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을 언제 처음 먹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까지 잊어버린 것은 아니다.
나는 아직도 치킨을 먹을 때, 가끔씩 그 선생님이 떠오른다.
【 기억 재생기 】- 다시 보고 싶은 20세기
1991년, 어느 토요일 오후의 이야기
그 선생님은, 굳이 한국의 연예인 중 닮은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80,90년대 큰 인기를 모았던
남자 가수 전영록을 떠오르게 만드는 이미지의 사람이었다. 커다란 잠자리 안경, 크지 않은 키,
다정한 말투, 아이들에게 늘 친절했던 성격의 그 사람은 우리가 함께 했던 마지막 날의 찬란한
오후 햇살처럼 밝은 사람이었다.
그 때, 13살짜리 어린 아이였던 나는 알리가 없는 '비정규직'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던 '선생'
이었다. 원래의 담임은 임신 휴가중이었고 2-3개월간의 짧은 기간 동안 임시 담임을 맡게 된
그 남자 선생님은 마치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행복해 하셨던 것 같다.
평소보다 조금 많이 받게 된 월급 때문이 아니라 자신도 전담하여 책임지고 가르칠 수십 명의
어린 제자들이 생긴 것에서 오는 뿌듯함과 자부심, 그리고 하루종일 '가르침'을 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순수한 즐거움 때문이었던 것이리라 생각한다. 지금에 와서 깨달은 것이지만...
그랬다. 지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 선생님이 매일 그렇게 행복해하는 웃음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담임'이 되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 '담임'이라는 꼬리표가 뭐길래, 그를 그렇게나
웃게 만들었으며 그를 그렇게나 눈물 짓게 만들었을까.
학교에 출근하는 것을 순수한 가르침에 대한 고귀한 즐거움을 얻는 대신 '월급 주는 직장'으로만
여기는 요즘의 교양없는 선생들은 눈꼽 만큼도 공감할 수 없는 보석같은 빛을 그 남자 선생님은
가슴 안에 품고 있었다. 어린 아이들이 느낄 정도로 -
어느덧, 원래 담임이었던 선생은 돌아왔고 임시 담임이었던 그 선생님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뒤로
물러 나야만 했다. 우리는 몰랐다. 아니, 머리 속에 온통 놀 것만 가득했던 나는 들었는데도 잊어버
린 건지도 몰랐다. 선생님과 함께 운동장에서 뛰어놀던 그 황금 같던 시간이 마지막이었다는 것을.
그 날은 임시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일이었다.
수업이 다 끝나도 선생님은 뭐가 아쉬었던 것일까.
해가 다 지도록 남은 아이들 몇 명과 운동장에서 뛰어 놀았고, 그것도 모자라 우리들을 데리고 근처
치킨집으로 데리고 가서 후라이드 치킨을 사주셨다. 우리는 아무 생각없이 먹었고 선생님은 드시는
둥 마는 둥 하며서 그저 웃고만 계셨다.
선생님은 아쉬웠던 것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아이들과 함께 있고 싶었던 것이었다.
나는 그 전에도, 그 후에도 그것만큼 맛있었던 후라이드 치킨을 먹어본 적이 없다.
어린 아이도 다 안다.
상대방이 없는 돈 어렵게 꺼내 먹을 것을 사준다는 것을.
월요일, 이제 더 이상 우리의 담임은 아니었지만 학교에서 또 볼 수 있을줄 알았다.
그래서 우리는 평소처럼 선생님과 헤어졌다.
그러나 그 후로 그 선생님은 어디에도 없었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내가 잊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후로 그 선생님과 만난 기억이 전혀 없다.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8살 때, 내가 너무나 싫어했던 선생의 이름은 지금도 정확히 기억하면서. 아이러니다.
영화 <죽은 시인들의 사회>에서 '로빈 윌리암스'가 열연했던 선생의 역할은 '잘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아이들의 가슴에 빛과 사랑을 심어 주었었다.
<시스터 액트>에서 '우피 골드버그'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준 것은 '노래 실력'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이들의 재능을 꺼내주고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었다.
어느 따뜻한 토요일 오후, 치킨을 사주었던 그 선생님이 교실에서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었는지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 한다.
그러나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미소라는 것을 배웠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 선생님은 너무나 큰 것을 주셨다.
나는 사람들의 웃는 모습을 상상할 때면 늘 기분이 좋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