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내내 나는 미소를 지었고, 마치 몸이 간지러운 듯한 즐거움을 놓칠 수가
없었다. 아! 수 많은 영화를 보았지만, 이번만큼 흐믓하고 다정한 영화가 또 있었던가!
책, 영화, 음악을 통틀어 내가 별☆ 4개를 꽉꽉 채워 평점을 준 것은, 손으로 꼽을 정도로 극히
드문데 말이다, 나에게는.
어떤 영화는 머리에만 엔돌핀을 분비하게 하는 것이 있고, 어떤 영화는 가슴에만 감동의 물결을
출렁이게 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이번처럼 정신적 만족감과 감성적 만족감이 동시인 건 처음인 듯.
(마치, 새우 같지 않은가. 뇌와 심장이 머리 안에 같이 있어서 함께 느끼는 것처럼)
펭귄도, 바다표범도 없는 - 동서남북 눈만 잔뜩 있는 - 남극 중에서도 외로운 지역에 기지를 두고
있는 8명의 아저씨들의 낙은 니시무라 군이 해주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뿐이다.
또한 니시무라 군도 정성들여 만든 음식을 동료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흐믓하게 쳐다보는 것과
먹이는 것을 낙으로 삼으며 1년이 넘는 그 긴 시간 동안의 춥고 외로운 남극 생활을 견뎌낸다.
(원제목 : 남극 요리인)
일본은 매일 보는 직장 동료들한테도 깍듯이 예의를 차린다. 그들은 겉으론 친절하고 다정해 보일지
몰라도 '혼네'를 보여주거나, 아무렇지 않게 방귀를 껴도 흠이 안 될 정도의 허울없는 사이가 되기까지
상당히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한국처럼 처음 만났을 때 부터 편하게 대할 수 있는 그런 문화가 아니니까.
한 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친구가 몇 년 전, 일본에서 처음 생활했을 때였다.
같이 일하는 일본인 중 친한 친구가 1명 있었는데, 내 친구가 잘못 알고 사용하는 일본어를 1년이 다
되도록 고쳐주지 않은 것이다. 그것을 뒤늦게 깨달은 내 친구는 당연히 섭섭하고 바보가 된 기분으로
따졌다. 어째서 친구가 말을 잘못 사용하는데 가르쳐 주지 않았냐고. 날 왜 계속 바보로 만들었냐고.
그러나 그 일본 친구는,
"하지만, 일본에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해주는 것이 상당한 실례라서.."
이 때, 내 친구의 머리속에 무엇이 스쳤겠는가?
난 우리가 굉장히 친한줄 알았는데, 넌 우리 사이를 고것 밖에 여기지 않았구나.
내 친구는 한국 사람이다. 바로 거기서 문화의 차이가 온 것이다.
한국은 다른 사람의 실수나 잘못된 것을 가르쳐 준다. 특히, 외국인이 틀린 한국어를 사용하면 무슨
사명감이라도 있는 듯 정확하게 가르쳐 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 지나침이 외국인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른 채. 그러나 어쨌든 그런 이유로 한국에서 사는 외국인은 말이 참 빨리 는다.
반면에, 일본은 남에게 지적하는 것 자체를 꺼려한다. 상대방이 무안해하거나 기분이 상할 것을 먼저
염려한 덕이다. 게다가 항상 웃으며 상대의 의견에 맞장구 치거나 함께 하는데 인색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친해졌구나'하고 쉽게 오해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게 아닌 것을 깨달았을 때 오는 배신감은 더욱
커진다. 오죽했으면 일본인의 웃는 얼굴에 속지 말라고 하지 않던가.
일본인들 스스로도 주변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어디까지 '예의를 차려야 할' 사이이고, 어디까지가
'좀 더 허울없이 지낼 수 있는' 사이인지 늘 더듬이를 곧추 세우고 신경을 쓰는 마당인데 말이다.
내가 이 영화를 연속 2번이나 보았을 정도로 마음에 들어했던 이유는 딱 한 가지이다.
바로 가족같이 지내는 그들의 자연스런 모습이 좋았기 때문이다. 다른 일본영화에서 보여주는 일본 특유의
예의스러움이 없었다. 하기사, 그 넓은 곳에 사람이라곤(아니, 바이러스도 살 수 없을 정도로 더럽게 추워
다른 생물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곳에) 자기들 8명 뿐이니, 자신들의 행동거지를 평가할 사회도 없고, 믿고
의지할 사람들은 동료들 뿐이니까 자연스레 가족같이 변하는 건 오히려 당연한 건가.
엄마 역의 니시무라 군은 매일 하루 3끼, 8인분을 하느라 주방에서 떠날 일이 없다.
해병대 조리담당으로써 파견온 것이기에, 처음에는 제복을 반듯하게 차려 입었던 그였지만,
후반부에선, 일반 가정의 아줌마들처럼 츄리닝에 앞치마를 두르고 음식을 나른다.
설교하기 좋아하고 진지한 모토 상(오른쪽 하늘색 옷)은 식탁에서 신문을 보는 것이 완전 아빠 역이다.
제일 먼저 식탁에 앉은 모토 상에게 니시무라 군이,
"다른 사람들은 안 일어났어요?"
그러자 모토 상은,
"내버려둬"
그리고 곧바로 아들 역(아빠 옆에 앉은, 흰색과 빨간색 잠바를 입은)이 식당에 들어오자마 마자 꽥,
"왜 안 깨웠어요! 7시에 깨워달라고 했잖아요~" 라고 엄마(니시무라)에게 투정을 부린다.
"깨워도 안 일어나던데."
"제대로 깨워야죠~!" (가정집에 이런 얘 꼭 있다. 지 혼자 못 일어나고 엄마 탓 하는..-_-)
그 때, 엄격한 아빠(모토) 한 마디,
"앉아"
분위기 바로 평정된다.
곧 이어서 철없고 장난스러운 삼촌 역이자 기지 내의 유일한 의사(검은색 옷의, 물 따르는 더벅머리)는
들어올 때 부터 카하하하핫 하고 대장(겨자색 옷)이 자고 일어나 목이 안 돌아간다고 웃기 바쁘다.
남은 아들역 중 왼쪽 가운데 앉은 본은 자기 똥이 팔뚝만하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게 웃기다고.
처음엔 식사 전에 '오늘 할 일'에 대해 말하는 등 '직장'다운 분위기를 띄웠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런게
없어졌다. 심지어 일본인들 버릇처럼 하는 '이따다끼마스(잘 먹겠습니다)' 인사도 안 하고 먹는다.
이 얼마나 허울없고 가족같은 분위기인가.
이쪽 저쪽 아무리 둘러봐도 눈에 보이는 건 얼음처럼 딱딱해진 눈 눈 눈 눈 눈 뿐!
비디오를 보거나 마작 놀이를 하는 것도 하루 이틀, 그들에게 일 외 여가시간에 찾을 유흥은 아무것도 없다.
엄마가 그렇게 정성스레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는데도 뭔가 모자랐던 것일까.
그들은 야구를 하려고 시럽 같은 것으로 선을 그리는데, 결국 스푼을 가져와 샤베트처럼 퍼먹기 시작한다.
그러니 그들이 유일하게 즐길 수 있는 낙이란, 맛있는 것을 먹는 것 뿐이다.
우연히도, 기지 내 식품 재고에 '닭새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들은
"튀겨 먹으면 아깝잖아요. 회라던가..지지거나 부치거나.."
라고 다른 방법이 있다는 엄마의 말을 무시한 채
"에비 후라이~(새우 튀김)"를 노래 부르며 졸라댄다. 결국, 엄마는 먹고 싶다고 졸라대던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준다. 보라, 이 초거대한 새우를. 이걸 튀겨달라고 졸라대었던 그들의 표정은 썩 유쾌하지 않다.
그러게 엄마 말을 들었어야지.
밤에 몰래 라면을 먹어대던 대장과 본 때문에 체류 기한이 아직 반년 넘게 남았는데도 라면이 뚝 떨어졌다.
라면이 없으면 잠을 못 잔다고 징징대는 대장을 위해 엄마는 아무것도 없는 그 남극에서 떡 하니 라면을
만들어내는 신공을 발휘한다. 엄마 만세 !!!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이 있다.
쥐의 실험에서처럼, 인간도 어느 정도 외지로부터 밀폐된 곳에 같은 성별의 무리들만 있게 되면 각자의
역할이 나뉘어진다는 것이다. 아빠역, 엄마역, 아이들역, 할머니나 할아버지역, 삼촌역, 이웃집 같은 역 등.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중심축이 되는 것은 단연 엄마역이다.
엄마는 보살펴주고 매일 음식을 해준다. 인간은 맛있는 것을 먹을 때 행복을 느낀다. 다른 행복거리를 찾을
수 없는 환경에서 맛있는 것의 행복은 절대적이므로, 그것을 해주는 엄마가 최고인 것이다.
각자의 개성이 강하고 자기밖에 몰랐던 그들은 이 다정하고 요리 잘 하는 엄마(니시무라) 덕에 자신의 가족을
돌아보게 되기도 하고, 총각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싶어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족이 없는 이 남극에서 진정한 가족을 느꼈고, 자신들이 돌아갔을 때 어찌해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의 행복을 추억을 가슴에 새기고 돌아갔다. 진짜 가족의 품으로 -
그 추운 곳에서 그들이 하고자 결심했던 것은, 뜨거운 태양 아래 모래 위에서 비치 발리볼을 하는 것이었다.
비록, 그들의 몸은 1년 365일 추운 곳에 있었지만, 돌아올 때는 한층 더 따듯해져서 왔다.
그런 영화이다.
별다른 사건 없이 그저 알콩달콩 맛있는 요리를 먹으며 사소한 즐거움을 공유하는 남극 가족 일기다.
* 주의사항 : 맛있는 요리들이 계속 나오므로, 괴성을 지르지 않으려면 배를 든든히 하고 볼 것 -_-