저녁의 황사」가 당선되었다는 소식이 있으나 찾을 수가 없었고, <부산일보>에서도 시 부문 당선작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밖의 지역신문에서도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발표했을텐데, 일일이 다 찾기가 힘들어 여기까지만 하도록 한다. 이번 당선작들이 읽고 낭독하기 편하게 시가 짧아진 점도 고무적이라 생각된다. 당선자들 모두 더욱 좋은 시로 다시 만나길 기대한다. 축하를 전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촛불 덕분에 <경향신문>을 구독하게 되면서 책을 읽게 되는 시간은 이래저래 줄게 되었다. 매일같이 신문을 읽어내려가는 것은 짜증나면서도 재밌는 일이다. 나는 토요일자 신문을 유달리 기다리는데, 토요일에는 따끈따끈한 신간 소식들이 잔뜩(?) 실려오기 때문이다. 신문 덕분에 책은 덜 읽게 되면서도, 쟁여 논 책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가니, 혀를 찰 노릇이지만, <경향신문> 하나로는 부족해서 토요일이면 꾸준히 <한겨레>를 편의점에서 사서 책 소식을 유의깊게 살펴본다. 어제 <한겨레> '책과세상'에 시집 출간 소식이 있어, 리뷰기사를 옮겨 온다. <경향신문>과 <한겨레>의 책 소개를 보고는 보관함에만 담아 두고 말았는데, 이제는 좀 더 유의미하게 챙겨두고 볼 작정이다.(2009년은 좀 한가로워져서, 쟁여둔 책들을 꺼내 읽을 작정이기도 하다.) 알라딘의 몇몇 분들께서 인문사회나 문학분야 신간 소식들을 스크랩해서 알려주시지만, 시집은 좀 소홀하지 않나 싶다. 물론, 시집 출간 소식들을 신문에서도 뜸하게 다루고 있는 것도 나로서는 좀 불만이다. 일단 나를 위해서, 그리고 시집에 관심 갖고 계시는 다른 분들을 위해서, 시집 소식만이라도 꼼꼼히 챙기는 2009년이 되도록 하고 싶다. 춥고 삭막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시집은 효과적인 위안이 되지 않을까 싶다.

"방송작가 20년 접고 ‘시로 마음을 방송하네’"(최재봉 문학전문기자)
<한겨레> 2008년 12월 27일 토요일, 13면.  

말이란 소통의 도구인 동시에 오해와 갈등의 진앙지이기도 하다.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부드럽게 이어 주기도 하고 살천스럽게 끊어 놓기도 한다. 말은 야누스의 얼굴을 지녔다. 그것은 물론 말을 부리는 인간의 본성이 야누스적이기 때문이다.

김경미(49)씨의 새 시집 <고통을 달래는 순서>는 말과 인간의 그런 야누스적 속성을 탐사한다.

“비천과 험담 그치지 않는 입을 만났다/ 찻집 화장실에 가서 입을 몇 번이고 헹궜다/ 다 헹구고 거울 속 입안을 들여다보니 혀가 두 개였다”(<무언가를 듣는 밤> 첫연)

“단체버스, 늘 맨 뒷자리에 혼자 떨어져 앉는다/ 내 귀가 어색하고 허랑한 내 말을 좋아하지 않아/ 내 입과 좀 떨어져 앉으려는 것이다”(<조금씩 이상한 일들 3> 부분) 

비천하고 허랑한 말을 내뱉는 혀에는 남과 내가 따로 있지 않다. 하나의 입 안에 두 개의 혀가 있는 바에야,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것이 불가능한 노릇은 아니다. 자신을 배신하고 남을 기망하는 혀 놀림 앞에 시인의 섬약한 자아는 무시로 상처 입는다.

“저녁밥 빛깔로 입속에 앉힌 묵언/ 그 재속(在俗)의 하안거 며칠/ 지나/ 고양이 걸음에 연꽃 떠받치듯 나선 외출//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가슴에 대못이 박혀 돌아왔다”(<상심> 전문)

“몇 날이고 수도승처럼 눈만 감다가 모처럼 나섰다/(…)// 다정한 모임 속 네가 갑자기 내 머리에 못을 박았다”(<그날의 배경> 부분)  

상처 받는 것이 두려워 집에 틀어박혔던 시인은 모처럼 용기를 내 바깥 걸음을 한다. 그러나 결국 우려했던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그것도 한 번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두 번씩이나 동일하게. 은둔과 상처가 일종의 패턴처럼 반복되는 형국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세상과 사람들이 유독 그에게 적대적인 걸까? ‘끔찍하게 민감한 마음’이란 국내에 번역되었던 버지니아 울프의 산문집 제목이지만, 시집 <고통을 달래는 순서>의 화자야말로 바로 그런 마음의 소유자로 보인다.

“안심할 때만 골라서 뒷머리에 돌을 맞거나/ 시작하려 하자마자 떠나거나/ 애절하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거나/ 한밤중에 깨어 일어나 찬밥을 먹거나/ 한낮의 버스에서 쇼핑백 터지듯 울음이 터지거나,”(<눈물의 횟수> 부분)

이렇게 어긋날 수도 있는 것이다. 재수가 없다거나 불운하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한 무언가가 여기에는 있다. 아홉 번을 울어야 할 때 달랑 한 번만 울고 마는 고장난 뻐꾸기시계처럼 시인과 세상은 서로 리듬이 맞질 않는다. 그 어긋남이 그를 힘들게 만드는 것이다.

<연희>에 따르면 그의 이런 기질은 선천적인 것이다. <글씨의 시절―방송국에서>는 그가 지난해까지 20년 넘게 해 온 방송작가 일(=‘지렁이 환전’)이 그런 기질을 더욱 악화시켰음을 알게 한다. 그렇지만 이 두 시는 그의 선천적이며 후천적인 인간혐오증과 염세주의가 개선될 가능성 또한 내포하고 있다.

“열한살 너의 봄 때문에 사람들이랑 잘 못 놀아준 봄들을/ 돌려세우는 저녁이란다”(<연희> 부분)

“바로, 그 지렁이 환전이, 밥솥의 김 같은 것이어서/ 그토록 오래도록 저녁 해거름이면 밥 먹어라,/ 나라는 동네 어귀에 대고 어머니처럼 불렀구나”(<글씨의 시절> 부분)

시인의 도저한 비관주의가 자기반성을 거쳐 포용과 화해로 나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 두 시는 시집 전체를 관류하는 커다란 흐름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인용된 두 시에서도 그러하지만 시집의 압도적인 시간대는 저녁이다. 그 저녁은 “세상에 정 주고 저물녘, 마음 허물어지지 않은 날/ 하루도 없으니”(<해질녘>)에서 보듯 상처를 확인하는 무렵이자, “저녁이라는 이름 하나면 이곳에 속했던 추억 충분히 벅차다고”(<나는 이곳에 속하지 않는다>) 말하게 되는 충일과 행복의 시간이기도 하다. 방송작가로서 보낸 20여 년 동안 그에게 저녁이란 밥벌이용 글쓰기가 끝나고 시인으로 돌아오는 무렵이었다. 두 개의 자아가 엇갈리면서 환호와 탄식이 교차하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저녁의 복합적인 심상은 그 시절 저녁을 맞이하던 그의 착잡한 심사를 비추고 있는 셈이다. 


댓글(1) 먼댓글(1)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고통스런 사람에게 병 주고 약 주고(한겨레21 제744호)
    from 非인간적 길을 향해서 2009-01-17 12:24 
    <한겨레21>(744호)에 실린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시 읽어주는 남자' 코너를 옮긴다. 얼마 전 <한겨레>에 실렸던 김경미의 『고통을 달래는 순서』의 출간 소식을 이미 전한 바 있다. '시 읽어주는 남자'에서는 이 책에 대한 좀 더 진한 리뷰인 셈이다.  고통스런 사람에게 병 주고 약 주고 [2009.01.16 제744호] [시 읽어주는 남자] 원망과 자책이 서로 갉아먹어 없어지기를 기다려야지, 김경미의 <고통
 
 
코코죠 2008-12-29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제가 리뷰 선발대회에서 일등 먹으면 멜기님한테 이 시집 사달라고 해야지 라고 생각했다면 전 김칫국 완샷인거죠!!!)
 

영화 <쌍화점>에서 '쌍화점'은 뭐지? 

  최근 유하 감독의 신작 <쌍화점>이 개봉을 앞두고 주목을 받고 있다. '남녀상열지사'라 하여 "당시의 퇴폐적이고 문란한 성윤리를 노골적으로 그린 노래"로 알려진 고려가요 <쌍화점>에서 그 제목과 모티브를 따온 영화 <쌍화점>은 조인성, 주진모 등의 호화 캐스팅과 더불어 수위 높은 베드신과 동성애를 다루고 있어 많은 호기심을 보이고 있다. 또한 기존 영화나 드라마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던 '고려시대'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대작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가요 <쌍화점>과는 그 내용이 전혀 다르지만, 당시나 지금이나 금기시된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고 하겠다. 영화 <쌍화점>으로 인해 역시나 제목 말고는 잘 알려지지 않던 고려가요 <쌍화점>에 대해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고 있는 듯하다. 여기저기서 '쌍화점'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 질문들이 많다. <쌍화점>은 내용상 당대의 음란하고 저속한 성을 다루고 있어, 중고등학교의 <국어>나 <문학> 교과서에도 그 원문은 실리고 있지 않다. 대부분 <쌍화점>이란 고려가요가 있었고, '퇴폐적'이며 '문란한 성' 등을 다루고 있을 뿐이라고 배우는 정도다. 

그래서인지 학계에서도 <쌍화점>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편이다. 몇몇 고전 문학 전공자나 어학 전공자들의 초기 연구 외에는 별다른 최근 연구가 없는 편이다. 이러한 초기 '저명한' 학자들의 학설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쌍화점>에 대한 질문 중 "'쌍화점'이 무슨 뜻이냐"에 대해 대다수가 '만두 가게'로 답하고, '아! 그렇구나!'하고 끝나버린다. 정말 '쌍화점'이 '만두 가게'일까? 

고려가요 <쌍화점> 읽어 보셨어요?

먼저, 고려가요 <쌍화점> 전문을 읽어 본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 같아서, 여기에 그 전문과 현대어 해석을 올려본다. 천천히 감상 한 번 해보자. 

   
  쌍화점(雙花店)에 쌍화(雙花) 사라 가고신댄  
회회(回回)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
이 말사미 이 점(店) 밧긔 나명들명
다로러거디러 죠고맛감 삿기 광대 네 마리라 호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자리예 나도 자라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잔 대가티 거츠니 업다. 

삼장사(三藏寺)에 블 혀라 가고신댄
그 뎔 사주(寺主)ㅣ 내 손모글 주여이다.
이 말사미 이 뎔 밧긔 나명들명
다로러거디러 죠고맛감 삿기 상좌(上座)ㅣ 네 마리라 호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자리예 나도 자라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잔 대가티 거츠니 업다. 

드레우므레 므를 길라 가고신댄
우믓 용(龍)이 내 손모글 주여이다.
이 말사미 이 우믈 밧긔 나명들명
다로러거디러 죠고맛감 드레바가 네 마리라 호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자리예 나도 자라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잔 대가티 거츠니 업다. 

술팔지븨 수를 사라 가고신댄
그 짓아비 내 소모글 주여이다
이 말사미 이 집 밧긔 나명들명
다로러거디러 죠고맛감 싀구바가 네 마리라 호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자리예 나도 자라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잔 대가티 거츠니 업다.              - 출전, <악장가사>  

 

[현대어 번역]  

만두집에 만두 사러 갔더니만
회회 아비 내 손목을 쥐었어요
이 소문이 가게 밖에 나며 들며 하면
다로러거디러 조그마한 새끼 광대 네 말이라 하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위 위 다로러 거디러 다로러
그 잔 데 같이 답답한 곳 없다 

삼장사에 불을 켜러 갔더니만
그 절 지주 내 손목을 쥐었어요
이 소문이 이 절 밖에 나며 들며 하면
다로러거디러 조그마한 새끼 상좌 네 말이라 하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잔 데 같이 답답한 곳 없다 

두레 우물에 물을 길러 갔더니만
우물 용이 내 손목을 쥐었어요
이 소문이 우물 밖에 나며 들며 하면
다로러거디러 조그마한 두레박아 네 말이라 하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잔 데 같이 답답한 곳 없다 

술 파는 집에 술을 사러 갔더니만
그 집 아비 내 손목을 쥐었어요
이 소문이 이 집 밖에 나며 들며 하면
다로러거디러 조그마한 시궁 박아지야 네 말이라 하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잔 데 같이 답답한 곳 없다
 
   

내용을 대충봐도 교과서에 넣기에는 좀 그런 점이 있다. 대부분의 현대어 번역에서 '쌍화점'을 '만두 가게'로 번역하고 있다. 일단 그 해석을 인정하고 보면, 1연에서 만두가게에 만두 사러 갔더니 그 주인(회회아비)이 손목을 덮석 잡아 끌고 음밀한 데러 갔다는 내용이다. 그 일이 소문이 나서 저마다 '만두가게'에 몰려 갔다나? 2연에서는 '만두 가게'가 '삼장사'란 절로, 3연에서는 '우물'가로, 4연에서는 '술 파는 집'으로 장소가 바뀐다. 특이하게 3연에서는 '회회아비' 대신 '용'이 등장하지만 전체 내용은 각 연이 모두 동일하다. 

'쌍화점'은 정말 '만두 가게'일까? 

이 고려가요 <쌍화점>에서 해석에 문제가 되는 것은 1연이다. 1연에서 '쌍화점'('쌍화')과 '회회아비'가 그것인데, 대개 '쌍화'를 '雙花(쌍화), 霜花(상화)'로 보아 상화, 곧 만두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우리가 호(胡)떡으로 알고 있는 것의 일종으로 당시 '상화병(霜花餠)', 곧 '만두떡'이라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쌍화점'을 '만두 가게'로 해석하고 '회회아비'를 '만두 가게' 주인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삿기 광대' 곧 '새끼 광대'의 등장이 의문이다. 최철은 이 점을 주목하여 '회회 아비'를 '큰 광대, 어른 광대' 쯤으로 보고 '쌍화'를 광대들이 파는 물건, '쌍화점'을 광대들이 물건을 파는 가게로 해석하고 있다. 최철의 해석은 다소 자의적이고 막연하여 학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여전히 '만두 가게'로 해석하였다. 

문제는 '쌍화'를 '만두'로, '쌍화점'을 '만두 가게'로 해석했을 때 다소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옛 문헌에 대한 해석은 당시의 시대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전반적으로 참조해야 하는 동시에, 글 전체의 맥락이나 논리 상과도 맞아야 할 것이다. 글 맥락으로 보아 '화자'는 불가피하게 몸을 주(파)는(성관계를 맺게 되는) 구조로 되어 있다. 2연에서는 '절 지주', 3연에서는 '용', 4연에서는 '술집 주인'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성관계를 맺게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고려해볼 때, 고려시대 절은 막강한 부와 권력을 지녔다. 고려시대 뿐만 아니라, 소설 『사하촌』에서도 보이듯이, 한 지역의 절과 그 절의 주지는 무시하기 힘든 부와 권력의 소유자였다. 이 점에서 화자가 절 지주에게 몸을 팔게 된 것은 어쩔 수 없음을 이해할 만 하다. 이것이 소문이 나서 저마다 절에 들락날락 했다고 하는 것은 몸을 팔게된 대가가 어느 정도 이상이 있었음을 추측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3연에서는 특이하게도 '용'이 등장한다. 이것은 다분히 허구적이지만 글 전체의 맥락상 화자가 몸을 허락하게 된 것이 권력관계 부와 지배의 관계, 물리적 힘의 관계에서 낮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라고 보면 해석에 큰 무리가 없다. 4연도 마찬가지다. '술집' 주인에게 이 화자는 무언가 빚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남편에 의한 것이든, 부모에 의한 것이든, 이런 정도의 추측의 가능하다) 

그런데, '만두'를 사기 위해 몸을 팔았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당시의 궁핍상 등을 짐작할 수는 있겠지만, 단순히 '만두' 때문에, 일반적인 여인들이 그것을 얻기 위해 몸을 팔러 몰려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이 '만두 가게'의 주인이 '회회아비'라는 사실도 다소 자연스럽지가 못하다. 

'회회아비'는 이전에 '몽고인'이나 색목인(色目人) 또는 서역인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회회교(回回敎)가 이슬람교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때, 이 '회회아비'는 이슬람인, 아라비아 상인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 아라비아 상인이 멀리 고려까지 와서, '만두'를 팔았을까? 다소 이상하다고 할 수 있다. '만두' 때문에 몸을 팔았다, 아라비아 상인이 고려에서 '만두'를 팔았다, 이해하기 힘든 해석이다. 이 점에서 그간의 '쌍화, 쌍화점'에 대한 해석을 달리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쌍화점'은 '유리, 보석 가게' 

인하대학교 국어교육과는 박덕유 교수는 이 점을 천착하여 엄밀한 문헌 연구와 사료를 통해 '쌍화'가 '만두'가 아님을 증명한다.(박덕유, 「『쌍화점』의 운율 및 통사구조 연구」,『어문연구』(통권 110호 2001년 제29권 2호) 박덕유 교수는 중한사전(1989)에서 '霜花[솽화, shuanghua]'에 대해 "① 성에, ② 서리 모양의 細工(세공)"으로 풀이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고려가요 <쌍화점>에서의 '쌍화'는 만두가 아니라 '세공품'이고, 따라서 '쌍화점'은 '세공품 가게'임을 밝혀냈다. 자연스럽게 아라비아인인 '회회아비'는 세공품 가게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쌍화'를 세공품으로, '쌍화점'을 세공품 가게로, '회회아비'를 세공품을 파는 아라비아인으로 해석해 보면, 보다 고려가요 <쌍화점>에 대해 해석이 자연스러워 진다. 박덕유 교수는 "회회인들이 광대를 두고 만두를 팔았다기 보다는 당시 부녀자들을 상대로 악세서리의 일종인 물건을 팔았다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쌍화'가 세공품이란 증거는 다양하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시대에 회회인과 교역을 시작했음을 알 수 있고, 이때의 교역 상품은 로마형 유리기구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고분에서도 "서역계 상인들에 의해 전래"된 각종 유리기구들이 출토되었으며, "중국에서는 사치품 중의 하나로 여자들의 빗장식으로 사용"되는 등 다양하게 세공품들이 이용되었음을 여러 사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 『태종실록』에는 "회회인이 수정으로 다는 구슬을 만들어 드리니 왕이 기뻐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 당시 "무슬림들은 이러한 뛰어난 보석 세공 기술을 바탕으로 왕과 왕실에 가공된 각종 보석을 진상하고 상당한 수준의 사회, 경제적 입지를 마련"했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광대를 두고 서역인들의 세공품을 판매한 '쌍화점'은 분명 고려 여인들의 관심이 많았음에 틀림" 없을 것이다. 

학계, 새로운 연구 결과에 대한 수정 반영 필요 

박덕유 교수의 이러한 주장은 명확한 근거와 당대의 역사, 문화, 사회, 경제적 배경과도 어울리며, 글 자체의 맥락과 논리에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이 주장이 2001년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학계에서는 기존의 <쌍화점> 해석에 대해 수정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우리 학계의 이런 게으르고 나태한 점은 명확히 비판받아야 할 점이고, 모처럼 일반 대중의 관심이 모여졌을 때 그들에게 보다 정확하고 확실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학계의 반성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여러 점들을 고려할 때, '쌍화'는 '만두'가 아니고, '쌍화점'은 '만두 가게'가 아니며, '회회아비'는 '만두 가게' 주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회회아비'는 아라비아인이 분명하며, 이들은 각종 유리, 보석 등을 가공하여 판매하는 상인으로 고려에 들어와 '쌍화', 곧 세공품을 파는 세공품 가게를 열었던 것이다. 따라서 '쌍화점'은 세공품 가게, 혹은 '유리, 보석 가게'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댓글(17)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라주미힌 2008-12-24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점집이 아니었구료;; ㅎㅎ

멜기세덱 2008-12-24 01:28   좋아요 0 | URL
음...타로점인가, 별자리 점을 봤었을까요? ㅎㅎ

마늘빵 2008-12-24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중국요리집인줄 알았는데 ( '')

멜기세덱 2008-12-24 01:28   좋아요 0 | URL
이 싸람들이 이거.....ㅋㅋㅋ

hnine 2008-12-24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만두가게'라고 배운 기억이 나는데요. 이상하다 생각은 했지만 선생님이 그렇다니 그런가보다 했죠 뭐.

멜기세덱 2008-12-24 01:31   좋아요 0 | URL
요즘도 그렇게 배우고 있을거에요 아마,,,
고전문학계가 참 고루해서, 학계어른이 정한 정답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또 <쌍화점>을 문학의 영역이라고만 보고 다른 이들(어학)의 얘기는 귓등으로도 안 들어요.
필요한 것은 받아들이고 오류를 수정하는 것이 필요한데 말이죠.

이매지 2008-12-24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공시간에도 만두가게로 배운 거 같네요 ㅎㅎ
이거 뭐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
문학의 해석이라는 게 정말 100프로 확실한 게 아닌데도,
한 번 정해진 건 여간해선 바뀌지 않는 것 같아서 아쉬워요.
멜기님 말씀처럼 필요한 건 받아들이는 유연성이 있어야 하는데 말이죠~

순오기 2008-12-24 0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교수님은 아라비아인과 만두가게가 안 어울리니 의문의 여지가 있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보석가게로 추정하는 말씀은 안 하셨지요~~
박덕유 교수님 말씀이 공감되는데요.^^

조선인 2008-12-24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라비아 상인의 유리세공점이라니, 터번 두른 만두가게 주인보다 훨씬 그럴싸해요. 수긍이 가네요.

Alicia 2008-12-24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놀라워요- 저도 국어시간에 만두가게로 배웠어요. 만두도 만두지만 갑자기 그때의 국어 선생님의 음흉한 눈빛이랄까 웃음이 떠올라서 몸이 배배꼬이는것도 같공.. -_-;;
유하감독이 어떻게 영활 만들었을지 궁금하네요.^^

마노아 2008-12-24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이렇게 읽으니 이해가 잘 가요. 멜기님 고맙습니다!

무스탕 2008-12-24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보면서 만두가 나오는지 유리세공품이 나오는지 잘 지켜봐야 겠어요 ^^

(전 이 페이퍼를 만두님이 쓰신건줄알고 왔지 뭐에요.. -_-;;)

Forgettable. 2008-12-24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공시간에 얼핏 배웠던 게 이제 생각나는 것 같은데, 문학계의 보수성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군요 :) 전 광대랑 세공품가게 얘기들을 다 들었거든요- 왠지 광대에 더 꽂혀서 관심있게 듣긴 했었는데 ㅎㅎ 이 페이퍼를 보니 다시 수업을 듣는 느낌이라 참 좋네요ㅋㅋㅋ(반갑습니다~ㅋㅋ)

아영엄마 2008-12-24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시에 대해 배운지 오래되서 어렴풋한데 이처럼 새로운 해석도 있군요. 글 잘 읽고 갑니다~

뷰리풀말미잘 2008-12-25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

노이에자이트 2008-12-26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회아비는 중국 신쟝성에서 온 위구르 족일 거라는 해석도 있었어요.그 곳 사람들도 동양인처럼 생기진 않았죠.게다가 이슬람교도이기도 하구요.

마늘빵 2008-12-27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겨레 기사(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29817.html)로 나갔는데요?!!! ^^
 

   
 

민지의 꽃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살 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시인 정희성의 4번째 시집 『詩를 찾아서』에 수록된 시다. 시인은 늦은 나이에 첫 시집 『답청』(1974년)을 펴내서인지, 여타 시인들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며, 느릿느릿 시의 걸음을 걸어왔다. 4년만에 두번째 시집으로 그 유명한 「저문 강에 삽을 씻고」가 수록된 동명의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출간한 것은 그의 느릿한 시작을 놓고 봤을때 이례적으로 빠른 속도를 보여준 것이라고 하겠다.(얼마 전 시인의 인하대 강연에서, 아직도 「저문 강에 삽을 씻고」의 시인으로 기억되고 소개되는 것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아쉽고 멋쩍은 일이라고 한 바 있다. 좋은 시는 독자에게 오래 기억되는 법이긴 한데, 살아남은 노시인에겐 그게 뛰어넘기 힘든 높은 벽이 될 수도 있었겠다 싶다.) 정희성은 이것으로 1981년 제1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다. 아무리 봐도 정희성 시인은 김수영을 생각나게 한다. 중고등학교의 시험문제에서도 시인의 「답청」과 김수영의 「풀」이 비교지문으로 곧잘 등장하니 말이다. 이후 두번째 시집으로부터 13년만에 세번째 시집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를 펴냈고, 그로부터 10년만에 바로 이 시집을 펴낸 것이다.(시인은 올해 『돌아다보면 문득』(창비, 2008.)를 펴낸 바 있다.)

 

 

 

 

10년을 묵혀온 시들을 모아 펴낸 시집이라면, 참 묵직하기도 하겠다 싶지만, 그마저도 기대를 저버리고 마는 시인이 정희성이다. 시집이란 이미지에 걸맞게 시인의 시집은 제법 가볍기 그지 없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는 43편에 불과하다.(대부분의 시인들은 보통 70~100편 가량을 시집으로 묶는다.) 과작(寡作)의 시인 정희성. 오랜 동안 교직에 몸담으면서 일과 생활에 지쳐서 시를 쓰는 것이 어려울 성 싶지만, 그게 그의 과작을 이끈 주된 이유는 아닌 것 같다. 많이 갈고 닦아서도 아닌 것 같고, 아무튼 그의 과작의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적은 시 중에서 기억에 오래 남고 읊조릴 시들이 비교적 많다는 사실이다.

한 권의 시집에는 어떤 천재적 시인이라고 할지라도 각각의 시편들의 성취정도는 둘쭉날쭉이기 십상이다. 물론 정희성의 시도 예외일 수 없다. 이번 시집에서도 그가 「저문 강에 삽을 씻고」의 시인으로 기억되는 일을 중단시킬만한 시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시집 『詩를 찾아서』에서 무척이나 주목되는 시가 바로 위의 시다. 이 시 「민지의 꽃」은 특별나거나 의미심장하거나, 시적 성취가 뛰어나거나, 뭔가 문제적이거나, 아름답거나, 괴기하거나, 어렵거나, 재미나거나, 독특하거나, 기타 등등의 시에 대한 찬사를 바치기에는 미흡한 시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나는 이 시를 주목하게 되고, 자꾸 읊조리게 된다.

시를 읽어보자. 강원도 어느 산골에 귀농한 제자를 찾아간 시적화자는 거기서 몇날을 묵었던듯 싶다. 그집 딸 민지와의 에피소드가 주된 내용이다. 앞마당의 잡초에 물을 주는 민지를 보면서, 시적화자는 어떤 성찰을 얻는다. 잡초를 꽃으로 여기는 민지의 그 행위와 인식이 때묻은 시적화자에게 주는 어떤 파토스는 커다란 충격으로 남은 듯 하다. 그게 다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이 시가 수록된 시집의 제목이 '詩를 찾아서'라는 점이고, 다시 눈여겨 볼 점은, 이 시가 「시가 오는 새벽」과 「詩를 찾아서」사이에 놓여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이 시집이 13년만의 소산이란 점을 염두에 두자. 그러한 사실들을 고려해 볼 때, 이 시는 이 시집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시가 오는 새벽」에서 시인은 "내 이마 서늘"할 정도의 시적 영감을 받지만, 그것이 어떻게든 시로 탄생되어질 수 있었는지는 아직 의문으로 남는다. 그런 시적 영감 혹은 시에 대한 어떤 깨달음, 혹은 시에 대한 충격은 어느 한 날의 새벽으로는 다소 부족하다. 시적 영감이 시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시적 언어, 시적 인식에 대한 성찰과 깨달음이 동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민지의 꽃」이 필요했다.

「민지의 꽃」에서 시적화자는 때묻은 자신의 언어(말), 곧 세상의 때 묻은 인식을 깨닫고 충격을 받는다. 바로 민지가 보여주는 그 따뜻하고 순수하며, 시적화자와는 달리 결코 때묻지 않은 언어와 인식으로부터 언은 충격이다. 어떤 시가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시인에게 시는 그 시를 읽는 독자를 감동시켜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을 것이다. 세상의 때 묻은 언어는 그로부터 어떤 시가 되어도 그런 감동을 주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시가 오는 새벽'에 얻었던 시적 영감이 시가 되지 못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시인의 자신의 언어와 인식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 것이 아닐까? 뒤로 이어지는 「詩를 찾아서」에서 줄곧 찾아되는 것이 '말'이란 사실에서 그것을 확인하게 된다. 시인은 시의 언어를 찾아서 여기저기 헤매고 다니지만, 결국 찾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마도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인 게라고/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인 게라고/끝없이 저잣거리 걷고 있을 우바이/그 고운 사람을 생각했다"(「詩를 찾아서」)는 체념만을 찾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체념만이 아니다.

시를 찾아 나선 시인이 생각한 "그 고운 사람"은 '우바이'만이 아닐 것이다. 이미 시인은 때묻은 말에서 헤어날 수 없다. 그러나 시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이어서, 시인은 자꾸만 그 볼 수 없는 마음을 찾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고뇌하고 떠돌 수 밖에 없을 따름이다. 그러나 보고 싶으면 볼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이가 있으니, 그게 바로 '민지'다. 그렇게 시인은 '우바이'를 생각하고 '민지'를 생각했을 것이다. 여전히 시를 찾지는 못했지만, 어떤 마음을 볼 것인지, 어떤 마음에서 오는 세상과 세상의 것들에 대한 인식인지, 어떤 언어여야 하는지를 슬며시 깨달았음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시인은 늘상 '시가 오는 새벽'에 몸을 부르떨며 시적 영감을 얻고, 민지의 언어와 마음과 인식을 넘지 못하는 자신의 때묻은 언어와 인식을 한탄하고, 또한 시를 찾아 떠나는 행위를 반복해가며, 그렇게 살다가 뜨엄뜨엄 뜻대로 되지 않는 고통들을 뱉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런 산고의 산물이 이 시집에 엮인 시들일 것이고, 그것이 소량이고, 과작이어야 함은 분명한 이유를 가질 수도 있겠다. 연로한 시인에게 시를 토해내는 것은 말라가는 피를 토해내는 것일수도 있으니, 건강상으로도 과작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도 하겠다.

민지는 세상의 눈으로는 '잡초'일 따름이지만, 그 마음으로부터는 '꽃'이다. '민지의 꽃'은 그래서 특별한 꽃이 된다. 시적화자가 그런 민지에게 세상적 인식, 곧 그것이 '잡초'란 사실을 알리지 못한 것은 아이에 대한 자애로움에서 온 것이 절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틀렸다는 부끄러움에서 오는 오싹함이다. 시적화자가 입을 다물며 느껼 수 이 치떨림과 부끄러움이 느껴져 오는 듯하다. 그것이었으면 족하지 않을까? 시인의 "내 말은 때가 묻어/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는 마지막의 첨언은 사족과 같이 느껴진다.

정희성 시인은 아마도 이 「민지의 꽃」에서 시심을 본 것이 분명하다. 늙으면 아이가 된다고 했던가? 연로한 시인은 어쩌면 민지의 마음까지도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근래에 펴낸 『돌아다보면 문득』이란 시집에 대한 기대는 그런 것들이다. 시인의 신작시집『돌아다보면 문득』을 진작에 손에 넣고도 아직 읽고 있지 않은 것은, 그런 기대감을 만끽해보고 싶은 짖궂음이다. 이 겨울을 틈타 한적하게 읽어보아야 겠다. 내일은 어느 잡초에게 물을 주어볼까? 아차, 겨울이잖아! 역시 나도 어쩔 수 없는 때묻은 인간을 뿐이로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손이 닿지 않는 곳

 

내 손이 미치는 범위안에서
아무리
헤쳐보아도, 뒤져보아도
모두다 쓰레기 뿐이야

등잔밑이 어둡다고?
젠장!
난 등잔따윈 켜놓은 적이 없단 말이야

내 손이 닿지 않는곳
닿을 수 없는 곳
닿으면 안 되는 곳
그런 곳에 있을까?

가질 수 없는 것
그것을 갖고자 하는 것은
욕망일까?
혹은 죽음일까?

젠장!
쓰레기더미에 파묻혀 죽느니,
내 손이 닿지 않는 곳
그곳에 닿을 때까지
손을 뻗고나 죽으리!


댓글(7)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멜기세덱 2008-12-09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손이 닿지 않는 곳엔 죄다 좋은 것들만 있지(!?)

순오기 2008-12-09 00:40   좋아요 0 | URL
^^
손이 닿지 않기에 죄다 좋아 보이는 것은 아닐까요?

멜기세덱 2008-12-10 01:36   좋아요 0 | URL
좋은 것과 좋아 보이는 것이 많은 다른 걸까요? 어쩜, 우리가 '보는 것', 우리에게 '보이는 것' 그 자체가 진실이지 싶습니다.

바람돌이 2008-12-09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의 처세관과는 많이 다르군요. 손이 닿지 않는것 그냥 포기하지요. ^^;;

멜기세덱 2008-12-10 01:38   좋아요 0 | URL
처세관이랄 것은 없는데요, 저는^^;; 유토피아로 날아가고 싶거든요.ㅎㅎ

웽스북스 2008-12-10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에 닿는 것의 소중한 면들을 볼 때, 손에 닿지 않는 것들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갑자기 들어요. (웬디의 개똥철학 ㅎㅎ)

멜기세덱 2008-12-10 01:38   좋아요 0 | URL
왠지, 마스터베이션 같아서, 찝찝해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