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나는 고양이를 미워한다.
그의 아첨한 목소리를
그 너무나 敏捷(민첩)한 적은 動作(동작)을
그 너무나 山脈(산맥)의 냄새를 잊었음을
그리고 그의 사람을 憤怒(분노)ㅎ지 않음을
범에 닮었어도 범 아님을.

- 유치환, 『청마시초』, 문학사상사, 1939.

며칠 전 경남으로 학술답사를 따라갔다 왔어요. 갔다왔더니 또 한바탕 뜨거웠었나 보더군요. 경상남도 통영에 있는 청마문학관엘 갔었는데, 통영이 시인 유치환의 고향이라죠. 유치환의 시 중에 재밌게도 이런 시가 있더군요.

야성을 잃은, 본성을 잃은 고양이. 그런 고양이를 유치환은 '미워'하기까지 하네요. 여하건간에, 체셔고양2님의 그 본연의 매력이 끝내 살아남아서, '산맥의 냄새' 물씬 풍기는, 진정한 고양이 되셔야겠습니다. 진정 체셔고양2님은 '범'이었을지도 모를 일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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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0-08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울뻔 했네... ㅠㅠ

비로그인 2007-10-08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보다 더 적절한 위로가 또 있을까, 체셔님한테.
멋지군요.
 

秋夜雨中(추야우중)

                                -최치원

秋風唯苦吟(추풍유고음)  가을바람에 괴로이 읊나니

世路少知音(세로소지음)  세상엔 날 알아주는 이 없네

窓外三更雨(창외삼경우)  창밖엔 삼경의 빗소리

燈前萬里心(등전만리심)  등불 앞엔 만리로 내닫는 이 마음

 

최치원의 절창이다. 저작 시기에 따라 해석이 약간 달라지기는 하나, 그에 상관없이 절절히 울리기는 다름없다.

지음(知音)이란 말은 잘 아는 고사를 담고 있다. 이 세상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진정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세상이 다 아는 천재 최치원, 그러나 세상은 그의 뜻을 알아주지 않는다. 당대의 천재가 그러한데, 이 하찮은 둔재를 이 세상 어느 누가 알아주리오.

오늘 밤도 비는 내리고, 내 마음은 또 어데 만리(萬里)를 내달을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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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7-09-20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가을밤 비는 내리고' 정말 멋집니다~~~~
지음의 고사를 생각하며, 내겐 그런 사람이 있는가 헤아립니다~~

멜기세덱 2007-09-20 01:31   좋아요 0 | URL
아~~~ 순오기님은 옆지기가 계시잖아요 ㅠㅠ;;

웽스북스 2007-09-20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 딱 오늘밤의 시네요 ^^
방황하는 마음 붙잡고 얼른 주무세요 (라고 말하면서 못자고 있는 저는 또 뭐랍니까 ;)

멜기세덱 2007-09-20 23:27   좋아요 0 | URL
오늘밤도에요.ㅎㅎㅎ 비가 오는데, 어떻게 자요? ㅎㅎㅎ

2007-09-20 1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09-20 23:27   좋아요 0 | URL
이 이게 국어책에 나왔었나요? 난 왜 몰랐지....ㅋㅋ
 

구월의 단풍나무

 

푸르른 잎사귀를 달고 선 단풍나무야
구월엔
외투를 입지 않고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다

여름내 울고간 매미도 없는
가을의 초입엔

뜨거워지지 않고 그리워하는
인내를 가졌구나, 너는

 

-이신영, 「구월의 단풍나무」, 『獨守空房 208호』, 동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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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1 0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11 09: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09-12 00:50   좋아요 0 | URL
잘 읽겠습니다.ㅎㅎ
정이현은 <달콤한 나의 도시>와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읽었는데요,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읽고 반했더랍니다.ㅎㅎ
저도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는 좀 밋밋했다 싶었어요.ㅎㅎ
 

참새 소리


뿌드득
달걀 깨지는 소리가 났다
한 마리 참새의 대가리를 밝은 것이다

화들짝 놀라 뒤로 주춤거렸다
가엾은 참새 한 마리
행여 살아있던 것은 아닐까
숨이라도 붙어있던 것을
묵중한 무게로 확인사살 한 것은 아닐까
무서워서 그만 도망쳐 버렸다

사체손괴는 칠년간의 징역살이다

참말로 참새는 알에서 난 게 참인가 보다
참새 대가리를 밟으면
달걀 깨지는 소리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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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에게 말한다

이승복(홍익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여전히 교실에서는 입시위주의 수업방식이 문제다. 시교육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작품을 읽는 게 아니라 작품 분석의 결과를 외우라고 해서이다. 이런 현상을 결코 긍정적이라 말할 수 없다. 충분하다고 말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하지만 지금의 이런 상황도 나름의 변명은 있다. 입시성적에 기울어 있기는 해도 그나마 정규교과에 들어가 있는 덕분에 시교육이 있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시교육은 아예 사라질 수도 있지 않냐는 것이다.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이렇게라도 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이 말은 여전히 시교육을 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의 상황은 분명히 개선돼야 하고, 그 개선은 시교육 자체에서가 아니라 중등학교 교육의 총체적인 정책에서부터 해결점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정책의 변화를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다. 지금 여기서부터 우리는 바람직한 시교육의 모형을 설정해 보고 개선방향을 모색해 보아야만 한다.

중등학교의 모든 교육이 그러하듯, 시교육의 최종 목표도 건전한 사회인 양성에 놓인다. 정상적으로 교과과정을 마친 사람이라면 능히 건전한 사회인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중등학교의 시교육은 미적 체험을 가르치는 것만으로 그쳐서는 안 되며 시적 체험을 생활체험으로까지 이어가게 해야 한다. 결국 시교육이란 시를 경험함으로써 자신의 생활을 기쁘고 유용하게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시적체험과 생활체험을 이어주기 위해서는 학생들이 시를 읽으면서 지적 호기심을 느낄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시를 공부한 학생이 알게 된 게 무엇이냐가 아니라, 시를 접한 학생이 궁금해 하는 게 무엇이냐에 더 많은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에 대해서는 많은 교사들도 공감한다. 다만 지적호기심을 위한 시교육의 필요성과 효율은 이해가 되지만 시교육을 위한 좀더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방법론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시의 존재이유와 방식 자체가 비사실적인 것을 포함하는 '발견'과 '제시'에 있는 만큼, 시교육의 방법이란 것도 항상 새로울 수밖에 없다. 기존의 방법론으로 새로운 시에 접근하는 것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교육의 성격에 따라 단계별로 구분해 보면 어떤 방법이 있어야 할지를 가늠해 볼 수는 있겠다. 여기서 말하는 단계란, '즐기기', '잘 읽기', 그리고 '써보기' 등이다.

먼저 '즐기기' 단계란 학생들에게 시라고 하는 것이 즐길 수 있는 대상임을 알게 하자는 것이다. 시에서 흥미를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는 '고르기'와 '거듭 읽기' 그리고 '외우기' 등의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고르기'란 학생 자신의 취향에 따라 자유롭게 시작품을 고르게 하는 것인데, 학생들은 작품을 고르는 과정에서 스스로 선택의 이유를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거듭 읽기'란 시작품을 즐기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동시에 최소한의 시 읽기 방법이기도 하다. 실제로 많은 학생들은 같은 작품을 거듭하여 읽는 동안 시작품에 대한 아우라와 스키마를 스스로 마련하는데 그 내용과 수준에 있어서 매우 현격한 자기성장을 발견해 내곤 한다. '외우기'는 암송할 수 있는 시를 학생들에게 제공한다는 의미이다. 암송은 기억하고 있다는 만족감 외에도 같은 시를 매번 새롭게 해석해 낼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시를 외운 학생들에게서는 높은 수치의 충족도가 발견되곤 한다.

두 번째로 '잘 읽기' 단계란 현재의 교과내용에서와 같이 용어와 개념 학습을 통해 분석을 체험하고 모범적인 시 읽기의 전형을 경험케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우선 시와 관련된 다양한 개념과 용어를 학습하되 구체적인 방법으로 '말하기'를 제시할 수 있다. '고르기' 과정에서 특정한 시를 선택한 이유라거나 암송할 수 있는 시에 대해 요즘하고 있는 해석내용, 그리고 시의 화자를 향해 하고 싶은 말 등을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해 보는 것이다. 이때의 구술과정에서 학생은 작품에 대한 편견을 조정하고 총제적인 자기정리의 기회를 획득할 수 있다.

세 번째로 '써보기' 단계에서는 ' 시 읽기'와 '말하기'에서 얻어진 판단 내용을 문자로 정리하여 써보는 것과 자신의 생각을 시적소통 체제 즉 시작품으로 형상화하는 시도를 경험케 한다. 문장화 과정에서는 정서와 감상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힘을 기르고 동시에 자신의 정서가 지니는 특징을 파악하게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시적 형상화 과정에서는 어떻게 하면 독자에게 자신의 시적 의지를 오차 없이 전달할 수 있는지 알게 한다. 이리하여 '써보기' 단계에서는 시작품이라고 하는 것이 일상 속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이며, 시적소통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세계와 대상이 있으며, 그런 이유에서 시적 체험과 생활체험은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자각케 하는 것이다.

교사들에게 말하고 싶다. 시는 시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과 삶의 문제이며, 인간을 향한 끊임없는 질문의 양식이다. 시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 시인이나 평론가를 만들려는 게 아니다. 단지 학생들로 하여금 시를 즐기게 하되 이왕이면 시 속에 있는 많은 것들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해주자는 것이고, 생활 속에서 시가 지니는 효과를 누리게 해주자는 것이다. 하지만 시교육에서 교사의 몫이란 학생 스스로가 자신을 찾아가는 경로를 곁에서 살펴보며 지원해 주는 일일 뿐이다. 엄밀히 말해서 시교육의 시작과 결과까지의 과정에서 주된 내용은 교사의 몫이 아니라 학생의 몫이다. 그런 점에서 시교육 담당교사는 지도안의 내용보다 애정어린 시각을 우선시해야 한다. 학생들이 자신의 삶에 한발한발 잘 다가서고 있는지를 살펴주는 것이 교사의 주된 역할임을 가슴에 새겨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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